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애쓰지도 말고 머물지도 말고, 기대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아야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2. 3. 10:17

애쓰지도 말고 머물지도 말고, 기대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아야
 
 
책을 읽다가 멈추었다. 꼭 기억해두고 싶은 글을 발견했다. 꼭 새겨두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네 가지 정근’에 대한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발견한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만약 그 위의 도를 염두에 두고, 목적으로 하고 기대하면서 위빳사나 관찰을 했다고 하자. 그때는 위빳사나 지혜가 바른 정근 네 가지 모두를 성취하면서 생겨나기 때문에 과만을 위해 관찰할 때의 위빳사나와는 다르기도 다르고, 그 위의 여러 위빳사나 지혜들에 이전처럼 쉽게 이르지 못하기도 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482쪽)
 

 
도와 과에서 도의 증득과정에 대한 것이다. 왜 도의 증득과정에 대한 것인가? 이는  “과만을 위해 관찰할 때의 위빳사나와는 다르기도 다르고”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도와 과에 있어서 도는 한번 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과는 여러 번 일어날 수 있다. 이처럼 도와 과가 차이가 나는 것은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라는 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수다원이 되려면 반드시 도에 들어가야 한다. 사다함이 되려면 역시 도에 들어가야 한다. 이런 도는 딱 한번만 일어난다. 그러나 한번 도에 이르면 과는 여러 번 일어난다. 도의 과실을 따 먹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수행은 도에 이르기 위한 것인지 모른다. 과는 따라 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를 이루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네 가지 정근으로 도에 이를 수 있다고 써 놓았다. 이는 “바른 정근 네 가지 모두를 성취하면서 생겨나기 때문에”라는 말로 알 수 있다.
 
흔히 도(道: magga)와 과(果: phala)를 성취한다고 말한다.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늘 하는 말 중에 하나는 “도와 과를 성취바랍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런 말은 대승불교 불자들이 “성불하십시오.”라는 말과 같다. 이런 도와 과를 꽃과 열매로 설명할 수 있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다. 마찬가지로 도를 이루면 과가 성취된다. 여기서 꽃은 도로 비유되고 열매는 과로 비유된다. 여기서 꽃은 원인이고 열매는 결과이다. 이렇게 본다면 도는 원인이고 과는 결과가 된다.
 
한국불교에서 ‘도통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도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도에 들어가면 열반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도에는 어떻게 들어가는 것일까?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네 가지 정근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네 가지 정근이란 어떤 것인가? 팔정도분석경(S45.8)에 다음과 같은 정형구가 있다.
 
 
“1)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건전한 악하고 불건전 것들은 생겨나지 않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하고,
2) 이미 생겨난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은 버리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하고,
3)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일으키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하고,
4) 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여 잊어버리지 않고 증가시키고 확대시키고 계발시키고 충만하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정진이라고 한다.”(S45.8)
 

 
이와 같은 정형구는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네 가지 정근은 1)제어의 노력(律儀勤), 2)버림의 노력(斷勤), 3)수행의 노력(修勤), 4)수호의 노력(守護勤)으로 설명된다. 이를 사정근이라고 한다.
 
사정근에서 주목하는 것이 있다. 이는 세 번째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일으키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한다.(Anuppannāna kusalāna dhammāna uppādāya chanda janeti vāyamati viriya ārabhati citta paggahāti padahati)”(S45.8)라는 구절이다. 왜 이 세 번째 항을 주목하는가? 이는 수행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정근에서 수근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이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법을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 도에 들어가는 것도 수근에 해당된다. 이는 체험하지 못했던 선법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정진이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하면 불선법은 버리고 선법을 취하는 노력을 말한다. 그런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법도 일어나게 하는 것이 정진이라는 사실이다. 도와 과도 선법이기 때문에 수행을 해서 일어나게 해야 한다.
 
도에 들어가면 과가 된다. 마치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그런데 도는 한번만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마치 꽃이 한번만 피는 것과 같다. 그런데 도는 한번만 일어나지만 과는 여러 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도에 들어가는 것이 핵심이 된다.
 
도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한번 도에 들어가면 과는 저절로 따라 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마치 꽃이 피면 열매가 맺는 것과 같다.
 
