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땅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4. 6. 25. 11:02

땅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사방 어디를 둘러 보아도 아파트가 보이지 않는다. 여기는 전남 함평 고향마을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함평에 간다. 일년에 한번 합동제사가 있다. 전국에 사는 사촌들이 모이는 날이기도 하다.
 
함평에서 하루 밤
 
모임이 있는 날은 6월 23일 일요일이다. 하루 전에 갔다. 6월 22일 오후 4시에 열리는 광주전남불교환경연대 후원의 날 행사에 참여 했다. 행사가 끝나고 함평으로 향했다.
 
함평에서 하루 밤 잤다. 사촌 누나 집에서 잔 것이다. 고향마을에서 십리 떨어진 곳이다.
 

 
차를 가지고 갔다. 장시간 운전하는 것이 피곤하기는 하지만 자유롭게 돌아 다닐 수 있어서 좋다. 고향마을 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아직도 때묻지 않은 자연환경이다.
 
월야에 대규모 공단이 생겼다. 이를 ‘빛그린산단’이라고 한다. 이제까지 발전의 무풍지대였던 곳에 이변이 생긴 것이다. 오로지 농사만 지어먹고 사는 고장에 공장이 생긴 것이다.
 
공단이 생긴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고향을 아끼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는 자연환경을 크게 훼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지역사람들에게는 긍정적인 것 같다. 인구가 갈수록 감소하고 있는 현실에서 현대자동차 전기차부문 공장이 들어선다는 것은 긍정적인 것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사촌누나집에 저녁 여덟 시에 도착했다. 사촌누님은 혼자 살고 있다. 부산에서 온 가장 큰 형님이 오셨다. 백부의 장형이다. 백부의 막내 아들인 사촌형님 부부가 오셨다. 모두 다섯 명이 집에서 하루밤 잤다.
 

 
어느 모임이나 단체이든지 헌신하는 사람이 있다. 집안 모임도 다르지 않다. 합동제사와 같은 일년에 한번 열리는 큰 행사가 있을 때 헌신하는 사람이 없지 않을 수 없다. 백부 막내아들 내외가 그렇다.
 
아무도 하지 않을 때 누군가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백부 막내아들 내외가 그런 케이스이다. 하루 전에 도착해서 빈집을 청소하고 제사 준비를 하는 것이다.
 
밖에서 잠을 잘 때가 있다. 여행지에서 잠을 잘 때 잠이 잘 오지 않는다. 환경이 바뀐 것이다. 사촌누나집에서 잠을 잘 때 잠이 오지 않았다. 농촌이라 그런지 끈적끈적 했다. 습도가 높아서 불쾌지수가 매우 높았다.
 
큰일 났다. 다음날 운전해야 한다. 그것도 안양까지 장거리운전이다. 잠을 꼭 잘 자야 한다.
 
집을 떠나기 전에 미리 준비한 것이 있다. 만일을 대비해서 수면제를 가져 온 것이다. 한 알 가져 왔다. 다 먹을 수 없다. 반만 먹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새벽 1시 반에 잠들어서 새벽 5시 반에 깬 것이다. 그야말로 죽은 듯이 잤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이삼십호 되는 마을에 거의 반은 비어 있어
 
사촌누나집은 고향마을에서 십리가량 떨어진 곳이다. 새벽에 일찍 깨서 마을을 한바퀴 둘러 보았다. 사방 어디를 둘러 보아도 아파트가 보이지 않는다.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함평은 지형적 특징이 있다. 이는 함평(咸平)이라는 이름과도 관련이 있다. 다 함(咸) 자에 평평할 평(平)자가 그것이다. 이 말은 ‘모두 다 평평하다’라는 뜻이다. 실제로 그렇다. 사방을 보면 툭 터져 있는 것이다.
 
함평은 전형적인 농촌이다. 이렇다 할 공업단지가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월야면에 ‘빛그린산단’이 들어서서 깨졌다. 외부에 나가 사는 사람이 보기에 안타까운 일이다.
 

 
고향산천이 변함 없이 그대로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산단은 고향마을에서 보이지 않는다. 십리 이상 떨어져 있다.
 
사방 어디를 보아도 아파트를 볼 수 없다. 전원주택 단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시골마을이다. 속된 말로 ‘깡촌’인 것이다.
 

