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물수다원과 막행막식, 2024년 우안거를 시작하며

담마다사 이병욱 2024. 7. 21. 11:57

물수다원과 막행막식, 2024년 우안거를 시작하며
 
 
비 오는 일요일 아침이다. 방금 행선과 좌선을 끝냈다. 오래 한 것은 아니다. 행선은 10여분, 좌선은 30분 했다.
 
오늘 아침 백권당에 가는 길에 어제가 우안거 시작되는 날임을 알았다. 우안거 첫째날을 모르고 지나간 것이다.
 

 
작년 우안거를 했다. 재가우안거이다. 재가자가 안거에 들어간다고 해서 ‘재가우안거’고 이름 붙여 본 것이다.
 
작년에는 첫째날부터 마지막날까지 기록을 남겼다. 하루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주로  좌선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재가우안거는 여러모로 제약이 많다. 생업과 병행하는 것이 가장 큰 제약이다. 일감이 있으면 만사 제쳐 놓고 일순위로 해야 한다.
 
올해 우안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작년과는 달리 하려 한다. 아침에 한시간 의무적으로 앉아 있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를 삼십분으로 줄이려 한다. 그대신 점심 먹고 삼십분 앉아 있으려고 한다.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형식은 필요한 것이다. 우안거를 들어가자고 마음 먹었을 때 입재법회에 먼저 참석해야 한다.
 
한국테라와다불교 담마와나선원에서 7월 14일 우안거입재법회가 있었다. 우안거를 6일 앞두고 열린 것이다. 이는 빤냐와로 스님이 울주에서 사는 것이 이유가 크다.
 
지난주 일요일 담마와나선원에서 빤냐와로 스님을 비롯하여 열두 분의 상가스님을 모시고 입재법회가 있었다. 그때 스님은 상카라의 소멸에 대하여 법문했다.
 
수행자의 삶의 결실
 
삶에는 결실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나이가 되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도 결실에 해당될 것이다. 수행자도 결실이 있어야 할 것이다.
 
수행자의 삶의 결실은 어떤 것일까? 디가니까야 2번 경을 보면 궁극적으로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이는 “태어남은 부수어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D2.94)라는 아라한 선언으로 이루어진다.
 
빤냐와로 스님은 입재법회에서 상카라의 소멸에 대해서 법문했다. 이는 52가지 마음부수 또는 마음의 작용에 대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탐, 진, 치에 대한 것이다.
 
중학교 다닐 때 불교학교 다녔다. 그때 입학해서 배운 노래가 있다. 삼귀의와 사홍서원을 말한다. 운율에 맞추어 노래형식으로 된 것이다.
 
사홍서원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이 있다. 모든 번뇌를 끊겠다는 것이다. 중학교 1학년 청소년이 번뇌가 무엇인지도 몰랐는데 너무나도 큰 서원을 한 것이다.
 
상카라의 소멸은 번뇌를 끊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느 날 갑자기 한꺼번에 끊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꺼번에 끊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열반에 들 때이다.
 
도와 과를 이루는 순간에 대하여
 
열반을 아직 체험해 보지 않았다. 열반이 어떤 경지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책에서 보아서 알고 있고 들어서 알고 있다. 마치 사과 맛을 모르는 자가 들어서 아는 것과 같다.
 
열반은 모든 상카라가 소멸된 상태이다. 아라한이 되지 않아도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한번 열반에 들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다. 수다원이 되는 것이다.
 
수다원은 아직 모든 번뇌가 소멸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럼에도 수다원이 되었다는 것은 궁극의 경지를 맛 보았다는 말과 같다. 열반을 체험한 것이다.
 
열반의 상태는 번뇌가 완전히 소멸된 상태이다. 아직 남아 있는 번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의 경지를 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제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기 위한 수행을 할 것이다. 이것이 ‘수행도’로서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를 말한다. 처음 열반을 경험한 상태에 대해서는 ‘견도’라고 한다.
 
열반은 어떻게 체험되는 것일까? 아직까지 열반을 경험해 보지 않으니 알 수 없다. 그러나 먼저 경험한 사람의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마하시사야도는 아리야와사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성자 여덟 분)

‘아리야와사(ariy
āvāsa)’란 여덟 분의 성자를 뜻하는 ‘아리야(ariyā)’와 머 무는 집을 뜻하는 ‘아와사(āvāsa)’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아리야와사 (ariyāvāsa)’란 성자들이 머무는 집을 말합니다.
 
