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신덕고분의 주인은 누구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6. 26. 17:54

신덕고분의 주인은 누구일까?
 
 
고향에 가면 늘 가는 코스가 있다. 고분과 학교이다. 예덕리 고분군과 폐교가 된 초등학교를 가본다.
 
고향 떠난지 얼마나 되었을까? 초등학교 일학년 늦가을에 떠났다. 계산해 보니 1967년 11월쯤 된다. 그때 함평에서 광주로 이사 갔다.
 
농사 짓는 사람이 농촌을 뜨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농사 지어 먹고 살 수 없어서 떠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때 1966년과 1967년에 대한해가 있었다고 한다. 가물어서 비가 오지 않은 것이다.
 
지금도 기억 난다. 저 멀리 불갑산 가까이 산등성이에서 기우제 지낸 것을 말한다. 밤에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밤에 불을 지펴서 하늘에 제사 지낸 것이다.
 

 
하늘은 인자하지 않다. 하늘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 기우제 지낸다고 해서 비는 오지 않는다. 그러나 비 올 때까지 기우제 지낸다며 비가 올지 모른다.
 
농촌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농사 지어먹고 살기 힘들었다. 가뭄이 들어, 그것도 연속해서 이삼년 가뭄이 들었을 때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남부여대하고 도시로 떠났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 시골을 떠났다. 유년시절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시골을 떠나기 전 이삼년전 기억은 드문드문 뚜렷하다.
 
유년시절 사는 곳이 세상의 전부인줄 알았다. 들과 구릉과 산이 있는 산하대지가세상의 다 인줄 알았다. 그러나 저 아스라이 있는 산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몰라도 되는 것이었다.
 
그때가 몇 살 때인지 알 수 없다. 정자에서 아이들과 있었는데 갑자기 동쪽 하늘에서 굉음이 들려 왔다. 처음 듣는 엄청나게 큰 소리였다. 태어나서 한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굉음과 함께 괴물체가 나타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늘을 나는 것이었다. 그것도 여러 대가 이 쪽에서 나타나 저 쪽으로 날아가서 사라졌다. 형태는 분명히 기억한다.
 
무엇이든지 처음 접한 것은 강렬하다. 태어나서 처음 접한 괴물체의 이미지는 있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비행기였다. 군인들을 실어 나르는 수송기 C123이었던 것이다.
 
그때 전기가 없었다. 밤이 되면 호롱불을 켰다. 그때 가뭄이 들어서 사람들은 걱정했지만 아이에게는 가뭄이 무엇인지 몰랐다. 세상에 근심걱정 없는 세월을 보냈다.
 
이제까지 살아 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언제일까? 지체 없이 유년기 몇 년이라 본다. 왜 그럴까? 가만 생각해 보니 근심걱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인 ‘순수의 시기’였던 것이다.
 
서울에 올라 온 것은 초등학교 삼학년 때이다. 환경은 열악했다. 삼양동 산동네달동네에서 살았다. 농사 지어먹고 살던 사람이 서울에 오면 할 일이 없다. 기술도 없고 자본도 없다. 생계를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일해야 한다. 도시빈민이 되는 것이다.
 
환경이 바뀌었을 때 늘 꿈꾸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유년기 때 시골에서의 삶에 대한 동경이다. 그때는 가난이라는 것을 몰랐다. 무엇보다 마음이 풍요로웠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사시사철 마음은 충만 되었다.
 
고향은 늘 꿈꾸던 곳이다. 산동네달동네의 숨막힐 듯한 환경에 처해 있을 때 고향의 산하대지를 떠올렸다.
 
고향마을은 변함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이다. 신작로가 아스팔트로 포장된 것과 호롱불이 전기로 바뀐 것, 그리고 초가지붕이 기와지붕으로 바뀐 것이 대표적이다.
 