 
사촌누나집은 깡촌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른 아침에 마을을 둘러 보았는데 빈집이 눈에 띄었다. 그것도 하나 둘이 아니다. 이삼십호 되는 마을에 거의 반은 비어 있는 것 같다.
 
시골집이 살아 남은 것은
 
사촌누나집에서 아침을 먹고 고향마을 빈집으로 향했다. 반드시 준비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브로스타’이다. 빈집에는 아무것도 없다. 작년과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작년 제사 때 음식이 맛이 없었다. 제사상을 주문 했는데 모두 냉장 처리된 것이다. 음식을 데워 먹어야 하는데 브로스타와 소금을 준비하지 못했다.
 
찬 음식은 맛이 나지 않는다. 소금이 없어도 맛이 나지 않는다. 이런 경험으로 인하여 브로스타와 소금을 챙기고자 한 것이다.
 
고향마을에 도착했다. 십여호 되는 작은 마을이다. 작고하신 어머니 말에 의하면 탯줄을 묻은 곳이라고 했다. 고향마을에 십년 살면서 삼남내를 낳은 것이다.
 

 
집은 비어 있다. 일년에 한번 제사 지낼 때 활용한다. 백모가 혼자 살다 돌아가신 후 지금까지 이십년 가까이 비어 있다.
 
집은 오래 되었다. 해방 후에 6.25 전에 지었다고 한다. 집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가장 큰 형이 말한 것이다. 백부의 장형이다.
 
장형은 아마도 호랑이 띠일 것이다. 어머니 나이와 같다. 37년생이다. 해방 되었을 때 13세살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일제 시대 때 이야기를 들려 주고 집이 지어진 이야기도 들려 준다.
 

 
큰집이 45년과 50년 사이에 지어졌을 것이다. 47년에 지어졌다면 77년 되었다. 그런데 집은 한국전쟁 때 소실될 뻔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어렸을 적 어른들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다. 인공시절 이야기를 말한다. 인공은 인민공화국을 말한다. 한국전쟁 시절도 해당된다. 그때 당시 낮에는 국군 밤에는 빨치산 세상이었다고 들었다.
 
함평에도 이데올로기 갈등이 심했던 것 같다.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서 국군이 진입 했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것이다.
 
빨치산을 토벌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원칙이 있었던 것 같다. 빨치산 영역에 있는 마을 사람들을 소개(疏開)하는 것이다. 이는 마을을 불태워 버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고향마을은 소개지역이었다. 사람들은 마을에서 모두 떠나야 했다. 마을을 불태워 버리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할아버지는 집을 지키고자 했다. 그래서 지붕에 있는 짚을 모두 거두어 버린 것이다.
 
마을은 불에 탔다. 마을이 불타면 하나의 커다란 불덩이가 형성되어서 하늘로 치솟는 다고 한다. 그런데 할아버지 집은 불타지 않았다. 지붕에 있는 탈 것을 모두 거두어 버리고 그 위에 물을 뿌렸기 때문이다. 다른 집은 다 불 탔어도 할아버지 집만큼은 살아 남은 것이다.
 
나에게도 생가가 있다
 
23일 오전에 고향마을에 일찍 도착했다. 시간이 남아서 고향마을을 둘러 보았다. 고향마을은 온통 소 키우는 장소로 변한 듯 하다. 여기 저기에 축사가 보인다. 마치 공장식 축사를 연상케 한다.
 
축사가 있으면 환경이 좋지 않다. 냄새도 나고 소 울음 소리도 난다. 그래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사방을 둘러 보아도 아파트나 전원주택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축사 있는 것이 오히려 다행인 것으로 여긴다.
 
고향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다. 또한 고향은 탯줄을 묻은 곳이기도 하다. 내가 태어난 집도 그대로 있다. 큰집 바로 아래 작은집이 그것이다.
 

 
큰집은 비어 있다. 작은 집은 사람이 살고 있다. 초등학교 일학년 늦가을 때 고향을 떠났는데 그 자리에 친척이 들어 온 것이다. 서울에서 살다가 귀향한 것이다. 친척은 지금도 그 집에서 살고 있다. 나이가 87세이니 작고한 어머니와 동갑이다.
 
