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재가우안거 6일째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딱 자신의 수준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나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 백권당으로 향하는 길에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이는 “남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것은 수희찬탄(隨喜讚嘆)이라는 말 때문이다.
긴 글을 쓴다. 사람들은 대체로 긴 글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광속으로 변하는 시대에 시간낭비라 생각할지 모른다. 반면에 사람들은 대체로 감각적인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사진 같은 것이다. 페이스북이나 카톡이나 밴드와 같은 에스엔에스에 올려져 있는 콘텐츠를 보면 알 수 있다.
감각의 시대에 긴 글은 패싱(passing)의 대상이 되는 것 같다. 오전일과를 거의 다 투입해서 완성된 글에 대한 공감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서너시간 걸려 작성한 글을 오분도 안되어서 다 읽으려고 하다 보니 패싱 되는 것 같다.
수희찬탄하면
수희찬탄이라는 말이 있다. 타인의 성공과 번영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아름다운 마음이다. 불교에서는 사무량심 가운데 하나이다. 자비희사(慈悲喜捨) 중에 희(喜)에 속하고 빠알리어로는 무디따(mudita)라고 한다.
수희찬탄하면 모두 자신의 것이 된다. 세상에 이렇게 공덕 짓기 쉬운 것이 어디 있을까? 에스엔에스에서‘좋아요’라며 거들기만 해도 공덕이 되는 것이다. 모두 자신의 것이 된다.
지식인들은 대체로 공감에 인색한 것 같다. 잘 알려진 이름의 사람을 보면 공감능력이 결여된 듯 하다. 페이스북과 같은 에스엔에스에 ‘좋아요’라는 이모티콘 하나 누르는데도 인색한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좋아요’이모티콘을 잘 눌러 준다. 콘텐츠가 좋으면 하트모양의 ‘최고에요’이모티콘을 눌러 준다. 더 공감하면 댓글을 달아 준다. 대개 “사두! 훌륭합니다.”라며 수희찬탄해준다.
매일매일 공덕 짓는다. 타인의 성공과 번영을 축하해주는 것이다. 페이스북에 ‘좋아요’또는 ‘최고에요’라는 이모티콘을 눌러 주는 것, 그리고 “사두! 훌륭합니다.”라며 수희찬탄하는 것은 공덕 짓는 것이다. 거들기만 해도 내 것이 된다. 세상에 이렇게 공덕짓기가 쉬운 것이 어디 있을까?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하다 보니
집에서 백권당까지는 1.4키로 거리이다. 천천히 걷는다. 거의 삼십분 걸린다. 한발이라도 무심코 내딛어서는 안된다는 레디 사야도의 게송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아침에 정신은 맑다. 뉴스를 접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잠 자고 나면 리셋트 되는 것과 같다. 이런 상태가 계속 유지되고자 하는 것이다.
걸어서 일터에 가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자동차를 몰고 간다면 신경 쓰인다. 사고 날까 염려 되는 것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들이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아침의 평온이 깨질 수 있다.
아침에는 아무런 사람과 만나지 않는다. 가족도 잘 시간이다. 혼자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일터로 향한다. 한걸음 새김을 유지하며 걸으려고 노력한다. 사무실에 도착해서도 혼자이다.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하다. 세상과의 단절도 혼자 있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 뉴스와의 단절이다.
뉴스를 보지 않는다. 뉴스를 보면 마음이 혼란스러워진다. 일방적 전달이다. 보기 싫은 것도 보아야 하고 듣기 싫은 것도 들어야 한다.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것은 일방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지난 대선 이후 뉴스는 보지 않는다.
늘 혼자 있다. 아침에 일찍 나와 아침을 먹을 때도 혼자 먹는다. 커피도 혼자 타 마신다. 누가 해 줄 사람이 없다. 쓰레기통도 혼자 비워야 한다. 사무실 바닥청소도 혼자 한다. 컴퓨터에 문제가 생기면 혼자 해결해야 한다.
혼자 산지 오래 되었다. 그렇다고 가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혼자 일하고 혼자 명상하기 때문에 혼자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프리랜서는 자기절제가 있어야 한다. 혼자 사는 사람도 자기절제가 있어야 한다. 자기절제가 없다면 막행막식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홀로 일한지 오래 되었다. 2005년 직장을 그만 두 이래 홀로 살고 있다. 자영업자, 일인사업자로서의 삶이다.
명상은 정신이 맑을 때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 아침인가 싶으면 점심시간이고, 저녁시간이다. 하루가 빛의 속도로 흘러가는 것 같다. 월요일인가 싶으면 금요일이다. 이렇게 본다면 곧 연말이 될 것이다.
빛의 속도로 가는 세월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헛되이 시간을 보낼 순 없다. 무어라도 한가지 해야 한다.