고향마을에 가면 고분에 가본다. 마을에서 사오백미터 가면 신덕고분과 예덕고분군이 있다. 유년시절에는 이런 것이 있는 줄 몰랐다. 존재를 알게 된 것은 2010년 합동제사를 지내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신덕고분은 장고형 고분이다. 장구모양의 무덤을 말한다. 길이가 50미터가 넘는다. 이 고분의 주인은 누구일까?
 

(신덕 장고형 고분)

 
 
매년 유월이 되면 함평에 간다. 고향에 가면 반드시 고분에 가본다. 왜 이런 곳에 거대한 고분이 있을까? ‘이 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라고 생각한다.
 
신덕고분에 대한 발굴이 1991년 있었다. 수많은 유물이 출토 되었을 때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일본 고분시대 때 유물이 나온 것이다. 더구나 관은 금송이다. 금송은 우리나라에 없는 소나무이다. 일본에서 나는 품종이라고 한다. 더구나 일본 고분시대 토기가 나오고 대도(大刀)도 나왔다. 신덕고분은 일본무덤일까?
 
유튜브에서 신덕고분에 대한 것을 보았다.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만든 영상이다. 제목은 ‘[비밀의 공간, 숨겨진 열쇠] 큐레이터와의 대화 - 함평 예덕리 신덕고분’이다. 이 영상에서 대도에 대하여 “이것은 일본의 최상위 계층에서 출토되는 그런 칼과 굉장히 비슷하게 생겨서 일본과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소개 하고 있다. 또한 이 무덤의 유물 중에는 백제계통의 것도 있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되는 동탁과 은잔 같은 것이다. 이는 백제와 관련성 있는 것이다. 또한 투구는 대가야 것이다. 
 

 
신덕고분의 주인은 누구일까? 큐레이터는 “일본에서 온 것이 아닌가”라며 무덤의 주인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가져 온 유물도 있기 때문에 “이렇게 내외부의 요소들이 굉장히 복합적으로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이 무덤의 주인공을 특정하기는 아직은 어렵습니다.”라고 말한다. 다만 “이 무덤의 주인공에 대하여 굉장히 개방적은 성향을 가지고 주변지역과 교류를 했던 인물 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고분은 5세말에서 6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일본의 고분시대보다 백년이 늦은 것이다. 더구나 이 지역에서는 옹관묘 고분이 있었다. 신덕고분 바로 아래에 있는 예덕고분군은 옹관묘 형식이다. 이는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조성된 것이다.
 

(예덕 옹관묘 고분군)

 
 
두 그룹의 고분이 있다. 신덕고분과 예덕고분이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예덕고분은 옹관묘 형식으로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고분형태이다. 그런데 백년 후에 갑자기 장고모양의 전방후원형 고분이 출현한 것이다. 신덕고분을 말한다.
 
신덕고분의 주인은 누구일까? 유튜브를 찾아 보았다. 여러 가지 가설이 있다. 이곳 영산강 유역에 있는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정착해서 살다가 온 귀환 자의 무덤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문화는 물 흐르듯이 흐른다.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문화가 흘렀다. 특히 영산강 유역은 일본 큐슈 지역과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해로가 열려 있었던 것이다.
 
육로보다 해로가 안전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물자는 주로 바다나 강을 이용해서 운송된다. 고대 4세기부터 6세기 때도 그랬을 것이다.
 
삼국이 통일 되기 전에 국가 개념이 없었다. 민족개념도 없었다. 오늘날과 같은 국경 개념이 없었던 것이다. 살기에 적당한 곳을 찾아 이동했을 것이다. 특히 영산강 유역은 일본의 큐슈지역과 가깝고 해로도 있어서 교류도 있었을 것이다.
 
옛날의 일을 알 수 없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무덤에서 발견된 것과 역사적 사료를 근거로 하여 가설을 세울 수 있다. 함평 신덕고분의 주인공도 밝힐 수 있을까?
 
