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들기

124권 담마의 거울 2021, 마하까루나(大悲)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4. 4. 13. 10:26

124권 담마의 거울 2021, 마하까루나(大悲)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흔히 비우는 삶을 살라고 말한다. 자꾸 채우는 삶을 지양하자는 말이다. 책을 읽는 것도 채우는 삶이라고 한다.
 
책을 읽지 않는다. 읽어야 할 책이 있지만 읽지 못하고 있다. 시간도 없을뿐더러 책에서 크게 얻을 것이 없다고 본다. 그러나 경전은 다르다.
 
머리맡에는 초기경전과 논서가 있다. 요즘은 ‘쌍윳따니까야’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는다. 경전을 읽으면 책을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왜 그런가? 경전은 고전중의 고전이기 때문이다.
 
채우는 삶에 지식만 있을까? 채우는 삶에는 재산도 있다. 돈을 모으고 돈을 불려 나가는 것도 채우는 삶이다.
 
사람들은 채우는 삶을 살고자 한다. 채우고 또 채워서 부자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더 채우려 할 것이다.
 
여기 아파트 한 채 가진 자가 있다. 한 채로 만족하지 못한다. 두 채가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 채를 전세 줄 것이다. 전세자금을 이용하여 갭투자 할지 모른다.
 
아파트 두 채가 되면 그 다음부터는 늘리기 쉽다. 전세보증금으로 갭투자하면 이론상으로 무한정 늘릴 수 있다.
 
탐욕에는 만족이 없다. 가진 자는 더 가지려 하는 것이 탐욕이다. 아직 가지지 못한 자가 가지려 하는 것이 욕망이다. 누구도 욕망과 탐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에게도 욕망이 있다. 그것은 돈이 되지 않는 글쓰기, 명상하기, 경전보기, 책만들기, 빠알리어공부하기를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탐욕이라고 하지 않는다.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탐욕은 빠알리어로 로바(lobha)이다. 로바는 영어로 ‘greed’의 뜻이다. 이글거리는 욕망이 떠오른다. 이미 가지고 있음에도 또 가지려 하는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마치 끈끈이처럼 대상을 붙잡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라고 했다. 또한 “그것은 마치 급류의 강이 대해로 흘러가듯, 갈애의 강으로 확장되면서 악처로 붙잡아 간다.”(Vism.14.162)라고 했다. 탐욕의 종착지는 악처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욕망은 어떠한가?
 
틈틈이 책을 만들고 있다. 과거에 써 놓은 글을 모아서 만드는 것이다. 2006년 이후 써 놓은 글이 대상이다. 이제 2020년 것까지 만들었으니 앞으로 3년 것까지 더 만들면 따라 가게 된다.
 
책 만들기는 욕망이 작용된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바람, 욕구,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 빠알리어로는 찬다(chanda)가 된다.
 
찬다는 집착이 없는 ‘어떤 것에 대한 바람’이다. 또한 찬다는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심리학적 용어이다. 이는 집착이 있는 욕구인 해로운 로바(탐욕)와 구별된다.
 
책 만들기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쓴 모든 글에 대하여 시기별로 또는 카테고리별로 모아서 책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판매를 위해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보관용으로 두 질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 배포용으로 만든다. 피디에프(pdf)파일을 만들어 블로그에 올려 놓는 것이다. 누구나 다운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번에 만든 책을 하나 편집했다. 이를‘124 담마의 거울 2021’라고 이름 붙였다.  124번째 책으로 2021년 1년 동안 담마(法)에 대하여 쓴 것이다. 모두 75개의 글이 실려 있고 426페이지에 달한다. 책은 B5사이즈(18.2X25.7)이고 폰트사이즈는 10으로 했다. 참고로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
 
1. 신축년 소(牛)의 해와 고독한 수행자
2. 내가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것은
3. 깨달은 자의 신비한 미소
4. 새로 구입한 책장
6. 머물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5.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7. 암송하고 나면 “싸두, 싸두, 싸두!”라는 말이 절로
8. 정사유가 지혜의 영역인 이유
11.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는 진리
9. 다섯 천사의 메세지
11. 판단이 서지 않으면 왼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12.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고
13. 갈대와 같은 인간의 개념놀음
14. 권태와 혼침은 악마의 군대
15. 감정적 사랑 없는 자비와 나라는 생각 없는 지혜
16. 수가따(善逝)에 대한 네 가지 의미
17. 대승은 전혀 다른 불교
18. 욕망에 지배당하고 있을 때
19. 멧따(慈愛)와 함께
20. 빛과 같은 부처님 가르침, 세상을 아는 님 로까위두(世間解)

21. 마음공부와 불교공부는 다르다
22. 괴로움도 나의 자산
23. 최상자로서 아눗따라(無上士)
24. 인간은 본래 깨끗한 존재일까?
25. 사람을 잘 길들일 줄 아는 분 뿌리사담마사라티(調御丈夫)

