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일등(貧者一燈) 정신으로
부처님오신날이 머지 않았다. 다음주 5월 15일은 사월초파일로 한국불교의 ‘부처님오신날’이다. 그 다음주 5월 22일은 사월보름날로 테라와다불교의 ‘붓다데이’이다.
부처님오신날은 대승불교전통에 따른다. 오로지 탄생만을 기리는 것이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붓다데이라 하여 탄생뿐만아니라 성도와 열반, 이렇게 세 가지 사건도 함께 기린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공양을 했다. 부처님에게 올리는 공양이다. 이를 한자어로 ‘불공(佛供)’이라고 한다. 빠알리어로는 붓다뿌자(buddhapūjā)가 된다.
요즘 한국불자들은 기도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 같다. 이는 절에서 이런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수능백일기도, 관음기도, 지장기도 등과 같이 기도가 따라 붙는다.
기도라는 말은 기복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또한 유일신교 종교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절대자에게 자꾸 달라고 하는 듯한 기도를 연상케 한다.
기도라는 말보다는 불공이라는 말이 더 좋다. 부처님에게 무언가 이루어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에게 공양 올리는 것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꽃이나 향, 초, 쌀과 같은 공물이 될 수도 있고 또한 정신적 공양이 될 수도 있다.
등(燈)이라도 하나 달아야 하기에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마음을 내었다. 일년에 한번 있는 불자들의 최대 축제와 같은 날에 가만 있을 수 없었다. 등이라도 하나 달아야 한다. 그래서 다섯 곳에 공양 올렸다.
천장사에 공양 올렸다. 천장사 카톡방에 있는 계좌번호에 등 값을 이체한 것이다. 담마와나선원에도 공양 올렸다. 서울 청파동 담마와나선원에서 5월 19일(일) 붓다의 날 행사가 있는데 보시금을 이체한 것이다. 아산에 있는 스리랑카 사원 마하위하라에도 보시금을 이체했다. 마하위하라에서는 음력 사월보름날인 5월 22일(수)에 붓다의 날 행사를 한다. 각각 십만원씩 공양 올렸다.
사원에만 공양 올린 것은 아니다. 개인에게도 공양 올렸다. 허정스님 계좌로 등공양 올렸다. 마음의 등불로 십만원 이체했다. 그러나 이런 금액은 적은 것이다. 천장사 수월거사는 매달 그에 상당하는 금액을 보시한다.
수월거사는 서산에서 경비 일을 하고 있다. 배우자 길상화보살은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다. 수월거사 부부는 어렵게 살고 있지만 매달 보시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수월거사에 따르면 집과 관련하여 송사가 걸렸을 때 스님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아마 스님을 부처님처럼 모시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수월거사 부부의 공양을 보면 빈자일등 이야기를 떠 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카톡에다가 “수월거사와 비교하면 저는 십육분의 일도 되지 않습니다.”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도 공양 했다. 현재 밀린다팡하 교정작업을 하고 있는데 몇 달 있으면 출간할 것이다. 출간비용 명목으로 오십만원을 이체했다.
보시통장을 만들었기 때문에
오늘 이른 아침 다섯 군데에 공양 올렸다. 총금액은 구십만원에 달한다. 이제까지 살면서 이렇게 큰 금액을 보시해 보기는 처음이다. 이는 보시통장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삼주전 보시통장을 만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수주가 이루어져서 모두 보시금으로 활용하고자 보시통장을 개설한 것이다.
모든 보시는 보시통장에서 나간다. 만원이나 이만원 등 소액 보시 역시 보시통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나중에 통장정리를 하면 이력이 찍힐 것이다.
페이스북에 종종 보시 또는 후원을 요청하는 글을 볼 수 있다. 이제 지나치지 않는다. 보시통장이 있기 때문이다. 능력껏 후원한다. 그러나 만원으로 소액이다.
보시공덕은 보시금액에 비례하지 않는다. 보시는 능력껏 하기 때문에 상대적이어야 한다. 매월 일억원을 버는 사람이 백만원(1%)을 보시하는 것과 매월 백만원을 버는 사람이 십만원(10%)을 보시는 하는 것은 공덕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 후자의 공덕이 훨씬 더 큰 것이다.
이제까지 보시를 하지 않고 살아 왔다. 보시에 대한 개념을 알게 된 것은 오래 되지 않았다. 직장에 다닐 때는 보시개념이 없었다. 직장에 다닐 때는 직장과 집만 왕래했다. 그런 세월을 이십년 살았다.
