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나는 언제나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6. 14. 09:49

나는 언제나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나이 든 어른의 표정은 대체로 근엄하다. 무표정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연륜이 쌓여서 그런 것일까? 노인이 되면 지혜로워져서 그런 것일까?
 
건강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다. 어떤 날은 무척 힘들다. 아마도 잠과 관련 있는 것 같다.
 
잠이 보약이다. 잠을 잘 자고 나면 세상 살 맛 난다. 그러나 이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나는 왜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것일까?
 
부처님은 잠을 잘 자는 사람
 
아나타삔디끼까 장자는 부처님 만날 것에 기쁨이 넘쳤다. 장자는 라자가하로 비즈니스 출장 왔는데 부처가 출현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보고자 한 것이다.
 
장자는 다음 날 부처님을 찾아가고자 했다. 그런데 너무 들뜬 나머지 잠을 잘 이룰 수 없다. 새벽에 무려 세 번이나 깨기를 반복했다. 날이 훤하게 밝자 새벽인 줄 알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것이다.
 
장자가 본 것은 기쁨의 광명이었다. 마치 선정에 들었을 때 빛을 보는 것과 같다.
 
장자는 마침내 부처님 계신 곳 가까이 갔다. 부처님은 장자가 올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쑤닷따여, 어서 오시오.”(S10.8)라고 말했다. 집에서 부르던 이름을 말한 것이다.
 
장자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자 감동했다. 집에서 부르는 이름은 가족 외는 모른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전지성(全知性)을 나타낸 것이다.
 
부처님과 장자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장자는 부처님에게 “스승이시여, 세존께서는 편히 주무셨습니까?”(S10.8)라고 물었다.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리는 것 이다.
 
장자는 왜 잠을 잘 잤는지 물어 보았을까? 아마도 그 시대에도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서 아침인사가 있다. 전쟁과 같은 혼란의 시기에는 아마도 “밤새 별일 없었습니까?”라고 물어 볼 것이다. 노인의 안부를 묻는 질문에도 해당된다. 궁핍힌 시대 때는 “밥은 드셨습니까?”라고 물어 볼 것이다.
 
부처님은 장자의 문안인사에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답했다.
 
 
“완전한 열반을 성취한 성자는
언제나 참으로 편히 잠자네.
감각적 쾌락에 더렵히지 않은 님은
청량해서 번뇌가 없다네.
 
모든 집착을 자르고
마음의 근심을 제거하고
마음의 적멸을 얻어서
고요한 님은 안락하게 잠자네.”(S10.8)
 
 
숙면하기 위한 조건에 대한 게송이라 볼 수 있다. 번뇌가 소멸된 자는 잠을 잘 잘 수 있음을 말한다.
 
번뇌가 많으면 잠을 잘 이룰 수 없다. 누군가에 대하여 분노하는 마음이 생겨 났을 때 그 분노로 인하여 잠을 잘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다.
 
성자는 잠을 잘 잔다고 했다. 그런데 성자가 되려면 열반을 성취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열반은 성자가 되기 위한 등용문과도 같은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자아개념이 부수어진다. 오온에 대하여 내것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몸과 마음을 내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여기 미인이 있다. 미인은 자신의 얼굴을 끔찍이 사랑한다. 얼굴에 여드름이라도 나면 큰 일 난다. 얼굴은 자신의 모든 것이나 다름 없다.
 
여기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자가 있다. 눈은 보라고 있는 것이고 귀는 들으라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 혀는 맛 있는 것을 먹으라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 몸은 접촉하라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 이런 자에게 몸은 자신의 것이나 다름 없다.
 
몸만 자신의 것이 아니다. 마음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다. 느낌, 지각, 형성 등 수십가지 마음의 작용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다.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면 번뇌가 생겨난다. 번뇌가 많으면 많을 수록 잠을 이루기 힘들다. 욕망으로 살 때, 분노로 살 때 잠 자기 힘들다.
 
잠을 못 이루는 요인은 많다. 강남 사람들은 너무 한가해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한다. 갖출 것 다 갖춘 여유 있는 사람들이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강남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라 한다. 최근 유튜브에서 본 것이다. 삶이 너무 한가해도 잠 못 이루는 것이다.
 
부처님은 장자와의 첫만남에서 잠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이런 대화는 매우 심오하다는 사실이다. 게송에서는 탐, 진, 치에 대한 소멸의 가르침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빠알리성전협회의 리스 데이비즈 여사는 “아나타삔디까의 평범한 인사말을 이용해서 부처님께서 얼마나 깊은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Krs.I.273)라고 했다.
 
때로 포기할 줄도 알아야
 
잠이 보약이다. 꿀잠을 자고 나면 세상이 아름답다. 그러나 잠을 잘 자지 못하면 세상이 괴로워 보인다.
 
잠을 잘 자지 못하면 몸에 이상이 생긴다. 가슴 통증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럴 때 쉬는 것이 약이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 있는 것이다. 타이레놀 한알 먹고 푹 자고 나면 사라진다.
 
