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스님이 “허, 허, 허”소리 내어 웃은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4. 8. 11. 12:07

스님이 “허, 허, 허”소리 내어 웃은 것은
 
 
여름이 깊어 간다. 현재시각은 8월 11일 일요일 오전 8시 17분이다. 스마트폰 첫화면 날씨를 보니 29도이다. 체감온도는 32도로 나온다. 습도는 74프로이다. 습도가 높아서인지 끈적거린다.
 
시골의 날씨와 도시의 날씨는 다르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면 후끈하다. 아마 다른 곳보다 4-5도는 높은 것 같다. 에어컨 없이는 살 수 없다.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온다. 새벽 5시가 되었을 때 캄캄했지만 불과 일이십분도 지나지 않아 창 밖은 훤해졌다. 여름이 깊어지니 이제 가을도 머지 않았다.
 
오늘도 백권당 컴퓨터 앞에 앉아 하얀 여백을 메꾸어 나가고 있다. 늘 있는 일이다. 토요일이라 하여 쉬지 않고 일요일이라 하여 멈추지 않는다. 마치 매일 밥 먹듯이 쓰는 것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말한다. 인생은 짧고 글은 길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도 삶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 오늘은 무엇을 써야 할까? 이미 생각해 둔 것 있다. 그것은 ‘스님의 윤회관’에 대한 것이다.
 
재가우안거 23일째이다. 하루도 빠짐 없이 행선과 좌선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렇게 명상이 끝나고 난 다음 여백을 채우는 것도 안거 가운데 하나로 본다. 이른바 수행기를 작성하는 것이다.
 
지금 현재 시점이 가장 젊은 날
 
나는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보험회사에서 작성된 기대수명대로 살 수 있을까? 그러나 인간의 수명은 알 수 없다. 언제 어떻게 어떤 업이 작용할지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을 최후의 날이라고 보고 살아야 한다.
 
지난 시절을 되돌아 본다. 나는 잘 살았는가? 만 45세 이전에는 오로지 집과 직장만 왕래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 인줄 알았다. 젊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담마를 알고 나서부터는 마음이 달라졌다. 오늘이 마지막날인 것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십년만 젊었더라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말은 쓸데 없는 말이다. 그 사람은 십년전으로 되돌아가도 여전히 그 모양일 것이기 때문이다.
 
내년이면 지공거사가 된다. 전철과 지하철 무임승차자가 되는 것이다. 평일 KTX할인 혜택도 받는다. 무엇보다 기대 되는 것은 비과세자가 되는 것이다. 은행에 예금이나 적금을 들었을 때 이자에 대한 비과세 혜택을 받는 것이다.
 
늘 현재를 살고자 한다. 글을 써도 현재시점에서 쓴다. 페이스북에서 과거에 쓴 글은 소환하지 않는다. 작년이나 재작년 오늘 쓴 것을 노출시켜서 회상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늦었을 때가 가장 빠른 것이라고 한다. 지금 현재 시점이 가장 젊은 날이다. 앞으로 십년후에도 그 시점이 가장 젊은 날이다. “내가 십년만 더 젊다면”이라고 후회하지 않는다. 늘 오늘을 일생처럼 살아간다.
 
어느 스님의 윤회관에 의문을
 
글을 쓸 때 좌선을 마치고 쓴다. 좌선을 하면 마음이 일시적으로 청정해지는데 그 힘으로 쓰는 것이다. 쓸 거리는 미리 생각해 두었다. 스님의 윤회관에 대한 것이다.
 
유튜브를 보다가 어느 스님의 윤회관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놀랍게도 남방가사를 두른 스님이다. 스님의 법명은 ‘붓다빠라’이다.
 
오늘날 BTN은 불자들에게 있어서 공신력 있는 매체이다. 그러나 스님이나 법사의 법문을 들어 보면 비법에 대한 것도 많다. 이런 것에 대하여 어떤 이는 거래관계를 의심하기도 한다.
 
붓다빠라 스님은 한번도 만난 적 없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간헐적으로 들은 것이 있다. 윤회를 부정하는 스님으로 알고 있었다. 또한 크게 깨달은 자라는 소문도 있다.