2005년 더 이상 직장을 다닐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사업을 했다. 현재 하고 있는 인쇄회로기판(PCB) 설계업이다. 일인사업자이다. 사업을 하면서 불교를 본격적으로 접했다.
불교를 접하고서 알게 된 것이 보시이다. 보시하는 삶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보시와 담을 쌓고 살았다.
보시의 중요성에 알게 된 것은 초기경전을 접하고 나서부터이다. 초기경전 도처에는 보시공덕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 마음으로는 보시하는 삶을 살고자 했으나 실행되지 않은 것이다.
결단이 필요했다. 그것은 보시전용통장을 개설하는 것이다. 모든 보시는 보시통장에서 나가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주거래통장은 늘 마이너스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업을 하다 보면 주거래통장이 없지 않을 수 없다. 돈이 수시로 들락날락하는 통장이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인가 마이너스가 되었다. 마이너스통장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주거래통장은 늘 마이너스 상태이다. 한도에 이르면 간당간당하고 위태위태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마음 놓고 보시를 할 수 없다.
직장 다닐 때는 보시는 꿈도 꾸지 못했다. 보시개념도 없었을뿐더러 통장도 관리하지 않았다. 마치 용돈 타듯이 타서 쓰는 입장에서 보시는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다.
사업을 하면서 주거래통장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통장을 관리했다. 이는 의미가 매우 크다. 왜 그런가?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용돈을 타서 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주거래통장을 다른 사람이 관리한다면 어떻게 될까? 내 통장이지만 함부로 쓸 수 없다. 그러나 통장을 직접 관리하면 정말 내것이 된다. 돈을 쓸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이다.
돈은 내 수중에 있어야 내 돈이다. 내 돈이라도 남이 관리하고 있다면 마음대로 쓸 수 없다. 사업을 하면서 통장관리함에 따라 돈 쓰는 맛을 알게 되었다.
풍족한 삶은 아니다. 작은 평수에 경차를 타고 다닌다. 사업을 하지만 수입은 만족할만한 것은 아니다. 반기마다 시행되는 부가세 신고는 사업성적표와 같다. 연봉으로 따진다면 중소기업 신입사원 연봉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오월에 내는 종합소득세는 십만원 밖에 되지 않는다.
근근이 유지하고 있다. 사무실 임대료와 관리비, 그리고 생활비 정도만 벌린다. 그러나 빚은 없다. 국민연금은 모두 저축한다. 이런 때 생각지도 못한 수주를 받았을 때 내 돈이 아닌 것으로 간주했다.
보시통장은 이백팔십팔만원이 입금 되었다. 마음 놓고 쓸 수 있는 통장이다. 인연 있는 사람은 물론 인연 없는 사람들도 대상이다. 그렇다고 많은 금액을 할 수 없다. 인연이 먼 사람들은 소액이 되기 쉽다. 인연이 깊으면 보시금액도 커진다.
오늘 새벽 마음을 내어서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공양을 했다. 이런 것도 불공에 해당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불공은 효과가 있는 것일까?
불공의 효력에 대한 의문
밀린다팡하 교정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집에서도 읽고 사무실에도 읽는다. 마치 학생이 책가방 가지고 다니는 것처럼 배낭에 넣고 다닌다.
오늘 새벽 3시 50분에 일어났다. 더 잘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신이 맑을 때 교정작업을 하면 좋을 것 같았다. 새벽에 읽은 것은 불공에 대한 것이다.
밀린다왕의 질문은 매우 예리하다. 그리스 철학의 바탕이 깔려 있는 질문이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이다. 불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물었다.
“존자 나가쎄나여, 이 이교도들은 이와 같이 ‘만약 부처님이 공양을 받아주면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에 든 것이 아니고 세상과 연결되었고 세상 안에 존재하고 세상에서 세상과 함께 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행한 공양은 무효이고 결과를 낳지 못한다. 만약에 완전한 열반에 들어 세상과 연결되지 않고 모든 존재로부터 벗어나있다면, 그에 대한 공양은 일어나지 않는다. 완전한 열반에 든 자는 아무 것도 받지 않는데,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 행한 공양은 무효이고 결과를 낳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이 문제는 양도논법에 속한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을 얻지 못한 자들의 영역이 아니라, 바로 위대한 사람이 다루어야 할 영역입니다. 이 사건의 그물을 부수고 한쪽에 내려 놓으십시오. 이 질문이 당신에게 제기되었으니, 미래의 불자들을 위하여 다른 교설을 지닌 자들을 논박하기 위해 통찰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Mil.95)
밀린다왕은 공양을 행한 것에 대한 효력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다. 완전한 열반에 든 부처님에게 불공 올리는 것에 대한 의문이다.
