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지혜에 이르는 자는 만명 가운데 하나
마음을 정화하는데 명상만한 것이 없다. 이때 명상은 일반적으로 좌선을 말한다. 명상 한번 하고 나면 잠을 자고 난 것처럼 개운하다.
오늘 아침 스마트폰을 열어 보았다. 요즘 자주 있는 일이다. 이삼주전까지만 해도 자제했었다. 명상하는데 방해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열어 보는 것은 올린 글에 대한 반응을 보기 위함이다. 그러나 부작용도 업지 않을 수 없다.
스마트폰에서 페이스북을 볼 때 내 글에 대한 반응만 확인하는 것은 아니다. 남의 글도 보며 ‘좋아요’ 추천하거나 댓글을 단다. 그런데 거슬리는 글도 한두 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사람들 성향은 다양하다. 모두 다 내마음 같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걸린 글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면 나만 손해이다. 그 글로 인하여 불선심이 일어났다면 아침 명상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거슬리는 글을 보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뜻대로 하도록 해야 할까? 그렇게도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변함이 없다. 이럴 때는 내가 변해야 할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차단하는 것이다. 동네가 조용할 것 같다.
가능하면 잠에서 깨었을 때 스마트폰을 보지 않고자 한다. 그 대신 책을 보고자 한다. 머리맡에 있는 경전이나 논서를 보는 것이다.
하루를 스마트폰 보는 것부터 시작하면 마음이 혼란스러워진다. 마치 아침에 뉴스를 보는 것과 같다.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한다면 책을 보아야 한다. 머리맡에 있는 경전과 논서를 보면 하루가 고상하게 시작되는 것 같다.
좌선 30분에 머리가 맑아 졌다. 늘 이런 상태가 유지되고자 한다. 불선심이 일어나게 하는 대상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일부 스님들의 페이스북 계정을 차단하는 것도 해당된다.
무위도식에 막행막식하는
페이스북을 보면 갖가지 인간군상을 보게 된다. 그 중에 스님들도 있다. 안거 기간 중에 페이스북에 기생해서 노는 것 같다. 올린 콘텐츠를 보면 세속인과 다를 바 없다.
재가불자들은 담마에 목말라 한다. 스님들의 법문을 찾아서 듣는다. 그런데 스님들이 먹는 것에 관심을 가지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상 가득 차린 사진을 보여 주었을 때 한국불교 현실을 보는 것 같다.
어느 스님은 똑 같은 글을 반복적으로 올린다. 그것도 하루에 수도 없이 올린다. 몇 년 전 것도 같은 내용이다. 이런 콘텐츠를 접했을 때 정신적 능력을 의심하게 만든다.
어느 스님은 차(茶)에 대한 이야기를 올린다. 차에 관한 한 박사인 것 같다. 그런데 어디에도 담마에 대한 것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독자들이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 ‘차스님’이라고 볼 것이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는 말이 있다. 스님 글에는 담마가 없다. 스님 글을 보면 세속인이나 다름 없다. 정치에 대하여 분노하는 글을 보면 한편으로 공감하기도 하지만 지속적으로 반복 될 때 공부는 언제 하는지 의문이 든다.
스님에 대한 글을 쓰면 반박 글을 받는다. 주로 스님에 의해서 문제가 되기 된다. 어떤 것인가? 모든 스님들이 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스님에 대한 글을 쓰면 삼보를 비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페이스북에서 노는 스님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대부분 무위도식하는 스님들로 본다. 그런 스님들의 글에는 담마가 없다. 수행도 없다. 세간 사람들이나 하는 것을 똑같이 따라 하는 것 같다. 무위도식에 막행막식하는 것이다.
무위도식하며 막행막식하는 스님에게서 배울 것은 없다. 불선심만 자극할 뿐이다. 이런 스님 글에 개선을 촉구하는 댓글을 달아 보았지만 반응이 없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 차단이 답이다. 동네가 조용할 것 같다.
로또 맞을 확률보다 더 낮은 위빠사나 지혜
재가우안거 26일째이다. 오늘 새벽 잠에서 깨었을 때 오늘 쓸 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머리맡에 있는 논서 영향이 크다.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에서 본 것을 꼭 글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것은 위빠사나와 팔정도에 대한 것이다. 미얀마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2018 12월 31일의 일이다. 그때 미얀마에 갔었다. 한해 끝자락에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저녁에 양곤에 도착했다. 날씨는 컴컴해졌다. 일단의 수행자 무리를 실은 봉고차는 어둠 속에서 양곤 외곽에 있는 담마마마까국제선원으로 달렸다.
