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대상과 새기는 마음이 붙어 있는 것처럼

담마다사 이병욱 2024. 8. 2. 11:19

대상과 새기는 마음이 붙어 있는 것처럼
 
 
일순간 온세상이 고요해졌다. 그렇다고 선정에 든 것은 아니다. 밖에 차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다. 불과 몇 초에 지나지 않는다.
 
재가우안거 14일째이다. 어느 날과 마찬가지로 자리에 앉았다. 행선을 막 마치고 앉은 것이다.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가져 온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집중이라기 보다는 새김이다.
 
행선을 하면 집중이 된다. 발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하면 다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한쪽 발을 디디고 누름과 동시에 다른 한쪽 발 뒤꿈치를 들어 올린다. 이런 과정이 끊임 없이 진행되었을 때 구름 위를 걷는 것 같다.
 
막바로 자리에 앉지 않는다. 막바로 앉으면 흥분 된 채로 앉는 것과 같다. 이럴 때는 준비기간이 필요하다. 행선만한 것이 없다.
 
마하시전통에서는 행선을 좌선과 동등하게 여긴다. 행선에 대하여 좌선을 위한 몸풀기 정도로 본다면 잘못이다. 행선은 좌선 못지 않은 훌륭한 수행방식이다.
 
행선에서 형성된 새김(sati)을 좌선으로 가져 오고자 했다. 한발 뗄 때 무심코 떼지 말라고 했는데 행선에서 형성된 새김을 좌선에 가져 오면 새김이 유지될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은 새김이 핵심이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새김을 잃으면 안된다. 새김을 잃으면 정신을 잃는 것이나 다름 없다. 매혹적인 대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나 다름 없다.
 
저녁에도 앉아 있고자
 
자리에 앉았다. 늘 앉는 자리이다. 아침에도 앉고 점심에도 앉는다. 이번 우안거에서 각각 삼십분씩 앉아 있는다.
 
한시간 앉기는 긴 시간이다. 재가우안거는 삼십분이 적당하다. 생업이 있는 자가 안거에 들어 갔을 때 한시간은 너무 길다. 삼십분은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적절한 시간이다.
 
이번 우안거는 점심 때도 앉아 있는다. 작년 우안거 때는 아침에 한시간만 앉아 이었다. 이번 우안거는 아침에 삼십분, 점심에 삼십분 앉아 있는다. 이제 서서히 정착되어 가는 것 같다.
 
이번 우안거에서 저녁에 앉아 있는 것도 목표로 한다. 저녁 밥을 먹고 앉아 있는 것이다. 아직 시행해 보지는 않았다.
 
저녁이 되면 마음이 혼란스럽다. 마음이 오염되어서 마음이 들떠 있다. 아마도 유튜브를 많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정치관련 유튜브가 영향을 준다.
 
저녁에 앉아 있게 되면 하루 세 번 앉아 있게 된다. 아침, 점심, 저녁에 각각 삼십분씩 않게 되어 토탈 한시간 반 좌선하게 된다. 언제나 저녁에 앉아 있게 될까?
 
명상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장소는
 
일순간 고요했다. 차 소리가 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다 냉장고 모터소리도 그쳤다. 이런 때는 많지 않다.
 
재가우안거는 백권당에서 나고 있다. 사무실을 반으로 나누어 명상공간을 만들었는데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갖가지 소음에 시달린다.
 

 
사무실은 도로 바로 옆에 있다. 더구나 3층이다. 그러다 보니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시끄럽다. 때로 오토바이 지나는 소리도 요란하다. 전철 지나가는 소리가 나면 천둥 치는 것 같다.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도 무시할 수 없다.
 
소음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 좌선을 할 때 순간적으로 고요할 때가 있는데 이런 고요를 만끽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없는 깊은 산중이 좋을 것이다.
 

