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성도절날에 미역국을 먹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 18. 10:57

성도절날에 미역국을 먹고
 
 
오늘은 성도절이다. 음력으로 12월 8일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신 날이다. 물론 북방전통에 따른다. 남방에서는 음력으로 사월보름날이다. 남방에서 사월보름날은 탄생, 성도, 열반이라는 세 가지 사건을 한꺼번에 기념하는 날이다.
 
나는 어느 불교 전통을 따르는가? 예전에는 북방불교 전통을 따랐으나 지금은 남방불교 전통을 따른다. 법명을 ‘담마다사(Dhammadasa)’라 하여 빠알리 법명으로 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일종의 전향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북방불교의 전통을 존중한다.
 

 
불교 최대 명절 중의 하나인 성도절은 불교도에게는 축하의 날이다. 절에서는 성도절을 맞이 하여 철야용맹정진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성도절은 내 생일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오늘은 내 생일날이다. 음력으로 따진 것이다. 성도절날과 겹친 것이다. 이런 사실은 이전에는 몰랐다.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하고 나면서부터 알게 되었다.
 
불교입문은 늦었다. 2004년 계를 받았으니 이제 20년 되었다. 절에 30년, 40년, 50년 다닌 사람과 비교하면 새내기에 지나지 않는다.
 

 
생일날이 성도절날이라는 것은 2005년에 알게 되었다. 그때 불교교양대학 법우들이 성도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절에 가는 것을 보고서 알았다. 이전에는 성도절이라는 것이 있는 줄 조차 몰랐다.
 
태어나 보니 이 세상이었다라는 말이 있다. 불교에 입문해 보니 성도절날이 생일날이었던 것이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떤 스님은 이에 대하여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다. 스님은 “ 담마다사님, 생신을 축하합니다, 좋은 날 태어나셨군요! 성도절은 법신(담마카야)의 출생인데 담마다사님도 도를 이루시어 육신/화신과 법신을 누리시고, 법공양 공덕으로 보신도 갖추어 나가시기를 축원 드립니다!_()_ ”라는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과거 부처님들이 깨달은 것은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깨달음을 향해서 간다. 마치 연어가 태어난 곳을 찾아서 먼 길을 가듯이, 불자라면 누구나 말 하지 않아도 깨달음의 길을 향해서 간다.
 
불교인이라면 부처가 되고자 한다. 깨달은 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세계에 두 명의 부처님이 있을 수 없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유일한 사람의 품이 있다.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유일무이한 유일한 사람이 있다. 그 유일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렇게 오신님, 거룩한 님, 원만히 깨달은 님이다.”(A1.174)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두 번째 부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로지 한 세계에서는 한 분의 부처님만 있게 된다. 왜 그런가? 이 세상에 출현 했던 과거 모든 부처님들이 깨달은 것은 한결같이 똑 같았기 때문이다.
 
쌍윳따니까야 인연상윳따(nidānasaṃyutta: S12)를 보면 과거칠불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깨달은 내용은 모두 똑 같다는 것이다. 과거칠불 중에서 가장 선두에 있는 위빠시 보살의 깨달음 순간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보살 비빳씬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이 있으면 늙음과 죽음이 있고 무엇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나는가?’ 그 때 수행승들이여, 보살 비빳씬은 이치에 맞 게 정신활동을 일으켜 지혜로 꿰뚫었다. ‘태어남이 있으면 늙음과 죽음이 있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난다.’”(S12.4)
 

 
보살에게 왜 이런 생각이 떠올랐을까? 이는 하나의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쌍윳따니까야에 따르면 “세상은 곤란함에 빠져 있다.”(S12.4)라고 의문한 것에서 시작된다.
 
유튜브에서 강아지 영상을 보면
 
요즘 유튜브에서 종종 강아지 영상을 본다. 영상에서는 ‘시고르자브종’이라는 종의 개를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시골잡종’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시골똥개를 시고르자브종이라고 하는 것이다.
 
강아지는 귀엽다. 태어난지 두 달 정도 되는 강아지가 가장 귀엽다. 그런데 강아지를 보면 측은한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얘네들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라며 의문한다.
 
사람들은 뿌리를 찾는다. 조상이 없는 사람은 뿌리가 없는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개의 경우는 어떠할까? 정말 뿌리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시골잡종은 어떻게 생겨날까? 유튜브 영상을 보면 대개 떠돌이 수케와 집에서 기르는 암케 사이에서 태어난다. 어느 날 암케가 발정기가 되었을 때 만남을 가진다.
 