미얀마는 오래 전부터 가고 싶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나라로 알고 있었다. 또한 부처님이 전한 가르침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수행의 나라로 알고 있었다. 김진태 선생의 권유로 수행자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수행자들은 12월 31일 어두컴컴한 선원에 도착했다. 혜송스님이 마중 나왔다. 혜송스님은 수행자들을 에인다까 사야도 방으로 안내했다.
열네 명의 수행자들은 사야도와 상견례 했다. 미얀마어가 능숙한 혜송스님이 통역했다. 사야도는 한국에서 온 수행자들에게 위빠사나 수행이 어떤 것인지 말해 주었다.
어떤 것이든지 글의 소재가 될만한 것이 있으면 메모해 둔다. 사야도와의 상견례 때 들은 것을 스마트폰 메모앱에 골자를 써 두었다.
에인다까 사야도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는 수행자들에게 찬물을 끼얹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위빠사나 수행이 만만한 것이 아님을 뜻한다.
그날 밤 들었던 것을 기억을 되살려 후기 형식으로 글을 써 놓았다. 가장 충격적인 말은 위빠사나 지혜에 이른 자는 만명 중에 한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수행을 한다고 하여 모두 다 깨닫는 것은 아니다. 선원에서 산다고 하여 모두 깨닫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스님들과 재가자들로 이루어진 일단의 수행자들에 대하여 사야도는 위빠사나 지혜에 이른 자는 만명 중에 한사람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후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만명 중의 하나라면 0.0001%에 해당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고 하지만 그 중에 한사람 정도만 위빠사나 지혜에 이른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듣자 맥이 풀리고 힘이 빠진다. 로또복권이 연상되기도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근기가 없는 자는 지혜에 이를 수 없다는 말 아닌가! 사야도는 상견례에서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차라리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지혜에 이를 수 있다’라고 격려했어야 맞지 않을까? (사야도 상견례, 담마마마까 수행기2 (tistory.com), 2019-01-17)
위빠사나 지혜에 이르기는 로또 맞을 확률보다 더 낮은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참으로 낙담했다. 선원에서 살면 어떤 극적인 변화를 맞이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잔뜩 가지고 먼 나라에 까지 왔는데 0.0001%의 사람이 궁극적 지혜에 이를 것이라고 했다.
에인다까 사야도가 말한 위빠사나 지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위빠사나 16단계 지혜가 떠올랐다. 궁극적으로 열반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야도가 말한 만명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열반에 이른 자는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갈 가능성은 0.0001%에 해당됨을 말한다.
정학에 대하여 전혀 다르게 이야기하는 사야도
에인다까 사야도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스마트폰 메모앱에 메모해 두었다. 그런데 사야도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던 팔정도에 대하여 전혀 다르게 말했다. 처음 들어 본 것이기도 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에인다까 사야도는 상견례에서 세 가지를 강조했다. 그것은 위리야(정진)와 사띠(정념)와 빤냐(지혜)에 대한 것이다. 사야도는 사띠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정진이라 했다. 또 사띠가 성성하게 유지 되는 것이 정념이라 했다. 마지막으로 오온에 대하여 심, 수, 신, 법으로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고 보는 것이 지혜라 했다. 이 모든 것이 사띠를 중심으로 해서 돌아가고 있음을 강조했다.”(사야도 상견례, 담마마마까 수행기2 (tistory.com), 2019-01-17)
팔정도에서 정학에 대한 것은 정정진, 정념, 정정이다. 이 세 가지는 팔정도분석경(S45.8)에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전혀 다르게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싸띠에 기반한 것이었다.
사야도는 교학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사야도는 철저하게 수행을 기반으로 하여 말했다. 그것도 싸띠에 기반한 것이다. 그래서 정정진에 대해서는 사띠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정진이라고 했다. 사띠가 성성하게 유지 되는 것이 정념이라 했다.