나는 왜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 집착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무언가 꼭 붙잡고 있는 것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이런 것은 꿈에서도 나타난다.
 
꿈은 수면의 질과 관련 있다. 수면의 질이 좋으면 아름다운 꿈을 꾼다. 당연히 수면의 질이 좋지 않으면 악몽을 꾸게 된다.
 
잠을 잘 자려면 내려 놓아야 한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어도 내려 놓는 것이다. 어쩌면 포기에 해당되는 것인지 모른다.
 
때로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자신의 것이라고 꼭 붙잡고 있을 때 집착이 된다. 잠을 잘 자려고 노력하는 것도 집착이다.
 
잠은 잠이 와야 잠을 자는 것이다. 잠이 오지도 않는데 억지로 잠을 잘 수 없
다. 이럴 때는 “잠이 오면 잠을 자지.”라는 마음을 내야 한다. 또한 “잠이 오지 않으면 쉬자.”라는 마음을 내야 한다. 모두 다 마음을 풀어 놓는 것이다. 마음을 내려 놓는 것이다. 이런 것도 일종의 포기라고 말할 수 있다.
 
포기 중에서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죽음이다. 누구나 죽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것도 집착이다.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죽기보다 더 하겠어?”라는 말이다. 최악의 경우 죽는 것이다. 그런데 죽음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아난다여, 인간으로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anacchariyaṃ kho panetaṃ, ānanda, yaṃ manussabhūto kālaṃ kareyya)”(S55.8)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왜 인간이 죽는 것이 놀라운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을까? 이는 태어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죽어야 하는 사실은 새로운 사실은 아닌 것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난 자가 죽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라고 번역했다. 빅쿠보디는 “It is not surprising, Ananda, that a human being should be die.”라고 영역했다.
 
사람들은 왜 죽음을 두려워할까? 그것은 가진 것을 놓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재산을 모은 자는 두고 떠나는 것은 용납되지 않을지 모른다. 처자식과 손주 등 가족이 많은 자 역시 이들을 두고 떠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 왔으면 떠나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런가? 태어남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1)라고 십이연기의 순관으로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오늘날 죽음은 은폐되어 있다. 죽은 자를 보기 힘들다. 장례식장에 가도 시신을 볼 수 없다. 주변에서 죽음을 목격하기도 힘들다. 동물의 죽음도 보기 힘들다. 특히 도시에서 그렇다.
 
최근 유튜브에서 본 것이 있다. 우연히 베트남 유튜브를 보게 되었다. 유튜브 채널은 ‘Green forest life’이다. 북베트남 산간지대에서 축생을 기르며 살아가는 젊은 청년에 대한 채널이다.
 
유튜브에서는 돼지의 출산장면을 볼 수 있다. 보통 열 마리 낳는다. 그런데 새끼는 나오자마자 어미 젖부터 찾는 다는 것이다.
 
새끼 돼지 열 마리는 어미 돼지 젖을 빤다. 이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장면에 해당될 것이다. 생명의 숭고함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자라면 다른 사람의 먹이가 된다.
 
돼지로 태어난 것은 먹히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새끼 때는 귀여울지 모르지만 다 자라면 상품이 된다. 집에서 기르는 모든 가축이 다 그렇다. 개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축생의 세계에서는 삶과 죽음은 일상이나 다름 없다. 매우 짧은 기간 살다가 먹이가 된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고기를 먹을 수 없다.
 
사람은 긴 수명을 산다. 백세까지 사는 시대가 되었다. 주변에서 죽음이 있기는 하지만 실감하지 못한다. 보이지 않으면 사라진 것이다. 보이지 않으면 죽었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당면한 자신의 문제이다.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을 때 죽음이 두렵지 않을 수 없다. 그런 한편 죽음을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은 태어났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태어남이 있어서 죽음도 있다. 이런 이유로 언젠가 죽을 줄 안다.
 
애착이 있으면 잠 들기 힘들다. 꽉 붙들고 놓지 않고 있으면 잠 자기 힘들다. 이럴 때는 놓아 버려야 한다. 죽음까지도 놓아 버려야 한다. “죽는 것이 대수냐?”라는 식으로 놓아 버려야 한다. 때로 삶에 대한 집착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나이든 어른의 표정이 근엄하고 무표정한 것은
 
나이든 어른의 표정은 대체로 근엄하고 무표정하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건강과 관련 있는 것 같다. 몸이 불편하니 얼굴에 나타나는 것이다.
 
가능하면 밝은 표정 짓고자 한다. 프로필 사진도 웃는 모습을 게재 하고자 한다. 이 세상에서 웃는 모습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러나 수행자는 웃지 않는다.
 
올해 오월 붓다의 날에 한국마하시선원에 갔다. 선원 법당에는 미얀마 사야도의 사진이 걸려 있다. 한결 같이 근엄한 모습이다. 밍군 사야도, 마하시 사야도의 표정을 보면 날카롭다.
 

