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임종순간에 “껄껄껄”하는 것보다 호흡을 지켜 보며 평온한 마음을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 25. 10:20

임종순간에 “껄껄껄”하는 것보다 호흡을 지켜 보며 평온한 마음을
 
 
혹시 후회되는 일 없습니까?” 이 말은 죽음에 임박한 사람에게 질문한 것이다. 이에 임종자는 “스님들에게 많이 보시하지 못한 것이 후회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튜브에서 빤냐와로 스님이 말한 것을 들은 것이다.
 
빤냐와로 스님에 따르면 테라와다 불교권 국가에서 스님들은 임종하기 전에 방문한다고 한다. 임종하고 나면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것은 우리나라 불교와 반대 되는 것이다.
 
테라와다 스님들은 왜 임종하기 전에 방문하는 것일까? 그것은 임종 시에 어떤 마음 가짐을 갖느냐에 따라 내생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임종 후에 간다면 이는 이미 늦은 것이다. 아무리 천도를 해도 천도가 되지 않는 것이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중음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의 사이에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임종과 동시에 태어난다. 이에 대한 간격은 없다. 그래서 무간(無間)이라고 말한다.
 

 
재생연결식은 무간(無間)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중간존재를 인정한다. 죽은 다음에 49일 동안 머물다가 태어날 곳에 태어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 49일 동안 천도재를 해준다. 한국불교 스님들이 사람이 죽은 다음에 방문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부처님은 중간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죽자마자 태어난다고 했다. 이는 화생이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마치 눈을 번쩍 뜨듯이 새로운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재생연결식이 있다. 이는 이 생에서 마지막 죽음의 마음이 태어날 곳의 처음 마음과 같은 마음을 말한다. 임종순간에 업과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 중에 하나를 대상으로 하여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 마음을 재생연결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재생연결식은 현생과 내생을 연결해 주는 마음이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업,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 중의 하나를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데 바로 그 마음은 다음 생의 첫 마음이 된다. 이렇게 되면 틈이 없게 된다. 그래서 무간이다. 무간이어서 49일 동안 머문다는 중간 존재가 있을 수 없게 된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죽자마자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다. 아마 0.5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이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지었던 업이나, 업의 표상, 또는 태어날 곳의 표상에 따라 마음이 일어나는데, 그 마음이 다음 생의 첫 마음인 것이다.
 
다음 생의 첫 마음은 일생에 있어서 마지막 죽음의 마음과 같다. 그래서 한번 사람으로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사람으로 살아간다. 도중에 개나 소 등으로 바뀌는 일은 없다. 이런 마음을 바왕가의 마음(bhavaga citta), 또는 존재지속심이라고 한다.
 
임종순간에 가책이나 후회하는 일은 있는가?
 
빤냐와로 스님의 유튜브 영상법문을 듣고 마음이 우울해졌다. 태국에서 죽음에 임박한 사람의 가정을 방문해서 “혹시 후회되는 일 없습니까?”라고 물어 보았을 때 대부분 후회되는 것이 있다고 했다. 나는 후회되는 일이 없을까?
 
빤냐와로 스님의 유튜브 법문을 듣다가 경전에서 읽은 구절이 떠 올랐다. 그것은 상윳따니까야 ‘박깔리의 경’(S22.87)에 실려 있는 것이다.
 
수행승 박깔리는 중병에 걸렸다. 박깔리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았다. 무엇보다 중병으로 인하여 육체적 고통이 심했다.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부처님은 박깔리 병문안을 갔다. 부처님은 “박깔리여, 그대는 참아낼 만한가?”라며 물었다. 박깔리는 “세존이시여, 저는 참아낼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박깔리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부처님은 박깔리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예견했다. 부처님은 “박깔리여, 어떠한 가책이 될 만한 일이라도 한 적이 있는가? 어떠한 후회가 될 만한 일이라도 한 적이 있는가?”라며 물어 보았다.
 
부처님은 왜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는 자에게 가책이 있는지, 후회될 만한 일이 있는지에 대하여 물어 보았을까? 이는 이어지는 질문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박깔리여, 그대가 계행을 실천하는데 자신을 욕되게 한 적이 있는가?”라며 물은 것이다.
 
죽음 앞에서 진실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죽음을 앞에 두고 거짓이나 위선은 없을 것이다. 박깔리는 “세존이시여, 저는 계행을 실천하는데 자신을 욕되게 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누구나 임종의 순간이 올 것이다. 나이가 먹어 감에 따라 가책되는 일이나 후회되는 일도 많을 것이다. 출가수행자에게는 계행이 가장 마음에 걸릴 것이다. 그런데 박깔리는 임종순간에 가책이 되는 것도 없었고 후회되는 것도 없었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박깔리는 계행이 청정했던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가 있다. 가장 유명한 구절을 말한다면 아마도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다.”라는 말일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임종순간에 마음에 가책될 일이나 후회될 일이 없음을 말한다.
 
임종순간에 “껄껄껄”한다면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 “껄껄걸”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좀더 참고 살걸”, “좀더 즐기며 살걸”, “좀더 베풀면서 살걸”이라며 껄껄껄 함을 말한다.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감각적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눈과 귀 등으로 오욕락을 즐기는 것에 대하여 잘 사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일까 해볼 것 다해 본 사람은 “원 없이 살았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살지 못했을 때 “좀더 즐기며 살걸”이라며 후회할 것이다.
 