암케는 새끼를 여러 마리 낳는다. 열 마리도 낳는다. 갑자기 개떼가 출현한 것 같다. 그런데 강아지들은 자신의 아비 개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다. 본능에 따라 어미 개의 젖을 빨며 폭풍성장하게 된다.
 
강아지를 접하면 연민의 마음이 일어난다. 뿌리도 없는 강아지이다. 족보도 없는 시골똥개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 나왔다. 이 세상에 나와서 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보는 것이다. 개의 눈에는 개만 보일 것이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이 있다. 이는 아는 만큼 보임을 말한다. 인식하고 있는 것만큼 인식하는 것이다.
 
개의 눈에는 개의 세계 이상을 알지 못한다. 인간의 눈에는 인간 세계 이상을 보지 못한다. 당연히 인간은 깨달은 자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어느 스님은 강아지들이 태어났을 때 귀여웠던 것 같다. 스님은 페이스북에 “얘네들은 어디서 왔을까?”라며 글을 남겼다. 뿌리도 없는 강아지들이 갑자기 출현한 것에 대하여 측은한 마음으로 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기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럴 때 “이 많은 사람들은 어디서 왔을까?”라고 의문해 본다. 분명히 예전에는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이 출현한 것이다.
 
강아지도 중생이고 사람도 중생이다. 중생이 출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지상에 있는 어떤 중생이든지 부모가 있어야 태어난다. 인간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안다. 그러나 강아지들은 아비 개를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은 축생보다는 나은 것이다.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궁금해 한다. 옛날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탐구하기 시작했다.
 
부처를 이룬 사람들이 있다. 부처가 된 사람들은 존재의 근원을 탐구했다. 그래서 “세상은 곤란함에 빠져 있다.”(S12.4)라고 의문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위빠시 보살은 어떤 곤란함에 빠졌는가? 이는“태어나고 늙고 죽고 사멸하고 다시 태어나면서도 그러한 늙음과 죽음의 괴로움에서 벗어남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S12.4)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생사(生死)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삶의 괴로움에 대한 것이다.
 
사람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기뻐한다. 그러나 아기가 자라 성인이 되고 세월이 흘러서 늙고 죽게 되면 슬퍼한다. 더구나 삶의 과정에서 희로애락을 겪게 되는데 결국 죽음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삶은 괴로움이다’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보살은 “참으로 언제 그러한 늙음과 죽음의 괴로움에서 벗어 남을 알겠는가?”(S12.4)라며 삶의 해법을 찾고자 한 것이다.
 
보살은 사유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새김을 확립하고(sato)”라고 했다. 마침내 보살에게 전에 없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는 어쩌면 존재의 근원에 대한 것인지 모른다. 보살은 “무엇이 있으면 늙음과 죽음이 있고 무엇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나는가?(kimhi nu kho sati jarāmaraṇaṃ hoti, kiṃpaccayā jarāmaraṇa)”(S12.4)라고 의문한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서 여기에 있게 되었을까? 이런 의문은 시골똥강아지들을 보면서 “얘네들은 어디서 왔을까?”라며 의문하는 것과 같다. 하필이면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궁금한 것이다. 또한 하필이면 이런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이 너무나 궁금한 것이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하여
 
동물은 본능적으로 살아간다. 동물은 오로지 식욕으로 살아가고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고자 하는 번식본능만 있을 뿐이다. 이런 것에 있어서는 인간도 동물과 다름이 없다. 다만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위빠시 붓다가 보살로 살았을 때 깊이 사유했다. 그것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여기에 있게 되었을까?”라는 의문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던 것 같다. 내가 어떤 연유로 여기에 태어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죽음은 현실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명상 게송이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발간된 ‘예송지송’을 보면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나의 삶은 불확실하다는 것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을 말한다. 이는 “태어난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죽는다는 그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다. 그 때가 언제가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죽음은 확실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잠 못 이루는 밤이 되기 쉽다. 보살도 그랬을 것이다.
 
보살은 사유에 사유를 거듭했다. 마침내 사유가 완성되었다. 그것은 죽음의 극복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태어남이 있으면 늙음과 죽음이 있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난다. (jātiyā kho sati jarāmaraṇaṃ hoti, jātipaccayā jarāmaraṇa)”(S12.4)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태어남이 있으면 늙음과 죽음이 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보살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조건법’이다. 조건법은 다름아닌 연기법이다. 그래서 “존재가 있으면 태어남이 있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게 된다. (bhave kho sati jāti hoti, bhavapaccayā jātī)”(S12.4)라고 사유한 것이다.
 
