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왜 사느냐고 물었을 때 “사는데 이유가 있나요?”

담마다사 이병욱 2024. 6. 19. 11:39

왜 사느냐고 물었을 때사는데 이유가 있나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다. 하루하루 살다 보니 이렇게 나이 먹어 버렸다.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는 실례가 되는 말이다. 이렇게 살다가 어느 때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왜 살아야 하는가? 누구나 한번쯤 묻는 질문이다. 나이 어렸을 때, 청소년기 때 이런 생각을 한 적 있다. 나이 든 노인을 보았을 때 왜 사는지 의문한 것이다. 나이가 들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세월만 보내고 있는 노인을 보았을 때 삶의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어렸을 때, 청소년기 때 삶의 마지노선을 사십으로 보았다. 사십이 넘어가면 인생이 의미가 없어 보였다. 나이가 들면 사는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인 것이다. 더구나 늙어졌을 때 더욱더 의미가 없어 보였다.
 
세월이 엄청나게 흘렀다. 청소년은 이제 육십이 넘었다. 내년이면 지공거사가 된다. 나이가 사십이 넘었으므로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된다. 더구나 노년에 이르렀다. 청소년기 때의 자만으로 본다면 사는 이유가 없는 삶이라 볼 수 있다.
 
2012년 일본성지순례 때 들은 이야기이다. 어느 중년 거사는 법우들과 함께 어느 스님을 찾아 갔다. 이름 있는 덕 높으신 스님이다. 스님에게 왜 살아야 하는지 배우기 위해서 찾아간 것이다.
 
스님은 거사 일행을 만나 주지 않았다. 거사 일행은 스님이 나올 시간에 맞추어 길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스님에게 “왜 살아야 하는지 한 말씀만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쳤다.
 
사람들은 법에 대한 갈증이 있다. 스님에게 찾아 가면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 그러나 선사들은 대체로 냉담한 것 같다. 만나 주려 하지도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B스님의 글을 읽었다. 스님은 자신의 은사스님 얘기를 했다. 은사스님은 동진출가한 스님으로 삼보사찰 중의 하나에서 방장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은사스님은 임종하기 전에 마지막 법문에서 “나는 모른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더구나 “저 들에 핀 꽃에게 물어봐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은사 스님은 왜 저 꽃들에게 물어 보라고 했을까? 어떤 심오한 내용이 있는 것일 것? 화두에 해당되는 것일까? 잔뜩 기대했던 B스님은 아쉬워했던 것 같다. 이에 B스님은 “나 라면 죽기 전에 아니라, 부처님께서 그토록 희열과 새로운 눈을 얻어서 기뻐 하면서 ‘사성제가 성스럽고 열반으로 인도 한다.’라고 하신 ‘사성제(四聖諸)를 깨쳐라!’라고 할 것 입니다.”라고 페이스북에 써 놓았다.
 
노스님은 왜 저 꽃들에게 물어보라고 했을까? 저 꽃들은 어떤 대답을 해줄 수 있을까? 범부들은 그 경계를 알 수 없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사는데 굳이 이유가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태어났기 때문으로 본다. 태어났기 때문에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사는가? 태어났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태어났는가? 대부분 부모가 있어서 태어났다고 말할 것이다. 더 나아가 왜 이 모양 이 꼴로 태어난 것에 대하여 부모 탓으로 돌릴 수 있다.
 
사람이 사는 데는 굳이 이유가 필요 없다고 말한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법륜스님도 “사람이 하루하루를 사는 데에는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사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여기까지만 전하면 구업(口業)이 된다.
 
법륜스님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불교인들뿐만 아니라 비불교인들도 즉문즉설은 회자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사람이 즐겁게, 때로는 고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사는 걸까요?”라고 물었을 때 “사람이 하루하루를 사는 데에는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사는 거예요.”라고 답한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스님을 비판하면 삼보를 비방하는 것이 된다. 한글삼귀의문에서 승보에 대하여 “거룩한 스님에게 귀의합니다.”라는 문구 영향이 큰 것으로 본다. 한국스님들은 부처님과 동급인 것이다. 그래서 스님에 대하여 비판하는 글을 쓰면 삼보를 비방하는 것이 된다.
 
법륜스님은 왜 사는지 묻는 질문에 사는데 이유가 없다고 했다. 그냥 사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서 “풀이 자라는 데 이유가 있나요? 토끼가 자라는 데 이유 가 있습니까? 없잖아요.”라고 말했다.
 