 
종종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동굴에서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동굴도 고요하지 않을 것 같다. 천장사 ‘혜월동굴’에 잠시 앉아 있어 보았는데 새소리가 요란스러웠다. 산중이라고 해서 소음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
 
수행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장소는 어디일까? 산중에 있는 암자나 동굴보다 사막에 있는 동굴이 적합할 것 같다.
 
2013년 실크로드성지순례 갔었다. 그때 천불동에도 갔었다. 돈황 천불동과 투르판에 있는 베제크리크 천불동을 말한다.
 

 
왜 사막에 동굴을 만들어 수행했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소음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사막에서는 고요 그 자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여러 맛이 있지만
 
소음에서 완전히 해방 되었을 때 일시적으로 고요를 맛 보았다. 이대로 계속 있고 싶었다. 그러나 몇 초 후에 자동차 소음이 다시 나기 시작했다. 빨간불이 꺼지고 파란불이 켜졌을 때 자동차는 사정없이 질주하는 것이다. 그 결과 고요도 깨지고 말았다.
 
이 세상에는 여러 맛이 있다. 그러나 법의 맛만 못할 것이다. 법구경에서는 “가르침의 보시는 일체의 보시를 이기고 가르침의 맛은 일체를 이긴다.” (Dhp.354)라고 했다. 법의 맛이야말로 최상의 맛임을 말한다.
 
일시적으로 고요하게 되었을 때 법의 맛을 보았다. 그렇다고 선정이나 통찰과 같은 어떤 경지에서 체험 되는 맛은 아니다. 단지 소음에서 해방 되었을 때 새김만 있는 상태를 말한다. 새김이란 무엇일까?
 
일상에서 새김이 유지되려면
 
빠알리 싸띠(sati)에 대하여 새김이라고 말한다. 싸띠에 대하여 마음챙김, 알아차림, 마음지킴 등 여러 번역어가 있지만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에 따른다. 또한 이 새김이라는 용어는 한국마하시선원 일창스님이 사용하는 술어이기도 하다.
 
늘 새김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발도 무심코 내딛어서는 안된다. 이는 일상에서도 늘 새김을 유지하라는 말과 같다.
 
수행하는 사람이 있다. 이를 수행자라고 한다. 그런데 수행자가 수행할 때만 새김이 유지된다면 수행자라고 해야 할까? 진정한 수행자는 일상에서도 새김이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일상에서 새김이 유지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의도적이라도 새겨야 할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 새김하며 천천히 일어나는 것이다. 뒤 돌아 볼 때도 획하며 돌아 보는 것이 아니라 코끼리가 방향을 전환하듯이 천천히 새기면 돌아야 한다.
 
수행자는 매사에 새김이 있어야 한다. 새김을 놓쳤을 때 놓친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매사에 새김이 있다면 늘 선업을 짓는 것이 된다. 계는 자동으로 지켜질 것이다.
 
막 좌선을 마친 상태에서 글을 쓰면
 
아침 삼십분 좌선이 끝났다. 오늘 아침 좌선은 금방 끝난 것 같다. 평소와 달리 집중도 잘 되었고 새김도 선명했다. 아마 행선에서 가져 온 새김이 좌선에서도 연속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음이다. 일시적으로 자동차 등 소음에서 해방 되었을 때 앉아 있는 맛을 느꼈다.
 
좌선을 하고 나면 해야 할 것이 있다. 글을 쓰는 것이다. 이제 막 좌선을 마친 상태에서 글을 쓰면 최상의 글이 될 것 같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글을 쓸 수가 없다. 마음이 혼탁해져 있으면 쓸 마음이 나지 않는다. 마음이 명경지수처럼 맑아 졌을 때 훌륭한 글이 나온다. 하물며 이제 막 좌선을 끝냈을 때 글은 어떠할까?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새김이라는 밧줄로
 
새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본다. 오늘 좌선 중에 새김과 되새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소는 풀을 먹고 자란다. 소는 풀을 뜯을 때 오로지 먹는 것에만 관심 보일 것이다. 본래 소는 사유능력이 없기 때문에 먹기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는 새김질을 한다는 것이다. 이를 ‘되새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새김질은 소에게서 볼 수 있다. 한번 삼킨 먹이를 게워 내어 씹는 것을 말한다. 소뿐만 아니라 염소 따위와 같은 축생에게서도 볼 소 있다. 이는 소화하기 힘든 풀을 먹기 때문이다. 섬유소가 많이 들어간 풀은 새김질의 대상이 된다.
 
