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멀리 떠나고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4. 7. 1. 12:09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멀리 떠나고자
 
 
띠리릭~띠리릭~”벨소리가 우렁차게 울린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소리이다. 마침내 한시간 좌선에서 해방되었다.
 
좌선 할 때는 타어머를 세팅한다. 매일 한시간 좌선하기로 했으니 한시간으로 설정해 놓은 것이다.
 
타이머는 설정순간 제로를 향해서 간다. 마치 인간 60세의 수명을 운명으로 태어난 자가 세월이 가면 갈수록 제로로 수렴해 가는 것과 같다.
 
2024년 후반기 반년이 시작되는 날
 
오늘 2024년 후반기 반년이 시작되는 날이다. 올해도 반절을 넘겼으니 이제 가속될 것이다. 마치 나이가 반을 넘겼을 때 남아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 드는 것 같다.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죽음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게송을 보면 “나의 삶은 확실하지 않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라고 했다.
 
나는 언제까지 살까? 이런 의문은 우문이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왜 그런가? 업생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지은 업이 익어서 언제 작용할지 모른다. 또 하나는 불운한 사건(Visamaparihārajāni)과 우연의 피습(Opakkamikāni)이다. 이 두 가지는 업보의 성숙과 관련이 없다.
 
사람들은 늘 행복하기를 바란다. 또한 사람들은 늘 행운이 따르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람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내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통제아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 의도대로 되지 않는 것들
 
내 마음대로, 내 의도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 쌍윳따니까야 몰리야 씨바까의 경에 따르면 1)담즙(Pitta), 2)점액(Semha), 3)바람(Vāta), 4)체질(Sannipātikāni), 5)계절의 변화(Sannipātikāni), 6)불운한 사건(Visamaparihārajāni), 7)우연한 피습(Opakkamikāni), 8)업보의 성숙(Kammavipākajāni)을 들고 있다. 이런 것은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사고는 순간적이다. 예고 없이 사고가 난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뒤에서 받는 경우가 있다. 아무리 방어운전한다고 해도 뒤에서 들이받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길거리 간판이 떨어질 수 있다. 오래되어서 낡고 삭아서 어느 날 툭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재수없게 간판 아래로 지나갔다면 변을 당할 수 있다. 이런 것은 업보의 성숙과 관련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과거의 업의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그만하길 다행이다.”라고 말한다.
 
사고는 일어날만해서 일어난 것이다. 사고는 일어날만한 조건을 갖추었기 일어난 것이다. 하필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사고가 난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담즙 등 여덟 가지 불가항력적 사건이 발생했을 때 느낌이 생겨나는데, 그 느낌에 대하여 “세상의 진실로 인정해야 합니다.”(S36.21)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느낌은 ‘괴로운 느낌’을 말한다.
 
어떻게 숙명론자가 되는가?
 
부처님 가르침은 심오하다. 특히 업의 가르침은 난해하고도 심오하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행위의 과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서는 안되는데,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A4.77)라고 했다.
 
담즙 등 여덟 가지는 나의 통제 밖에 있다.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다. 멀쩡해 보이던 사람이 어느 날 진단을 받더니 암환자가 되었다. 수술을 해서 앞날을 알 수 없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이런 것을 모두 과거 전생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모든 것을 전생의 업보로 돌린다면 숙명론자가 된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어떤 행위를 해도 업보가 작용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부처님은 담즙 등 여덟 가지는 전생의 업보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개인이 느끼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모든 것은 과거의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S26.21)라고 말했다. 이는 숙명론적 발상이다.
 
부처님은 숙명론적 발상을 부정했다. 그래서 너무 지나친 것이라고 말했다. 더구나 숙명론자들은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말합니다.”(S26.21)라고 하여 분명하게 부정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다. 단지 여덟 가지 중에서 ‘업보의 성숙(Kammavipākajāni)’에 대해서는 신통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선정에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1)담즙, 2)점액, 3)바람, 4)체질, 5)계절의 변화, 6)불운한 사건, 7)우연한 피습은 신통으로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여덟 가지 모두에 대하여 업보의 성숙으로만 본다면 숙명론자가 된다.
 
몸에서 신진대사 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이 몸은 나의 몸일까? 이 마음은 나의 마음일까? 가만 생각해 보면 이 몸과 마음은 나의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몸은 왜 나의 몸이 아닐까? 이는 몸에서 신진대사 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순간 신진대사가 일어난다. 그때부터는 나의 통제하에 있지 않다.
 
음식은 여러 단계로 변형된다. 음식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가 되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음식이라는 자양은 몸 속에 어려 가지 효소도 만들어낸다. 자양이 자양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는 물질이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물질이 물질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 대하여 최대 열 단계로 보고 있다.
 