스님은 풍채가 당당하다. 상호도 원만하다. 알 수 없는 권위가 느껴진다. 더구나 아라한이라는 소문도 있어서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스님은 윤회를 부정했다. 이는 스님이 방송에서 “부처님은 윤회설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스님은 이어서 “부처님은 연기설을 말씀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스님의 권위와 학자의 권위
 
어떤 말이든지 권위 있는 자가 말하면 믿음이 있다. 스님이나 학자가 윤회에 대하여 부정하는 말을 하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러나 일반사람이 윤회부정을 말하면 비난할 것이다.
 
스님에게는 권위가 있다. 그것은 출가자의 권위이기도 하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자신마저 버린 것에 대하여 경외의 마음을 갖는다. 이런 스님이 한마디 했을 때 수긍하게 될 것이다.
 
학자에게도 권위가 있다. 보통사람보다 공부를 많이 해서 최상의 학위를 가진 것에 대한 권위이기도 하다. 이런 학자가 논문에서 조목조목 비판 했을 때 동조하게 될 것이다.
 
글을 쓴지 18년 되었다. 그 동안 수많은 스님과 학자의 윤회관에 대하여 비판했다. 경전에 있는 부처님 가르침과 다름으로 인하여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반향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럼에도 블로그에 기록을 남겼다. 나중에 관련 글을 모아서 책을 만들고자 한다.
 
비티엔(BTN) 영상법문에서
 
붓다빠라 스님은 초기경전을 근거로 해서 윤회를 부정한다. 스님은 방송에서 “내가 언제 윤회설을 설하더노. 나는 연기설을 설했어. 이렇게 교정을 해주는 장면이 대파애경에 고대로 나옵니다.”라고 말했다.
 
스님의 영상을 유튜브에서 보았다. 비티엔(BTN)에서 본 것이다. 이는 ‘부님 오도송 [붓다빠라 스님이 전하는 부처님 최초의 말씀 5회]’라는 영상의 제목이다.
 
스님의 억양은 독특하다. 두 번째 음을 올린다. 예를 들어 “윤회”라고 말할 때 두 번째 음“회”를 올리는 식이다. 이런 억양은 해피스님에게서도 볼 수 있다. 부산 사람들 억양에서 종종 듣는다. 자주 듣다 보면 거슬린다. 스님은 또한 지방어를 쓰기도 한다.
 
스님은 ‘대파애경’을 근거로 들어 윤회를 부정했다. 대파애경은 맛지마니까야 38번경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mahātahāsakhayasutta)’이다. 스님은 이 경을 근거로 하여 부처님이 윤회설을 부정하고 연기설을 설했다고 말했다. 정말그럴까?
 
논장을 부정하는 사람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스승이 있다. 한 부류는 삼장을 모두 수용하는 스승이고, 또 한 부류는 삼장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부류이다. 붓다빠라 스님은 후자에 해당된다. 빠알리 삼장에서 오로지 경장만 채택하는 것이다. 이는 논장을 철저하게 배제 하는 것을 말한다.
 
해피스님이 있다. 해피스님은 붓다빠라 스님의 제자로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논장을 철저하게 배제한다. 이는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멀리하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하여 비판하는 글을 지난 수년 동안 열 개 가량 썼다.
 
논장을 배제하는 학자도 있다. 이중표 교수이다. 유튜브에서 이중표 교수의 법문을 들어 보면 아비달마와 같은 논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했다고 맹렬히 비난한다.
 
흔히 농담으로 “이 사람과 저 사람은 같은 과야”라고 말한다. 이 말은 같은 계열임을 말한다. 윤회를 부정하고 논서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같은 과일 것이다.
 
최근 유튜브에서 향봉스님의 윤회관이 도마 위에 올랐다. 스님은 대놓고 윤회는 없다고 말했다. 스님은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하느냐’라는 식으로 말했다.
 
윤회를 부정하는 사람들 특징이 있다. 대부분 논장을 부정한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를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도 있다. 왜 그럴까? 논서를 인정하면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과 상충, 즉 상호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대부분 윤회부정론자가 되기 쉽다. 이중표 교수도 이에 해당된다.
 
이중표 교수의 대담프로를 우연히 보았다. 조현 기자와 좌담한 것이다. 이중표 교수는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라는 취지로 말했다.
 
이중표 교수의 유튜브 법문을 거의 다 들었다. 결론은 경전을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중표 교수는 ‘부처님이 설하신 진정한 가르침에 대하여 자신이 세계에서 최초로 해석했다’라는 식으로 말했다.
 