새김은 수행용어이다. 새김이라 하여 사람을 축생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새김이라 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잡는 것을 말한다. 마치 조각하듯이 명료하게 하는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사라지는 정신과 물질의 현상에 대하여 잊지 않고 마음속에 깊이 기억하는 것이다.
 
청정도론에서 새김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는 ‘호흡의 기둥에 새김의 밧줄을 묶는다’라는 말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예를 들면, 목우자가 야생의 암소 모든 우유를 삼키고 성장한 야생의 송아지를 제어하고자 암소에게서 떼어내어 한쪽 구석에 커다란 기둥을 박고 거기에 밧줄로 묶으면, 그 송아지가 여기저기 날뛰어도 도망 갈 수가 없고 그 기둥 가까이 앉거나 누울 수 있듯이, 그 수행승은 오랜 시간 형상 등의 대상의 맛에 심취한 사악한 마음을 제어하고자 형상 등의 대상에서 떼어내어 숲으로 가거나 나무 밑으로 가거나 빈집으로 가게 해서 그곳에서 호흡의 기둥에 새김의 밧줄을 묶으면, 그 마음이 여기저기 날뛰어도 이전에 습관화된 대상을 얻을 수 없고 새김의 밧줄을 끊고 도망갈 수가 없고, 그 대상에 대하여 근접삼매와 근본삼매를 통해서 가까이 앉고 누울 수 있게 된다.”(Vism.8.153)
 
 
청정도론에서는 새김에 대하여 밧줄과 같다고 했다. 호흡을 기둥과도 같다고 했다. 그래서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새김이라는 밧줄로 꽁꽁 묶어 두라고 했다.
 
대상과 새기는 마음이 붙어 있는 것처럼
 
마하시전통에서는 복부를 관찰한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을 배의 부품과 꺼짐이라는 기둥에 새김의 밧줄로 꽁꽁 묶어 두어야 한다. 이렇게 했을 때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새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마하시사야도의 저서나 법문집에서 볼 수 있다. 말하시 사야도는 새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새기면서 새김, 삼매, 지혜가 예리해지고 힘이 구족되면 ‘배의 부품’이라고 하는 물질과 ‘부푼다’하며 새기는 마음, ‘배의 꺼짐’이라고 하는 물질과 ‘꺼진다’하며 새기는 마음, 앉아 있는 물질 과 그것을 새기는 마음, 굽히는 물질과 새기는 마음, 펴는 물질과 새기는 마음, 드는 물질과 새기는 마음, 나아가는 물질과 새기는 마음, 내려놓는 물질과 새기는 마음, 이러한 등으로 대상과 새기는 마음이 계속해서 쌍을 이루면서 마치 붙어 있는 것처럼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78쪽)
 
 
마하시사야도는 새김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설명했다. 배의 부품의 경우 부품이라는 물질적 현상과 이를 아는 정신적 현상이 있는데 이 두 가지를 모두 아는 것을 새김이라고 한 것이다. 특히 “대상과 새기는 마음이 계속해서 쌍을 이루면서 마치 붙어 있는 것처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새김은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이와 같이 새기는 것에 대하여 “신체의 형성을 멈추게 하는 들숨과 날숨이 신체이고, 토대는 새김이고, 관찰은 앎이다. 신체는 토대이지만, 새김은 아니다. 새김은 토대일 뿐만 아니라 새김이다. 그 새김과 그 앎으로 신체를 관찰한다. 그래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새김의 토대를 닦는다고 하는 것이다.”(Vism.8.185)라고 했다.
 