몸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알 수 없다. 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몸은 내 몸이 아니다. 몸은 나의 통제 밖에 있다.
 
몸이 정말 내 것이라면 나는 병에 걸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암에도 걸리지 않아야 한다. 그럼에도 병에 걸리는 것은 나의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전생의 업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래서 1)담즙, 2)점액, 3)바람, 4)체질 이렇게 네 가지는 나의 의지와 관련 없이 일어난다. 그 결과 괴로운 느낌이 되어서 괴로움을 겪는다. 이를 전생의 업보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우연적 발생 현상을 전생 탓으로 돌린다면
 
늘 행운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 이 말은 불운이 나에게 닥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과 같다. 또한 이 말은 인간의 운명은 알 수 없음을 말한다. 언제 어떻게 불운이 닥칠지 모른다. 그래서 여덟 가지 중에서 5)계절의 변화, 6)불운한 사건, 7)우연한 피습은 ‘우연적인 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나의 의지와 관계 없이 발생되어서 괴로움을 겪는다. 이와 같은 우연적 발생 현상을 전생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모든 것을 업보의 성숙으로 돌린다면 숙명론자가 된다. 사고가 난 것에 대하여 ‘그만하길 다행이다’라거나, ‘액땜했다’라고 말한다면 비불교적 언사가 된다. 그래서일까 밀린다팡하에서는 “대왕이여, 그러므로 업보에서 생겨나는 것은 적고, 나머지 듣는 것은 더욱 많습니다. 그것에 관하여, 어리석은 자들이 ‘모든 것은 업보에서 생겨나는 것일 뿐이다.’라고 너무 지나치게 말합니다. 그 업에 관해서는 부처님의 앎이 없이는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Mil.135)라고 말했다.

 
누구든지 타인의 업과 타인의 업의 과보에 대하여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타인의 업에 대하여 알려고 한다면 미쳐 버릴 것이라고 한다. 타인의 업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한사람뿐이다. 일체지자인 부처님을 말한다. 그래서 “그 업에 관해서는 부처님의 앎이 없이는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Mil.135)라고 말한 것이다.
 
몸과 마음은 내 것이 아니다. 담즙 등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 네 가지와 계절의 변화 등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세 가지는 업보의 성숙과는 무관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앞날은 알 수 없다. 언제 어떻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알고자 한다면 수행을
 
왜 살아야 하는지 묻는다면 답이 없다. 사는 데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초목이 사는 데는 이유가 없다. 그냥 사는 것이다. 동물이 사는 데는 이유가 없다. 그냥 사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묻는다면 답을 할 수가 있다.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불교인이다. 부처님 가르침이야말로 괴로움과 윤회를 끝내는 것으로 본다. 이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알려 주는 것과 같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하고,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알아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과 함께 살고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접한지는 오래 되었다. 중학교 때 부처님일생을 배웠으니 오십년이 넘었다. 그러나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접한 지는 이십년도 되지 않았다.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알고자 한다면 수행을 해야 한다. 매일 행선과 좌선을 해야 한다. 선원에서 배운대로 해 보는 것이다.
 
백권당 행선대에서
 
오늘은 2024년 하반기 반년이 시작되는 첫날이다. 오늘부터 마음의 고삐를 죄기로 했다. 오늘부터 아침에 한시간 좌선을 하기로 했다.
 
아침이 되면 늘 새롭다. 마치 새로 태어난 것 같다. 아침이 되면 정신이 맑다. 마치 흙탕물이 가라 앉는 듯한 마음이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좌선을 시작하기 전에 행선을 했다.
 
오랜만에 행선을 해본다. 백권당 행선대에서 행선한 것이다. 금이 그어진 행선대를 말한다. 작년 우안거 들어가기 전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행선을 할 때 배운대로 한다. 육단계 행선을 말한다. 발을 떼고, 올리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육단계 동작을 말한다. 의도에서부터 움직임까지 면밀하게 새김하면 잡생각이 나지 않는다.
 
행선 할 때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세상의 근심걱정이 사라졌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길 바랬다. 아마 이런 것도 열반일 것이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열반에는 협의 열반이 있고 광의의 열반이 있다고 했다. 마음이 평화로우면 넓은 의미에서 열반과도 같다고 했다. 행선을 했을 때 몸이 날아 갈듯이 가벼웠다면 이는 광의의 열반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행선은 이십분 가량 했다.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죄선에 가져갈 수 있다. 그대로 방석에 앉았다.
 
추리닝바지로 갈아 입고
 
오늘 좌선은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이 큰 목적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복장이 편해야 한다. 사무실에 준비 되어 있는 추리닝바지로 갈아 입었다.
 
