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들어가는 방법을 어느 정도 알았으니
좌선 이전과 이후과 완전히 달라졌다. 불과 30분만의 일이다. 좌선 전에는 심란했는데 좌선 후에는 마음이 안정되어 있는 것이다. 아침 햇살이 찬란해서 그런 것일까?
오늘 재가우안거 24일째이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백권당에서 아침을 먹고 행선을 하고 방석에 앉았다.
날씨가 무척 덥다. 현재시각 오전 8시 16분 온도는 31도이다. 습도는 74%이고 체감온도는 31도로 동일하다.
30분전 방석에 앉았을 때는 끈적끈적 해서 견딜 수 없었다. 행선을 막 마친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땀도 나고 추리닝 바지 고무밴드가 압박되었다.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행이었다.
좌선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여름날 땀이 줄줄 흐를 때, 잡념에 시달릴 때 그만 두고 싶어진다. 집중이 되지 않았을 때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인내가 열반으로 인도한다는 말이 있다. 한시간 좌선하기로 했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자세를 바꾸지 않고 앉아 있어야 한다. 다리가 부서질 것처럼 고통이 극심하면 자세를 바꾸어 주어야 한다. 이럴 때는 새김을 유지하면서 서서히 자세를 바꾸어 주라고 했다.
고작 30분 앉아 있는 것이다. 오분도 안되어서 그만 두고 싶었을 때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하는 것 같았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은 움직임을 보는 것이다. 하나의 고정된 대상을 본다면 사마타가 될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변화하는 대상을 관찰하며 지켜 보는 것이다. 이것을 ‘새김’이라고 한다. 빠알리어로 ‘싸띠(sati)’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마음챙김’이라고 말한다.
언젠가 집중수행 할 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자리에 앉은지 20분 정도 지나면 선정에 들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근접삼매인지 본삼매인지 알 수 없으나 하나의 대상에 대하여 마음을 지속적으로 집중하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고요해질 것이라는 말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계속 지켜 보았다. 잘 잡히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잡념이 치고 들어 온다. 알아차리지 못하면 집을 짓는다. 나중에 알았을 때 한편의 짧은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사념의 집이 지어졌을 때 허탈하다. 생각의 무게를 느낀다. 앉아 있는 것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마음의 문을 지키지 못하여 잡념이라는 도둑이 들어 왔을 때 허탈한 마음이 된다.
오로지 배의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잘 보이지 않으면 명칭을 붙여야 한다.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을 보면 “부푼다” “꺼진다”라고 명칭 붙이라고 했다. 동사형 명칭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부품’이라 하여 명사형 명칭을 붙이는 것이 보통이다.
아주 오래 전 일이 떠올라
잡념은 많이 사라졌다. 어느 정도 집중이 되자 아주 오래 전 일이 떠 올랐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40년도 더 된 일이다. 1981년 4월 조치원 육군항공학교 면회실이 떠 오른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하다 보면 아주 오랜 옛날 일이 떠오른다고 한다. 잊고 있었던 일도 떠오른다고 한다. 논산훈련소에서 전반기 교육을 마치고 항공학교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은 일이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 떠 오를 때 마치 화면이 전환되는 것 같다. 면회실의 기둥이 보였다. 부모님이 면회 온 것이다. 옆 테이블에는 동료 부모가 있었다. 뚜렷이 기억하는 것은 식당의 둥근 기둥이다.
마음이 고요한 상태가 되면 오래 전의 일도 떠오른다. 이는 새김의 힘일 것이다. 경전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새김의 능력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 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새김의 능력이라고 한다.”(S48.9)라고 했다. 새김이 확립되어 있다면, 새김의 토대가 있다면 잊고 있었던 오래 전의 일도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엉덩이 ‘닿음’을 추가하여
새김이 어느 정도 확립된 상태에서 떠 오른 생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새김이 아직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치고 들어 오는 생각은 좌선을 그만 두게 만들정도로 강력하다.
고요한 마음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새김을 확립해야 한다. 대상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위빠사나를 한다면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런데 움직이는 대상이기 때문에 놓칠 수 있다. 이럴 때는 방편으로 “부품, 꺼짐”하며 명칭을 붙인다.