26. 왜 꿈의 비유가 최악인가 
27. 이것 과 현존을 말하는 사람들
28. 마땅한 스승이 없다면 경전을
29. 카라반의 리더 천인사(天人師)
30. 우리는 코끼리 등 위에 탄 사람
31. 여래십호에서 붓다(佛)의 진정한 의미
32. 공에 대한 그림을 보고
33. 일체가 괴롭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34. 바가와(世尊) 여섯 가지 의미
35. 백전백승 연기법
36. 매일 부처님 덕성을 새기면
37.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의 상베가
38. 바히야 다루찌리야의 드라마틱한 삶
39. 인생이 괴로운 이유는
40. 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자
41. 타인에 대한 보시는 결국 자기자신에게 하는 것
42. 앗따굿따(attagutta), 왜 자신이 자신의 수호자가 되어야 하는가?
43. 나는 불꽃 같은 존재
44. 새벽에 홍삼꿀차를 마시니
45. 원숭이 같은 마음
46. 견월망지(見月忘指)는 담마에 대한 무지
47. 늙어서 슬프다고 하는데
48. 사이비정법이 출현할 때
49. 천 개의 달 만 개의 달이 있지만
50. 자만의 계급장을 떼어라
51. 불교를 철학의 영역으로 끌어 내리고자 하는
52. 연기법이 왜 중도인가 
53. 비 오는 차분한 아침에
54. 과학적 유물론과 허무주의
55. 장자의 덕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그리고 불교의 꾸살라 
56. 그 사람은 나를 비추어 보는 거울
57. 혐오가 일어날 때
58. 저녁노을에서 찬란한 슬픔을
59. 가르침의 거울 담마다사
60. 리더의 조건 동등한 배려
61. 빈 둥지 같은 고향집
62. 유물론적 연기관과 유물론적 윤회관
63. 얽힌 매듭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64. 연기법으로 논파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 
65. 우연한 피습에 대하여
66. 멈추면 죽는다 
67. 칠일이내 밝혀지는 가짜뉴스
68.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69. 무지하기 때문에 윤회한다
70. 우연발생적 사고
71. 불교적 세계관과 인류원리
72. 괴로움 5종 종합선물세트
73. 열 가지 성찰
74. 떨어진 낙엽을 보면서
75. 정법 만나기 어려운 여덟 시기

 

124 담마의 거울 2021_240213.pdf
3.73MB

 

 
 
 
책을 만들려면 편집을 해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목차를 만드는 작업이기도 하다. 목차를 만들고 사진 사이즈를 줄이는 등 다듬는 작업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과거 써 놓은 글을 빠른 속도로 스캔한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찍은 사진은 한 눈에 알아 본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쓴 글은 한 눈에 알아 본다. 그런데 과거 써 놓은 글을 보면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도 있다. 목차 15번 ‘감정적 사랑 없는 자비와 나라는 생각 없는 지혜’(2021-02-18)라는 제목의 글이 대표적이다.
 
2021년 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여래십호에 대하여 정리하고자 했다. 니까야와 청정도론을 참고하여 열 개의 글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 동안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것을 확실하게 알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무엇보다 정리된 글을 공개하고자 하는 욕구도 강했다. 그 중에 ‘윗자짜라나삼빤나(vijjācaraa-sampanna)’가 있다.
 
윗자짜라나삼빤나에 대하여 한역으로 ‘명행족(明行足)’이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영지와 실천을 구족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청정도론을 참고하여 글을 쓰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글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지혜와 자비에 대한 것이다.
 
흔히 불교에 대하여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혜와 자비의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 이는 청정도론에서 “명지를 갖춤은 일체지성의 완성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덕행을 갖춤은 크나큰 연민의 완성으로 이루어진다.”(Vism.7.32)라는 글을 보았을 때 눈이 확 밝아지는 것 같았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지혜는 명지에 같은 개념으로서 ‘일체지성의 완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또한 자비는 덕행과 같은 개념으로서  ‘크나큰 연민의 완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일체지성과 크나큰 연민이 키워드인 것을 알 수 있다.
 
지혜 있는 곳에 자비가 있고 자비 있는 곳에 지혜가 있다. 이렇게 지혜와 자비가 동전의 양면처럼 되어 있는 이유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세존은 지혜로 진리(dhamma)의 왕국에 들어가고 자비로 진리(dhamma)의 시여자가 된다.”(빠라맛타만주싸)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지혜와 자비는 진리(dhamma)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빠라맛타만주싸에서는 지혜와 자비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해 놓았다. 지혜의 입장에서 본 자비와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1)지혜로 윤회의 수레바퀴를 멈추고, 자비로 윤회의 수레바퀴를 꿰뚫는다. 
2)지혜로 타자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고, 자비로 타자의 고통을 치유한다. 
3)지혜로 열반과 대면하고, 자비로 열반을 성취한다. 
4)지혜로 자신을 제도하고, 자비로 타자를 제도한다. 
5)지혜로 깨달은 님의 상태를 완성하고, 자비로 깨달은 님의 과업을 완성한다. 
 