이중표 교수에 대한 반박글을 수도 없이 썼다. 영상에서 녹취하여 글을 옮겨 놓은 다음에 경전을 근거로 들어 비판했다. 나중에 글을 모아 놓으면 소책자 한권은 될 것 같다.
 
스님이나 학자가 말하면 권위가 있다. 윤회가 없다고 말하면 없다고 믿게 될 것이다. 이는 경전을 자신이 생각한대로 새롭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존 논서와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아비담마와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에 대하여 모두 잘못 되었다고 맹렬히 비난하는 것이다.
 
연기법을 연기설이라니!
 
붓따빠라 스님은 대파애경을 근거로 부처님은 윤회설을 설하지 않고 연기설을 설했다고 말했다. 들으면 그럴 듯하다. 방청객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맛지마니까야 38번경을 보면 잘못 해석한 것이다.
 
부처님 제자 중에 ‘싸띠’라는 수행승이 있었다. 싸띠는 의식이 윤회한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이에 부처님은 “이 어리석은 자여, 누구에게 내가 그런 가르침을 설했던가?”(M38)라며 강하게 질책했다. 그러면서 “어리석은 자여, 의식도 조건적으로 함께 생겨난다는 것, 즉 조건 없이는 의식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법문으로 설하지 않았던가?”(M38)라며 역시 질책했다.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은 연기법이다. 이를 빠띳짜사뭅빠다(paiccasamuppāda)라고 한다. 이 용어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조건발생의 법칙’이라고 번역했다. 그럼에도 붓다빠라 스님은 ‘연기설’이라고 말한다.
 
연기법과 연기설은 다른 것이다. 연기법은 수학의 공식처럼 확고부동한 것이다. 그러나 연기설은 하나의 가설이라는 선입관이 들어 갈 수 있다.
 
연기설이 하나의 “썰”이 될 수 없다. 왜 그런가?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에 연기에 대하여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정해져 있으며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S12.20)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럴 진데 ‘연기설’이라니 전제부터 잘못된 것이다.
 
수행승 싸띠는 의식이 윤회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의식 자체도 조건발생하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알려 주었다. 그런데 붓다빠라 스님은 이 문구를 윤회부정론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내가 언제 윤회설을 설하더노. 나는 연기설을 설했어.”라고 해석한 것이다.
 
윤회를 부정하는 스님들
 
윤회를 부정하는 스님들이 많다. 즉문즉설 스님으로 유명한 법륜스님도 윤회를 부정한다. 윤회가 있다면 그것은 힌두교의 윤회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런데 똑같은 말을 붓다빠라 스님이 했다.
 
붓다빠라 스님은 부처님의 오도송을 소개 했다. 법구경에 실려 있는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꺽였다.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 왔으나, 마음은 형성을 여의고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Dhp.154)라는 게송에서 윤회를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힌두교 식 윤회로 본 것이다.
 
불교는 브라만교를 비판하며 성립되었다. 브라만교에서 볼 수 있는 윤회도 비판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법륜스님은 사성계급에 대한 윤회를 비판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붓다빠라 스님은 “신과 신이 만든 질서로서의 윤회설이 있고 그래서 신을 찾아 다녔고 윤회설도 찾고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것을 찾지 못했습니다.”라고 방송에서 말했다. 
 
붓다빠라, 법륜스님, 향봉스님, 해피스님, 이중표 교수는 같은 계열, 같은 과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공통적으로 윤회를 부정한다. 공통적으로 논서를 부정한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경전을 자신의 생각대로 해석한다.
 
붓다빠라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빨려 들어 가는 것 같다. 남방 짙은 주황색 가사의 권위가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더구나 경전을 근거로 들어서 자신이 생각한 것을 말했을 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마력이 있는 것 같다. 윤회에 대해서도 “신이 만든 질서가 윤회라는 거에요.”(25분 56초)라고 말했다.
 
수십 가지 웃음의 종류가 있는데
 
붓다빠라 스님은 영상 법문에서 “허, 허, 허”라며 웃었다. 스님은 “저는 윤회설로부터 매우 자유롭습니다.”(35분 59초)라며 소리 내어 웃은 것이다. 이 말을 듣고서 깨달은 자의 말처럼 들렸다.
 
