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방향도 목적도 없는 삶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4. 6. 13. 09:17

방향도 목적도 없는 삶은
 
 
아침에는 커피를 마셔야 한다. 차가 좋다고는 하지만 아침에 피를 돌게 하는 커피만은 못한 것 같다. 원두를 절구질해서 만든 백권당표 절구커피를 마셨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주문 받은 것을 진행해야 한다. 동시에 두 건이 걸렸다.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하는 날보다 노는 날이 더 많은 상황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아침 여섯 시가 되면 무조건 나가야 한다. 남보다 하루를 두세 시간 일찍 시작하는 것이다.
 

 
아침 일찍 가서 무엇을 해야 할까? 일인사업자에게 늘 해야 하는 루틴이 있다. 일이 있으면 일을 하고 일이 없으면 글을 쓰는 것이다.
 
하얀 여백을 대하고 있으면 마음은 안정된다. 일을 잡고 있는 것과 같다. 글쓰기도 일이다. 그렇다고 글만 써서는 안될 것이다.
 

 
이제까지 글만 써 왔다. 어느 해부터인가 태도를 바꾸었다. 경전도 읽고, 경이나 게송을 외우고, 책도 만드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빠알리공부까지 추가 했다.
 
올해 새해가 시작될 때 다짐한 것이 있다. 이른바 오대사업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이는 글쓰기, 경전읽기, 책만들기, 좌선하기, 그리고 빠알리어공부하기를 말한다.
 
올해도 반이 다 지나간다. 나는 목표한 바를 잘 실천하고 있는가? 썩 만족스럽지않다.
 
지난 육개월동안 다짐했던 것은 잘 실천되지 않고 있다. 글을 쓰고, 경전을 읽고, 좌선하는 것은 일상이 되고자 했다.
 
좌선은 잘 실천되지 않고 있다. 일감이 오면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그러나 글쓰기와 경전읽기는 일상이다. 밥 먹듯이 하는 것이다.
 
책만들기는 틈나는 대로 만든다. 빠알리어공부하기는 일주일에 한번 하기로 했다. 잘 되지 않는 것은 빠알리공부하기이다. 경전읽기 과정을 잘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간이다. 매주 화요일 저녁에 한시간 반 시간 내기 힘들다. 도중에 그만 두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활력소가 된다. 매일 글을 쓰고 경전읽기를 하는 것은 오대사업 중에서 가장 충실히 잘 지켜 지는 것이다. 책만들기와 좌선은 시간 날 때마다 한다.
 
책만들기에는 편집과정이 시간 걸린다. 하나의 책이 나오기 위해서는 최소한 열 번 이상 과정을 거치게 된다.

좌선은 틈만 나면 앉는다. 한시간은 너무 길다. 일이 많을 때는 삼십분이 적당하다. 둘다 일주일에 두 세 번 하면 잘 하는 것이다.

화분에 물주기도 해야 할 일이다. 두 주에 한번 준다. 물동이에 물을 붓고 난 화분을 담구어 놓는다. 하루밤 보낸다. 물동이 물은 재활용된다. 백권당 이십여개 화분에 물을 준다.

 
해야 할 일은 또 있다. 생계를 위한 것이다. 일감이 있으면 우선순위가 된다.
 
고객은 늘 급하다. 오늘 던져 놓고 내일 달라는 식이다. 메일을 열어 보았을 때 발견되면 만사 제쳐두고 먼저 처리해야 한다.
 
월말정리도 해야 한다. 매월 말일이 다가오면 마감내역서를 작성해야 한다. 세금계산서를 작성하기 위한 예비단계이다. 그 달 주문 받은 것에 대하여 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이다. 이런 것도 요청하는 기일 내에 해 주어야 한다.
 
해야 할 일은 많다. 세금관련 일도 해야 한다.
 
부가세는 일년에 두 번 납부해야 한다. 매년 7월과 다음해 1월이다. 반기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다. 국세청 사이트에 들어가서 직접 작성한다.
 
일년에 한번 종합소득세를 내야 한다. 매년 오월은 종합소득세 신고하는 날이다. 과정이 너무 복잡해서 회계사무소에 맡긴다. 일년에 딱 한번 이용한다. 절세 효과가 있다.
 
크게 두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 생계와 관련된 것과 수행과 관련된 것이다.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마치 새가 양날개로 날날 듯 재가의 삶을 자에게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가 될 것이다. 무위도식자가 되기 쉽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공원은 노인들의 천국이다. 어떤 노인은 벤치에 앉아서 졸고 있다. 한없이 한가롭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감미로운 것이 있다. 그것은 잠들기 직전의 상황에 대한 것이다. 의식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무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하는 순간 최상의 행복을 맛본다. 어쩌면 이것이 열반인지 모른다. 아마 열반과 비슷한 유사열반일 것이다.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법구경에 실려 있는 말이다. 열반은 최상의 행복도 되고 궁극적 행복도 된다. 왜 그런가 법구경에서는 ‘빠라마수카’라고 했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에는 열반과 관련된 여러 가르침이 있다. 마치 모든 강들이 바다로 향하듯이 불교의 수행은 열반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열반에 이르려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어떤 일인가? 이는 부처님이 최후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말은 “압빠마네나 삼빠데타(appamādena sampādethā)”(D16)이다. 이 말은 한자어로 ‘불방일정진(不放逸精進)’이다. 주석에 따르면 “새김을 잃어 버리지 말고 모든 해야 할 일을 성취하라.”(Smv.593)라는 뜻이다.
 
