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명학공원 산책하기

담마다사 이병욱 2024. 6. 12. 09:55

명학공원 산책하기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다.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는 것은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변화 없이 반복된다면 지옥이라 해야 할 것이다.
 
요즘 날씨가 갑자기 더워졌다. 유월도 이제 중순으로 접어든다.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된 것이다.
 
여름이 오면 괴롭다. 열대야의 뜨거움은 참을 수 없다. 에어컨을 틀어 보지만 속수무책이다. 밤기온이 25도 이하로 내려 가기만을 바란다. 바람이 불기만을 바란다.
 
올해 열대야는 얼마나 계속될까? 이럴 때는 멀리 떠나고 싶다. 몽골같은 서늘한 나라가 좋을 것 같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강원도 평창과 같은 고지대가 좋을 것 같다. 여름 한철 한달살이하면 최상이다. 이것 역시 가능하지 않다. 감내하며 살아야 한다.
 
여름을 이기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속옷을 입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런닝셔츠를 입지 않는 것이다. 헐렁한 겉옷 하나만 입으면 통풍이 잘되어서 견딜만할 것 같다.
 
여름을 이기는 또하나의 방법은 서늘할 때 일하는 것이다. 마치 농부가 새벽에 일을 하고 한낮에 쉬는 것과 같다. 일인사업자도 아침 일찍 일터에 나간다.
 
오늘은 새벽에 집을 나섰다. 새벽의 기준은 오전 여섯 시이다. 여섯 시 이전은 새벽이고 여섯 시 이후는 아침인 것이다. 오전 여섯 시 이전에 집을 나섰으니 새벽인간이 된 것이다.
 
백권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안양천을 건너야 한다. 징검다리를 건널 때 늘 두리번 거리며 찾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물오리가족이다.
 
오늘 아침 물오리가족을 보았다. 어미 오리와 새끼 오리 세 마리가 움직였다. 이게 얼마만인가? 기록을 찾아 보니 한달만이다.
 
지난 5월 10일 ‘비산 안양천 물오리 가족’이라는 제목으로 기록을 남겼다. 그때 물오리 새끼는 부화한지 며칠 되지 않은 것 같았다. 한달이 지난 오늘 물오리 새끼는 몰라보게 크게 자랐다.
 
한달전 물오리 새끼는 일곱 마리였다. 오늘은 세 마리가 어미와 함께 있다. 나머지 네 마리는 어디로 간 것일까?
 

 

 
 
물오리가 노니는 안양천은 평화롭다. 그러나 하천에서는 생존경쟁이 벌어진다. 한가롭게 노니는 것처럼 보여도 수면 아래서는 발놀림이 부지런하다. 먹이가 보이면 놓치지 않을 것이다.
 
물오리는 어디서 왔을까? 사람이 개입하지 않아도 스스로 잘 자란다. 때가 되면 짝짓기 해서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운다. 작년 물오리 새끼들은 이제 성년이 되었을 것이다. 새끼들이 자라서 또 새끼를 낳는다. 누가 보건 말건 해야 할 바를 다하는 것이다.
 

 
물오리의 삶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부자연스러운 삶도 있다. 개의 삶이다. 애완견이 된 개는 자연스럽지 않아 연민의 대상이 된다.
 
개처럼 사는 자가 있다. 주인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면 먹을 것은 보장된다. 마치 목줄에 묶인 개와 같은 신세의 사람이다.
 
개처럼 살 것인가 물오리처럼 살 것인가? 개처럼 살면 먹을 것은 보장된다. 그러나 자유가 없다. 물오리처럼 살면 먹을 것은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유가 있다.
 
자유롭게 살고자 한다. 일인사업자의 삶은 자유롭다. 일 하고 싶을 때 일을 하고 놀고 싶을 때 놀면 된다. 누가 뭐라고 할 사람 없다. 이런 자유를 십구 년째 만끽하고 있다.
 
자유는 있지만 수입은 별로 없다. 수입은 들쑥날쑥이다. 월급생활자처럼 계획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 한달 수입은 형편 없다. 겨우 먹고 사는 정도, 유지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유가 있어서 살만하다.
 
일인사업자로 살면서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은 글쓰기로 나타난다. 쓰고 싶을 때 쓰는 것이다. 생각나면 쓰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할 사람 없다.
 
글은 써 놓으면 남는다. 돈은 아무리 벌어도 남아나지 않는다. 글을 사랑하는 이유가 된다. 이렇게 써 놓은 글이 산을 이루었다.
 
한번 써 놓은 글은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시간이 녹아 있는 글이다. 돈은 사람을 배신하지만 한번 써 놓은 글은 절대로 달아나지 않는다. 글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백권당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 정신이 맑을 때 밀린 일을 해야 한다. 집중하면 두 배, 세 배의 효율이 있다. 밀린 일을 후딱 해 치우고 글을 써야 한다.
 

 
무엇이든지 여유롭게 하고자 한다. 하나의 일이 끝나면 공원에 간다. 만안구청사거리에 있는 명학공원이다.
 