오로지 마음만 이야기하는 수행전통을 보면
 
새김은 밧줄과도 같은 것이다. 이는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영역, 즉 고짜라(gocara)가 정해져 있어야 바르게 관찰할 수 있다. 마음이 영역 밖에 있다면 정신과 물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기 힘들 것이다.
 
마하시전통에서는 주로 몸관찰을 한다. 느낌이나 마음을 관찰하는 전통과는 다르다. 그래서 좌선할 때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한다. 행선할 때는 다리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그래서일까 느낌이나 마음을 관찰하는 전통에서는 행선을 중시하지 않는 것 같다.
 
요즘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어떤 이는 싸띠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마음챙김을 말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정신과 물질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기 힘들다. 단지 마음만을 말하는 것 같다.
 
마음 보는 수행이 있다. 심념처라고 한다. 심념처를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마음이 마음을 본다고 말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노팅(noting)한 것을 왓칭(watching)한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물질은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마음만 말하는 것 같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이다. 몸이 빠지면 마음만 남게 된다. 오로지 마음만 관찰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마음이 마음을 제압하는 화두선
 
요즘 ‘담마짝까법문’을 읽고 있다. 마하시 사야도가 1962년에 법문한 것이다. 성철스님이 백일법문할 때 60년대였다. 동시대에 두 명의 큰 스님이 법문한 것이다.
 
한국불교는 선불교 전통을 따르고 있다. 화두선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한번도 화두선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해보지 않은 자가 해보지 않은 것을 비판하면 구업(口業)이 된다. 한번도 화두선을 해보지 않은 자가 화두선에 대하여 말하면 구업이 될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화두선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담마짝까법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본 승이 전법차 일본에 갔을 때 어느 큰 절에서 좌선수행을 하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들의 방법은 ‘생겨나는 모든 마음을 다 제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소멸시켜 아무런 생각도 일어나지 않을 때 ‘공(suñña)’,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는 법도의 끝에 도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수행하는 모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먼저 수행하려는 대승(mah
āyāna) 비구들이 줄지어 결가부좌하고 앉았습니다. 여섯 명 정도 됐습니다. 한 스승이 앉아 있는 스님들을 때리기 위한 막대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수행지도 스승이 앉아 있는 스님들의 등을 막대기로 한 차례씩 때렸습니다. 맞는 순간 마음이 완전히 사라져 공에 이르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차례로 때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매우 이상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생겨나는 모든 생각을 제압해서 소멸시키는 방법입니다.

보살이 그 당시 마음을 마음으로 따라가서 제압하며 노력한 모습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보살은 그때 이를 악물고 마음을 마음으로 억지로 따라가서 제압하는 것이 매우 피곤했다고 했습니다. 피곤해서 겨드랑이에서 땀까지 흘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피곤 하게 노력해서도 특별한 지혜나 특별한 법을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담마짝까법문, 71-72쪽)

 
 
마하시 사야도가 일본 방문한 이야기를 쓴 것이다. 글에서 대승불교 수행방법에 대하여 “매우 이상한 방법입니다.”라고 했다. 이는 ‘마음이 마음을 제압하는 모습’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기 전에 피가 마르는 고행을 했다. 그런데 마하시 사야도는 선불교의 정진방식에 대하여 고행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초기불전연구원 각묵스님이 있다. 스님은 한국의 화두선에 대하여 오력으로 설명했다. 화두를 들고 있는 것에 대하여 싸띠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래서 마음챙김이라는 말도 화두챙김이라는 말에서 영감을 받아 싸띠의 술어로 채용했다고 밝혔다.
 
선불교에서 화두선과 테라와다불교의 위빠사나는 다른 것이다. 선불교에서의 화두선은 마음을 마음으로 제압하는 것이고, 테라와다불교에서의 위빠사나는 정신과 물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하시 사야도에 따르면 마음을 마음으로 제압하는 방식으로는 지혜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고행일 뿐이라고 했다.
 