여덟 분의 성자란 수다원도, 사다함도, 아나함도, 아라한도, 이렇게 도의 단계에 있는 네 분,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이렇게 과의 단계에 있는 네 분, 합쳐 서 여덟 분입니다. 이 중 도의 단계에 있는 네 분은 헤아리는 정도로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어떠한 사람이다’라고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도의 단계에 있는 사람은 마음 한 찰나 정도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자의 지혜가 성숙돼 완전히 구족되면 성스러운 도로 열반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경험하는 순간은 긴 시간이 아닙니다. 1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매우 짧은 ‘마음 한 찰나’ 정도입니다. 그렇게 열반을 보고 증득 하는 한 찰나에 존재하는 개인을 ‘도의 단계에 있는 개인’이라고 부릅니다.
 
성스러운 도를 통해 열반을 경험한 뒤 바로 다음에 도와 비슷한 과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과의 마음이 생겨나는 순간부터 그를 ‘과의 단계에 있는 개인’이라고 부릅니다. 간략하게 말하면 과의 단계에 있는 네 개인으로만 성자들을 분명하게 나타낼 수 있고,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아리야와사법문, 53-54쪽)
 
여기 사향사과의 성자가 있다. 네 종류의 성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열반을 체험해야 한다. 수다원단계에서 열반을 체험해야 하고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단계에서도 열반을 체험해야 한다. 마치 열반은 통과의례와도 같은 것이다.
 
네 종류의 성자가 체험한 열반은 모두 다른 것일까? 그렇지 않다. 모두 동일하다. 궁극적 경지는 모두 같은 것이다. 다만 각각 도와 과의 단계가 되기 위해서는 해당 도와 과에 단계에 이르는 열반체험을 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남아 있는 번뇌에 대한 것이다.
 
수다원에게 남아 있는 번뇌와 사다함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다르다. 이를 초기경전에서는 열 가지 족쇄 또는 열 가지 결박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어떻게 알까?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궁극적 경지에서 나와서 반조해 보았을 때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마음은 잘 해탈했다. 어떠한 장애나 오점도 없다. 완전히 벗어났다.”(아리야와사법문, 255쪽)라고 스스로의 지혜로 아는 것이라고 했다. 이를 반조의 지혜라고 한다.
 
물수다원 이야기
 
한국불교에서는 인가제도가 있다.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 상태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심지어 인가증까지 있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마하시사야도의 아리야와사법문에 따르면 ‘물러난 수다원’ 이야기가 있다. 어느 스승이 “당신은 이제부터 수다원입니다.”라며 인가해 준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다.
 
수다원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를 말한다. 열반을 체험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열반 체험 순간은 매우 짧다. 마하시사야도에 따르면 마음 한순간이라고 했다. 그래서 “1초도 걸리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또한 도에 이어서 바로 과가 일어난다고 했다. 이것 역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요즘 유튜브를 보면 어느 비구니 스님은 수다원 인증을 한다. 자신이 판단해서 수다원인지 아닌지 알려 주는 것이다. 이런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마하시사야도는 아리야와사법문에서 인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러난 수다원)

예전에 어떤 거사가 본승을 찾아왔습니다. 그 거사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견문도 어느 정도 갖춘 상류층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스승 밑에서 수행을 한 적이 있는데 수행을 마쳤을 때 그 스승이 “당신은 수다원입니다”라고 인가했다는 말을 본승에게 했습니다.

 
성자법과 관련해서 부처님을 제외한 다른 제자 아라한이나 장로가 그렇게 인가해 주었다는 사실은 삼장 어디에도 없습니다. 본승은 부처님의 제자가 다른 이를 인가해서는 안된다고 항상 말합니다. 지혜단계 법문만 설합니다. 지혜단계 법문과 비교해서 스스로 결정하도록 지도합니다.
 
그 거사는 스승이 자신을 수다원이라고 인가 해서 자신도 스스로 수다원이 됐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다원이기 때문에 오계도 잘 지키려 했습니다. (아리야와사법문, 243-244쪽)
 
 
참으로 코미디 같은 이야기이다. 스승이 수다원이라고 인가해 주어서 수다원처럼 살겠다고 말한 것이다. 가장 먼저 오계를 잘 지키고자 한 것이다.
 
오계도 지키지 않은 자에 대하여 수다원이라고 인정해 주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인가 받은 자는 오계를 잘 지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진짜 수다원이 아니기 때문에 계율을 어길 수 있다. 그럴 경우 “수다원도 술을 마실 수 있다.”라거나 "수다원도 살인할 수 있다.”라는 자기합리화가 일어날 것이다.
 
수다원이 되면 사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발견된다. 사악처에 떨어질 정도로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수다원이 살생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음행을 하고, 술을 마신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가짜 수다원이라고 보아야 한다.
 