생가는 그대로 있다. 그 자리에 다시 지어진 집이기는 하지만 나의 생가나 다름 없다.
 
이런 망상을 해본다. 작가의 생가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에 대한 상상이다.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블로그에 글을 쓰는 사람도 작가라고 볼 수 있을까?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음에도 망상을 피워봤다.
 
호랑가시나무는 천연기념물
 
고향마을은 변함이 없다. 십년전에도 그 모습이고, 이십년전에도 삼십년전에도 그 모습이다. 아니 유년시절에도 그 모습이었다. 지붕이 초가에서 개량형 기와로 바뀌고 전기가 들어 온 것 외에 산하대지는 바뀐 것이 없다.
 
무엇보다 다행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방을 둘러 보아도 아파트와 전원주택, 공장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농촌이고 그야말로 깡촌인 것이다.
 
큰집 빈집에 가면 늘 보는 것이 있다. 호랑가시나무이다. 마치 성장에 가속도가 붙는 것 같다. 지붕 높이까지 자랐다.
 
합동제사에 참여한 것은 아마 2010년인 것 같다. 이후 해마다 빠짐 없이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처음 제사에 참여 했을 때 하나의 가녀린 호랑가시나무를 발견했다. 키가 고작 무릎 높이 정도 되는 나무였다.
 
호랑가시나무는 천연기념물이다. 옛날에는 천지에 흔한 나무였으나 사람들이 캐가는 바람에 희귀목이 되었다.
 
호랑가시나무가 왜 빈집에 있게 되었을까?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갔다. 약재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열매에서 싹이 나와 자랐다는 설이 유력했다. 뒤켠에 버린 것에서 싹이 나와 저절로 자란 것이라는 말이다.
 

 
호랑가시나무를 발견하자 기록을 남겼다. 2006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으므로 2010년 당시에 호랑가시나무는 좋은 글쓰기 소재가 되었다. 이후 매년 호랑가시나무의 성장과장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호랑가시나무를 보호하고자 했다. 천연기념물이기 때문에 누군가 캐가는 것을 염려 했다. 집이 비어 있기 때문에 염려한 것이다. 그러나 호랑가시나무는 매년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다. 이제는 목대가 장딴지만하게 자랐다. 14년이 흐른 현재 누군가 파갈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자란 것이다.
 
신덕고분의 주인은 누구일까?
 
고향마을에 가면 둘러 보는 곳이 또 하나 있다. 예덕리 고분군을 말한다. 매년 가보는 곳이다.
 
예덕리 고분군은 큰집에서 사오백미터 거리에 있다. 차를 이용해서 가 보았다.
 
함평예덕리 고분군은 유명하다. 길이가 50미터가 넘는 큰 무덤도 있는데 4세기부터 7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조성된 것이다.
 

 
고분군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뉘어 진다. 신덕고분 두 기와 열 기 가량 되는 예덕고분군이다. 후자가 더 오래 되었다.
 
예덕고분군은 모양이 독특하다. 형태가 마치 당근 모양이다. 유튜브를 보니 4-5세기 때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옹관묘 형식의 고분이다. 마한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신덕고분이다.
 

 
신덕고분은 1991년에 발굴되었다. 그런데 이 발굴로 인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발견되는 유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신덕고분의 주인은 누구일까? 신덕고분에 대하여 유튜브를 보았다.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무덤의 주인이 왜의 장군일 것이라는 설이다.
 
전날 이계표 선생을 만났다. 나주에 사는 사학자이다. 광주전남불교환경연대 후원의 날 행사에서 만났다.
 
이계표 선생에게 신덕고분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이계표 선생에 따르면 조심스럽고 곤혹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일본의 전방후원형 무덤양식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본 것보다 시대가 일세기 이상 뒤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문제가 된다.
 
일본 역사에 고분시대가 있었다. 2-6세기 시대의 전방후원형 무덤 양식의 시대를 말한다. 그런데 영산강 유역에서 전방후원형 무덤이 열네 기나 발견된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고향마을에 근처에 있는 신덕고분이다. 축조연대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로 추정된다.
 
