진흙속의연꽃

보기 싫은 사람, 나를 무시한 사람, 원한 맺힌 사람을 대하는 방법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 19. 10:45

보기 싫은 사람, 나를 무시한 사람, 원한 맺힌 사람을 대하는 방법
 
 
아무래도 유튜브에 빠진 것 같다. 늦게까지 유튜브를 시청하다 보니 잠자는 시간을 놓친다. 그 결과는 수면저하로 나타난다. 수면의 질이 형편 없는 것이다. 자다 깨다 하다 보면 컨디션이 엉망 된다.
 
오늘 늦잠 잤다. 스마트폰을 보니 7시 36분이다. 6시 이전에 무조건 일어나는데 한시간 이상 잔 것이다. 자다깨다 하다가 막판에 단잠을 잔 것이다.
 
잠에서 깼을 때 시계를 본다. 새벽 2시대면 난감하다. 새벽 3시대가 되면 더 자야 할지 일어나야 할지 고민이다. 이렇게 뒤죽박죽 된 것은 유튜브를 과도하게 본 영향 때문이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번뇌가 일어났다면
 
요즘 정치의 계절인 것 같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관련 유튜브를 보고 있는 것이 이를 말한다. 불과 한달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은 없었다. 일체 정치관련 뉴스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점심 시간 때 뉴스채널이 있는 식당에 가는 것을 피할 정도였다.
 
상황이 좀 나아진 것일까? 그 날 이후 일체 뉴스를 보지 않았는데 슬금슬금 정치관련 유튜브를 보게 된 것은 상황이 반전된 것도 영향이 있는 것 같다. 진보와 보수의 유튜브를 막론하고 4월 총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날 이후 정치 혐오증이 생겼다. 그것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악의 결과가 되었을 때 기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뉴스를 보면 분노가 일어나기 때문에 뉴스를 보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것은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번뇌가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경우 부처님 가르침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M2)에 따르면 피하라고 했다. 번뇌가 일어나는 대상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회피라고도 볼 수 있다.
 
그 사람을 봄으로 인하여 번뇌가 일어나는 것보다 그 사람을 보지 않아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그래서 ‘피함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다. 어떤 것인가?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피함에 의해서 끊어져야 하는 번뇌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은 성찰에 의해서 이치에 맞게 사나운 코끼리를 피하고 사나운 말을 피하고 사나운 소를 피하고 사나운 개를 피하고 뱀, 말뚝, 가시덤불, 갱도, 절벽, 웅덩이, 늪지를 피한다. 총명한 길벗은 앉기에 적당하지 않은 자리에 앉는 자, 가기에 적당하지 않은 장소로 가는 자, 사귀기에 적당하지 않은 악한 친구와 사귀는 자를 악한 상태에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는 성찰하여 이와 같은 적당하지 않은 자리, 적당하지 않은 장소, 악한 친구를 피한다. 수행승들이여, 피하지 않으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날 것이지만, 피하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들을 피함에 의해서 끊어져야 하는 번뇌라고 한다.”(M2)
 
 
피함에 의히여 끊어지는 번뇌의 조건이 있다. 그것은 “적당하지 않은 자리, 적당하지 않은 장소, 악한 친구를 피한다.”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있는 곳에 가지 않으면 보기 싫음으로 인한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 날 이후 뉴스를 보지 않았다. 총선을 앞두고 슬금슬금 유튜브를 보다가 빠져 들게 되었다. 그것은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것만 찾아서 보다 보니 늦잠을 자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수면의 질 저하로 나타났다. 오늘 늦잠 자게 된 이유가 된 것이다.
 
좋았던 그 사람이 적대감으로 변할 때
 
요즘 사람 만날 일이 없다. 겨울철이라 더욱더 그렇다. 모임도 거의 나가지 않는다. 모임이 방학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보면 번뇌를 일으키기 때문에 나가지 않는 경우도 있다.
 