불교인이 최후를 맞이한다면 후회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좀더 보시하며 살걸”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이는 보시하고 지계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최후의 순간에 인내하지 못한 것을 후회할지 모른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을 때 여한이 될 것이다. 그래서 “좀더 참고 살걸”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테라와다불교인들은 어떻게 임종을 맞아야 할까? 빤냐와로 스님에 따르면 마음이 평안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는 것이 좋다고 했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말인지 모른다. 왜 그런가? 후회하며 죽으면 그 후회의 마음으로 인하여 악처에 떨어질 수 있음을 말한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후회는 불선법이다. 후회는 성냄을 뿌리로 하는 마음이다. 임종순간에 “껄껄껄”한다면 이는 자책하는 마음으로서 불선법  이 된다.
 
임종순간에 불선법이 일어나면 그 불선한 마음으로 인하여 악처에 떨어질지 모른다. 이는 무지에 따른 것이다. 설령 그 사람의 삶이 가책되는 것이 많고 후회스러운 일이 많다고 할지라도“껄껄껄”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임종순간에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빤냐와로 스님에 따르면 임종순간에 마음을 평안하게 가지라고 했다. 어떻게 하는가? 호흡을 관찰하라고 했다. 임종순간까지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면 마음이 마음이 평온해질 것이기 때문에 악처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청정한 자의 자살은 나쁜 것이 아니다
 
빤냐와로 스님의 유튜브 영상을 들었을 때 마음이 착잡했다. 왜 그런가? 후회스러운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박깔리의 경에서와 같이 마음이 가책되는 일도 많다. 그러고 보니 지난 세월이 부끄럽고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사람만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안다고 한다. 축생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없다. 그런데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삶의 과정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마음이 고요해졌을 때 나타난다.
 
새벽이 되면 마음은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이 된다. 흙탕물이 가라 앉는 것과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바닥까지 보일 정도가 되면 전날 행위가 떠오르게 된다. 대체로 부끄럽고 창피한 것들이 많다. 심지어 자신을 속인 것도 있다.
 
죽음에 임박 했을 때 자신의 일생을 돌아 볼 것이다. 가책되는 일이나 후회되는 일이 많을 때 마음이 착잡할 것 같다. 그러나 중병에 걸린 박깔리는 가책되는 일도 후회되는 일도 없었다. 그것은 청정한 계행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계행이 청정하면 두려울 것이 없을 것 같다. 지금 최후를 맞이한다고 해도 가책이나 후회될 일이 없을 것이다. 설령 중병에 걸려서 괴로워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 죽는다면 후회 없는 삶이 될 것이다.
 
박깔리는 부처님의 병문안을 받고 난 다음에 칼로 자결했다. 이는 부처님이 박깔리의 자결을 묵인 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박깔리여, 두려워말라. 그대의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대가 목숨을 끊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S22.87)라는 말을 전달 받았기 때문이다.
 
흔히 자살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초기경전을 보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마음이 청정한 상태에서 자살하는 것은 죄업이 되지 않는다.
 
초기경전을 보면 종종 수행승의 자살사건에 대한 것이 있다. 대표적으로 고디까의 자결(S4.23), 박깔리의 자결(S22.87), 찬나의 자결(S35.87)을 들 수 있다. 여기서 고디까는 일시적 마음의 해탈에 대한 퇴전으로 자결했다. 박깔리와 찬나는 중병에 걸려서 자결했다.
 
부처님은 자결을 용인했다. 마음이 청정한 상태에서 자결에 한한 것이다. 고디까는 “이제 나는 여섯 번이나 일시적 마음에 의한 해탈에서 물러났다. 나는 차라리 칼로 목숨을 끊는 것이 어떨까?” (S4.23)라며 자결했다. 박깔리는 “그 때 존자 박깔리는 도공의 집에 있으면서 병이 들어 괴로워 했는데 아주 중병이었다.”(S22.87)라고 해서 중병을 이유로 해서 자결했다. 찬나는 “나는 참아내고 견디어 낼 수 없습니다” (S35.87)라며 자결했다.
 
부처님은 일반사람들에게 자결을 말하지 않았다.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나 계행이 청정한 자, 마음에 가책이 없는 자, 후회가 없는 자의 자결은 허용했다. 그래서 “그대가 목숨을 끊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S22.87)라고 말한 것이다.
 
빤냐와로 스님도 자살은 나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청정한 삶을 산 자가 더 이상 살아야 할 의미를 느끼지 못할 때 삶을 내려 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자살로 인한 마음의 가책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무의식 저편에 있는 것이 꿈으로
 
삶의 과정에서 가책되는 것도 많고 후회스러운 것도 많다. 그래서일까 종종 꿈에서도 나타난다. 무의식 저편에 있는 것이 꿈으로 나타난 것이다. 애써 잊어 버리려고 했던 것들이 꿈이라는 무의식에서 발현 되는 것이다.
 
오늘 새벽 꿈에서 깨어 났을 때 몹시 우울했다. 마치 숨기고 싶은 마음의 그림자가 꿈이라는 무의식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 우울한 마음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경전을 읽었다. 그리고 다시 잠을 잤다. 잠을 자고 나자 산뜻한 기분이 되었다.
 
지난 시절을 되돌아 본다. 좋았던 기억보다는 좋지 않았던 기억이 더 많은 것 같다. 오늘 새벽처럼 꿈에서 무의식에 있던 것이 발현 되었을 때 가책과 후회가 강하게 일어났다.
 
사람이 죽을 때 “껄껄걸”하며 죽는다고 한다. 그라나 빤냐와로 스님 법문에 따르면 평온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는 것이라고 했다. 죽는 그 순간까지 호흡을 지켜 보는 것이다.
 
 
2024-01-2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