함평에 다녀 온 후에 후기를 썼다. 매년 쓰는 것이다. 2010년부터 다녔으니 14회가 될 것이다. 나중에 글을 모아 놓으면 책이 될 것 같다.
 
올해도 신덕고분과 예덕고분에 갔다. 그곳에서 사방을 둘러 보았다. 탁 트인 개활지이다. 낮은 구릉이 연속된 것이다. 저 멀리에는 수키로에 달하는 월야평야가 있다. 그야말로 곡창지대이다.
 
함평 월야면은 하나의 커다란 고분을 만들기에 충분한 경제력을 가진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예덕고분 입간판에는 “원래 이 지역은 마한의 소국이 있었던 지역인데 모두 백제에 통합되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함평에 소국이 있었다. 소국은 함평에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너른 평야를 가진 지역 여기저기에 소국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소국은 백제에 편입되기 전에 경쟁적으로 큰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향 마을에 있는 거대한 무덤은 소국의 산물이다. 소국이 있었기 때문에 거대한 봉분을 만들었던 것이다. 대국에 흡수 되었을 때 더 이상 거대한 무덤은 나오지 않았다. 왕의 무덤 보다 더 큰 무덤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산강 유역의 거대한 무덤은 소국시절 경쟁적으로 만든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신덕 장고형 고분)

 
 
거대한 무덤은 6세기 이후에 나오지 않는다. 신덕고분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조성된 무덤이기 때문에 소국 마지막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무덤 주인은 누구일까? 일본 장군의 무덤일까? 그러나 그때 당시 일본이라는 나라는 없었다.
 
일본 고분시대에는 여러 소국이 있었다. 소국시대의 특징은 경쟁적으로 거대한 무덤을 만드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소국이 대국에 통합되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일본의 3세기부터 7세기에 이르는 고분시대는 소국시대라 말할 수 있다.
 
소국시대에 큰 무덤이 만들어진다. 소국시대에 경쟁적으로 큰 무덤을 만들었다. 영산강유역에 큰 무덤이 많은 것은 소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의 영향력이 강하지 않을 때 소국이 있었는데 경쟁적으로 큰 무덤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왜 신덕고분과 같은 일본의 고분시대 전방후원형 무덤이 있게 되었을까?
 
영산강유역에서 발견되는 무덤은 옹관묘 형식이 대부분이다. 전방후원형은 마치 갑자기 등장한 것과 같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집중된다. 그러나 숫자는 14기로 많지 않다. 이 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
 
매년 고향을 다니면서 신덕고분 앞에 섰을 때 참으로 궁금했다. 무덤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혹시라도 일본장군의 무덤이라면 곤혹스러운 것이된다. 그때 당시 한반도의 문화가 일본열도 보다 훨씬 선진이었는데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대체 신덕고분의 주인은 누구일까?
 

(신덕 장고형 고분)

 
 
페이스북에 고대 한국의 역사에 책을 쓰는 사람이 있다. 정재수 선생을 말한다. 프로필에 ‘역사작가’라고 소개 되어 있다. 최근에는 ‘우리가 몰랐던 백제사’를 출간했다.
 
정재수 선생에게 물어 보았다.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무덤의 비밀을 밝혀 달라고 요청했다. 그랬더니 두 장의 사진을 남겼다. 자신이 지은 책의 일부를 알려 준 것이다. 글을 읽어 보니 궁금해 하던 비밀이 풀리는 것 같다.
 
정재수 선생에 따르면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형 고분에 대하여 장군의 무덤으로 보는 것 같다. 이는 무덤에서 철제투구와 갑옷 등 왜계통의 유물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덤의 주인에 대하여 1)왜인설, 2)왜인-마한계 토착세력 무덤 혼합설, 3)마한계 왜인의 재이주설, 4)마한계 토착 세력 무덤설, 5)마한계 토착세력 무덤설 변형, 6)왜계 백제 관료설, 이렇게 여섯 가지 가설을 말한다.
 