일인사업자가 되고 나서 한 것이 있다. 글쓰기이다. 2006년부터 썼다. 매일 쓰다시피 했다.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숙제하지 않은 것 같아서 견딜 수 없다.
아침 정신이 맑을 때 글이 쓰고 싶어진다. 그러나 요즘 이런 욕구를 억제한다. 명상하고 나서 글을 쓰는 것이다.
요즘 테라와다불교 우안거철이다. 재가불자라고 해서 안거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우안거에 들어갔다.
재가안거라 하여 특별한 것은 아니다. 생활속에서 명상하는 것이다. 행선과 좌선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 아침 행선을 십여분 했다. 좌선은 삼십분 했다. 한시간 앉아 있어야 하나 그렇게 하지 못한다. 힘이 부친다. 한시간 앉아 있을 힘이 부족한 것이다. 그 대신 점심먹고 삼십분 앉아 있고자 한다. 토탈 한시간 되는 것이다. 더 욕심 낸다면 저녁에도 앉아 있는 것이다.
저녁이 되면 들뜬다. 이는 마음이 오염되어 있음을 말한다. 아침과는 달리 마음은 혼탁해져 있다. 메일을 열어 보는 순간 근심걱정이 될 수도 있다. 유튜브를 시청하고 나면 머리의 한켠을 차지한다. 이런 상태에서 앉아 있기 힘들다. 더구나 저녁이 되면 어둑해지는데 더욱 앉아 있기 싫어지는 것이다.
글을 쓸 때는 솔직하게 불리한 것도
명상하는 삶을 오래 전부터 살아 왔다. 그러나 큰 진전은 없다. 맨날 제자리 걸음 하는 것 같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재가에서 수행하는 것에 한계가 있는 것일까?
명상홀에서 수행하면 수행이 잘 될지 모른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커다란 홀에서 좌선하면 잘 될지 모른다. 그러나 숙소에 돌아와서 하지는 않는다. 내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한다. 자신이 이런 상태라면 상대방도 이런 상태일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이다.
종종 이런 생각을 해본다. “저 사람은 내가 하는 것처럼 사는 것일까?”라는 의문이다. 매일 아침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고 있는데 저 사람도 그렇게 하는 것인 것 생각해 보는 것이다.
페이스북에는 지식인들이 많다. 페이스북은 지식인들의 놀이터 같다. 대부분 점잖은 글을 쓴다. 불리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한 집안의 어른처럼 글을 쓰는 것 같다.
이름이 있는 사람, 지식이 있는 사람, 지위가 있는 사람은 매우 조심하는 것 같다. 조금이라도 흠결이 나면 안되는 것 같다. 글을 하나 올릴 때도 무척 조심하는 것 같다. 용어도 선택하여 올린다. 속어나 비어를 쓰지 않는다. 이러다 보니 무결점인 것처럼 보인다. 때로 꼰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글을 쓸 때 솔직하게 쓰고자 한다. 있는 그대로 쓰고자 한다. 그러다 보니 불리한 것도 쓴다. 숨기고 싶은 것도 표현 하는 것이다. 부자나 학자나 성직자에게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재가자가 수행한다고 나대는 것은
부자들도 에스엔에스를 할까? 페이스북에 큰 부자를 아직 보지 못했다. 이름난 부자를 말한다. 왜 그들은 에스엔에스를 하지 않을까? 아마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노출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부자들은 몸조심한다. 자신이 부자라고 알려지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이는 본능이라고 볼 수 있다. 빼앗길 것을 염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담을 쌓고 살아가는 것 같다.
고등학교는 사대문 안에 있었다. 서울성벽을 깔고 지어진 경신고등학교에 다녔다. 소위 뺑뺑이로 들어간 것이다.
고교시절 성채 같은 집을 보았다. 학교 후문으로 해서 성곽길을 따라 삼선교까지 내려 오는 길에 보는 부자집은 마치 성을 보는 같았다.
부자들은 노출을 싫어한다. 자신의 부를 지키기 위한 수단인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담을 쌓고 살아간다. 성북동이나 혜화동에서 본 성채 같은 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그런 것 같았다.
부자만 세상사람들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많이 배운 사람도 성을 쌓고 살아간다. 종교인들도 성을 쌓고 살아간다.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당연히 페이스북과 같은 에스엔에스를 하지 않는다. 해서 이익 될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이름 있는 학자나 성직자를 본다. 스님들도 있다. 이들의 글을 보면 대단히 조심스러워 하는 것 같다. 불리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성찰하는 이야기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이미지 관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숨어서 살고자 하는 것 같다.
오늘 아침 좌선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저 스님도 좌선을 할까?”라는 생각해 보았다. 내 기준으로 본다면 당연히 좌선할 것이다. 그러나 스님의 글을 보면 수행에 대한 것은 거의 없다. 차 마신 이야기, 봉사하는 이야기, 세상 돌아 가는 이야기는 많지만 수행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스님과 같은 수행자는 당연히 수행을 하리라고 본다. 기본이기 때문에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재가자가 수행한다고 나대는 것은 매우 경솔한 것이 된다.
