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얼굴에 사마귀가 사라졌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4. 8. 8. 10:19

얼굴에 사마귀가 사라졌다
 
 
늘 컨디션이 좋은 것은 아니다. 오늘 아침이 그랬다. 평소와 달리 몸이 찌뿌둥했다. 오늘 힘든 하루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안다. 의사가 안다고는 하지만 아마도 그것은 기계의 힘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가지고 있는 번뇌는 내가 가장 잘 안다. 수행지도 하는 사람이 아는 것도 한계가 있다.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지금은 안거기간이다. 재가자의 우안거를 말한다. 아침 행선과 좌선을 하기로 했다.
 
행선을 하면 금방 마음이 바뀐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의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산란했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행선을 해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몸이 불편하니 자꾸 거기에 마음이 가 있는다. 좌선을 하면 나아질까?
 
방석에 앉았다. 스마트폰 타이머를 삼십분에 세팅했다. 스타트 버튼을 누루자 시간은 지체 없이 아래로 카운트 되었다.
 
오늘도 삼십분 앉아 있어야 한다. 재가우안거에서 삼십분 앉아 있기로 했다. 점심 먹고 나서도 삼십분 앉아 있는다. 저녁에 야간 좌선도 해야 하나 유튜브 보는데 시간을 다 보내고 있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두었다. 움직임이 명확하지 않다. 이럴 때는 내버려 두어야 한다. 어느 순간 불룩불룩 하는 느낌을 받는다.
 
배의 부품과 꺼짐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마치 호흡을 억지로 만들지 않는 것과 같다. 단지 지켜만 볼 뿐이다. 그러나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잡념만 생긴다.
 
삼십분은 긴 시간일까 짧은 시간일까? 분명한 사실은 한시간 앉아 있는 것보다 짧다는 것이다. 조금만 집중이 되어도 삼십분은 금방 지나간다. 그러나 한시간은 마치 고행하는 것처럼 힘들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오분 앉아 있기도 쉽지 않다. 하물며 삼십분은 어떠할까? 오늘 그랬다. 앉아 있었지만 자꾸 가려운 부분이 생기고 모기가 앉았다. 더구나 날씨는 덥고 습했다. 오전 아홉시가 되어야 중앙냉방장치가 가동된다.
 
마음에 극적 반전이 이루어지고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을 보면 “인내가 열반으로 인도한다.”라고 했다. 한번 자리에 앉으면 자세를 바꾸지 말고 앉아 있으라는 것이다. 그래야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법의 성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것이다. 물질과 정신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따라서 새기다 보면 어느 것 하나 항상 하는 것이 없고, 항상 하지 않아서 불만족이고, 항상하지 않아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비록 삼십분에 불과한 좌선이지만 인내를 가지고 앉아 있었다. 어느 순간 변화가 있었다. 마치 컴컴한 방에 전구가 켜진 것처럼 환해졌다. 그렇다고 빛과 같은 니밋따를 본 것은 아니다. 단지 마음이 밝아 졌을 뿐이다.
 
좌선 중에 마음이 밝아 지면 청신호이다.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기회가 오면 놓치지 말아야 한다. 환한 마음에 마음을 두었다. 이런 상태를 유지하고자 했다.
 
마음이 환해지자 다른 것은 잊어 버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가렵고 근질거리고 더구나 습함으로 인하여 끈적거리는 것이 좌선을 그만 두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마음이 밝아지자 전혀 다른 상태가 되었다. 마음에서 극적 반전이 일어났다.
 
얼굴에 커다란 사마귀가 있었는데
 
세상을 살다보면 불가사의할 때가 있다.  믿기지 않은 일이 일어 났을 때를 말한다. 마음의 상태가 바뀌는 것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러나 최근 얼굴에서 일어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
 
얼굴에 검버섯이 있다. 우측 얼굴이 심하다. 사진을 찍을 때 가능하면 왼쪽 얼굴을 노출시키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우측 얼굴에 있던 커다란 사마귀가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지난 수년동안 사마귀와 전쟁을 벌인 듯 하다. 거울을 보면 흉측하게 도드라진 부위가 마음을 상하게 했다. 어쩌면 이런 것도 얼굴을 나의 것으로 보는 자아개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마귀가 언제 생겨났는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거의 십 년 가까이 된 것 같다는 사실이다.
 