신덕고분에서는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아직까지 전방후원형 고분에서 이렇게 많은 유물이 나온 경우는 없다고 한다. 그런데 유물 중에는 금송이 있다. 금송은 한국에서 나지 않는 소나무이다. 일본에서 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일본 무덤에서 볼 수 있는 스에키 토기가 발견되고 긴 칼도 발견되었다. 백제 것으로 추정되는 왕관 모양도 발견되고 구슬 등도 발견되었다. 이 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
 
오늘날 나라와 민족개념은 명확하다. 국경이 있어서 나라가 되고 같은 언어를 사용해서 민족이 된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개념은 근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옛날에는 어땠을까?
 
땅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땅에서 살다가 간 사람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땅은 감정이 없다. 누가 살다가 갔는지 무관심한 것 같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니 알 수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무덤이다.
 
마을사람들은 대형고분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물어 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다만 사촌형님들을 통해서 일부를 알 수 있다.
 
사촌형님들은 무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특히 신덕고분에 대해서는 ‘장고봉’이라고 했다. 장구모양이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전방후원(前方後圓)’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일본 고분시대 무덤양식을 말한다.
 
전방후원형은 전방에 네모만 모양을 말하고 후방은 원형을 말한다. 그렇다면 왜 네모난 모양이 있을까? 이에 대하여 제단이라고 말한다.
 
무덤 앞에는 제단이 있다. 공양물을 올려 놓는 제단을 말한다. 그런데 전방후원형에서 전방은 제단을 뜻한다고 한다. 네모만 형태이기 때문에 제단으로 보는 것이다.
 
오늘날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형에서 전방은 제단의 모습이 아니다. 마치 동산처럼 솟아 있다. 멀리서 보면 장고처럼 보인다. 그래서 장고분이라고 한다. 사촌형님들은 장고봉이라고 했다.
 
한국 사학계의 최고의 미스터리는 신덕고분이다. 일본 큐슈지방의 고분에서 나오는 유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영산강 유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말도 한다. 그러나 이계표 선생에 따르면 6세기 이전에는 국가나 민족개념이 없었다고 한다. 물론 그때 당시에는 일본이라는 말도 없었고 한국이라는 말도 없었다.
 
영산강 유역의 마한과 일본의 큐슈지방은 교류가 있었다. 한반도의 선진 문물이 일본에 전파되는 교류가 주된 것이다.
 
문화는 물 흐르듯이 흐른다. 이는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과 같다. 한반도와 일본열도와의 관계도 그렇다. 여기에 오늘날과 같은 나라 개념도 없었고 당연히 국경도 없었을 것이다. 서로 교류하며 산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산강 유역과 일본 큐슈 지역의 교류도 활발했을 것이다. 이는 지리적 조건도 따른다. 영산강 유역이 한강유역이나 대동강유역, 압록강유역과 교역하는 것보다 해로를 이용해서 일본 큐슈 지역과 교류하는 것이 더 지역적으로 유리했을지 모른다.
 
이계표 선생에 따르면 고대역사에 대하여 오늘날과 같은 관점으로 보면 안된다고 했다. 국경이 분명하고 민족이 분명히 갈리는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고대 6세기 이전의 역사와 근현대의 역사는 다른 것이라는 말이다.
 
신덕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일본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그때 당시 일본이라는 나라는 없었다. 물론 한국이라는 나라도 없었다. 사람들이 해로를 이용하여 서로 왕래하며 살아 간 것이다. 서로 문화를 교류하며 살아 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산강 유역에 전방후원형 고분이 있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기록을 남겨 놓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무덤에서 유물이 나왔지만 기록이 없어서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땅은 알고 있다.
 
성주상을 차리는 이유는
 
TV에서 영화 ‘미드웨이(Midway, 2019)’를 보았다. 영화가 끝날 때 “바다는 알고 있다.”라는 자막이 떴다. 해전은 오래 전에 있었고 바다에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때 그 일을 바다는 알고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땅도 알고 있을 것이다.
 
고향 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살다가 죽었다. 그러나 3-4대 이전 사람들은 알 수 없다. 기록이 없으니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6세기 이전 고분의 주인공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러나 땅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제사 지낼 때 성주상이 있다. 칠팔년 전까지만 해도 성주상을 차렸다. 그러나 제사상을 주문하게 되면서부터 성주상이 사라졌다. 참으로 아쉽게 생각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 해야 하나 나이가 듦에 따라 힘에 부처 하지 못한다. 조카들이 대신 해야 하나 기대하기 힘들다.
 