스승은 거사에게 수다원 인가증을 주었다. 오계도 지키지 못하는 거사는 그 순간부터 오계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거사는 어떤 큰 스승에게서 “자네는 아직 법을 얻은 것이 아니네. 수다원과는 거리가 머네.”(244쪽)라는 말을 들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거사는 “이제 오계도 지키지 않으렵니다.”라고 말했다.
 
깨달음과 막행막식
 
마하시사야도의 아리야와사법문에 따르면 수다원이 되면 오계는 자동으로 지켜 지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네 종류의 성자 모두에게 해당된다. 또한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고 했다.
 
앙굿따라니니까야 학습계율의 경(A3.86)이 있다. 경에서 수다원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한 수행승이 계행을 구족하였더라도 삼매가 그만하고 지혜가 그만하다면, 그는 작고 사소한 학습계율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범하기도 하고 복귀하기도 한다.” (A3.86)라고 한다.  
 
수다원도 학습계율(sikkhāpada)을 범할 때가 있다. 수백 가지나 되는 구족계에서 사소한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승단추방에 해당되는 계를 범하지 않는다. 당연히 오계는 범하지 않는다.
 
수다원이 되면, 즉 성자의 흐름에 들면 사악처는 부수어진다. 그래서 “그는 세 가지 결박를 끊어 버린 뒤에 최대한 일곱 번 다시 태어나는 님으로 최대 일곱 번 신들이나 인간으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괴로움의 종식을 이룬다.” (A3.86)라고 했다.
 
거사는 수다원이 아니었다. 수다원이라고 인가해 주어서 수다원으로 살고자 했다. 가장 먼저 오계부터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을 것이다. 술을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수다원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고 오계를 지키고자 노력하지 않았다. 당장 술부터 마셨을 것이다.
 
깨닫지 않았음에도 깨달았다고 인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막행막식해도 용서될 것이다. 본래 깨달은 자는 걸림 없이 사는 것으로 볼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다원이 아님에도 수다원이라고 인가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수다원은 술도 마신다.”라거나, “수다원은 다른 생명도 죽일 수 있다.”라고 자기합리화를 할 것이다. 그래서 ‘술꾼 수다원’이 되고 ‘파계 수다원’이 되는 것이다.
 
개미 한마리 죽일 수 없는 것은
 
수다원이 되면 오계를 어길 수 없다. 개미 한마리 죽일 수 없다. 이는 다음과 같은 주석의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다른 생에 태어나 머물면서 자신이 성자인 사실을 모른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성제자에게 만약 “이 개미를 죽이면 우주 전체를 다스리는 전륜성왕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더라도 그 성제자는 개미를 죽일 수 없다. 또 다르게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성제자에게 “만약 그대가 이 개미를 죽이지 못한다면 내가 그 대의 머리를 자르겠다”라고 말해도 그렇게 말하는 이가 그 성제자의 머리를 자르는 일만 있게 될 것이다. 그 성제자는 개미를 죽이지 못할 것이다.”(MA.iv.75, 아리야와사법문 265쪽)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수다원이 되면 개미 한마리 죽일 수 없다. 오계는 자동으로 지켜 지는 것이다.
 
미얀마 선원에서 수행자는 모기를 잡을 수 없다. 모기 잡는 도구도 없고 약도 없다. 다만 곤충 채집하는 채는 있다. 채로 잡어서 풀어 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자는 농사를 지어서는 안된다. 농사를 짓다 보면 벌레를 죽이게 할 수 있다.
 
깨닫지 못한 자를 인가하게 되면
 
수행자는 여름에 안거를 난다. 우기가 되면 한군데에서 보내는 것이다. 우기에 지렁이와 같은 생물을 밝아 죽일 수 있다. 수다원이 되면 개미 한마리 죽일 수 없는데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수다원이 아님에도 수다원이라고 인가를 하면 계가 무너질 수 있다. 어떤 경우인가? 이에 대하여 “수다원에게는 아직 감각적욕망애착이나 분노 등의 번뇌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목숨이 위험이 닥치는 매우 긴급한 상황과 무너졌을 때는 계가 무너질 수 있다.”(264쪽)라고 자기합리화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자신의 범부마음으로 유추하고 궁리해서 말하면 그러한 말은 위에서 언급된 식카숫따(A3.86) 등 부처님 가르침을 오염시키고 무너뜨리는 것입니다.”(264쪽)라고 했다.
 
깨닫지 못한 자를 깨달았다고 인가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된다. 깨달았다고 하여 막행막식하는 것이다. 술꾼 깨달은 자, 파계 깨달은 자가 양산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가는 삼장에 그 어디에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하시사야도는 “본승은 부처님 제자가 다른 이를 인가해서는 안된다고 항상 말합니다. 지혜단계 법문만 설합니다.”(244쪽)라고 말했다.
 