불교들은 불단 앞에 공양물을 올려 놓고 서원을 빈다. 이런 행위는 전형적인 기복이다. 어쩌면 유일신교에서 기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일까 한국불교에서는 수능백일기도, 관음기도, 지장기도 등 각정 기도라는 이름의 불공을 올리는지 모른다.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그럼에도 살아 있는 부처님으로 보는 종파도 있다.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지만 지금도 살아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논리가 부처님 사후 밀린다왕시기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부처님이 공양을 받아주면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에 든 것이 아니고 세상과 연결되었고 세상 안에 존재하고 세상에서 세상과 함께 하는 자이다.”라고 의심한 것이다.
부처님은 과연 살아 있을까? 부처님이 살아 있다면 완전한 열반에 든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런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면 어떻게 될까? 밀린다왕은 “그에게 행한 공양은 무효이고 결과를 낳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을 때 공양하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 이에 대하여 왕은 “만약에 완전한 열반에 들어 세상과 연결되지 않고 모든 존재로부터 벗어나있다면, 그에 대한 공양은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완전한 열반에 든 자는 아무 것도 받지 않는데,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 행한 공양은 무효이고 결과를 낳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는 양도논법(兩刀論法)
밀린다왕의 질문은 이래도 저래도 공양의 효과가 없음을 말한다. 출구가 없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양도논법(兩刀論法)’이라고 했다. 사전적 의미는 “2개의 가설 형식의 대전제와 1개의 선언명제의 소전제로 이루어진 추론형식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양도논법을 뜻하는 빠알리어 우바또꼬띠까(ubhatokoṭika)라고 한다. 이는 영어로 ‘딜레마’에 해당된다. 맛지마니까야에서는 “마치 사람의 목에 쇠고챙이가 걸리면, 그것을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듯이, 그대가 이 수행자 고따마에게 두 개의 뿔이 달린 질문을 제기하면, 그는 그것을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할 것입니다.”(M58)라고
양도논법은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는 상태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불교는 큰 위기에 처할 것이다. 그래서 밀린다왕은 미래의 불자들을 위하여 다른 교설을 지닌 자들을 논박하기 위해 설명해 달라고 부탁한다. 과연 나가쎄나 존자는 어떻게 이 위기를 돌파해나갈까?
공양이라 하여 반드시 물질적 공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 공양도 있다. 만약 물질적 공양만을 말한다면 완전한 열반에 든 부처님은 받을 수 없다. 그래서 나가쎄나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왕이여, 세존께서는 완전한 열반에 드셨고 세존께서는 공양을 받지 않습니다. 공양을 받지 않는 여래에게 신들과 인간이 사리의 보배를 위한 토대를 만든 뒤에 여래의 지혜를 대상으로 올바른 실천을 닦을 때 세 가지 성취를 얻습니다.”(Mil.96)
참으로 명쾌한 답변이다. 공양에 대하여 물질적인 것으로 본다면 양도논법이 되어서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공양에 대하여 정신적인 것으로 본다면 해법이 있게 된다. 이에 대하여 세 가지 성취를 말했다. 여기서 세 가지 성취는 천상의 행복, 인간의 행복, 열반의 행복을 말한다.
최상의 공양은 무엇인가?
흔히 시계생천(施戒生天)이라고 한다. 보시하는 삶과 지계하는 삶을 살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이다. 여기에 수행하는 삶을 더하면 열반의 행복이 될 것이다.
절에서는 보시를 강조한다. 어느 스님은 법문 할 때마다 보시를 말한다. 어떤 법문을 해도 마지막에 가서는 보시하라고 말한다. 이런 법문은 아마도 ‘기승전보시’가 될 것이다.
스님들은 보시만 강조해서는 안된다. 지계하는 삶도 강조해야 한다. 더 나아가 수행하는 삶도 강조해야 한다. 그래서 불교인이라면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을 쌓아야 한다.