삼 년 전의 일이다. 함평 제사모임 갔었는데 사촌형님이 보았다. 보기에 흉해 보였던 것 같다. 얼굴에 습기를 유지라고 했다. 화장품 같은 것을 바르라는 것이다.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지 않는다. 모임에 나가도 화장품을 발라 본 적이 없다. 그 결과 얼굴이 늘 건조한 상태로 있다. 여기에 강렬한 햇볕이라도 쏘이면 피부가 손상될 것이다.
 
사마귀를 없애기 위한 별 방법을 다 써 보았다. 유튜브에서 본 대로 따라 해보기도 했다. 식초에 밀가루를 개어서 붙여 보라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시행하지는 않았다. 인터넷 검색해서 검버섯 연고를 구입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락스를 묻혀 보라고 했다. 역시 시행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사마귀를 없앨 수 있을까? 이태리 타월로 박박 문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도드라진 부분을 없앨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마귀가 부풀어 올랐다.
 
병원에 잘 가지 않는다. 감기에 걸렸을 때 내과 가서 약 타먹는 것과 이빨이 아플 때 치과 가는 것이 전부이다. 건강검진도 받지 않는다. 몸에 어떤 병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런 일로 비난 받는다.
 
사마귀가 부풀어 올랐을 때 피부과를 찾았다. 레이저 시술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 찾은 것이다. 상처 부위를 보여 주자 레이저 시술하면 된다고 했다. 한 부위에 팔만원이다. 의료보험도 되지 않는다. 최소한 네다섯 부위는 해야 한다.
 
피부과에서 레이저 시술하지 않았다. 처와 상의해서 결정하겠다고 말하고서 나왔다. 그런데 며칠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부풀어 오른 사마귀가 사라진 것이다. 집에 있는 연고를 바른 것일 뿐이다.
 
사마귀는 왜 사라졌을까? 십년 가까이 거울 보며 근심 했는데 ‘데타손’이라는 연고를 바른지 며칠 지나지 않아 없어진 것이다. 더구나 더 넓게 번져 있는 오래된 것도 사라졌다.
 
사마귀가 사라진 것은 연고 때문일까? 분명한 사실은 연고를 바르고 나서부터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후 밤낮으로 연고를 발랐다. 지금은 얼굴이 매끈해졌다. 그러나 검은 자국은 남아 있다. 나의 몸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사마귀가 사라지자 하나의 자만이 생겨났다. 모든 병은 내버려 두어도 때가 되면 낫는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자연치유력을 말한다.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했을 때 없어질 것이라는 믿음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지침서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에 따르면, 여섯 가지 위빠사나 수행 이익이 있다. 이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청정한 마음을 갖게 된다.
2) 안정되고 균형잡힌 마음이 된다.
3) 병이 치유된다.
4) 법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다.
5) 수행자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으로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6) 궁극적으로 성스런 법을 얻는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38쪽)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이익이다. 이 중에서 세 번째 항을 보면 “병이 치유된다.”라는 말이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에 대하여 우 쿤달라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세 번째 이익 - 세 번째 이익은 병의 치유이다. 수행자가 생멸의 지혜에 이르면 소소한 질병과 통증이 사라진다. 여기에 있는 수행자들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알아차림이 있는 순간은 매우 강력한 힘이 작용하기 때문에 수행 중에 병이 생겨도 약을 먹으려 하지 않는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먹는 것이 오히려 치료 시간이 더 걸린다고 수행자들은 말한다. 그것은 목이 뻣뻣하거나 두통, 복통과 같은 통증이 오더라도 알아차리면 바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39쪽)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믿기지 않는 말이다. 그런데 사야도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병이 나을 수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고 모든 수행자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생멸의 지혜, 즉 위빠사나 4단계 지혜에는 이르러야 함을 말한다.
 
생멸의 지혜는 어떤 단계일까?
 