흔히 이런 말을 듣는다. 그 사람 보기 싫어서 모임에 나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자신과 생각을 달리 하는 사람이 있을 때 함께 있는 것은 고역이 될 것이다. 그런 것은 피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경에서와 같이 “적당하지 않은 자리, 적당하지 않은 장소, 악한 친구를 피한다.”라는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 만날 일 없는 요즘에 번뇌가 있다. 그것은 온라인 상에서 번뇌를 말한다. 일종의 스토킹 같은 것이다. 처음에는 우호적이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괴롭히는 것을 말한다.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에서나 인연은 소중한 것이다. 가능하면 적대적이 되지 않고자 한다.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분노가 일어나게 된다.
 
언젠가 페이스북에서 글 잘 쓰는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은 나처럼 하루에 하나 글을 올린다. 그것도 내용과 형식을 갖춘 글이다. 이런 글을 보면 반갑다. 감각적인 사진이나 잡담과 같은 글만 보다가 글다운 글을 보면 관심이 가기 마련이다.
 
그 사람 글에 공감했다. 이는 ‘좋아요’ 이모티콘 누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때로 댓글을 달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댓글에 대한 반응이 없었다. 공감하는 이모티콘 하나만 눌러 주어도 만족한다. 그러나 일체 그런 것은 없었다.
 
그 사람은 소통하지 않는 것 같다. 자신의 글만 올리고 다른 사람 글은 보지 않는 것 같다. 댓글을 달아 주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런 것이 반복되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불만을 표현하는 글을 남겼다. 역시 반응이 없었다.
 
사람은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 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반대로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에게는 분노한다. 온라인 상에서 댓글에 무반응을 보인다면 무시당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된다. 좋았던 그 사람이 적대감으로 변한다.
 
광팬에서 스토커가 나온다
 
스토커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을 대우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시 받는 다고 생각하면 스토커가 되는 것이다. 대개 광팬에서 스토커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매일 글을 쓰고 있다. 장문의 긴 글을 쓰고 나면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동시에 올린다. 그런데 긴 글임에도 불구하고 공감 표현 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이모티콘이나 댓글을 달아 주는 것이다.
 
공감 표현 하기가 쉽지 않다. 장문의 글을 다 읽어 본 사람이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했을 때 공감 표현 할 것이다. 때로 댓글로 나타난다. 이런 경우 반드시 공감하는 이모티콘을 눌러 준다.
 
어떤 이는 자신이 쓴 글에 댓글이 달리면 일일이 답글을 달아 준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의 소유자이다. 바쁜 시간임에도 일일이 답글을 달아 준다는 것은 상대방을 존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 글에 댓글을 달아 주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어떤 이는 긴 글을 달아 준다. 이런 때 나도 그에 상응하는 답글을 달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한다. 시간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쓸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잘 보았다는 의미로, 고맙다는 의미로 ‘좋아요’ 이모티콘이나 ‘최고에요’ 이모티콘을 눌러 준다.
 
어떤 이는 자신의 글에 대한 기대를 하는 것 같다. 댓글을 달았으면 그에 상응하는 답글을 반드시 달아 주어야 하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특히 메신저로 보내 왔을 때 그런 것 같다. 그러나 블로거는 바쁘다. 생업도 있고, 좌선도 해야 하고 빠알리 공부도 해야 한다. 댓글 달아 줄 여유가 없는 것이다.
 
스토커는 광팬에서 생긴다라는 말은 진실인 것 같다. 어느 팬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을 때 답을 요구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마음에 들 때까지 답을 요구한다. 점차 그 강도는 높아 간다. 마침내 괴롭힘의 단계에 까지 이른다. 광팬이 스토커로 변신하는 것이다.
 
보기 싫은 사람, 나를 무시한 사람, 원한 맺힌 사람을 대하는 방법
 
지난 날을 되돌아 본다. 나도 어느 정도 스토커적 성향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관심 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지속적으로 관심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마음 한켠에 쌓여 있다면 이는 불선(不善)한 것이다.
 