요즘 틈만 나면 명학공원에 간다. 머리 식히기 위해서도 가고 운동삼아서 가기도 한다. 공원을 오른쪽으로 하여 돌기 시작한다. 한번 도는데 삼백미터정도 되는 것 같다.
 

 
 
도시에서 삶은 피곤하다. 소음이 가장 문제가 된다. 자동차 소음은 견딜만하다. 가장 힘든 것은 오토바이 폭탄음이다.
 
무엇이든지 의식을 하면 번뇌가 되는 것 같다. 오토바이 소음에 민감해지자 오토바이 타는 자가 공공의 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오토바이 소음은 요란하다. 속도를 낼 때 불선심을 자극할 정도이다. 그럴 때 속으로 욕설이 튀어나온다. 나도 모르게 구업 짓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폐 끼치지 않고 살고자 한다.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을 삼가는 것이다. 층간소음이 나지 않게 하는 것도 해당된다. 금연장소에서 담배피지 않는 것도 해당된다.
 
오토바이폭탄음은 불쾌를 야기한다. 폐 끼치는 행위에 해당된다. 욕을 먹는다면 불선업을 짓는 것이 된다. 불선업은 어떻게 작용할지 모른다.
 

 
오토바이는 대부분 배달용이다. 대부분 큰 소음은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폭탄음이 나는 것이 있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의 소유자라고 볼 수 있다. 공공의 적이다.
 
배달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코로나 때 배달이 급증했다. 젊은 사람들에게 배달음식은 일상이 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곳저곳에서 오토바이를 볼 수 있다.
 
오토바이로 출퇴근하는 사람도 있다. 배달이 아닌 교통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이다. 대개 바퀴가 두껍다. 바퀴가 두꺼운 만큼 소음도 심하다. 폭탄음을 낼 때 불선심이 일어난다.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 성찰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행위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다. 나는 남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가?
 
글을 쓰다 보면 공공의 적이 되는 경우도 있다. 사람의 잘못을 지적했을 때 불편해 하는 사람이 있다면 폐를 끼치는 것이 된다.
 
어느 스님이 글을 하나 올렸다. 스님의 범계 행위에 대하여 비난하는 글을 보고서 불쾌감을 표현한 것이다. 이 글을 접하자 “제가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댓글 달았다.
 
어떤 재가수행자가 글을 하나 올렸다. 그 수행자는 경전공부만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에 “제가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댓글 달았다.
 
일인사업자로 살면서 체득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고객과 싸우지 않는 것이다. 고객과 싸우면 고객은 더 이상 주문하지 않는다. 나만 손해인 것이다. 누군가 시비 거는 글을 올렸을 때 싸우지 않는다. 다만 경전을 근거로 해서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수행승들이여,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S22.94)
 

 

 
부처님은 세상사람들과 싸우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투는 것처럼 보였다. 왜 그런가? 세상사람들의 삶과 진리의 삶을 사는 자의 삶은 다른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세상의 흐름대로 살아간다.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며 탐, 진, 치로 살아간다. 그러나 진리의 삶을 자는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살아간다. 감각적 즐거움을 괴로움이라고 보고 무탐, 무진, 무치로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세상과 싸우는 것으로 비추어진다.
 
세상사람들은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다. 얼굴에 자신 있는 사람은 얼굴을 자신의 전부라고 본다. 그러나 현자들은 얼굴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본다.
 
세상사람들은 물질에 대하여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불변한 것이라고 본다. 느낌, 지각, 형성, 의식도 역시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불변한 것이라고 본다. 이는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보는 것과 같다. 이는 갈애와 자만과 견해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현자는 이와 반대로 본다. 그래서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정반대로 보니 세상과 싸우는 것처럼 비추어진다.
 
현자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현자는 진리만 설할 뿐이다. 세상의 흐름과 반대되는 말을 하니 세상사람과 싸우는 것으로 비추어진다.
 
나는 고객과 싸우지 않는다. 나는 스님과 싸우지 않는다. 나는 재가수행자와 싸우지 않는다. 그들이 싸움을 걸어 온다. 이럴 때 부처님 가르침으로 대응한다. 그러다 보니 세상과 싸우는 것으로 비추어진다.
 
현자는 아닌 것에 대하여 아니라고 말한다. 현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 역시 아닌 것을 아닌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에 폐 끼치지 않는 삶을 살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作用心: kiriya citta)’을 내야 한다. 업을 짓지 않는 마음이다. 단지 “그렇네, 그렇군”이라고 하면 그뿐이다.
 
나에게 시비 거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에게 “제가 새겨야 할 말 같습니다.”라고 응대한다. 이런 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없다. 또 하나의 말은 “그렇군요”라는 말이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말이다. 이런 말에 역시 시비 거는 사람은 없다.
 
그 사람은 나를 비추어 보는 거울이다. 그 사람의 행위를 보고서 나의 행위를 돌아 보게 된다. 세상에 공공의 적이 되지 않고자 한다.
 
 
2024-06-1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