성주상은 땅의 주인에게 지내는 것이다. 인간은 왔다가 가는 무상한 존재에 지나지 않지만 우주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땅은 계속 있다. 따라서 땅의 주인, 땅의 신은 계속 땅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땅은 모든 것을 낳는 어머니와도 같다. 모두 땅에서 나와서 땅으로 돌아간다. 사람만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축생도 땅에서 난다. 산천에 있는 초목도 땅에서 난다. 땅의 주인, 땅의 신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유월의 고향은 초록의 바다이다.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또한 유월은 풍요롭다. 이런 땅에서 고대부터 사람들이 살아 왔다.
 
백년전에도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았다. 천년전에도 이곳에서 사람들이 살았다. 저 고분의 주인들도 이 땅에서 살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땅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땅을 증인으로 하여
 
바다는 모든 것을 알고 있듯이 땅 역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이는 부처님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자타카를 보면 부처님 성도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는 땅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악마는 보살의 성도를 방해했다. 악마는 보살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했다. 이에 보살은 “악마여, 그 대는 열가지 일반적 초월의 길도, 열 가지 우월적 초월의 길도, 열 가지 승의적 초원의 길도 닦지 못하고, 다섯 가지 위대한 포기도 닦지 못했고, 앎을 위한 삶도 살지 않았고, 세상의 이익을 위한 삶을 살지 않았고, 깨달음을 위한 삶도 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나는 닦았다. 그러므로 이 가부좌는 그 대의 것이 아니라, 참으로 나의 것이 다.”(Jat.I.73)라고 말했다. 십바라밀을 닦지 않는 자는 금강좌에 앉을 자격이 없음을 말한다.
 
보살은 사아승지하고도 십만겁동안 보살행을 했다. 이를 누가 알아줄까? 보살은 증인이 필요 했다. 보살은 성도의 순간에 “그대가 보시한 것에 대한 증인들은 의식이 있는 존재들이지만, 나의 이 경우에 는 의식이 있는 어떠한 증인도 없다. 내가 다른 생에서 보시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벳싼따라’로서의 생에서 칠백 번 큰 보시를 행한 것에 대한 증인은 의식이 없는 두터운 대지 이다.”(Jat.I.74)라고 말했다.
 
자타카는 547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547번째 ‘벳싼따라자타카’이다. 마치 서사시를 보는 듯하다. 길이가 길어서 자타카 7권 중에서 일곱 번째 책으로 별도로 구성되어 있다.
 
보살은 땅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그래서 오른손 손가락을 땅을 가리켰다. 땅을 증인으로 한 것이다. 사아승지십만겁동안 보살행을 한 것에 대하여 땅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보살은 부처가 되기 전에 수많은 생을 살았다. 이를 자타카에서는 547개의 이야기로 소개 하고 있다. 수많은 생을 살았다는 것은 수많은 죽음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죽기도 한다. 동물로 태어나서 죽기도 했을 것이다. 천신으로도 태어났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땅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땅에서 태어나서 땅에서 죽은 것이다. 그래서 오른손 손가락을 아래로 했다. 땅이 증인임을 말한다.
 
땅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어머니이다.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차별 없이 대하듯이 땅은 생명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하여 차별이 없다. 이에 대하여 보살은 “증인은 의식이 없는 두터운 대지 이다.”(Jat.I.74)라고 말했다.
 
땅은 의식이 없다. 땅은 생명의 원류이지만 땅에서 태어난 것에 대하여 좋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땅은 알고 있다. 이 땅에서 벌어진 일이나 사건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보살은 대지를 향해 손을 뻗쳤다. 그러자 “그때 내가 그대의 증인이다.”라며 백의 외침, 천의 외침, 십만 의 외침이 들려왔다. 대지가 증언해 준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군을 제압하는 것처럼 소리 쳤다.”(Jat.547)라고 표현되어 있다.
 
악마는 보살에게 패했다. 보살이 땅을 가르켰을 때 땅이 증인이 되어 준 것이다. 보살의 금강좌는 보살의 차지가 된 것이다.
 