 

 
미얀마 사야도는 왜 근엄한 모습일까? 아마도 그것은 늘 새김(sati)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스님 중에는 파안대소하는 스님이 있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의 유튜브 소개 화면을 보면 흰 이를 드러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불교라고 해서 똑 같은 불교는 아닐 것이다. 대승불교는 대승의 길로 가고 테라와다불교는 테라와다불교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행자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가? 앙굿따라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노래는 울음이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춤은 광기이다.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것은 장난이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노래도 계율의 파괴이고, 춤도 계율의 파괴이다. 이유가 있어 기뻐한다면, 단지 미소 짓는 것으로 충분하다.”(A3.103)
 
 
 
부처님은 출가수행자가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금했다. 춤은 광기라고 했다. 노래는 울음과도 같다고 했다. 웃음도 자제해야 한다. 흰 이를 드러내 보이면 안된다. 단지 미소 짓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대승불교 스님들은 걸림 없다.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못하는 것이 없다. 법문할 때 파안대소 한다. 테라와다 빅쿠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테라와다 스님은 대체로 근엄하고 냉정하고 무표정하다.
 
꼰대가 되기 보다 어른이 되어야
 
재가수행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출가한 스님처럼 살아야 할 것이다. 이는 포살계를 지킬 때 한정된다. 포살 팔계를 받았을 때 그날 하루낮하루밤만큼은 출가수행자처럼 사는 것이다.
 
재가수행자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 생업도 있고 가족도 책임 져야 한다. 일반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음은 늘 저 너머를 지향하고 있어야 한다. 언젠가 인연되면 저 언덕으로 건너 가는 것이다.
 
재가의 삶을 살고 있다. 재가의 삶을 살면서 수행을 하고 있다. 깊은 수행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이것이 최선이다. 글을 쓰고 경전을 읽고 명상을 하고 책을 만드는 삶이다.
 
재가수행자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늘 배우는 입장이다. 배울 것이 너무나 많다. 가장 시급한 것은 성자의 흐름에 드는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기 전에는 배우는 사람이다. 그런데 모든 번뇌가 소멸된 상태가 되기 전에도 학인이라는 사실이다. 아라한이 되어야 배움은 끝이 난다.
 
아직까지 한번도 가르쳐 본 적이 없다. 이는 직업적 특성에도 기인한다. 개발자로 살다 보니 계측기 앞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지금은 모니터 앞에 있는 시간이 많다.
 
한번도 선생이라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2016년 전재성 선생을 찾아 갔을 때 “이선생”이라고 호칭하는 것에 놀랐다. 한번도 남을 가르쳐 본 적이 없는데 선생이라니!
 
나는 어른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다. 남들 있는 손주도 없어서 아직 어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자식이 있으니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탐, 진, 치로 사는 한 나는 어른이 아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지적 능력이 낮은 사람들을 보면 이를 실감한다.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었어도 어리게 보이는 것이다. 반면 지적 능력이 높은 아이가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어른스럽게 보인다. 이는 번뇌 많고 적음에 달려 있다.
 
아직까지 한번도 어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남을 가르쳐 본 적 없는 것이 큰 이유가 된다. 그러나 나의 지적 능력에 따른다. 나의 번뇌의 많음에 따른다.
 
번뇌가 많은 자는 잠을 잘 자지 못한다. 탐, 진, 치로 사는 자는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기 쉽다. 그가 아무리 나이가 많고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하더라도 욕망과 분노와 사견으로 산다면 어른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나 때는 말이야”라든가,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며 나선 다면 꼰대라 해야 할 것이다.
 
꼰대가 되기 보다 어른이 되어야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지혜롭게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삶의 지혜도 될 있고 진리에 대한 지혜도 될 수 있다. 나는 지혜로운 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한참 부족한 것 같다. 왜 그런가? 잠 못 이루는 밤이 많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집착하는가? 무엇을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인가?
 
나는 언제나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이제 놓아 버려야 한다. 죽음마저 놓아 버려야 한다. 부처님도 “인간으로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S55.8)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또한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난 자가 죽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라고 번역하지 않았던가? 또한 빅쿠보디는 “It is not surprising, Ananda, that a human being should be die.”라고 영역하지 않았던가?
 
죽는 것은 대수가 아니다. 태어났으니 죽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죽지 않고자 한다. 죽기 싫어서 꽉 움켜 쥐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집착이다.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을 내려 놓아야 한다.
 
잠을 잘 자는 것이 소원이다. 너무 편해서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너무 한가해서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너무 육체노동을 하지 않아서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분명한 이유가 있다. 번뇌가 많아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잠을 잘 자는 사람 중에 하나라고 했다. 부처님은 “모든 집착을 자르고 마음의 근심을 제거하고 마음의 적멸을 얻어서 고요한 님은 안락하게 잠자네.”(S10.8)라고 했다. 집착과 근심을 제거해야 한다. 나는 언제나 잠을 잘 잘 수 있을까? 나는 언제나 어른이 될 수 있을까?
 
 
2024-06-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