경전을 읽을 때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불교학자들은 경전을 읽을까?”에 대한 것이다. “많이 배운 지식인들은 니까야를 읽을까?”에 대한 것이다. 이는 내 기준으로 본 것이다.
내가 경전을 읽기 때문에 나 보다 더 많이 배운 사람들은 당연히 읽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본다면 조금 배운 자가 경전 읽는다고 나대는 것은 매우 경솔한 것이다.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글을 쓰다 보면 허물을 짓는 것 같다. 가만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솔직하고 진실되게 쓴다고 하여 불리한 것도 쓰고 성찰하는 것도 썼을 때 모두 허물이 되는 것 같다.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라는 말이 있다. 최근 유튜브에서 본 것이다. 문화평론가 김갑수가 유튜브 ‘경향티비’에서 말한 것이다. 어떤 내용인가? 한겨레신문 성한용이 이번 총선 전에 이재명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글쓰기가 건방이 될 수 있다. 쓰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쓴다는 것은 자만이 될 수 있다. 불리한 것도 쓰고 비속어를 사용해서 쓰는 것도 건방진 것이다. 점잖은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건방 떠는 것이다.
선어록에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는 말이 있다. 입을 열기만 하면 어긋난다는 것이다. 깨닫지 못한 범부가 내뱉는 말은 진실로 보기 어려움을 말한다.
진리를 말하는 자는 깨달은 자이다. 깨달은 자는 결코 허황된 말이나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깨달은 자는 진실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깨닫지 못한 자의 말은 진실된 말이 아니기 쉽다.
매일매일 글을 쓴다. 이 말은 ‘매일매일 구업짓는다’라는 말과 같다. 왜 그런가? 깨닫지 못한 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런 글에 대하여 어떤 이는 좋지 않게 볼지 모른다. 어떤 이는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래서 ‘좋아요’나 ‘최고에요’와 같은 추천을 하지 않는 것일까?
나이 먹어서 글 쓰는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손자 볼 나이에, 이미 손자 볼 나이가 지난 나이에 글을 쓰는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점잖은 사람에게는 경솔하게 비추어질 것이다.
가족이 보아도 부끄럼 없는 글을
글쓰기 한지 18년 되었다. 글쓰기 할 때 하나의 원칙을 세웠다. 절대 가족이야기는 쓰지 않는다. 이것은 처가 요청한 것이다. 하나 더 있다. 길이 남는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이다.
글을 쓰면 인터넷에 올려 놓는다. 요즘은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동시에 게재한다. 이런 글은 가족이 볼 수도 있다.
가족이 보아도 부끄럼 없는 글을 쓰고자 한다. 날자를 쓰고 서명하는 이유가 된다. 글에 대한 무한책임이다. 그럼에도 쓰고 나면 창피하고 부끄럽다.
창피한 것은 외면적인 부끄러움이다. 내면적인 것을 가감 없이, 불리한 것도 쓰고, 성찰하는 것도 썼을 때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모두 허물이 되는 것 같다.
명상 하면 마음이 충만 되는데
어떤 이는 글쓰기를 수행으로 본다. 글쓰기 자체를 수행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타당한 측면이 있다. 글 쓴다는 것 자체가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 할 때 마음이 혼탁하면 글을 쓸 수 없다. 탐욕에 가득 차 있을 때 분노로 끓을 때 글을 쓸 수 없다. 마음이 들떠 있을 때도 글을 쓸 수 없다. 막 잠에서 깼을 때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이 되었을 때 글이 잘 나온다.
아침이 되면 쓰고 싶어서 안달이다. 이런 유혹을 참는다. 행선과 좌선이 끝난 다음에 쓰고자 하는 것이다.
아침에 글을 먼저 쓰면 무언가 허전하다.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이는 명상을 해 보면 알 수 있다.
명상을 하면 마음은 충만 된다. 행선할 때 다리의 움직임에 대하여 새김이 유지되면 마음은 충만 된다. 좌선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을 놓치지 않고 새김하면 마음이 꽉 찬 것 같다.
죄선하면 왜 마음이 충만 되는 것일까? 이는 새김에 달려 있다. 배의 부품과 꺼짐 전과정에 대하여 놓치지 않고 싸띠(새김)이 유지될 때 마음은 충만 된다.
코의 뿌리에 마음을 두면
죄선이 늘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조금만 새김을 놓치면 마음은 망상의 놀이터가 된다. 이를 알아 차렸을 때 기운이 빠진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집중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나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코끝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금요니까야시간에 전재성 선생이 말한 것이 있다. 그것은 코끝이라는 말이다. 아마 대념처경에 있는 ‘빠리무캉싸띠’라는 말을 염두에 둔 것 같다.