부품과 꺼짐을 관찰해도 잡념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는“부품, 꺼짐, 닿음”이라 하여 하나 더 추가한다. 엉덩이의 ‘닿음’을 말한다. 꺼짐과 부품 사이에 공백기간이 있는데 그 사이로 잡념이 치고 들어 올 수 있다. 이를 막는 방법은 엉덩이 닿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왜 새김의 토대 또는 새김의 확립이라 하는가?
좌선할 때 부품, 꺼짐, 닿음을 새기면 잡념을 차단할 수 있다. 이런 상태로 계속 새기면 어느 정도 새김이 확립된다. 마치 탄탄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싸띠빳타나(Satipaṭṭhāna)’라고 했을 것이다. 이를 한자어로는 ‘염처(念處)’라고 한다. 또한 이 용어는 ‘새김의 확립’ 또는 ‘새김의 토대’라고 번역된다.
새김의 토대가 확립되면 탄탄한 토대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짓는 것과 같다. 마치 성문을 단단히 지키는 문지기를 둔 것 같다. 도둑과도 같은 잡념이 차단된다. 설령 들어 온다고 하더라도 힘을 잃고 만다. 생각의 집을 짓지 못하는 것이다.
군대시절 면회실 장면이 떠 올랐다.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새김의 토대가 어느 정도 확립된 상태에서 떠 오른 것이기 때문에 좌선을 그만 두고 싶을 정도로 강력한 것은 아니었다.
새김이 확립된 상태에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이는 새김이 없는 상태에서 떠오르는 잡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주로 담마(dhamma: 法)에 대한 것이 많다. 그래서 오근의 새김에 대하여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한다.”(S48.9)라고 했을 것이다.
좌선의 성패는 새김의 확립에 달려 있다. 새김이 확립되지 않고 망상속에서 보낸다면 피곤한 것이다. 그러나 새김이 확립되어 확고하고 탄탄해진 상태가 되면 어지간한 잡념은 쳐 낼 수 있다.
갑자기 마음이 밝아졌을 때
좌선에서 30분은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다. 본래 한시간 앉아 있어야 하나 생업이 있어서 가능하지 않다. 그 대신 오전에 30분, 오후에 30분 하여 한시간 앉아 있기로 했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둔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마음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동시에 마음이 고요한 상태가 되었다. 이것은 기회이다.
기회가 오면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마치 굶주린 치타가 먹이를 발견했을 때 강력한 어금니로 숨통을 물은 것과 같다. 물은 것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이 밝아진 상태와 일시적으로 고요한 상태 역시 놓치지 말아야 할 먹이와도 같다.
마치 화면이 전환되듯이 마음이 바뀌었다. 일시적으로 마음이 밝아지고 마음이 고요해졌을 때 계속 이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탄탄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음이 밝아지고 고요해지면 잘 보이는 것 같다. 마치 어두침침한 방에 백촉짜리 백열전구를 켜는 것과 같다. 개미 지나가는 것도 보일 정도라면 아주 밝은 것이다.
마음이 밝지 않고 어두울 때 마음은 잡념의 놀이터가 된다. 그러나 마음이 밝고 고요한 상태가 되면 더 이상 잡념은 발 붙이지 못한다. 그 대신 경전에서 읽었던 담마나 법문에서 들었던 것들이 떠 오른다.
좌선 중에 떠 오른 담마는 잡념과 다른 것이다. 둘 다 모두 새김의 대상이긴 하지만 담마는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다. 이렇게 본다면 싸띠라 하여 반드시 몸이나 느낌, 마음만을 관찰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서 떠오르는 담마도 싸띠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마음이 밝아지고 또한 마음이 고요해져서 어느 정도 새김이 확립되었다. 이런 상태가 되자 몸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는 몸의 감촉을 느낄 때만 몸이 있는 것을 아는 상태를 말한다.
평좌한 두 장딴지가 바닥에 닿는 느낌을 받았을 때
배의 부품과 꺼짐, 그리고 엉덩이 닿음을 새겼다. 그런데 닿음을 관찰하다 보니 평좌한 두 장딴지가 바닥에 닿는 느낌을 받았다. 비로소 두 다리가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두 장딴지가 방석에 닿는 느낌을 받았을 때 나의 장딴지가 아닌 것 같았다. 마치 남의 다리처럼 느껴진 것이다. 몸 전체가 그랬다. 단지 이를 아는 마음만 있는 것 같았다.