 
임종을 앞둔 노스님이 마지막 법문에서 “저 꽃들에게 물어보라.”라고 말했다. 법륜스님은 “왜 살아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사는데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서 “풀이 자라는 데 이유가 있나요? 토끼가 자라는 데 이유 가 있습니까?”라며 되물었다. 마치 “저 꽃들에게 물어 보라.”라는 말에 답이 되는 것 같다.
 
법륜스님의 말을 한면만 전하면 구업이 된다. 빠짐 없이 전해야 구업이 되지 않는다.
 
법륜스님은 “왜 사는 걸까요?”라는 질문에 그냥 사는 것이라고 답했다. 사는 이유에 대하여 물어 보았을 때 사는 이유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질문에 잘못된 답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잘된 질문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법륜스님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묻는 것이 바른 질문이라고 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묻지 않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방법에 대하여 묻는 것이 바른 질문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하지 않았다. 잘못된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하지 않은 것이다. 어떤 것인가? 부처님의 제자 팍구나가 “세존이시여, 누가 태어납니까?”(S12.12)라고 물었을 때 올바른 질문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올바른 질문이 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태어남이 있습니까?”(S12.12)라고 묻는 것이 올바른 질문이라고 했다.
 
올바른 질문에 올바른 답을 할 수 있다. 질문이 올바르지 않으면 올바른 답을 할 수 없다. 부처님은 질문 같지 않은 질문, 질문으로서 성립되지 않는 질문을 받았을 때 무기(無記), 즉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몰라서 묻는 질문에는 잘못을 지적해 주고 자비의 마음으로 가르쳐 주었다.
 
부처님 가르침의 연기법이다. 연기법은 조건발생법이다.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이루어진 법이다. 이런 연기법은 부처가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이미 원리로서 확정 되어 있는 법이다. 누구든지 이 조건발생법을 발견하면 부처가 된다.
 
부처님 가르침은 논리적이다. 이는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연기법에 따른다. 원인 없이 조건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 저 들에 피어 있는 들꽃도 원인과 조건에 따른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원인과 조건에 따른 것이다. 이 세상에 이유 없이 생겨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법륜스님은 질문자의 질문이 잘못 되었다고 말했다. ‘왜 사느냐’고 묻는 것은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잘못된 질문에는 답을 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법륜스님은  “사람이 하루하루를 사는 데에는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사는 거예요. 풀이 자라는 데 이유가 있나요? 토끼가 자라는 데 이유 가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처럼 사람이 사는 것도 다 그냥 사는 거예요.”라며 답했다. 우문에 우답한 것이다.
 
법륜스님은 우문에 우답했다. 이는 질문자에 대한 자비심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문에 우답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사는 것이 괴로운 자에게 “저 꽃들에게 물어 보라.”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다. 어쩌면 깊은 뜻이 있는지 모른다. 우문에 우답하여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인지 모른다. 법륜스님은 “ ‘왜 사느냐’는 올바른 질문이 아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가 올바른 질문입니다.”라고 알려 주었다.
 
법륜스님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알려 주었다. 그래서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하게 사는 길이냐? 이건 얼마든지 길이 있어요. 거룩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거룩하게 살 수 있지, 거룩하게 살겠다는 생각을 움켜쥐고 있으면 나날이 인생이 괴로워지고 비참해집니다.”라고 말했다.
 
질문을 잘 해야 답을 잘 할 수 있다. 질문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현재 위치를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누가 태어납니까?”(S12.12)라는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이는 어떤 변치 않는 자아나 영혼을 상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없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태어남이 있습니까?”(S12.12)라고 질문해야 바른 질문이라고 했다. 이런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있다. 연기법적인 질문이 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난다.”(S12.12)라고 하여 연기법적으로 답을 한 것이다.
 
왜 살아야 하는가? 누구나 이런 의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질문에는 “사는 데 이유가 있어?”라는 말을 듣기 쉽다. 풀이 자라는 데 이유가 없는 것과 같고 개나 고양이, 돼지가 자라는데 이유가 없는 것과 같다. 태어났으니 그냥 사는 것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축생과 다르다. 인간이 축생과 다른 것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본능만 있는 축생은 왜 사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태어났으니 사는 것이다. 사는 것에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사유 능력이 있는 인간은 왜 사는지 고민한다. 그런데 이런 의문은 잘못된 것이다. “왜” 아니라 “어떻게”라고 물어야 한다. “왜 사는가?”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물어야 함을 말한다.
 