단지 지혜단계 법문만 할 뿐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를 알아 볼 수 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범부는 깨달은 자를 알아 볼 수 없다. 왜 그런가? 정신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스승은 제자가 어느 단계에 있는지 알 수 있다. 왜 그런가? 그 단계를 다 거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문답 할 수 있는 것이다.
 
스승은 제자가 어느 단계에 있는지 스스로 알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지혜단계 법문만 해준다. 인가해 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단계 법문과 비교해서 스스로 결정하도록 지도합니다.”(244쪽)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혜단계 법문이란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위빳사나 지혜를 모두 갖췄다고 생각되는 수행자, 한 달 반이나 두 달 등 충분한 시간 동안 수행했다고 생각되는 수행자에게 들려주는 법문이다.”(244쪽, 165번 각주)라고 설명되어 있다.
 
한마리 두꺼비를 발견하고
 
우기에 우안거에 들어갔다. 오늘 둘째날이다. 한국불교에서는 이미 하안거가 진행중에 있다. 꼭 두 달 차이가 난다.
 
오늘 아침 우산을 쓰고 안양천을 건넜다. 길에서 한마리의 두꺼비를 발견했다. 마치 어른 주먹만한 크기이다. 비가 와서 뛰쳐 나온 것일까?
 

 
두꺼비는 어떻게 해서 두꺼비로 태어났을까? 한번 두꺼비로 태어나면 두꺼비로 일생을 살다가 죽어야 한다. 죽어서는 무엇이 되는 것일까?
 
인간으로 태어나서 살고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접해서 부처님 가르침으로 살고 있다. 마침내 우안거하기에 이르렀다.
 
축생으로 태어나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부처님 가르침을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초기경전과 논서에 따르면 성자의 흐름에 들지 않는 한 어떤 세계에서 태어날지 알 수 없다. 아무리 보시를 하고 아무리 계를 잘 지켰어도 궁극적 경지, 즉 열반을 체험하지 않으면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와 같은 악처에 태어날 수 있다.
 
정법이 살아 있을 때 수행하라고 말한다. 지금은 정법시대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은 수행하기 좋은 시대이다. 무엇보다 먼저 길을 개척한 스승들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시차는 있지만 남겨진 책으로 알 수 있다. 마하시사야도의 논서와 법문은 최상이다.
 
한 발걸음도 새김 없이 무심코 내디뎌서는 안 돼
 
이번 안거기간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까? 늘 새김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는 레디사야도의 다음과 같은 게송이 와 닿는다.
 
 
감이라는 몸의 자세에서 발걸음마다 계속해서 ‘나는 간다. 나는 간다’라고 발에만 머무는 마음을 생겨나게 하면서 가야 한다. 한 발걸음도 새김 없이 무심코 내디뎌서는 안 된다.”(198쪽)
 
 
한걸음도 새김 없이 무심코 내디뎌서는 안된다는 말이 와 닿는다. 이는 “갈 때는 간다고 분명히 안다.”(D22)라는 경전적 근거에 따른다.
 
매사에 싸띠(새김)가 있어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도 새김하며 천천히 일어나야 한다. 이때 일어나려는 의도를 새겨야 한다. 그리고 일어나는 물질적 현상을 새겨야하고, 일어나는 아는 마음을 새겨야 한다.
 
무엇이든지 무심코 해서는 안된다. 갈 때는 간다고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간다는 것은 가려는 마음 때문에 움직이는 물질이 생멸하고 있는 것뿐이다.”(199쪽)라며 사실대로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안거에서는 항상 새김이 유지되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의도적으로라도 노력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자신이 보호된다. 그래서 마하시사야도는“번뇌라는 위험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보호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새김이라는 보호장치입니다.”(156쪽)라고 말했다.
 

 
법을 지키면 자신이 보호된다. 담마를 따르면 담마가 보호해 준다. 그래서 “가르침은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수호하고 잘 닦여진 가르침은 행복을 가져온다.”(Thag.303)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새김이 있으면 자신을 보호해 준다. 번뇌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이다.
 
행선이나 좌선할 때 새김이 있으면 번뇌가 치고 들어올 수 없다. 일상에서도 늘 새김을 유지하고 있으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사고가 방지된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운명이다. 자신의 안전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마음을 능숙하게 다루어야 한다. 늘 새김을 유지하는 것이다. 한걸음도 무심코 걸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이번 우안거 잘 해낼 수 있을까?
 
 
2024-07-2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