좌선 중에 마음이 가는 곳에 몸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마음이 배에 가 있으면 배가 있는 것이다.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 평좌한 장딴지에 가 있으면 비로서 장딴지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몸을 내 몸이라 할 수 있을까?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듣는 말이 있다. 다리가 저려 통증이 일어났을 때 “남의 다리 보듯이 관찰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물질과 정신을 분리해서 관찰하라는 말이다.
흔히 사람들은 이 몸이 내 몸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 마음이 내 마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위빠사나 스승들은 이 몸과 마음에 대하여 내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위빠사나 16단계 지혜가 있다. 제1단계의 지혜는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이다. 정신 따로 물질 따로 보는 것이다. 이 단계를 넘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 갈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몸과 마음에 대하여 몸 따로 정신 따로 보라고 했다. 사람들에게는 내 몸, 내 마음이라 하여 몸과 마음이 내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데 몸 따로 정신 따로 라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을 해보면 알 수 있다.
오늘 좌선에서 몸 따로인 것을 알았다. 이전에도 알고 있었으나 오늘 확연히 드러나는 것 같았다. 두 장딴지가 마치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제삼자의 위치에서 보는 것 같았다.
몸은 신진대사를 하는 나무토막과도 같은 것
위빠사나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는 몸 따로 정신 따로인 것을 아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왜 몸 따로 정신 따로라고 하는가?
몸은 마치 나무토막과도 같은 것이다. 생명기능이 없다면 시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설령 생명기능이 있는 몸이라고 하더라도 내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왜 그런가? 대사작용을 보면 알 수 있다.
밥을 먹으면 몸 속에서 소화가 된다. 음식이 소화가 되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가 된다. 또한 갖가지 효소를 만들어 낸다. 이는 물질이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청정도론에 따라면 열 번 진행된다고 한다. 이런 신진대사를 내가 모두 다 알 수 있을까?
몸은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알아서 신진대사를 한다. 이런 몸에 대하여 이래라 저래라 통제할 수 없다. 통제할 수 없어서 내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몸은 내 것이 아니다.
몸은 정신과 결합되어야만 몸으로 기능이 발휘된다. 생명기능도 없고 정신기능도 없다면 통나무토막과도 같은 것이 된다.
좌선하다 보면 몸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럴 때 닿은 느낌을 받을 때 비로서 몸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평좌한 두 장딴지에서 닿음을 느꼈을 때 비로소 몸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 몸 따로 마음 따로인 것을 알게 되었다. 위빠사나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해당된다고 보았다.
찰나삼매를 바탕으로 위빳사나를 관찰하는 모습
위빠사나 수행을 십년 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위빠사나 지혜는 잘 생기지 않는 것 같다. 언제나 제자리 걸음인 것이다. 1단계에서 한걸음도 못나가는 것 같다.
오늘 몸 따로 정신 따로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혹시 이런 것도 책을 보아서 그런 것 아닐까? 마하시 사야도의 ‘찰나삼매를 바탕으로 위빳사나를 관찰하는 모습’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래서 본 승은 배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팽팽함, 밀어냄, 움직임 등 바람 요소를 시작으로 관찰하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 관찰하는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배가 부풀 때는 <부푼다>라고 관찰해야 합니다. 꺼질 때는 <꺼진다>라고 관찰해야 합니다. 부품과 꺼짐, 이 두 가지를 시작으로 관찰하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두 가지도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부푼다. 꺼진다>라고 관찰하고 있다가 생각이 일어 나면 그 생각도 관찰해야 합니다. 그 뒤 부품과 꺼짐을 다시 관찰합니다.
몸에 참기 어려운 어떤 괴로운 느낌이 분명하게 드러나면 그것도 관찰해야 합니다. 그렇게 관찰해서 괴로운 느낌이 사라지든지, 사라지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오랫동안 관찰했다면 부품과 꺼짐으로 다시 돌아와 집중해서 관찰합니다.
