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오늘도 내일도 앉을 뿐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1. 21. 19:47

오늘도 내일도 앉을 뿐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스님들은 당연히 한시간 이상 참선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생각하는가? 스님들은 본래 명상전문가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에 수많은 스님들이 있다. 그러나 담마에 대하여 글을 쓰는 스님들은 드물다. 설령 담마에 대한 글을 올린다고 하더라도 남의 글을 그대로 올리는 경우가 많다.
 
출가자의 본분사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깨달음을 향한 정진이라고 본다. 그러나 에스엔에스에서 본 스님들은 정진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소소한 일상에 대한 것이 많다.
 
어떤 스님들은 봉사활동을 한다. 재가불자들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같다. 이럴 때 이런 의문이 든다. “저 스님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것일까?”라는 의문을 말한다.
 
매일 한시간 앉아있기로 했다. 테라와다 우안거 때부터 오늘까지 매일 한시간 앉아 있다.
 
일감이 있어서 너무 바쁠 때는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서울나들이 갈 일이 있을 때 역시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이런 때를 제외하고 매일 한시간 의무적으로 앉아 있고자 한다.
 
오늘 아침에 한시간 앉아 있고자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오전 8시 11분에 앉았다가 8시 35분에 일어섰으니 불과 26분 앉아 있었던 것이다. 집중이 되지 않은 것이 크다.
 
한시간 앉아있기로 했으면 한시간 앉아 있어야 한다. 오전에 실패 했으니 오후에라도 앉아 있어야 한다.
 
해야 할 일이 많다. 일감 주문 받은 것을 처리해야 한다. 오전에 글 하나 쓰고 나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점심 이후에 일감 마무리작업을 했다. 제작 주문도 한건했다. 은행에서 볼 일도 보았다. 이렇게 하다 보니 오후가 훌쩍 지나갔다.
 

 
오늘 한시간 앉아 있어야 하는데 시간이 없다. 그러나 시간은 내기 마련이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어야 하고 아무리 급해도 화장실은 가야 한다.
 
오후 5시가 넘자 오늘 해야 할 일을 다 마쳤다. 오늘 큰 일을 몇 건 한 것이다. 이제 마음 편히 앉을 시간이다.
 
오늘 두 번째 좌선은 5시 17분에 시작되었다. 좌선을 시작하기 전에 스마트폰 메모앱에 시간을 기록해 둔다. 그리고 한시간 알람설정 스타트 버튼을 누른다.
 
매일 하는 좌선이다. 이제 더 이상 다리저림은 없다. 다리저림으로 인한 통증이 발생된다면 반갑게 맞이 할 것이다. 통증은 법을 보기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겼다. 그러나 잘 새겨지지 않는다. 부품과 꺼짐이 있는지 조차 모르겠다. 왜 그럴까? 아마 어느 정도 집중이 된 상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업무 처리하는 과정에서 집중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침과는 다른 양상이다.
 
앉아 있으면 한없이 아늑하고 편안하다. 배의 부품과 꺼짐은 있는지 조차 모른다. 이럴 때 고요가 지배한다. 그러나 귀로는 차 지나가는 소리, 전철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방해 받을 정도는 아니다.
 
요즘 해가 무척 짧아 졌다. 오후 5시만 넘으면 어둑해진다. 좌선을 할 때는 형광등을 끈다. 명상공간은 어둑어둑해진다. 시간이 갈수록 어둠은 심해진다. 어느 순간 아주 캄캄해져 있음을 알게 된다.
 
호흡이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무색계 선정으로 갈지 모른다. 네 번째 선정에 이르면 호흡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배에 더 이상 움직임이 없을 때 무엇을 대상으로 할지 모르겠다. 아마 허공을 대상으로 하지 않을까? 그렇게 했을 경우 공무변처가 되는 것일까? 그 다음에는 식무변처, 그 다음에는 무소유처, 그 다음에는 비상비비상처가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한시간 앉아 있기로 했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앉아 있어야 한다. 배의 움직임이 미세해도 망념이 생겨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집중이 된 상태에서는 망상으로 전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집중이 된 상태에서 일어난 생각은 지혜라고 볼 수 있다.
 
좌선 중에 경전적 지식이 떠 오를 때가 있다. 또한 법문 들었던 것이 떠오를 때가 있다. 모두 담마에 대한 것이다. 담마에 대한 것이 떠오를 때 이를 망념 또는 번뇌라고 말할 수 없다. 이를 ‘삼빠자나’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띠가 있으면 삼빠자나가 있다. 사띠와 삼빠자나는 어떤 관계일까? 이에 대하여 어느 스님은 탁발을 예로 든다.
 
미얀마에서 탁발행렬을 따라 가 본적이 있다. 그때 머리를 깍은 단기출가자들도 있었다.
 
단기출가자들 말에 따르면 맨발로 걸을 때 무척 조심스럽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아무 생각없이 내딛으면 가시나 유리에 찔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산행할 때 등산보다 하산이 더 어렵다. 발을 잘못 디디면 넘어질 수 있다. 낙엽에 바닥이 보이지 않아 미끄러질 수도 있다. 이럴 때 마치 탁발하는 것처럼 한발한발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탁발할 때나 등산할 때 한발한발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이런 행위는 사띠와 삼빠자나로 설명된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다치기 때문에 마음을 온통 발에 두지 않을 수 없다.
 