하루하루 삶을 살고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방향도 목적도 없이 살아간다. 태어났으니 사는 것이다. 이럴 때 “왜 사는가?”라며 의문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의문이다. 답이 없는 질문과 같은 것이다. 굳이 답을 찾아 낸다면 부모로부터 태어나서 산다고 말할 것이다.
 
사람마다 태어난 환경이 다르다. 어떤 이는 재능이 있고 어떤 이는 재능이 없다. 어떤 이는 용모가 준수하고 어떤 이는 용모가 추하다. 어떤 이는 가문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고 어떤 이는 미천한 집에서 태어난다. 이는 불공평하고 불평등한 것이다. 그럼에도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부모탓, 조상탓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태어나 보니 이런 나라, 이런 집안이다. 그리고 이런 용모에 이런 성향을 갖게 되었다. 이럴 때 “왜?”라고 물으면 어떻게 될까? 아마 부모탓 조상탓 하게 될 것이다. 환경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태어난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업의 가르침으로 설명했다. 내가 태어난 것에 대하여 “바라문 청년이여, 뭇 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라고 말한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부모로부터 나온 것은 분명하다. 이는 유전적 조건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업으로서의 존재를 말한다. 자신이 과거에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에 의해서 태어난 것임을 말한다.
 
업으로서의 존재는 불평등한 것이다. 이는 각자 업이 다르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 모른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업으로서 존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이는 사성제를 실천함으로써 얻어진다.
 
내가 태어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저 들꽃에게 물어 볼 수 없다.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불교음악 중에 ‘Reason Behind Your Birth가 있다. 이를 ‘당신이 태어난 이유’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원담스님이 번역한 가사는 다음과 같다.
 
 
 
Reason Behind Your Birth
당신이 태어난 이유
 
There is a reason behind your birth
It`s not by chance you`re here on earth
Who you are is how you have been
The law of karma tirelessly spins
 
당신이 태어난 이유가 있다.
당신이 여기 이 땅위에 있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신이 이제까지 어떻게 살아왔냐가 현재의 당신을 있게 만들었다.
까르마의 법칙은 이렇게 끊임없이 돌고 돌게 만든다.
 
 
Dharma is perfect and just
With a cause the effect  is cast
Though in life no one escapes pain
This sad human state, need not always remain
 
인과법은 완전하고 공평하다.
원인이 결과를 낳기에
누구도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지만,
이 슬픈 인간존재가 언제까지나 지속되라는 법은 없다.
 
 
Break free from this cycle that binds
Leave your earthly selfish concerns behind
Cultivate wholesomeness in your thought, speech, and deed
And surely you`ll live in peace
 
당신을 속박하고 있는 이 윤회의 바퀴를 부숴라.
세속에 붙들린 이기적인 관심사에서 벗어나라.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선한 자질을 계발하라
그러면 평화스럽게 사는 것이 확실해진다.
 
 
Look inside your heart, and you will find
A nature that  is pure and kind
Let your heart  be noble and true
Let your mind be calm and stable, too
 
내면을 주시하라 그러면
본성이 순수하고 친절하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당신의 가슴을 고귀하고 정직하게 하라.
마음을 평온하고 안정되게 하라.
 
 
Break free from this cycle that binds
Leave your earthly selfish concerns behind
Cultivate wholesomeness in your thought, speech, and deed
And surely you`ll live in peace
 
당신을 속박하고 있는 이 윤회의 사이클에서 벗어나라.
당신의 세속에 붙잡힌 이기적인 관심사에서 벗어나라.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선한 자질을 계발하라
그러면 평화롭게 사는 것은 확실하다.
 
 
To see the wholesoness increase
day by day is the evolution of consciousness.
It is a journey which unfolds ever fresh landscape endlessly.
How fortunate human existence is
not to remain unchanged as it was!
 
나날이 선법이 증장되는
것을 일러 의식의 진화라 한다.
의식의 진화란 끝없이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여행이다.
인간이 과거에 얽매여 구태의연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게 얼마나 다행한가! (원담스님역)
 
(유튜브 https://youtu.be/m3pATKNuk6I?si=L2uXzuwD7MbBABxi)
 
 
2024-06-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