손이나 다리를 구부리는 것. 펴는 것. 움직이고 자세를 바꾸는 것이 생겨나면 그 몸의 움직임들도 관찰해야 합니다. 그 뒤 부품과 꺼짐으로 다시 돌아와 관찰합니다.
특별한 봄, 들음 등이 분명하게 드러나면 그것도 <본다, 본다; 들린다, 들린다>라는 등으로 관찰해야 합니다. 그렇게 두 번, 세 번, 네다섯 번 관찰하고 나서 다시 부품과 꺼짐으로 돌아와 집중해서 관찰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집중해서 관찰하면 마음의 집중됨인 특별한 삼매가 생겨나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때 거듭 관찰할 때마다 관찰해서 알아지는 물질이 따로, 관찰해서 아는 정신이 따로 구분되어 분명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집중됨인 삼매를 의지해서 물질과 정신을 구별 하여 아는 특별한 위빳사나 지혜가 생겨난 것입니다.”(담마짝까법문, 209-210쪽)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은 기본이다. 마치 베이스캠프와도 같은 것이다. 통증이나 잡념이 발생되었을 때 그것이 더 강력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먼저 관찰하라고 했다. 관찰해서 사라지면 주관찰대상인 배의 부품과 꺼짐으로 복귀해야 됨을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몸과 마음을 새기는 것이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몸 따로 마음 따로 새기는 것이다.
장딴지에 닿는 느낌이 발생 했을 때 닿음은 물질이고, 닿음을 아는 것은 정신이다. 이 두 가지를 새겼을 때 몸 따로 마음 따로 인 것을 알게 된다. 몸이 내것이 아니고 마음도 내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몸과 마음이 생겨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는 “거듭 관찰할 때마다 관찰해서 알아지는 물질이 따로, 관찰해서 아는 정신이 따로 구분되어 분명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위빠사나 1단계 지혜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는 몸과 마음이 내것이 아니고 조건 발생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좌선해서 새김이 확립된 상태에서 발생되는 현상을 보면 알 수 있다. 나에게 있어서는 평좌한 두 장딴지가 마치 남의 다리처럼 여겨 졌을 때 몸 따로 마음 따로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것도 위빠사나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아는 지혜에 해당되는 것일까?
이제 들어가는 방법을 어느 정도 알았으니
매일 30분 두 차례 앉아 있는다. 오늘 두 장딴지 닿음을 느꼈을 때 나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알게 된 것은 사띠가 확립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앉아 있다 보면 고요해질 때가 있다. 이런 때 잘 보인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몸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되었을 때, 몸의 닿음이 있게 되면 그제서야 비로소 몸이 있게 됨을 알 수 있다. 이런 것도 몸 따로 마음 따로로 아는 것이라 본다.
위빠사나수행 지침서를 매일 읽는다. 특히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을 읽으면 매우 공감한다. 이는 수행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법문을 읽고서 수행에 적용해 본다.
어떤 이는 책을 읽지 말라고 한다. 수행지침서도 읽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을 읽다 보면 모두 수긍하게 된다. 그럼에도 “혹시 이런 것이 수행에 방해가 되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책에서 읽은 것을 자신이 경험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오늘 어느 정도 새김이 확립된 상태에서 몸과 마음이 구분되어 있음을 보게 되었다. 설령 이런 것이 책에서 본 것을 착각한 것으로 여기는 것일지라도 몸과 마음이 따로이고 또한 조건 발생하는 것이어서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들어 가는 방법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리에 앉을 때 처음에는 잘 집중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내를 갖고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해야 한다. 여의치 않으면 엉덩이 닿음도 추가해야 한다, 이런 상태를 인내를 가지고 새기다 보면 어느 순간 바뀐다. 마치 화면이 바뀌듯이 드라마틱한 반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마음이 밝은 상태 고요한 마음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좌선이 늘 잘되는 것은 아니다. 그날 컨디션에 따라 달려 있다. 몸이 아프다면 5분도 앉아 있을 수 없다. 날씨가 너무 더워도 힘들고 너무 추워도 어렵다. 그럼에도 인내를 가지고 앉아 있다 보면 들어가게 된다. 이제 들어가는 방법을 어느 정도 알았으니 다음 좌선에도 적용하고자 한다.
2024-08-1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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