꽃이 피면 아름답다. 어떤 꽃이든지 피면 아름답다. 설령 호박꽃이라도 꽃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꽃이 피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호박꽃이 피면 커다란 호박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아주 작은 감꽃도 피면 커다란 열매를 맺는다.
 
세상에 꽃이 피지 않고 열매를 맺는 과일나무는 없다. 무화과나무는 꽃이 피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꽃이 있다. 보이지 않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도에 들어가지 않고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갈 수 없다. 도에 들어가지 않고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될 수 없다.
 
여기 아홉 가지 출세간법(九出世間法)이 있다. 그것은 사향사과와 열반이다. 여기서 사향은 도에 대한 것이고 사과는 과에 대한 것이다. 사향사과의 성자가 되려면 반드시 열반에 들어야 한다.
 
열반에는 수다원의 열반이 있고, 사다함의 열반이 있고, 아나함의 열반이 있고, 아라한의 열반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각 과위마다 도가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고 과위마다 열반이 다른 것은 아니다. 열반이라는 궁극적 경지는 모두 똑 같다. 다만 남아 있는 번뇌가 다르기 때문에 구분하는 것이다.
 
네 가지 성자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열반에 들어야 한다. 이를 도에 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도에 들기 위해서는 정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없던 것을 생겨나게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일으킨다.(Anuppannāna kusalāna dhammāna uppādāya)”(S45.8)라고 했다.
 
도에 들기 위해서는 정진을 해야 한다. 그런데 정진이라는 말은 수행과 동의어라는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정진이 중요한가?
 
요즘 불교에 대하여 조금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이는 ‘마음챙김’이라는 말이다. 사띠를 마음챙김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사띠라는 말은 마음챙김 이상의 뜻이 있다. 주의기울이는 것도 사띠이고, 감각기관을 지키는 것도 사띠이고,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도 사띠이고, 부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도 사띠이다.
 
사띠라는 말은 지금 여기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또한 사띠는 부처님의 말씀을 늘 새기는 것도 해당된다. 이런 이유로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이라는 말보다 ‘새김’이라는 말로 사용한다.
 
새김이라는 말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도 볼 수 있다. 한국마하시선원의 일창스님은 사띠에 대하여 새김으로 번역해 놓았다.
 
어느 테라와다스님은 말끝마다 사띠를 말한다. 마치 대승불교 스님이 말끝마다 마음을 말하는 것과 같다. 사띠는 중요하다. 매사에 알아차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 있을까?
 
사띠는 아라한이 되었다고 해서 멈추지 않는다. 임종의 그 순간까지 사띠와 삼빠자나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행에 있어서 사띠는 어느 위치에 있을까?
 
부처님은 니까야 도처에서 37조도품을 말씀 하셨다. 그런데 37도품을 분석해 보면 정진(viriya)이 아홉 가지로 으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아홉 가지는 사념처(1), 사정근(4), 사신통(1), 오근(1), 오력(1), 칠각지(1), 팔정도(1)에서의 정진의 법을 말한다.
 
정진 다음으로 많은 것은 사띠(sati)이다. 이와 같은 사띠는 여덟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여덟 가지는 사념처(4), 오근(1), 오력(1), 칠각지(1), 팔정도(1)에서 사띠의 법을 말한다.
 
37조도품에서 정진이 사띠보다 한 개 더 많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사띠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정진에 1위 자리를 내 준 것이다.
 
지혜(pañña 는 37조도품에서 몇 개나 될까? 37조도품에서 지혜는 3위로 기록된다. 이는 다섯 가지로 사신통(1), 오근(1), 오력(1), 칠각지(1), 팔정도(1)에서지혜의 법을 말한다.
 
37조도품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서른 일곱 가지 법을 말한다. 이는 사념처(4), 사정근(4), 사신통(4), 오근(5), 오력(5), 칠각지(7), 팔정도(8)에서 법을 합산 한 것이다. 그런데 순위를 보면 1위는 정진으로 9법이고, 2위는 사띠로 8법이고, 3위는 지혜로 5법이다. 왜 정진이 사띠보다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불교수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법은 정진과 사띠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에 들기 전에 “압빠마데나 삼빠데타”(D16)라고 말씀 하셨을 것이다. 이는 “불방일정진”을 말한다. 여기서 불방일은 사띠와 같은 말이다. 항상 깨어 있어서 원하는 바를 성취하라는 말이다.
 