생멸의 지혜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아리아와사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생멸의 지혜)

“명상의 지혜 단계에서 계속 관찰해 나가며 ‘무상하다. 괴로움이다. 무아인 성품법일 뿐이다’라고 많이 숙고하고 반조해서 능숙하게 됐을 때는 특별히 숙고하지 않고 계속 관찰만 하게 됩니다. 그제야 앎이 빨라집니다. 새길 때마다 계속해서 새겨지는 물질-정신 대상들의 처음과 끝을 분명히 구별해서 알게 됩니다. 이것이 생멸의 지혜(udayabbaya ñ
āņa)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빛도 경험합니다. 기뻐하고 만족하는 희열(piti)도 강하게 일어납니다. 몸과 마음의 고요함인 경안(passaddhi)도 분명하게 생겨납니다. 깨끗함, 존경함 등 믿음(saddhā)도 강하게 생겨납니다. ‘새기지 못하는 것. 알지 못하는 것은 없다’라고 생각될 정도로 새김(sati)과 지혜(ñāņa)도 매우 좋아집니다. 이 지혜 단계에 이른 수행자는 매우 행복하고 만족해합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앞서 해태-혼침에 대해 설명할 때 언급했던, 특별한 법의 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부 수행자들은 그러한 현상들을 경험할 때 ‘도와 과, 열반이라는 특별한 법을 얻었구나’라고까지 생각하기도 합니다.”(아리아와사법문, 233-234쪽)
 
 
생멸의 지혜는 법의 처음과 끝을 분명히 보는 단계라고 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여 아는 단계와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는 단계가 앞서야 한다. 이 두 가지 지혜가 만족 되었을 때 ‘명상의 지혜’가 생겨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명상한다고 말한다. 명상을 지도하는 스승 중에는 불교가 아닌 유일신교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어떤 명상을 지도하는 것일까?
 
유일신교 믿는 사람이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어떤 일이
 
어떤 유일신교 사람의 명상지도하는 글을 보았다. 자애명상에 대한 것이다. 호흡명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명상은 사마타 명상에 해당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40가지 사마타명상주제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유일신교 믿는 사람도 위빠사나 수행을 할 수 있다. 그들이 제대로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그들이 믿는 신을 버릴지 모른다. 왜 그런가? 신은 개념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마타 명상은 개념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자애도 개념이고 호흡도 개념이다.
 
호흡이 위빠사나가 되려면 운동성을 보아야 한다. 코 끝에서 바람의 기운을 느꼈을 때 위빠사나가 된다. 단지 호흡 그 자체에 집중하면 들숨 날숨이라는 개념에 집중하는 것이 되어서 사마타 명상이 되어 버린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배를 보라고 말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말한다. 이는 몸관찰에 대한 것으로 풍대(風大)를 보라는 말과 같다. 움직임을 보는 것이다. 이는 고정된 대상이나 하나의 개념을 대상으로 하는 사마타명상과는 다른 것이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보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대상이 된다. 일상에서 행, 주, 좌, 와도 대상이 된다. 이는 유동성이 있는 것이다. 고정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위빠사나는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등 오감도 대상이 된다. 이것 역시 유동성이다. 움직이는 대상을 새겨서 그것이 정신과 물질로 구분 되어진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1단계)이고, 또한 조건 발생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2단계)이다. 이렇게 알았을 때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단계가 ‘명상의 지혜 단계’로서 위빠사나 3단계가 된다.
 
명상의 지혜 단계는 구체적으로 어떤 단계일까? 이는 “조건파악의 지혜가 무르익으면 관찰하는 물질법과 정신법을 처음과 끝으로 분명히 구별해서 알게 됩니다. 처음이라는 것은 생겨나는 성품 입니다. 끝이라는 것은 사라지는 성품입니다. 새길 때마다 그렇게 처음 생겨나서 끝에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때 ‘항상하지 않은 무상(anicca)의 법일 뿐이다’라고 숙고합니다. 이것이 명상의 지혜(sammasana ñāņa)입니다.” (아리아와사법문, 227쪽)라는 설명으로 알 수 있다.
 
명상의 지혜는 무상을 아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더 나아가면 4단계 생멸의 지혜에 이른다.
 