깨달은 자들은 잘 웃는 것 같다. 법문 중에 “허, 허, 허” “껄, 껄, 껄” 웃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무엇이 좋아서 웃는 것일까? 왜 웃는 것일까?
 
웃음에도 종류가 있다. 좋은 웃음이 있는가 하면 나쁜 웃음도 있다. 인터넷에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종류의 웃음이 있다.
 
 
1)너털웃음--큰 소리로 호기스럽게 웃는 웃음.
2) 눈웃음---소리를 내지 않고 눈으로만 가볍게 살짝 웃는 웃음. 목소(目笑).
3) 비웃음---흉을 보듯이 빈정거리거나 업신여기는 웃음.
4) 선웃음---우습지도 않은데 꾸며서 웃는 거짓 웃음.
5) 소웃음---웃음 같지 않는 웃음. 소는 웃을 줄 모른다.
6) 쓴웃음---마음에는 시쁘면서 마지못하여 웃는 웃음.
7) 억지웃음- 웃기 싫은 것을 억지로 웃는 웃음.
8) 찬웃음-- 냉소 가소로운 듯 웃음.
9) 코웃음-- 콧소리를 내거나 코끝으로 가볍게 웃는 비난조의 웃음. 비소(鼻笑).
10) 함박웃음-환하게 활짝 웃는 웃음.
11) 헛웃음---마음에 없이 겉으로만 거짓 지어 웃는 웃음.

 
 
검색한 것을 보면 껄걸 웃는 ‘가가대소(呵呵大笑)’ 등 수십 가지의 웃음이 있다. 스님의 “허, 허, 허”는 어떤 의미의 웃음일까?
 
윤회를 존재론으로 보았을 때
 
붓다빠라 스님은 윤회를 부정했다. 그러나 스님은 윤회를 부정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스님은 윤회를 존재론으로 보아서 “윤회가 있다고 하면 상견에 빠지고 윤회가 없다고 하면 단견에 빠집니다.”라고 말했다.
 
붓다빠라 스님은 윤회를 존재론으로 보았다. 윤회를 존재론으로 보면 답이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자 말룽끼야뿟따가 의문한 “세상은 유한한가 무한한가?”(M63)등과 같은 열 가지 형이상학적 주제가 떠 올랐다.
 
부처님은 형이상학적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세상이 유한한가 무한한가 등과 같은 세간의 질문을 말한다.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것은 우답이 된다. 본래 답이 없는데 답을 하는 것은 우답이 됨을 말한다.
 
세상의 존재 유무 등에 관한 열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는 답이 없다. 이는 존재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붓다빠라 스님은 윤회에 대하여 열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과 같은 존재론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윤회를 존재론으르 보면 안된다는 학자가 있다. 이중표 교수의 유튜브 법문을 들어 보면 십이연기에 대하여 “부처님은 생물학적 연기를 설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삼세양중인과를 비판하는 말이다.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다고
 
붓다빠라 스님과 이중표 교수는 같은 과라고 볼 수 있다. 해피스님과 향봉스님은 두 사람의 견해를 받아 들이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윤회를 말하지 않는다. 오로지 현세에서 삶에 대해서만 말한다. 현세에서의 연기적 삶이 윤회라고 말한다. 사후 세계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죽어서 돌아 온 사람이 없기에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이중표 교수는 말했다.
 
이중표 교수는 초기불교를 연구한 학자로 알고 있다. 그러나 아비담마와 청정도론 같은 논서를 인정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했다고 맹렬히 비난한다. 당연히 윤회에 대해서도 붓다빠라 스님과 같은 입장이다. 그런데 죽어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기에 천국이나 지옥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놀랍다. 왜 그런가? 디가니까야에 이런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종종 이런 의문을 해 본다. 이는 ‘스님들이나 학자들은 초기불교경전을 다 읽었을까?’에 대한 의문이다.
 
사부니까야 또는 오부니까야를 다 읽었다면 윤회를 부정하는 말을 할 수 없다. 더구나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없다고 하여 부정하는 것은 초기경전을 다 읽어 보지 않았다고 밖에 판단할 수 없다.
 