 
여기서 새기고 싶은 말은 네 번째 “지혜로 자신을 제도하고, 자비로 타자를 제도한다.”라는 말이다. 이런 말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본 청정도론 각주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지혜와 자비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상세하게 써 놓은 것을 아직 보지 못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비의 입장에서 본 지혜와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1)자비로 타자에 대해 비폭력을 실천하고, 지혜로 타자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 
2)자비로 타자를 보호하여 자신을 보호하고, 지혜로 자신을 보호하여 타자를 보호한다. 
3)자비로 타자를 괴롭히지 않고, 지혜로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다. 
4)자비로써 모든 존재를 아버지처럼 돕고, 지혜로써 그들 모두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5)자비로써 모든 존재에게 도움을 준다는 사실에 관계하지만, 지혜로써 그의 마음은 일체의 사실을 모두 여읜다.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다. 이 중에서 네 번째 "자비로써 모든 존재를 아버지처럼 돕고, 지혜로써 그들 모두에게 집착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새기고자 한다. 마치 자비에 대한 것을 보면 예불문에서 ‘삼계도사 사생자부’라는 말이 떠오른다.
 
지혜와 자비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는 결론적으로“세존의 자비에는 감정적인 사랑이나 슬픔이 없고, 그의 지혜에는 ‘나’나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다.”라는 말이다. 자비에는 감정적 사랑이나 슬픔이 없고 지혜에는 나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비의 개념이 더 다가온다.
 
자비는 자애와 연민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자애는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라고 바라는 아름다운 마음이다. 또한 연민은 “모든 존재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라고 바라는 아름다운 마음이다. 이런 자비의 마음이 실패할 때가 있다.
 
자애가 애정으로 변질되면 실패한다. 그래서 자애는 배우자나 연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연민은 근심걱정하면 실패한다. 불쌍하다고 노심초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존의 자비에는 감정적인 사랑이나 슬픔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지혜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나’나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다.”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몸과 마음이 나의 것이라는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이 없음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지혜와 자비가 강조된다. 그러나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런데 청정도론에서는 명지(vijja)에 대하여 일체지성의 완성이라고 했고, 덕행(caraa)에 대해서는 크나큰 연민의 완성이라고 했다. 바로 이것이 지혜와 자비를 가장 잘 설명한 말이라고 본다. 특히 덕행에 대하여 ‘크나큰 연민(mahākaruā)’이라고 한 것이 마음에 와 닿는다.
 
흔히 자비의 마음을 내라고 말한다. 그런데 자비 중에서도 큰 자비가 있다. 이를 ‘대자비’라고 한다. 그런데 대자비보다 더 강하게 와 닿는 것은 ‘대연민’이다. 이와 같은 대연민은 빠알리어로 마하까루나이다. 우리말로는 크나큰 연민이고 한자어로는 대비(大悲)이다.
 
불교음악 중에 대비주가 있다. 대자비주가 아니고 왜 대비주라고 했을까? 그렇다고 큰 슬픔을 말하지 않는다. 연민을 슬픔이라고 번역하면 근심걱정하거나 노심초사하는 것이 된다. 이는 연민의 실패에 해당된다.
 
어떻게 대비의 마음을 내야 할까? 이는 “세존의 자비에는 감정적인 사랑이나 슬픔이 없다.”라는 말을 근거로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S15.11)라고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 내는 것이 진정한 마하까루나(大悲) 아닐까?
 
사람들은 채우는 삶을 살고자 한다. 재산도 채워야 하고 지식도 채워야 한다. 그래서 돈벌이 선수가 되어서 돈벌이에 올인하는 삶을 살게 된다. 또한 지식도 채워야 하기 때문에 이런 책 저런 책을 읽고자 한다.
 
책을 잘 읽지 않는다. 경전이나 논서 이외에 읽지 않는다. 이런 행위는 비난 받을 만하다. 그러나 고전 중의 고전인 경전과 논서에는 이미 지혜가 가득 들어 있다. 이는 세속적인 지식이 아니다.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한 지식인 것이다.
 
경전과 논서를 읽으면 새기고 싶은 내용이 많다. 이를 글로 써서 남긴다. 인터넷에 올리면 공유된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글을 모아서 책을 만든다. 이렇게 글쓰기 하고 책을 만드는 것도 채우는 삶이 된다. 그러나 어떤 이득을 위한 목적은 아니다.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것은 욕망에 따른다. 이는 집착이 없는 바람, 욕구, 의지, 열의인 것이다. 이런 삶을 사는 것에 대하여 채우는 삶, 쌓는 삶, 축적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오늘도 내일도 채우는 삶, 쌓는 삶, 축적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다름아닌 공덕의 축적이다.
 
 
2024-04-1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