빠리무카(parimukha)라는 말은 ‘얼굴둘레’ 또는 ‘코둘레’라는 말과 같다. 이를 코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진짜 코끝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코의 뿌리를 말하는 것이다.
코끝에 마음을 두면 쉽게 번뇌를 제압할 수 있다. 이는 밝음에 대한 지각에 해당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해태와 혼침이 발생 했을 때 “빛에 대한 지각활동을 기울이고, 대낮에 대한 지각을 확립해야 한다.”(A7.61)라고 했기 때문이다.
좌선은 번뇌와 망상과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새김을 확립해야 한다. 동시에 빛에 대한 지각이 있어야 한다.
빛에 대한 지각은 빠알리어로 ‘알로까산냐(ālokasaññā)’라고 한다. 이를 한자어로 ‘광명상(光明想)’이라고 한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에 따르면 ‘생멸의 지혜단계’에서 발생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번뇌망상에 시달리는 자는 코끝에 마음을 두어도 효과가 있다.
전재성 선생은 번역에 임하기 전에 반드시 좌선한다고 말했다. 마음을 명경지수처럼 맑게 해 놓고서 번역에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금요니까야멤버들에게 꿀팁을 하나 알려 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코끝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코끝은 어디일까? 정말 코끝은 아니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코끝이 아니다. 그것은 코의 뿌리이다. 양미간 사이를 말한다.
좌선 중에 코끝, 아니 코의 뿌리에 마음을 집중해 보았다. 환하게 밝아 옴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빛을 보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마음이 환해지는 것을 느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캄캄한 밤에 불을 켜면 온세상이 밝아지는 것 같다. 번뇌와 망상이 들끓듯 할 때 양미간에 마음을 집중했을 때 마음이 밝아 졌다. 그 상태에서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겼다. 번뇌와 망상이 없어 졌을 뿐만 아니라 배의 부품과 꺼짐의 처음과 끝도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수행도 요령이 있어야 할까? 행선이나 좌선도 요령이 있을까? 어느 정도 있어야 할 것 같다. 번뇌망상이 폭풍 칠 때 코끝, 즉 코의 뿌리인 양미간에 마음을 두었을 때 어느 정도 해방되었다. 그 상태에서 부품과 꺼짐을 보았을 때 마치 손전등으로 비추어 보는 것처럼 처음과 끝을 보는 것 같았다.
명상은 밝음 속에서 해야 한다. 어둠 속에서 명상을 하면 온갖 번뇌망상에 시달린다. 이럴 경우 밝게 만들어야 한다. 코의 뿌리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마치 대낮처럼 밝아 졌을 때 개미 지나가는 것도 보일 것이다. 이런 것도 하나의 명상요령 아닐까?
재가우안거 6일째
오늘 재가우안거 6일째이다. 오늘도 긴 글을 썼다. 아침에 글쓰기를 먼저 하려는 욕구를 억누루고 명상을 먼저 한 것이다.
명상할 때는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한다. 마음이 뉴스 등으로 오염되지 않아야 한다. 차를 타고 가는 것보다 걸어 다니는 것이 더 좋다. 마음이 외부 대상에 오염되지 않은 상태에서 행선과 좌선에 임하는 것이다.
좌선한지는 오래 되었다. 십년도 넘었다. 그러나 매년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 같다. 남들도 그런 것일까? 내 기준으로 남을 판단할 수 없다.
저기 많이 배운 사람은 명상을 매일 하는 것일까? 저기 스님은 니까야와 같은 경전을 매일 읽는 것일까? 내 기준에서 판단해 보았다. 공부를 많이 해서 최고의 학위를 가진 사람은 매일 명상하고 매일 경전을 볼 것이라고 본다. 또한 스님은 당연히 명상이 생활화되어 있고 경전도 매일 볼 것이라 믿는다.
명상이 진척이 없다. 위빠사나 1단계 지혜에도 이르지 못한 것 같다. 내가 이런 상태이니 남들도 이런 상태라고 볼 수 있을까?
나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할 수 없다. 그들이 비록 침묵하고 있지만 경전도 보지 않고 명상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스님이 매번 차 마시는 글을 올리지만 그렇다고 하여 좌선도 하지 않고 경전도 읽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매일 긴 글을 쓰고 있다. 가족이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글을 쓰고자 한다. 그럼에도 어떤 이에게는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라고 볼 수 있다. 수희찬탄 하지 않는 것도 이에 해당될 수 있다.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오늘도 내일도 행선을 하고 좌선 할 것이다. 이제 점심좌선은 생활화 되었다. 더 나가 저녁좌선도 하려고 한다. 이런 것에 대하여 글을 쓰는 것도 허물이 될 것이다.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2024-07-2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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