오늘 새벽에 읽은 것이 있다. 머리맡에 있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읽은 것이다. 그것은 스토커에 대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혐오하는 정치인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보기 싫은 사람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어떤 것인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비난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성냄을 뿌리로 한 마음과 함께 생겨나는 정신법들, 마음에 의해 생겨난 물질법들일 뿐이다. 다섯 무더기(五蘊)일 뿐이고, 물질과 정신일 뿐이다. 비난하는 사람이라고하는 어떠한 존재는 따로 없다. 그 물질과 정신들도 비난하는 바로 그 사이에 사라져 버린다. 그러니 지금 화낼 일도 없다. 비난하는 물질 과 정신들이 없는데도 그 뒤에 화를 내고 있으면 그 물질과 정신들의 연속된 결과인 새로운 물질과 정신들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화를 내는 것은 마치 부모에게 원한을 가져 그들이 죽은 뒤에 그 아들이나 손자에게 복수를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비난 당하고 있는 그대로 다섯 무더기일 뿐이다. 그 다섯 무더기, 물질과 정신들도 바로 지금 사라져 간다. 그러한 물질과 정신의 연속된 결과인 바로 지금 물질과 정신들이 화를 내고 있다면 부모 시대에는 어찌할 수가 없어 아들, 손자, 손녀 시대가 되어서야 복수를 하는 것과 같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92쪽)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다 읽었다. 1권과 2권을 1년 2개월에 걸쳐서 다 읽은 것이다. 머리맡에 놓고서 읽었다. 이제 두 번째 읽고 있다.
 
위 글은 성냄에 대한 것이다. 보기 싫은 사람, 나를 무시한 사람, 원한 맺힌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를 위빠사나 방법론으로 극복하는 내용이다.
 
그 사람에 대하여 싫은 감정, 분노의 마음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청정도론 자애수행편에 따르면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자신을 오온으로 보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는 것은 단지 언어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나라는 것을 분석해 보면 오온의 무더기에 지나지 않다고 했다.
 
그 사람에 대하여 싫은 마음이 일어 났을 때 나를 오온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 싫어하는 나는 없다는 것이다. 있다면 오온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오온이라는 것은 조건발생이라는 것이다.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이라는 것은 그때그때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것이다.
 
내가 오온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그 사람을 미워하는 나는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미움의 마음이 그치지 않는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놀랍게도 마하시 사야도는 ‘빚쟁이의 비유’를 들었다.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갑자기 일어났다. 그런데 이런 느낌은 그 순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미움의 감정을 계속 마음에 품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마하시 사야도는 이에 대하여 “부모에게 원한을 가져 그들이 죽은 뒤에 그 아들이나 손자에게 복수를 하는 것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 사람에 대하여 분노가 일어났을 때 그 것은 그 때뿐이다. 그럼에도 그 사람의 이름을 볼 때 마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볼 때마다 싫은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 사람의 아들이나 손자에게 복수한 것과 같다고 했다.
 
그 사람에게 싫은 감정이 일어 났을 때는 그 감정을 살펴 보아야 한다. 예전에 있었던 좋지 않았던 감정이 되살아나서 분노의 마음이 일어났다면 예전의 그 마음에 지배당한 것이다.
 
예전의 마음은 지나가고 없다. 한번 발생하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다. 그럼에도 그 사건을 계속 생각하고 있다면 이는 대대손손 원수를 갚고자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아들, 손자, 손녀 시대가 되어서야 복수를 하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그 사람의 허상(虛像)을 보는 것은 아닌지
 
오온은 조건발생한다. 이는 오온이 끊임없이 생멸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끊임 없이 생멸하기 때문에 어느 것이 나의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떤 변치 않는 마음이 있다면 나의 마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나의 마음, 나의 마음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언어적 형성에 따른 것이다. 조건발생하여 사라진 것은 나의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예전에 불쾌했던 일을 떠 올리며 싫은 마음, 미워하는 마음, 분노의 마음이 일어나서 집착한다면 예전의 그 사람에 대하여 복수하는 것과 같다.
 
예전의 그 사람은 정말 예전의 그 사람일까? 내가 미워하던 그 사람은 여전히 내가 미워하던 그 사람일까?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고 하는데 예전에 그 사람일 것이라고 여기는지 모른다.
 
예전의 그 사람은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왜 그런가? 내가 예전의 내가 아니듯이, 그 사람도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닌 것이다. 예전의 그 사람이 싫어서 분노했으나 그 사람은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닐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그 사람의 허상(虛像)을 보고서 미워하고 있는 것이 된다.
 