세 가지 공덕, 즉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 중에서 가장 수승한 것은 수행공덕이다. 단지 보시공덕만 강조하면 양도논법에 빠진다. 그러나 수행공덕을 강조하면 빠져 나올 수 있다. 그래서 나가쎄나 존자는 “지혜를 대상으로 올바른 실천을 닦을 때 세 가지 성취를 얻습니다.”(Mil.96)”라고 말했다.
불공이라 하여 물질적 공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잘 실천하는 것도 공양이다. 이는 나가쎄나 존자가 “지혜를 대상으로 올바른 실천을 닦을 때”라는 말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부처남이 완전한 열반에 들 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난다여, 이러한 것으로 여래가 존경받고 존중받고 경배받고 예경받고
숭배받는 것이 아니다. 아난다여, 수행승이나 수행녀나 남녀 재가신자가 가르침
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한다면, 그것이 최상 의 공양으로 여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경배하고 예경하고 숭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그대들은 ‘우리는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하리라.’라고 배워야 한다.”(D16.108)
부처님은 꽃 등으로 공양하는 것이 공양이 아니라고 했다. 이는 물질적 공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공양은 수행승이나 수행녀나 남녀 재가신자가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최상의 불공은 무엇일까? 경전에서 찾아야 한다. 부처님은 분명하게 정신적 공양을 말했다. 이는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는 수행공덕이 된다.
불의 비유
나가쎄나 존자는 양도논법에 대하여 무려 네 가지 비유를 들었다. 이는 불의 비유, 바람의 비유, 소리의 비유, 대지의 비유를 말한다.
불의 비유는 어떤 것일까? 이는 나가쎄나 존자가 “대왕이여, 아주 커다란 불덩이가 타다가 꺼졌다고 합 시다. 대왕이여, 그 아주 커다란 불덩이는 다시 풀이나 설과 같은 연료를 받아들이겠습니까?”라고 묻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대왕이여, 아주 큰 불덩이가 타오르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세존께서는 일만 세계에서 불광(佛光)으로 비추다가, 대 왕이여, 아주 큰 불덩이가 타다가 꺼지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세존께서는 일만 세계에서 불광으로 타오르다가 잔여가 없는 열반으로 완전히 열반에 드신 것입니다. 대왕이여, 이미 꺼진 불덩이가 풀과 과 같은 연료를 받아들이지 않듯, 세상에 안녕을 주는 님에게는 받아 들이는 것은 버려져서 지멸한 것입니다. 대왕이여, 사람들이 불덩이가 꺼져 연료가 없을 때 자신의 기세, 힘, 정진으로 각자의 역량으로 부싯목을 마찰하여 불을 일으키고 그 불로 불이 필요한 일을 하는 것처럼, 신들과 인간은 이와 마찬가지로 여래께서 완전한 열반에 드셨고 공양 을 받지 않을 때조차, 사리의 보배를 위한 토대를 만든 뒤에 여래의 지혜를 대상으로 올바른 실천을 닦을 때 세 가지 성취 - 해탈하거나 천상에 채어나거나 인간으로 태어난 것 - 를 얻습니다. 대왕이여, 이러한 이유로 완전한 열반에 들어,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 행한 공양도 효력이 있고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Mil.96-97)
부처님은 빛과 같은 존재이다. 비록 열반에 들어 지금 여기에 계시지는 않지만 언제든지 볼 수 있다. 그것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수행공덕으로 보는 것이다. 가르침을 실천하여 깨달았을 때 부처님을 보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바람의 비유
무엇이든지 비유로 설명하면 이해하기 쉽다. 밀린다팡하는 질의응답에 대한 것으로 답할 때는 비유를 든다. 진리를 언어로써 설명할 수는 없지만 비유로는 가능한 것이다. 나가쎄나 존자는 이번에는 “대왕이여, 큰 바람이 불다가 그쳤다면, 대왕이여, 이미 그쳐버린 바람이 다시 생겨남을 받아들이겠습니까?”라며 바람의 비유를 든다.
질문을 잘하는 자가 공부를 잘 하는 자이다. 밀린다왕은 “존자여, 그쳐버린 바람은 다시 새로 생겨나는데 관심 이나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바람의 요소에는 정신작용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묻는다.