보살은 거꾸로 추적해 나갔다. 연기의 역관에 대한 것이다. 현재 당면한 죽음문제부터 먼저 사유한 것이다.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조건에 대하여 태어남이라고 보았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죽음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우리는 여기 태어났다. 이미 벌어진 것이다. 어찌할 수 없다. 이제 늙어서 병들어 죽는 일 밖에 남지 않았다. 어찌할 것인가? 이대로 죽음의 침상에서 죽음을 받아 들여야 할까?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과거에 출현 했던 부처가 사유했던 것이다.
 
쌍윳따니까야 니다나 상윳따를 보면 과거에 출현했던 부처님들이 깨달았던 내용은 모두 똑같다. 그래서일까 인연상윳따가 시작되자 마자 선두에 위빠시 붓다 등 과거칠불이 깨달은 것을 모두 표현해 놓았는데 모두 다 똑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이다.
 
연기법은 생성과 소멸에 대한 가르침이다. 다만 조건발생적인 가르침이다. 원인 없이 조건 없이 발생할 수 없음을 말한다. 내가 이 세상에 지금 여기서 시퍼렇게 존재하는 것도 원인과 조건에 따른 것이다.
 
시골 똥강아지는 뿌리가 없다. 아비개가 누구인지 모른다. 태어났으니 사는 것이다. 어미 개의 젖을 먹고 폭풍성장한다. 두 달 정도 되면 분양된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면서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어느 집에 가서 개로서 일생을 살아간다.
 
개로 일생을 살면 괴로울 것이다. 늘 먹을 것을 찾아야 한다. 먹기 위해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개처럼 사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사는 것이다. 눈이 있어서 보고 귀가 있어서 듣는 것이다. 감각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사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삶에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지 않다. 이는 매일 술로 사는 사람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인생 뭐 별거 있어? 자, 술이나 마시자고.”라며 천년만년 살 것처럼 방일하며 보낸다.
 
어떻게 불사(不死)가 되는가?
 
인간은 동물과 달리 사유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죽음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태어나는 것은 어찌 할 수 없지만 죽는 문제 하나만큼은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과거에 부처가 출현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과거에 출현 부처들은 보살로 살 때 사유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며 삶의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삶이 무엇인지 천착하면 할수록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며 사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인연상윳따에 실려 있는 과거칠불 이야기를 보면 죽음문제를 해결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죽음에서부터 시작되어 역순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출현 했던 모든 부처님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게 된다.
 
 
“이와 같이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가지 감역이 생겨나고, 여섯 가지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생겨난다.”(S12.4)
 

 

 
연기의 순관에 대한 것이다. 처음 사유할 때 죽음부터 시작했는데 사유를 하다 보니 무명에 이른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태어난 것임을 알게 된다.
 
태어나면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한번 강아지로 태어나면 개의 일생을 살아가야 한다. 죽기 전에는 도중에 바뀌는 일은 없다. 마찬가지로 한번 사람으로 태어나면 사람으로 일생을 살아가야 한다. 도중에 바뀌는 일은 없다. 죽어야 다른 존재로 태어나게 된다. 그런데 깨달은 자는 도중에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다. 범부에서 성자로 계보가 바뀌는 것이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죽음을 극복했기 때문이 불사가 된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완전한 열반에 대하여 아마따(amata: 不死)라고도 한다. 번뇌 다한 아라한은 자아개념이 없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말은 아예 시설되지 않는 것이다.
 
깨달은 자들은 불사가 된 자들을 말한다. 일반사람들에게는 오온의 죽음이 있지만 깨달은 자는 죽음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깨달음은 언어로서 표현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도절날에 미역국을 먹고
 
오늘은 성도절이다. 내 생일날이기도 하다. 생일잔치는 지난 일요일 이미 치른바 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미역국을 먹었다. 이런 것도 일종의 이중과세일 것이다.
 
북방불교 전통에서는 오늘은 뜻 깊은 날이다. 불교 사대명절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신심 있는 불교인들은 이날에 부처님이 무엇을 깨달았는지 새기기도 한다.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불교인이 되고 나서 궁금한 것이 있었다.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아 부처가 되었을까?”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보니 모든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깨달아 부처가 된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인연상윳따에 분명히 실려 있다.
 
 
“이와 같이 무명이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가지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가지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며,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며,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소멸한다. 수행승들이여, 소멸하고 소멸하는 것과 함께 보살 비빳씬에게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가르침에 대한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밝음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S12.4)
 

 

 
2024-01-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