목표를 이루려면 불방일정진해야 한다. 여기서 불방일은 압빠마다를 번역한 말이다. 이 말은 늘 새김을 유지하라는 말과 같다. 늘 사띠를 유지하는 것이다.
 
매사에 새김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무심코 하는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새김을 유지하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보고 듣는 등 여섯 감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새겨야 한다.
 
압빠마네나 삼빠데타, 불방일정진이다. 불방일정진하면 목표로 하는 일을 이룰 수 있다. 이 한마디에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인이 목표로 하는 일은 열반이다. 열반에 대하여 제석천쌍윳따(S11)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해야 할 일이 없고 쇠퇴하지 않는 곳이
어느 곳 어디인가에 있다면,
그것은 실로 열반의 길이니 쑤비라여 그곳으로 가라.
나도 또한 그곳으로 데려 가다오.”(S11.1)
 

 
제석천은 삼십삼천에서 신들의 제왕이다. 어느 천신이 제석천에게 물었다. 천신은 “제석천이여, 신들 가운데 높으신 님이여, 해야 할 일이 없고 안락한, 제석천이여, 절망이 없고 슬픔도 없는 그 궁극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S11.1)라고 물었다. 이에 제석천이 게송으로 답한 것이다.
 
게송을 보면 열반에 대하여 묘사되어 있다. 열반이 있다면 그곳은 절망도 슬픔도 없는 곳이라고 했다. 이는 연기가 회전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십이연기에는 순관과 역관이 있다. 십이연기 순간은 항상 절망으로 끝난다. 이는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1)라는 정형구로 알 수 있다.
 
삶은 결국 죽음으로 귀결된다. 죽음은 되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절망이다. 사람들은 절망의 길로 가고 있다. 삶의 열차 종착지는 ‘절망역’이 된다.
 
슬픔과 절망을 극복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극복방법을 제시했다. 이는 십이연기의 역관으로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S11.1)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에는 특징이 있다. 늘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만약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며 고성제만 말했다면 염세주의자로 몰렸을 것이다. 오늘날까지 법이 전해져 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괴로움의 원인을 설명했고, 더 나아가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 방법에 이르는 길도 제시했다.
 
열반은 어떤 것일까? 아직까지 한번도 경험해 보아서 알 수 없다. 다만 낮잠 잘 때 잠 들기 직전의 그런 감미로움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이런 열반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해야 할 일이 없고 쇠퇴하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열반은 해야 할 일이 없는 곳이다. 여기서 해야 할 없는 것은 빠알리어 아깜마(akamma)를 번역한 말이다. 이를 한자어로 말하면 무위(無爲)가 된다.
 
무위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무위도식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아쌍카타(asakhata)와 같은 말이다.
 
무위를 뜻하는 아깜마와 아쌍카타는 동의어나 다름 없다. 공통적으로 부정접두어 아(a)가 붙었다. 이는 행위와 형성을 부정한 것이다. 그래서 무위가 된다.
 
무위는 열반과 동의어이다. 무위를 뜻하는 아쌍카타는 모든 조건지어진 것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유위(sakhata)는 조건지어진 것이 된다.
 
무위를 뜻하는 또 하나의 말은 아깜마이다. 아깜마는 무행위를 뜻한다.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할까?
 
사람들은 매일 행위를 한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행위 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모두 업이 된다. 재생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행위를 하지 않으면 업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부처님이나 아라한은 가능한 것이다. 이는 ‘작용심(kiriya citta)’으로 설명된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네 가지 마음이 있다. 선심, 불선심, 과보심, 작용심을 말한다. 이 중에서 작용심에 대하여 부처의 마음 또는 아라한의 마음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과보를 만들어내지 않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아라한도 사람이다. 사람이다 보니 밥도 먹고 잠도 잔다. 당연히 말도 하고 생각도 한다. 그런데 아라한의 행위는 업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행위를 하면 업이 된다. 그런데 아라한은 어떠한 행위를 해도 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막행막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라한은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내기 때문이다.
 
작용만 하는 마음이 있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행위를 해도 업이 되지 않는 것은 작용만 하는 마음 때문이다. 마치 “그렇네, 그렇군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태어났으니 사는 것인가? 대부분 사람들은 삶의 목적도 방향도 없이 사는 것 같다.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목표가 있는 삶이다. 일감이 있어서 일을 한다면 며칠 목표가 된다. 장기적인 계획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목적도 방향도 없이 살아간다. 살아 있으니 사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밥 먹는 것이 가장 큰 일중 행사가 된다. 하루 일과 중에 식사가 대사(大事)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순 없다. 식사가 대사가 된다면 축생과 다를 바 없다. 사유하는 능력이 있는 인간이라면 벗어나야 한다. 저쪽으로 건너가야 한다. 그곳은 다름아닌 무위의 세계, 열반이다.
 
저 언덕에 건너가려면 함이 없는 함을 해야 한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을 정신적으로 행위를 해도 업이 되지 않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렇네요, 그렇군요”라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
 
오늘도 해야 할 일이 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어쩌면 묶이고 매이는 삶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이 없는 삶을 동경한다. 해야 할일 없는 불사(不死)의 길로 가는 것이다. 방향도 목적도 없는 삶은 그치고자 한다.
 
 
2024-06-1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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