오늘부터 사무실에 오자마자 좌선부터 하기로 했다. 준비해 온 삶은 계란, 고구마, 토스트 한쪽을 간단히 먹고, 그리고 절구커피를 만들어 마시고 난 다음 행선을 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았다. 한시간 좌선 시동을 건 것이다.
 
한번 하기로 했으면 해야 한다. 자신과의 약속도 약속이다. 또한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그래서 “전쟁에서 백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하나의 자신을 이기는 자야말로 참으로 전쟁의 승리자이다.”(Dhp.103)라고  했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한시간 앉아 있기로 했다. 한시간 앉아 있고 난 다음에 글도 쓰고 업무도 보기로 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앉아서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했다. 마하시방식대로 한 것이다. 어떤 이는 코뿌리에 집중하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사마타가 된다.
 
코뿌리는 어디일까? 코끝이 아니다. 코의 뿌리가 되는 부분. 즉 양미간이 만나는 곳이다. 이곳에 집중하면 사마타가 된다.
 
위빠사나 수행은 관찰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지켜 보는 것이다. 마치 제삼자가 보듯이 지켜 보는 것이다. 다리가 저리다면 남의 다리 보듯이 지켜 보는 것이다.
 
마하시방식에서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라고 한다. 그러나 강한 대상이 나타나면 그곳을 지켜 본다. 관찰을 하는 것이다. 새김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음챙김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음이라는 대상을 챙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상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망상의 바다에서
 
대상을 관찰할 때 잡념이 일어난다. 나도 모르게 망상의 집을 짓는다. 대개 의도가 실린 것이다. 의도가 개입된 것이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 그러나 다시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면 ‘여몽환포영’이 된다.
 
한시간은 매우 긴시간이다. 광속으로 변하는 현시대에서 한시간 동안 눈을 감고 새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고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좌선하다 보면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몸은 꼼짝하지 않고 움직임이 없다. 그러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통제되지 않는다. 몸안에서 물질이 물질을 만들어 내는 일에 관여 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몸은 내것이 아니다.
 
마음도 내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문득문득 생각이 치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새김을 놓치면 그야말로 망상의 바다가 된다. 생각지도 못한 것이 치고 들어와서 사념의 집을 지을 때 허탈하다. 이런 이유로 마음은 내 것이 아니다.
 
몸과 마음은 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내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의 몸, 나의 마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좌선을 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몸과 마음은 내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아인 것이다.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멀리 떠나고자
 
마침내 알람소리가 울렸다. 길고 긴 한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작년 우안거 때는 사무실에 도착 했을 때 하루일과 중에 일순위로 좌선을 했었다. 이제 이를 복원하고자 한다. 오늘이 첫날이다.
 

 
재가우안거로 세상을 떠나고자 한다. 세상을 싫어하여 아주 멀리 떠나고자 한다. 어떻게 해야 세상을 잘 떠날 수 있을까?
 
니까야를 보면 ‘싫어하여 떠난다’는 정형구가 있다. 이는 ‘닙비다 위라가’를 말한다. 이를 염오와 이욕이라고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에게도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Stn.340)라고 했다.
 
부처님은 왜 세상을 떠나라고 했을까? 그것도 아주 싫어하여 멀리 떠나라고 했다. 이말은 ‘존재를 염오하라’라는 말과 같다. 이는 빠알리 원문 “nibbidābahulo bhava”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 말은 “윤회의 소용돌이에 아주 실망해서 모든 세상을 기뻐하지 않는 지각을 가져라.”(Prj.II.343)라는 뜻이다.
 
왜 수행을 하는가? 이 말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말과 같다. 존재에서 떠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다. 윤회를 끝내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다.
 
존재는 괴로움이다. 괴로움을 끝장내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대하여 싫어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계율의 항목을 지키고 다섯 감관을 수호하여, 그대의 몸에 대한 새김을 확립하라.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라고 말했다. 새김(sati)을 확립하는 것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걸어서 세상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우주선을 만들어 우주 끝까지 이를 수 있을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몸과 마음을 관찰하면 세계의 끝에 이를 수 있다. 그 세계의 끝은 ‘열반’이다.
 
수행은 열반을 목적으로 한다. 열반이란 세상의 끝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하여 싫어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는 것이다.
 
명상은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싫어하여 떠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몸에 대한 새김을 확립해야 한다. 앉아서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단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지켜 보기만 하면 된다.
 

 
테라와다불교 우안거는 7월 20일부터 시작된다. 이에 재가우안거 들어가고자 한다. 장소는 백권당 사무실이다. 하루일과 중에서 가장 먼저 좌선하고자 한다. 목표는 한시간이다. 그리고 후기를 쓰고자 한다. 생애 두 번째 재가우안거가 된다.
 
재가우안거로 세상을 떠나고자 한다.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멀리 떠나고자 한다. 나는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잘 떠날 수 있을까?
 
 
2024-07-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