탁발할 때 수행승들은 눈을 아래로 뜨고 걷는다. 논서에서는 멍에의 길이만큼 아래를 보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눈을 아래로 뜨고 걸으면 매혹적 대상에서 감관이 보호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안전 때문일 것이다. 눈을 앞으로 하여 아무 생각없이 무심코 걸었을 때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좌선할 때 사띠한다. 이는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라는 밧줄로 묶어 두는 것을 말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은 마음을 배의 움직임에 묶어 두고자 하는 것이다.
 
마음을 배의 움직임에 묶어 두면 이득이 있다. 망념이 생겨나지 않는다. 설령 틈을 비집고 들어오더라도 금방 제압되어서 망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득에 대하여 삼빠자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삼빠자나란 무엇일까? 디가니까야 대념처경(D22) 주석을 보면 삼빠자나에 대하여 네 가가지로 설명되어 있다.  이는 1)삿타까(sātthaka), 2)삽빠야(sappāya), 3)고짜라(gocara), 4)아삼모아(asammoha)에 대한 것이다. 이를 각각 1)목적 또는 이익 (useful; advantageous), 2)수단 또는 적합성(beneficial; wholesome; suitable), 3)행경(pasture, suitable place), 4)무사견(absence of confusion)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사띠 있는 곳에 삼빠자나가 있고, 삼빠자나 있는 곳에 사띠가 있다. 마치 바늘과 실의 관계와도 같다. 특히 수행에서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늘 함께 한다.
 
삼빠자나 네 가지 설명에서 주목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아삼모아(asammoha)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무사견(無邪見)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다.
 
무사견은 사견없음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실재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을 말한다. 행동의 배후에는 주체가 없음을 말한다.
 
행선을 할 때 발을 앞으로 내민다. 이때 누가 가는가? 이렇게 물으면 사견이 된다. 발을 들어 앞으로 가는 것은 정신과 물질의 작용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의도가 있어서 행위를 하고 이를 새긴다. 이것이 새김(사띠)이다. 그런데 정신과 물질의 현상을 관찰하면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내가 간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올바른 알아차림이 된다. 이를 빠알리어로 삼빠자나라고 한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아마도 초심 수행자에게 수행을 하는 가장 큰 목적은 유신견을 타파하는 것으로 본다. 정신과 물질의 현상을 관찰했을 때 자아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자아라는 사견은 타파된다. 그래서 삼빠자나 네 가지 설명 중에서 아삼모아(asammoha)에 대하여 무사견으로 본다.
 
어떤 이는 명상에 대한 글을 올려 놓는다. 뒤에서 지켜 보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내가 행위한 것을 지켜 보는 또 다른 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나에 대하여 진짜 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행선이나 좌선을 해서 사띠와 삼빠자나가 있게 되면 지켜 보는 나는 없다고 말한다.

아는 마음은 단계가 있다. 한국테라와다불교 빤냐완따 스님은 아는 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첫 번째 단계가 <지각인식(想, 산냐)>입니다."

"두 번째 단계가 <알음알이, 판단식, 결정식, 분별식>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판단ㆍ분별해서 알게 된 것을 '단지 있는 그대로 아는 것' 입니다."

"네 번째 단계는 '그 아는 마음을 또다른 아는 마음이 뒤에서 지켜보는 앎' 입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대상과 대상을 아는 마음을 꿰뚫어 보는(아는) 앎' 입니다."

모두 다섯 가지 아는 마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두 번째 단계인 분별식에서 머문다. 수행을 하면 세 번째 단계인 '단지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의 상태가 된다. 사념처 수행으로 가능한 것이다.

수행을 하면 아는 마음은 깊어진다. 가장 흥미 있는 것은 네 번째 단계인 '그 아는 마음을 또다른 아는 마음이 뒤에서 지켜보는 앎'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예를 들자면, 강가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다가 문득 둘중 한 사람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남은 한 사람이 물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감각기능이 순일해지고 흙탕물같던 마음이 샘물처럼 맑고 고요해지면 알아차림의식이 자동적으로 활성화되고 정밀해지면서 '아는 마음을 또다른 아는 마음이 뒤에서 지켜보는 앎'이 생겨납니다."

아는 마음을 아는 마음이 있다고 한다. 이를 지켜 보는 마음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앎이 앎을 알고 그 앎을 또다른 앎이 지켜봅니다. 일순 앎이 사라집니다. 하나의 앎이 사라지면 뒤에서 지켜보던 앎이 사라지고, 그것을 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앎마저도 사라집니다. 그로인해 앎의 연속적 소멸을 보게 됩니다."라고 설명했다.

아는 마음도 무상하고 지켜보는 마음도 무상하다. 그럼에도 지켜 보는 마음에 대해서 한마음이라거나 궁극적 실재라고 말한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섯 번째 단계는 '대상과 대상을 아는 마음을 꿰뚫어 보는(아는) 앎' 이라고 했다. 이를 통찰지(Paññā 또는 ñāna)라고 한다.

통찰지는 무상, 고, 무아에 대한 것이다.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아는 마음도 없고 지켜 보는 마음도 없다. 바왕가의 마음도 없고 한마음도 없다. 세상만물의 근원이 되는 궁극적 실재도 있을 수 없다. 조건 지어진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아는 것이 통찰지라는 것이다.

오늘도 한시간 좌선을 마쳤다. 하다보니 1시간 8분을 하게 되었다. 한시간을 알리는 알람 스타트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시간이 되었는데 울리지 않아 확인해 보니 한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오늘도 해야 할 일을 했다. 일감이 있어서 일을 했고, 매일 의무적으로 글을 썼고, 은행업무도 보았다. 바쁜 날에 지나갈 수도 있지만 자신과의 약속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시간 보낸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앉을 뿐이다.
 
 
2023-11-2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