전방후원형 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 여섯 가지 가설이 있지만 각기 해석상의 약점이 있어서 명확한 정설은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정재수 선생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해 놓았다.
 
 
(무덤주인은 곤지왕이 이끈 야마토세력)

장고형고분의 무덤주인은 축조 시기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까지로 제한되고, 철제 투구, 갑옷 등 왜계통 유물이 출토된 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는 5세기 후반인 476년 곤지왕이 데리고 온 야마토세력과 관련이 깊다. 곤지왕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벌전쟁으로 한성이 몰락하자 급히 야마토세력을 이끌고 귀국한다. 그리고 고구려와 정전협상을 원만히 마무리하고 동생 문주왕을 도와 백제 재건에 힘쓰다가 477년 7월 해씨 세력(문주왕의 왕후 오로치)에 의해 전격적으로 제거된다. 이로 인해 곤지왕 하나만 믿고 한반도로 건너온 야마토세력은 더 이상 웅진(공주)에 뿌리 내릴 근거를 상실한다. 이제 남은 길은 다시금 야마토로 돌아가는 길뿐이다. 그러나 야마토세력의 장수급 일부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충남지역(웅진)을 벗어나 남쪽의 전남지역(모한)에 정착한다. 이들의 본향이 모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지도자 곤지왕을 잃은 까닭에 백제에서도 야마토에서도 환대받지 못하는 처지가 된다. 곤지왕이 이끈 야마토세력 중에는 일본열도(야마토)출신도 있지만 상당수는 한반도(모한)출신이다. 특히 이들은 곤지왕과 정치적, 군사적 행보를 함께한다. 곤지왕은 455년 좌현왕에 임명되어 모한을 다스리다 461년 형 개로왕에 의해 일본열도로 추방되는 정치적 숙청을 당한다. 이때 좌현왕 시절에 인연을 맺은 모한의 상당수 수장급 인사들이 곤지왕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 간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476년 곤지왕이 이끄는 야마토세력의 일원이 되어 다시금 돌아온다. 결국 이들은 지도자 곤지왕을 잃게 되자 백제(충남) 도 야마토(오사카)도 아닌 본향 모한(전남)으로 돌아가 각기 살다가 죽어서 묻힌다.

다만 무덤양식을 장고형고분을 선택한 것은 곤지왕과 함께 야마토에 15년간(461-476) 살면서 직접 목격한 당시 야마토 오사카일대에 조성 되기 시작한 전방후원분 무덤양식을 자연스레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전남지역 장고형고분의 주인공은 곤지왕이 이끈 모한(전남)출신 야마토세력의 일부 수장급 인물이다.”(정재수 선생 책에서)

 
 
이 글을 보니 어느 정도 의문이 풀린다. 함평 고향마을에 있는 신덕고분의 주인은 이 지역 출신 장군이었던 것이다. 백제 곤지왕이 영산강 유역의 지배자가 되었을 때 협력했던 장군이었던 것이다. 곤지왕을 따라 야마토의 근거지 오사카 지역에 갔었는데 그곳에서 유행하던 전방후원형 무덤을 차용한 것이라 한다.
 
그 옛날 이곳에 소국이 있었다. 함평의 월야평야는 소국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쌀이 나는 곡창지대인 것이다. 하나의 거대한 무덤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한 경제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함평 월야평야)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고향마을 무덤을 찾는다. 일본 고분시대 무덤형식의 무덤이 있는 것이 놀랍다. 더구나 무덤에서 갑옷, 대도 등 장군의 유물이 출토 되었다. 정재수 선생의 글에 따르면 정치적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무덤의 주인은 사라졌다. 봉분만 남았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천이백년동안 무덤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기에 왕의 무덤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실제로 소국의 왕의 무덤이다. 이제야 어느 정도의 무덤 주인의 비밀이 풀리는 것 같다.
 
 
2024-06-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