디가니까야 23번 경에 육도윤회를 부정하는 왕자의 이야기가 있다. 왕자에게 “저 세상도 없고,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의 뭇삶도 없고, 선행이나 악행도 없고, 업의 과보도 존재하지 않는다.”(D23)라는 악한 견해가 생겨났다. 이런 견해가 생겨난 것은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왕자는 내세를 부정했다. 오로지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 믿었다. 이는 죽은 자가 돌아와서 내세를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무도 오지 않았고 아무도 알려주지도 않았습니다.”(D23)라고 말했다. 이중표 교수가 말한 것과 똑같다.
 
스님의 웃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붓다빠라 스님은 윤회에 대하여 존재론으로 보았다. 존재론은 본래 답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윤회가 있다고 말하면 상견에 떨어지고, 윤회가 없다고 말하면 단견에 떨어진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했을 때 윤회는 믿을 수 없게 된다.
 
붓다빠라 스님은 윤회론은 존재론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윤회론과 같은 존재론을 말한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 대신 부처님은 인식론을 말했다고 한다. 윤회설은 존재론이고, 연기설은 인식론이라는 것이다.
 
붓다빠라 스님은 법문 도중에 “허, 허, 허”하고 웃었다. 두 번 웃었다. 스님은 윤회설을 존재로 보아 상견과 단견으로 설명하고서 존재론은 답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윤회설을 믿을 것인지 믿지 않을 것인지 문제는 인식론입니다.”라고 말하고서는 “허, 허, 허”하며 웃은 것이다.
 
깨달은 자는 잘 웃는 것 같다. 월호 스님에 따르면 어느 날 북한산 바위 위에서 기도 하고 있었는데 “껄, 껄, 껄” 웃었다고 한다. 깨닫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서 웃었다고 한다.
 
깨닫고 보니 너무 허망해서, 또는 너무 허탈해서 웃었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붓다빠라 스님의 웃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밀린다팡하에 양도논법이 있다.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는 질문에 대한 것이다. 이를 딜레마라고도 말할 수 있다. 붓다빠라스님이 말하는 윤회의 상견과 단견도 일종의 양도논법이라고 볼 수 있다.
 
붓다빠라 스님은 윤회설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하면서 “허, 허, 허”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또한 스님은 윤회설 대신 연기설을 믿는 것에 대하여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부처님 관점을 따르기 때문입니다.”라며 또다시 “허, 허, 허”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붓다빠라 스님의 웃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붓다빠라 스님의 웃음에 대하여 해석해 보았다. 하나는 양도논법에 대한 것이다. 존재론에 지나지 않은 윤회설에 대하여 있다고 보면 상견에 떨어지고 없다고 보면 단견에 떨어진다고 보았는데 이는 딜레마에 대한 것이다. 마치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하느냐고 추궁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봉착한 사람들에 대하여 웃는 것 같았다.
 
자신만만한 스님의 법문
 
붓다빠라 스님의 법문을 보면 자신만만한 것 같다. 스님은 자신이 생각하는 윤회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부처님 연기설을 따르기 때문에 윤회가 있는지 없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있으면 뭐하고 없으면 뭐합니까? 저는 연기설을 따라서 수행하고 십이연기에 따라서 세상을 살고 팔정도를 통해 수행을 완성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BTN, 붓다빠라 스님이 전하는 부처님 최초의 말씀 5회, 36분 30초)
 
 
붓다빠라 스님의 말을 들어 보면 주눅이 든다. 스님의 당당한 모습에 움추리는 것이다. 윤회가 있다고 믿으면 상견에 빠지고 없다고 믿으면 단견에 빠진다는 양도논법으로 무장해제 당한 느낌이었다.
 
스님은 깨달은 자일까? 자칭타칭 아라한이라는 말이 있던데 정말 그런 것일까? 하나의 단서는 잡을 수 있다. 그것은 “팔정도를 통해 수행을 완성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이다. 스님은 팔정도 수행을 완성했다고 말했다. 아는 아라한의 경지에 해당된다.
 
한국불교에서는 본래부처라는 말을 한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수행을 해서 본래 부처인 것을 증명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래부처라고 법문하는 사람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본래부처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미 깨달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에게 불성이 있어서 누구나 깨닫기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깨달은 자일 것이다. 염불선으로 유명한 청화스님도 그렇게 말했다.
 