불교수행의 목적은 아홉 가지 출세간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는 사향사과와 열반을 말한다. 그런데 사향사과를 성취하려면 반드시 열반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열반이라는 특별한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정진을 해야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체험해야 한다. 그래서 정진을 필요로 한다. 특히 정진 중에서 세 번째 항목 수근(修勤)에 대한 것이 핵심이다.
 
도를 닦는 수행자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법은 열반이다. 이런 이유로 수행을 해야 한다. 그래서 수근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일으킨다.(Anuppannāna kusalāna dhammāna uppādāya)”(S45.8)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
 
요즘 매일 한시간 앉아 있는다. 지난 우안거때와는 요즘에는 글을 쓰고 난 다음에 좌선에 임한다. 글 쓰는 것도 집중이기 때문에 글로 인한 집중을 좌선으로 가져갈 수 있다.
 
열반은 아직 일어나지 않는 선법이다. 한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경지가 어떤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네 가지 정근으로 가능하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세 번째 수근으로 이해했다.
 

 
매일 한시간 앉아 있지만 늘 그 자리인 것 같다. 아직 위빠사나 1단계 지혜에도 이르지 못한 것 같다. 그럼에도 열반에 대한 것을 읽고 있다. 이는 열반이 어떤 상태인지, 어떻게 하면 열반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이기도 하다.
 
어떤 이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을 읽지 말라고 한다. 1권만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2권을 읽었을 때 열반에 대한 지식이 형성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열반에 대하여 개념적으로 또는 이론적으로 알았을 때 수행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이다. 열반을 체험해야 성자의 흐름에 들어갈 수 있다. 이는 도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도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꽃이 피는 것과 같다. 그런데 꽃은 한번 핀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도 또한 한번 있게 된다. 수다원이 되려면 수다원 도에 들어가야 하고, 사다함이 되려면 사다함 도에 들어가야 하고, 아나함이 되려면 아나함 도에 들어가야 하고, 아라한이 되려면 아라한 도에 들어가야 한다.
 
머리맡에는 경전과 논서가 있어서 틈만 나면 열어 본다. 요즘은 상윳따니까야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경전과 논서를 읽다 보면 새겨 두고 싶은 내용이 많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된다.
 
불교수행에서 정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진은 사띠보다 더 중요하고 지혜보다 더 중요하다. 이는 37조도품에서 정진이 차지하는 개수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정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오랫동안 새기고 싶은 구절을 발견했다. 그것은 “기대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아야 한다.”(2권, 483쪽)라는 말이다.
 
도와 과를 이루려면 정진해야 한다.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그 과 증득에 머물도록 애를 쓰면 안된다.”(2권, 483쪽)라고 했다. 그리고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계속 관찰하고 새기기만 해야 한다.”(2권, 483쪽)라고 했다, 이런 말은 기억하고 새겨 두고 싶은 말이다.
 
상윳따니까야 첫 번째 경에 ‘중도’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그것은 “벗이여, 나는 머무르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 흐름을 건넜습니다.”(S1.1)라는 말이다. 이 문장에서 “머물지도 애쓰지도 않고”라는 말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언급되어 있는 “그 과 증득에 머물도록 애를 쓰면 안된다,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말라. 계속 관찰하고 새기기만 해야 한다.”라는 말과 일치한다.
 
불교인들은 저 열반의 언덕을 건너가고자 한다. 그런데 이 언덕과 저 언덕 사이에는 폭류(暴流)가 있다는 것이다.
 
폭류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 과도하게 노력하면 휩쓸려 갈 것이다. 그렇다고 가면 있으면 빠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래서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거센 흐름을 건넜던 것입니다.”(S1.1)라고 말했다.
 
매일 한시간 좌선을 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난 다음에도 한시간 앉아 있을 것이다. 지금 시각 일요일 오전이다. 수행자에게 주말은 없다. 오늘 일요일임에도 앉아 있는다.
 
수행한다고 한다고 용을 쓰며 앉아 있어서는 안된다. 수행은 욕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도와 과를 성취하기 위하여 애쓰지도 말고 머물지도 말아야 한다. 그리고 기대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아야 한다. 오로지 계속 관찰하고 새기기만 해야 한다.
 
 
2023-12-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