사촌들은 이야기 꽃을 피우고
 
제사는 끝났다. 제사가 끝나고 모두 모여 식사를 했다. 미리 준비 해간 부로스타의 힘이 컸다. 역시 음식은 덥혀 먹어야 한다. 음식에는 소금이 있어야 한다. 작년에 못했던 것을 올해는 하게 되었다.
 
먹었으면 정리해야 한다. 그런데 먹는 사람 따로 있고 정리하는 사람 따로 있다는 것이다. 여자는 정리하고 남자들은 먹기만 한다. 막내에 해당되기 때문에 두고 볼 수 없었다. 여자가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거들었다.
 
정리가 끝나고 갈 시간이 되었다. 이때 마루에서는 이야기 꽃이 피었다. 주로 어렸을 때 이야기이다. 공통된 화제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살아온 배경이 모두 다 다르기 때문에 시골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 했다.
 

 
오후 2시 반이 되자 출발해야 했다. 작은 경차에 사람을 네 명 실었다. 운전자를 포함해서 모두 다섯 명 탄 것이다.
 
문장까지 가야 한다. 시골 빈집에서 십리 가량 된다. 사촌들은 차 안에서도 이야기 꽃을 피웠다. 지나가면서 ‘붉은보’ 이야기도 했다. 어렸을 때 저 곳을 지날 때 무척 무서웠다고 한다.
 
부산에 사는 장형은 일제시대 때 기억을 가지고 있다. 나이가 87세이니 가능한 것이다. 문장에 가기 전에 일본인 학교가 있었다고 회상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땅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인정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문장은 교통의 요지이다. 영광으로 가는 국도 변에 있다. 그런데 면단위에도 미치지 못하는 문장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변함 없던 곳인데 아파트라니! 아마 월야면에 건설된 현대자동차 전기차공장인 빛그린산단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부산에 사는 백부 두 분 형님을 문장 공용버스터니널에 내려 주었다. 중부 형님 부부는 광주송정역까지 데려다 주었다.
 
중부 형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보다 육년 나이가 많다. 내 글을 종종 본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자 부끄럽고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중부 형님은 나에게 있어서 무척 어려운 사람이다. 형님은 많이 배운 사람이다. 그리고 아는 것도 많다. 광주일고 출신 박경준 선생과 이중표 선생과 동기이다.
 
중부 형님과 글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었다. 형님은 글 쓴 것에 대하여 박경준 선생에게 들었다고 한다. 박경준 선생은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로 정년퇴임 했다. 박경준 선생이 형님에게 말을 잘 한 것 같다.
 
아래 사람은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어리게 보인다. 아래 사람은 아무리 유명해도 어리게 보인다. 유명한 사람이 동네에게 가면 어르신들 입장에서 유년시절 기억밖에 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형님은 박경준 선생으로부터 나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들은 것 같다. 항상 어리게만 보아 왔을 것이다. 이번에 차에서 이야기하면서 인정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땅은 알고 있다
 
일박이일 함평일정을 마쳤다. 고향의 하늘과 땅은 변함 없다. 유년시절에 보았던 산하대지가 그대로 있다. 사방 어디를 돌아 보아도 아파트나 전원주택, 공장이 보이지 않는다. 대규모 축산농가가 있기는 하지만 산하대지는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다행으로 생각한다.
 
시골 빈집에 호랑가시나무도 그대로 있었다. 이제는 누가 파갈 까 염려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크게 자랐다. 낫을 들고서 시누대와 가시뽕나무를 제거했다. 잘 자라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집에서 사오백미터 거리에 있는 고분은 여전히 미스터리이다. ‘고분의 주인은 누구일까?’라고 생각해 본다. 그러나 근현대의 국가나 민족개념을 도입하면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그때 당시 시대상황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땅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사람만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축생들도 살고 있고 초목들도 살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땅은 말이 없다.
 

 
이 땅에서 수많은 존재, 수많은 생명들이 태어나서 살다가 사라졌다. 먼 아득한 옛날에도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땅은 의식이 없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부처님이 오른손가락을 아래로 하여 땅을 증인으로 했듯이.
 
 
2024-06-2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