바람은 계속 부는 것이 아니다. 불다가 그친다. 다시 바람을 일어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마음이 있어서 의도를 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람은 바람일 뿐이다. 그래서 나가쎄나 존자는 “대왕이여, 이미 바람이 그쳤을 때, ‘바람’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이 어울리는 것입니까?”라며 역질문한다. 그리고서는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한다.
“대왕이여, 그러므로, ‘받아들이지 않는 공양은 무효이고 결과를 낳지 못한다.’라고 하는 이교도의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대왕이여, 큰 바람이 부는 것처럼,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일만세계에 청량하고 달콤하고 평화롭고 미세한 자애의 바람으로 바람을 보내십니다. 대왕이여, 큰 바람이 불고 그치듯, 이와 같이 세존께 서는 청량하고 달콤하고 평화롭고 미세한 자애의 바람으로 바람을 보낸 뒤에 잔여가 없는 열반의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드셨습니다. 대왕이여, 이미 그쳐버린 바람이 다시 생겨남을 받아들이지 않듯,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이익을 원하는 분에게 다시 생겨남을 받아들이는 것은 제거되었고 지멸되었습니다. 대왕이여, 사람들이 더위에 시달리고 열기에 괴로워하듯, 이와 마찬가지로 신들과 인간이 세 종류의 불의 열기에 시달리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다라선이나 부채가 바람을 일으키는 수단이듯, 이와 마찬가지로 여래의 유골(遺骨)과 지혜의 보고(寶庫)는 세 가지 성취를 얻기 위한 수단입니다. 사람들이 더위에 시달리고 열기에 괴로워하면, 다라선이나 부채로 바람을 일으키고, 더위를 식히고 열기를 가라앉히듯, 이와 마찬가지로 신들과 인간은 여래께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받아들이지 않을 때조차도 여래의 유골과 지혜의 보배에 공양하여 착하고 건전한 것을 일으키고 그 착하고 건전한 것으로 세 종류의 불의 열기에 시달리는 것을 식히고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대왕이여, 이러한 까닭에 여래께서 완전한 열반에 들어 공양을 받지 않을 때조차도, 그에게 행해진 공양이 효력이 있고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Mil.97-98)
이 비유는 물질적 공양의 유효성에 대한 것이다. 불상 앞에 공양물을 올려 놓고 소원을 빌 때 허사가 아님을 말한다. 이를 바람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한번 분 바람은 두 번 다시 불지 않는다. 부처님은 바람과 같은 분이다. 이는 자애의 바람으로 설명된다. 그렇다면 중생에 대한 자애의 바람을 맞고자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열반에 든 부처님은 말이 없다. 살아 있는 부처님을 대하듯 공양물을 올리며 소원을 빌어도 아무 말이 없다. 바람이 불기만을 기다려서는 안된다. 이럴 때는 바람을 만들어내야 한다. 어떻게 하는가? 먼저 부처님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탑묘에서 꽃이나 향, 초 등 물질적 공양을 한다. 그 다음은 마음을 착하고 건전하게 내야 한다.
불공이라 하여 공양물을 올리고 소원만 빈다면 진정한 공양은 아니다. 진정한 공양은 탑이나 불상 앞에서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래의 유골과 지혜의 보배에 공양하여 착하고 건전한 것을 일으킨다.”라고 했다. 이렇게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면 세 종류의 불이 꺼진다고 했다. 이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불을 말한다.
세상은 불타고 있다. 중학교 때 불교시간에 들은 말이다. 세월이 흘러 초기경전을 보니 탐욕의 불로 불타고, 성냄의 불로 불타고, 어리석음의 불로 붙타고 있다고 했다. 이런 불은 어떻게 꺼야 할까? 마치 부채질을 해서 불의 열기를 식히듯이 바람을 내는 것이다. 어떤 바람인가? 착하고 건전한 행위, 즉 십선업을 행하는 것이다.
십선업은 바람을 내는 것과 같다. 불상 앞에서 앉아서 공양을 할 때 소원을 비는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마음의 불을 끄는 것이다. 이렇게 했을 때 비록 부처님이 지금 살아 있지는 않지만 함께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러한 까닭에 여래께서 완전한 열반에 들어 공양을 받지 않을 때조차도, 그에게 행해진 공양이 효력이 있고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Mil.98)라고 한 것이다.