정정에 대한 것은 후기에 보이지 않는다. 사야도의 말을 놓쳤을 수도 있다. 현재 시점에서 추측해 본다. 아마 찰나삼매에 대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에인다까 사야도와 상견례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제까지 책으로만 접했던 것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사야도는 지혜에 대해서도 말했다. 이는 블로그에 “오온에 대하여 심, 수, 신, 법으로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고 보는 것이 지혜라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멸현상을 보는 것이 지혜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상, 고, 무아라는 통찰지일 것이다.
에인다까 사야도는 마하시 사야도의 손상좌
머리맡에 있는 담마짝까법문을 보다가 6년전에 있었던 그날 밤의 일이 떠올랐다.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에는 에인다까 사야도가 말했던 것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에인다까 사야도는 담마짝까법문을 기초로 해서 말해준 것일까?
미얀마에는 커다란 계보가 하나 있다. 마하시 방식의 계보를 말한다. 전세계적으로 마하시 방식이 가장 널리 퍼져 있는데 이는 마하시 사야도의 저서와 법문집 영향 때문일 것이다.
매일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읽는다. 현재 읽고 있는 것은 담마짝까법문이다. 이전에는 ‘아리야와사법문’을 읽었다. 더 이전에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과 2권’을 읽었다.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에 푹 빠져 있다. 머리맡에 두고서 잠 자기 전에 읽고 잠에서 깨어나서 읽는다. 중요부위는 노랑색 형광메모리펜 칠을 해둔다. 더 중요한 부분은 분홍색 펜으로 덧칠한다.
에인다까 사야도는 어떻게 마하시 사야도가 말한 것과 동일한 말을 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에인다까 사야도가 마하시 사야도의 손상좌 뻘에 해당되기 때문일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에게는 여러 명의 직계 제자들이 있었다. 거의 대부분 입적했지만 아직도 생존해 있는 직제자도 있다. 나이가 90이 넘는 찬먜 사야도가 대표적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여러 직제자 가운데 쿤달라 사야도가 있다. 미얀마 ‘삿담마란시’국제선원을 창건한 사야도이다. 이 선원에서 혜송스님이 배웠다고 한다. 쿤달라 사야도의 상좌 가운데 한사람이 에인다까 사야도이다.
담마마마까 선원장 에인다까 사야도의 스승은 쿤달라 사야도이다. 에인다까 사야도의 스승의 스승은 마하시 사야도이다. 에인다까 사야도는 마하시 사야도의 손상좌가 되는 것이다. 이런 계보가 있기에 에인다까 사야도는 마하시 사야도가 말한 것과 똑 같은 내용을 말한 것으로 본다.
담마마마까 선원은 한국절이나 다름 없다. 혜송스님이 원력으로 창건된 절이기도 한다. 혜송스님의 원력과 한국의 스님들과 불자들이 십시일반 모금해서 건립된 국제선원이다.
담마마마까 선원은 ‘고려사’라고 한다. 그런데 담마마마까 선원은 한국의 종단에 귀속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선원을 만들어 미얀마 상가에 기증한 것이다. 그럼에도 고려사라 하여 한국절이라고 한다. 창건주 혜송스님이 관리하는 선원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사야도 방에는 혜송스님의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 있다.
보름동안 미얀마에 있었지만
위빠사나 수행 한지 십년이 넘었다. 그러나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가운데 첫번째 단계도 넘은 것 같지 않다. 6년 전에도 그랬다.
미얀마에 가게 된 것은 김진태 선생의 권유가 결정적이다. 미얀마에 가면 틀림 없이 변화를 맞게 될 것이라고 했다. 매일 글만 쓰는 것과 한번 수행해 보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미얀마에만 가면 체험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행도 제대로 해 보지 않은 자가 앉아 있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앉아만 있으면 무언가 큰 변화가 생길 것 같았다.
미얀마에는 보름 있었다. 거의 보름동안 행선도 하고 좌선도 해 보았지만 마음의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오후에 먹지 않는 오후불식으로 인하여 몸이 피곤하고 정신마저 해이해져 갔다.
선원 시간표를 보면 짝수 시간에 좌선하고 홀수 시간에 행선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시간표 대로 행하면 장사도 견디어 나지 못할 것이다. 하루에 세 번 좌선하면 많이 하는 것이다.