생멸의 지혜 단계는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에서 획기적인 단계에 해당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수행이 급진전을 이루게 된다고 말한다. 육문에서 일어나는 물질과 정신, 정신과 물질을 분명히 아는 것을 넘어서 시작과 끝도 알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새길 때마다 계속해서 새겨지는 물질-정신 대상들의 처음과 끝을 분명히 구별해서 알게 됩니다.”라고 했다.
 
생멸의 지혜에 이르면 빛도 보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위빠사나 열 가지 경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명상 중에 아직까지 빛을 본 적이 없다. 빛을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 어떤 사람은 “아, 내가 깨달음을 얻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라 한다.
 
빛을 본 것은 본격적인 수행의 시작일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빨리 위빠사나 경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말한다. 어떻게 벗어나는가? 청정도론에 따르면 현상에 대하여“무상하다. 괴로움이다. 무아인 성품법일 뿐이다.”라며 관찰하라고 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여러 가지 변화가 생긴다. 유일신교를 믿는 사람이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생멸의 지혜 단계에 이르면 자신이 믿는 신을 버리게 될 것이다. 왜 그런가? 신이라는 것은 언어적 개념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신을 계속 믿는다면 진정한 위빠사나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유일신교를 믿는 사람도 명상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명상지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명상하는 것은 아마도 ‘사마타’일 것이다. 마치 ‘불수념’ 같은 것이다.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하듯이 그들의 신을 계속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자애명상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애명상 역시 40가지 사마타 명상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배의 딱딱한 멍울이 사라진 사례
 
생멸의 지혜에 이르면 수행에 큰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단계의 지혜에 이르렀을 때 병도 치유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소한 질병과 통증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목이 뻣뻣하거나 두통, 복통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위빠사나 수행하면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는 새김(sati)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아차리면 바로 사라진다.”라는 말이 있다.
 
위빠사나는 고질적인 병도 치유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하나의 사례를 들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지난 안거 때 한 여자 수행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수행자의 배에 딱딱한 멍울이 있었습니다. 피가 뭉친 것이든 근육이 뭉친 것이든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수행센터에 오기 전 집에서 지낼 때는 오래 앉아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손님이 찾아와도 10~15분 정도만 앉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 수행자는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고 의사는 수술로 그 멍울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수행자는 ‘수술하기 전에 의지할 만한 것 하나를 마련하리라’라고 결심하고서 양곤 마하시 사사나 수행센터에서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의사는 그녀에 게 “오랫동안 앉아 있지 마십시오. 그러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주의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수행자의 지도 스승은 그 동안의 사정을 듣고도 “전혀 문제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너무 열심히 만 하지 마십시오. 천천히, 조심조심, 편안하게 계속 수행하십시오”라고 지도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대로 수행을 계속해 나가자 그 수행자는 새김과 삼매, 지혜의 힘이 조금씩 좋아졌습니다. 그렇게 새김과 삼매, 지혜가 좋아지면서 배에 있던 딱딱한 멍울도 조금씩 줄어들다가 오래 지나지 않아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무리 오래 앉아 수행하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확인을 위해 의사에게 다시 진찰을 받으러 갔습니다. 진찰을 마친 의사는 멍울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면서 어떻게 한거냐고 물었고, 그녀는 “오로지 수행 만 했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이제 아무런 병이 없으니 안심해도 좋습니다”라고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아리야와사법문, 116쪽)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다.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수행으로 병을 치유하는 것이다.
 
얼굴에 사마귀가 사라졌다
 
얼굴에 사마귀가 사라졌다. 아마 나를 보았던 사람들은 얼굴에 콩알만한 사마귀가 있었던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열흘 전에 사라졌다. 그것도 드라마틱하게 없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때 피부과에서 시술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레이저로 태워서 사마귀를 제거했을 것이다. 그 결과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어 갔을 것이다.
 
부풀어 오른 부위에 연고 몇 번 발랐을 뿐이다. 어느 날 사마귀가 사라졌다. 우둘투둘 했던 것이 매끈해진 것이다. 다만 검은 흔적은 남아 있다. 이런 것도 위빠사나 치유 능력에 해당되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24-08-0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