북소리의 비유
북소리의 비유는 어떤 것일까? 이는 나가쎄나 존자가 “대왕이여, 다른 교설을 지닌 자들을 논박하기 위한 또 다른 이유를 들어보십시오. 대왕이여, 사람이 큰 북을 쳐서 소리를 냈다하면, 그 큰 북의 소리는 사람에 의해 생겨났지만, 그 소리는 사라 질 것입니다. 대왕이여, 그 소리는 다시 생겨남을 받아들이겠습니까?”라며 역질문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소리는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이는 눈으로 계속 형상을 보고 있는 것과 다르다. 눈으로 형상을 보면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눈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을 보면 소리의 비유를 주로 들고 있다.
소리는 다시 생겨나지 않는다. 소리에는 소리가 생겨나게 하기 위한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소리는 단지 명칭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소리를 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명한 밀린다왕은 “한번 생겨나고 큰 복 소리는 사라졌을 때 그 큰 북 소리는 완전히 끊긴 것입니다. 그러나 큰 북은 소리가 생겨나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수단이 있다면, 자신의 노력으로 큰 북을 쳐서 소리를 낼 것입니다.”(Mil.98)라고 말한다.
북은 소리를 내기 위한 수단이다. 북소리를 내려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북소리가 울리기만 기다린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처님은 큰 북을 울렸다. 그러나 완전한 열반에 들었기 때문에 다시는 들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 북소리를 듣고자 물질적 공양만을 하며 소원을 빈다면 북소리가 들려 올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부처님의 북소리를 울리게 하려면 북을 쳐야 한다. 어떻게 치는가?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최상의 공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가쎄나 존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1)계행, 2)삼매, 3)지혜, 4)해탈, 5)해탈에 대한 앎과 봄으로 닦여진, 유골의 보배와, 교법과, 계율과 교계를 스승으로 지적하신 후에, 스스로 잔여가 없는 열반계로 완전한 열반에 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세존께서 완전히 열반에 드셨다고, 뭇삶들에게 세 가지 성취를 얻는 것이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생존의 고통에 시달리는 뭇삶들은 유골의 보배와 교법과 계율과 교계를 수단으로 세 가지 성취를 얻는 것입니다. 대왕이여, 이러한 까닭에 여래께서 완전한 열반에 들어 공양을 받지 않을 때조차도, 그에게 행해진 공양이 효력이 있고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Mil.98)
중생을 뭇삶이라고 한다. 그런데 뭇삶은 괴롭다는 것이다. 괴로울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절에 가서 법당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할지 모른다.
언젠가 안양에 있는 ‘안양사’에 간 적이 있다. 그때 법당에서 어느 노보살은 “이렇게 법당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요.”라고 말했다.
법당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왜 편할까? 그것은 천상에 앉아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눈으로는 부처님이 보이고, 귀로는 염불소리가 들린다. 코로는 향 사르는 냄새를 맡는다. 육근이 청정해지는 것이다.
부처님은 지금 계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자들은 지금 부처님이 계신 것처럼 법당에서 불공을 드린다. 그런데 불공을 드리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마음이 청정해졌기 때문이다.
불공을 드릴 때 소원을 말한다. 이른바 사대소원일 것이다. 입시, 사업, 건강, 치유를 말한다. 그런데 법당에 앉아 있으면 소원을 빌지 않아도 다 이루어진 것과 다름 없다. 왜 그런가? 마음이 청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청정하면 천상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수행을 해서 기쁨과 행복과 평온을 맛보았다면 해탈한 것이나 다름 없다. 부처님에게 불공드린 효과이다. 그래서 “여래께서 완전한 열반에 들어 공양을 받지 않을 때조차도, 그에게 행해진 공양이 효력이 있고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Mil.98)라고 말한 것이다.
대지의 비유
대지의 비유가 있다. 어떤 것인가? 이는 나가쎄나 존자가 “대왕이여, 어째서 씨앗들은 받아들이지도 않는 대지 위에 성장하고 단단한 뿌리를 내어 정착하고 줄기와 수심과 가지를 받고 꽃과 열매를 맺겠습니까?”(Mil.99)라고 묻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대지는 어머니와도 같다. 모든 생명체는 대지에서 나서 대지로 돌아간다. 마찬가지로 부처님도 대지와 같다. 그래서 나가쎄나 존자는 다음과 같이 대지의 비유를 들어 공양을 설명한다.