업과 업보의 가르침을 보면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하는 재가불자이다. 이렇게 재가우안거 기간에 스님을 비판하는 글을 써 보았다. 그것은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업과 업보에 대한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사성제와 같은 출세간적 가르침도 설했지만 업보의 가르침도 설했다. 사성제가 출세간적 정견이라면 업보의 가르침은 세간적 정견이다. 그런데 붓다빠라 스님은 출세간적 정견만을 말하는 것 같다.
 
행위를 하면 받드시 과보를 받는다. 이와 같은 인과의 법칙은 부처가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원리로서 확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윤회설을 설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부처님은 연기설을 설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부처님은 정말 윤회를 설하지 않았을까?
 
초기경전을 거의 다 읽어 보았다. 시중에 번역되어 나온 니까야 경전은 사서 다 읽어 보았다. 요즘도 머리맡에 놓고서 읽는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읽다 보면 하나의 확신이 생긴다. 그것은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이 틀림 없는 진리라고 보는 것이다.
 
불교에 대하여 무언가 좀 아는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윤회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법륜스님은 “윤회는 힌두교의 것으로 사성계급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붓다빠라 스님은 “신이 만든 질서가 윤회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초기경전 어디에도 이런 말은 찾기 힘들다.
 
부처님은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자신은 업의 상속자라고 했다. 이것이 업자성정견(kammassakadiṭṭhi)이다. 이러한 업의 가르침에 따르면 내세와 윤회는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윤회설을 설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연기설을 설했다.’라며 윤회를 부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법과 율에 대조하여 맞으면 받아 들이고
 
유명하다고 하여 다 훌륭한 사람은 아니다. 머리가 희다고 하여 모두 다 장로는 아니다. 많이 배웠다고 하여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스님이 말한 것이라 하여 다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 잘 말해 준다.
 
 
그 수행승의 말에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아야 한다.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고, 그 말마디와 맥락을 잘 파악하여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의 말을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 법문에 들어맞고 계율에 적합하다면, ‘이것은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말이다. 이 수행승은 올바로 파악한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D16)
 

 

 
디가니까야 16번 경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말과 다른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여기 자신의 견해를 말하는 스님이나 학자가 있다. 그런데 윤회를 부정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초기경전을 열어 보아야 한다. 그래서 법과 율에 대조하여 맞으면 받아 들이고, 맞지 않으면 배척하라고 했다.
 
부처님은 차제설법으로
 
어떤 스님은 부처님은 팔만사천법문을 설했어도 열반에 이르렀을 때는 한마디도 설한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기경전을 보면 보면 이런 말은 깨진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룬 그날 밤부터 열반에 든 그날 밤까지 구분교의 가르침을 설했다고 했다.
 
어떤 스님이나 학자는 부처님은 윤회를 말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그대로 받아 들인다. 스님의 권위, 학자의 권위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누구에게나 “세존께서는 차제설법을 설했다. 곧, 보시에 대한 이야기, 계행에 대한 이야기,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위험·타락·오염과 욕망의 여임에서 오는 공덕에 대하여 설명 했다.”(Vin.I.15)라고 했다.
 
부처님은 내세와 윤회에 대하여 설했다. 초기경전을 열어 보면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는 천상도 없고 윤회도 없다. 무아의 성자에게 언어적 개념에 대한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스님은 양도논법의 논리를 구사하면서 “허, 허, 허”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단지 미소 짓는 것으로 충분
 
글 쓰는 행위는 구업 짓는 행위이다. 이렇게 스님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도 구업이 된다. 그러나 스님은 공인이다. 공인이어서 비판 하는 것이다.
 
한국스님들은 “껄, 껄, 껄” “우하하, 우하하, 우하하” “허, 허, 허”하며 호탕하게 웃는다. 그러나 남방 테라와다 스님들은 웃지 않는다. 소리내어 웃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다만 미소는 지을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노래는 울음이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춤은 광기이다.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것은 장난이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노래도 계율의 파괴이고, 춤도 계율의 파괴이다. 이유가 있어 기뻐한다면, 단지 미소 짓는 것으로 충분하다.”(A3.103)
 
 
방송에서 스님은 소리 내어 웃었다. 여러 종류의 웃음이 있다. 스님의 웃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깨달은 자의 표현일까? 양도논법의 웃음일까? 방송을 보는 사람은 스님의 웃음 의미를 파악했을까?
 
 
2024-08-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