위빠사나를 하는 목적은
 
위빠사나 수행을 왜 하는가? 고요함과 평화를 맛보기 위함일까? 이런 목적이라면 종교성이 배제된 MBSR을 해도 될 것이다. 스트레스 완화기법 명상을 말한다. 위빠사나를 하는 목적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이 물질과 정신만을 개인, 중생, 남자, 여자라고 부르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단지 명칭일 뿐이다. 사실은 개인 중생, 여자, 남자라고 하는 것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새겨 알아 지는 물질과 [새겨 아는] 정신의 성품만 존재한다’라는 등으로 이해하고 반조하고 결정할 수 있다. 그러한 반조들도 계속해서 생겨날 때마다 ‘반조함, 반조함’이라고 새긴 후 부품과 꺼짐 등 원래 새기던 대상만을 계속해서 끊임없이 새겨야 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80쪽)
 
 
 
위빠사나 수행하는 목적 중에 하나는 자아개념을 부수기 위한 것이다. 이는 대상에 대하여 빤냣띠로 보는 것이 아니라 빠라맛타로 보는 것이다. 개념이 아니라 실재를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나, 너, 중생’등과 같은 말은 언어적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세상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초기경전에 따르면 이런 질문은 번뇌만 일으킨다. 왜 그런가? 실재하지 않는 것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적으로만 존재하는 개념이고 명칭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희론 또는 망상이라고 한다.
 
한번 고요를 맛 보았을 때
 
오늘 아침 삼십분 앉아 있었다. 삼십분 앉아 있으면서 글은 두세 시간 쓴다. 글 쓸 시간에 더 앉아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수행이라 하여 반드시 다리 꼬고 앉아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상이 수행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부처님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아는 것도 수행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잘 기억하는 것도 수행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잘 새기는 것도 수행이다. 더 나아가 되새김하는 것도 수행이다.
 
일시적으로 고요를 맛 보았을 때 앉아 있는 맛을 알게 된다. 이런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몇 초 후에 이런 바램은 깨진다. 푸른신호등으로 바뀌었을 때 차는 쏜살같이 달린다. 그 결과 자동차 소음이 귀에 들려서 고요는 깨진다.
 
한번 맛을 보면 잊지 못한다. 맛집을 찾아 가는 이유에 해당된다. 한번 고요를 맛 보았을 때 이를 잊지 못한다. 깊은 산속 암자에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새소리, 바람소리, 벌레소리에 방해 받을 수 있다. 사막에 있는 천불동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
 
고요한 상태에서는 새김이 분명하다. 모든 것이 정지된 것처럼 보였을 때 아는 마음만 남아 있다. 이를 새김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앉아 있다 보면 경전에 있는 말이나 논서에 있는 말이 떠오를 수 있다. 이것도 새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위빠사나는 정신과 물질을 새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일상이 수행임을 말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보고, 듣는 등 여섯 감역에서 일어나는 물질과 정신, 정신과 물질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여기에 가르침도 새겨야 한다.
 
소가 새김질 하듯이 가르침을 되새김해야
 
새기고 새겨야 한다. 새기고 새기면 되새김이 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들숨과 날숨이 신체이고, 토대는 새김이고, 관찰은 앎이다. 신체는 토대이지만, 새김은 아니다. 새김은 토대일 뿐만 아니라 새김이다. 그 새김과 그 앎으로 신체를 관찰한다.”(Vism.8.185)라고 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 했을 때 복부는 토대이다. 복부의 움직임은 물질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복부의 움직임은 정신적 현상으로 관찰된다. 복부라는 물질과 움직임을 아는 정신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두를 아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새김이다. 그래서 “새김은 토대일 뿐만 아니라 새김이다.”라고 했다.
 
새김은 토대도 되고 아는 마음도 된다. 새김이 없다면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유기체에 지나지 않는다. 축생과 같은 삶이 된다.
 
새김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크다. 그런데 되새김도 있다는 것이다. 마치 소가 새김질 하듯이 부처님 가르침과 논서의 가르침을 되새김 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늘 새김과 되새김이 있어야 한다.
 
 
2024-08-0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