분노로 인한 쾌감은 독이 된다
 
누구가 스토커가 될 수 있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 주지 않으면 자꾸 답을 요구한다. 답이 성에 차지 않으면 더욱더 긴 답을 요구한다. 점점 강도를 높여 가다가 어느 정도 한계에 이르면 적으로 돌변한다. 광팬이 스토커가 되는 것이다.
 
스토커는 과거의 좋지 않았던 기억에 기반하여 괴롭힌다. 이럴 경우 상대방도 괴롭고 자신도 괴로운 것이다. 분노를 하면 양자가 괴로운 것이다.
 
스토커는 분노하는 자와 같다. 계속 관심을 끌기 위해서 답을 요구하는 것은 괴롭히는 것이다. 만족하지 않으면 더욱더 세게 몰아 부친다. 그 과정에서 쾌감을 느낀다. 분노로 인한 쾌감이다. 그래서 “뿌리에는 독이 있지만 꼭지에는 꿀이 있다.”(S1.71)라는 게송이 있다.
 
여기 사디스트가 있다. 사디스트는 가학을 함으로 인하여 쾌감을 느끼는 자를 말한다. 욕먹은 자에게 욕을 하고, 매 맞은 자를 때리는 것은 사디스트적 가학이다. 그래서 분노하는 것에 대하여 “뿌리에는 독이 있지만 꼭지에는 꿀이 있다.”(S1.71)라고 한 것이다.
 
사디스트적 가학을 즐기는 자들이 있다. 정치권에서도 이런 것을 볼 수 있다. 야당 대표를 탈탈 터는 것을 말한다. 그것도 모자라 칼로 죽이려 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악마화 하여 즐기는 것이다.
 
사디스트적 가학은 스토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 주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괴롭힌다. 상대방이 굴종적인 자세를 취하면 쾌감을 느낄 것이다. 더욱더 세게 자극할지 모른다. 가학으로 인한 쾌감이다.
 
분노하면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당장은 시원하고 후련할 것이다. 그러나 분노하면 할수록 독(毒)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꼭지에는 꿀이 있지만 뿌리에는 독이 있다고 했다.
 
분노하면 후련할 것이다. 그러나 후련한 만큼 독은 쌓여 간다. 분노의 뿌리는 점점 깊어간다. 뿌리에 독이 가득했을 때 어떻게 될까? 그 뿌리의 독으로 인하여 목숨이 위태로워 질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분노를 끊어 편안히 잠자고
분노를 끊어 슬프지 않네.
참으로 하늘사람이여,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를 죽이는 성자는 가상이 여기니,
그것은 죽이면 슬프지 않기 때문이네.”(S1.71)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그때그때 잘 관찰해야
 
오늘도 장문의 글을 썼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내용과 형식을 갖춘 글을 쓰고자 노력한다. 이런 긴 글에 공감을 표현 해 주는 사람들이 많다. 이모티콘을 눌러 주거나 댓글을 달아 주는 것이다.
 
댓글을 달아 주는 사람들을 고맙게 생각한다. 늘 보는 이름을 보면 반갑다. 나중에 만나면 밥이라도 사고 싶다. 선물이라도 하고 싶다. 그런데 댓글에다 일일이 답글을 달지 못한다는 것이다. 공감한다는 이모티콘 하나를 남기는 것이 고작이다. 다음 글을 올리는 것으로 대신한다. 유익한 글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똑 같은 일상이다. 이런 일상이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글을 쓸 수 있었다. 매일 오전은 이렇게 글쓰기로 하루일과가 시작된다.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 하루가 되고자 한다.
 
더 이상 유튜브에 빠져 지내지 않고자 한다. 더 이상 미움의 감정을 지니지 않고자 한다. 마치 그 아들이나 손자에게 복수하는 것과 같다. 또한 나의 아들, 손자, 손녀 시대가 되어서야 복수를 하는 것과 같다.
 
복수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다. 미래는 오지 않았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그때그때 잘 관찰해야 한다.
 
 
2024-01-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