“대왕이여, 이렇게 오신 님, 거룩한 님, 올바로 깨달은 님은 대지와 같습니다. 대왕이여, 대지는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듯, 이와 마찬가지로 여래께서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씨앗들은 받아들이지도 않는 대지 위에 성장하고 단단한 뿌리를 내어 정착하고 줄기와 나무심과 가지를 뻗고 꽃과 열매를 맺듯, 이와 마찬가지로 신들과 인간은 여래께서 완전한 열반에 들어 공양을 받지 않을 때조차도, 유골과 지혜의 보배에 의지하여 단단한 착하고 건전한 것의 뿌리를 정착시키고 삼매의 줄기, 가르침의 나무심, 계행의 가지를 뻗고, 해탈의 꽃과 수행자의 삶의 결실이라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대왕이여, 이러한 까닭에 여래께서 완전한 열반에 들어 공양을 받지 않을 때조차도, 그에게 행해진 공양이 효력이 있고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Mil.99-100)
대지의 비유를 보면 화엄경에서 ‘잡화엄’이 연상된다. 이 세상의 모든 꽃들은 대지를 기반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대지에는 갖가지 종류의 꽃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잡꽃으로 이루어진 화장세계라고 말한다.
부처님은 대지와도 같다. 그런데 열반에 든 부처님은 공양을 올려도 받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풍부한 공양을 올려서 기도해 보아도 응답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올린 공양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진정한 공양은 대지 위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몸과 같은 대지에 뿌리를 내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수행이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다. 수행을 해서 도를 이루면 과가 따른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열반에 든 부처님이 도와 주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 도와 과를 이루어내야 한다. 그래서 “유골과 지혜의 보배에 의지하여 단단한 착하고 건전한 것의 뿌리를 정착시키고 삼매의 줄기, 가르침의 나무심, 계행의 가지를 뻗고, 해탈의 꽃과 수행자의 삶의 결실이라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Mil.100)라고 했다.
티 내지 말고 보시하라고 했는데
오늘 이른 아침 네 건의 보시를 했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인연이 있는 천장사, 담마와나선원, 그리고 마하위하라에 십만원씩 보시했다. 보시의 등불을 단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불교적폐청산운동을 함께 했던 전천장사 주지 허정스님에게 등을 하나 달았다. 십만원짜리 등을 단 것이다. 그리고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 밀린다팡하 출간에 동참하기 위해서 오십만원을 투척했다.
금강경에서는 무주상보시를 강조한다. 티 내지 말고 보시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티를 내고 말았다. 보시했다는 상을 낸 것이다. 언젠가는 티도 내지 않고 상도 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위한 보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인색하다.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돈 나가는 것을 마치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까워한다. 그 대신 감각을 즐기는데 있어서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어떤 이는 보시는 바보나 하는 짓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현자는 취득한다고 말한다. 보시의 과보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이라 말할 수 있다. 예로부터 단멸론자들이 이런 입장을 보였다.
인생은 원타임이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다음 생에도 계속된다. 이렇게 본다면 보시는 자신을 위한 것이 된다. 죽어서 저승에 갈 때 노자돈이 되는 것이다.
빈자일등(貧者一燈) 정신으로
보시통장이 있어서 보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돈관리를 직접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수십억에 해당되는 아파트를 가지고 있어도 빚에 시달리면 한푼도 보시할 수 없다. 있을 때 보시해야 한다.
한때 주식에 미친 때가 있었다. 직장 다닐 때인 2000년대 전반을 말한다. 그때 전업 투자자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주식으로 돈을 벌었는데 기념으로 아내에게 차를 한대 사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주식으로 망했다. 나중에 남은 것은 아내에게 사준 차 한대였다고 한다.
형편이 좋을 때 보시해야 한다. 이 다음에 돈 많이 벌어서 보시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되지 않는다. 소액이라도 있을 때 해야 한다. 보시는 능력껏 하는 것이다. 보시는 절대금액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금액이 중요하다. 빈자일등(貧者一燈) 정신으로 보시하는 것이다.
2024-05-10
담마다사 이병욱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로는 외국인 이주민노동자들의 해방구, 2024년 우중의 연등축제 (3) | 2024.05.12 |
---|---|
폐기물 수거장에서 취득한 오단책장 (3) | 2024.05.11 |
신부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 (9) | 2024.05.05 |
망해암 낙조바위 (14) | 2024.05.03 |
오토바이 폭탄음 (18) | 2024.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