새벽 네 시 좌선과 저녁 여덟 시 좌선은 필수이다. 여기에 두 세 번 더하면 많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힘이 없어서 가능하지 않았다. 하루에 좌선 세 번 하는 것으로 그쳐야 했다. 행선도 한시간씩 여러 차례 해야 하나 한시간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보름동안 미얀마에서 변화를 가지지 못했다. 어쩌면 환상이었는지 모른다. 짧은 기간에 욕심을 낸 것이다. 그럼에도 남은 것은 있었다. 그것은 미얀마 불교를 체험한 것이다. 탁발을 보면서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것을 보았다.
사무실에 수행공간을 만들고
미얀마에서 체험은 수행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막연히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구체화 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사무실에 수행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행은 모여서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수행은 집중수행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선원에 가서 집중수행하는 것이다. 명상홀에서 행선과 좌선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재가불자가 시간 내기 힘들다. 집중수행하기 위해서 10일 시간 내는 것도 쉽지 않다. 하물며 두세 달씩 미얀마에 가서 어떻게 보낼 수 있을까? 생업이 있는 자는 불가능한 것이다.
생업이 있는 재가자는 선원에서 두세 달 보낼 수 없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것은 사무실에 명상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수행을 한다고 하여 반드시 커다란 명상홀에서 해야 할까?
미얀마에 있을 때 행선과 좌선은 커다란 명상홀에서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한 것이다. 그렇게 하니 수행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하다 보니 숙소는 그야말로 잠자는 장소, 휴식을 취하는 장소가 되었다.
초기경전을 보면 수행자들이 모여서 수행했다는 것을 보기 어렵다. 수행은 각자 처소에서 하고 법문 들을 때만 커다란 홀에 모이는 것이다. 니까야에 등장하는 ‘중각강당’이 대표적이다.
규모가 있는 절에는 강당이 있다. 문자 그대로 설법을 듣는 곳이다. 그런데 오늘날 선원에서는 함께 모여 수행하는 장소로 되었다.
수행은 각자 하는 것이다. 수행은 남 보기 좋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은 숙소인 ‘꾸띠’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무실 공간을 수행공간으로 만들었다. 열 평 가량 되는 사무실을 칸막이로 하여 반을 명상공간으로 만들었다. 바닥에 매트를 깔아 보니 3평이 확보 되었다. 행선공간도 만들었다. 사무실 벽면 복도에 검정 테이프를 붙여서 5미터 가량의 행선공간도 확보 되었다. 2020년 1월의 일이다. 미얀마에 다녀온지 만 1년만의 일이다. 이에 대하여 ‘사무실을 수행공간으로 (tistory.com)’(2020-01-14)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사무실 반쪽을 수행공간으로 만들었다. 매일 앉아 있고자 했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다. 생업을 병행하면서 앉아 있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틈만 나면 앉아 있고자 했다.
위빠사나 정정진, 정념, 정정이란?
사무실을 수행공간으로 만든지 4년이 되었다. 요즘은 2024년 우안거철이다. 재가우안거를 사무실에서 하고 있다. 행선과 좌선이 끝나면 수행기를 쓴다. 오늘 써야 할 것은 위빠사나와 팔정도에 대한 것이다.
에인다까 사야도가 말한 것이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에서 발견되었다. 마히시 사야도는 팔정도의 바른 정진(정정진), 바른 새김(정념), 바른 삼매(정정)에 대하여 ‘위빳사나 삼매 도 구성요소가 생겨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겨나는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푼다, 꺼진다; 앉음, 닿음; 생각함, 망상함; 안다; 뜨거움, 아픔; 본다, 들린다>라는 등으로 계속해서 새길 때마다 그렇게 관찰하도록 애쓰고 힘을 실어주는 것이 바른 노력 도 구성요소입니다. 새기는 것이 바른 새김 도 구성요소입니다. <<몸의 움직임을 새기는 것이 몸 거듭관찰 새김확립이고 느낌과 마음과 법 성품을 새기는 것이 각각 느낌 거듭관찰, 마음 거듭관찰, 법 거듭관찰 새김확립입니다.>> 관찰하는 대상에만 계속해서 밀착해 머무는 성품이 바른 삼매 도 구성요소입니다. <<위빳사나 찰나삼매 도 구성요소입니다.>> 그 바른 노력, 바른 새김, 바른 삼매가 삼매 도 구성요소 세 가지입니다.”(담마짝까법문, 217쪽)
마하시 사야도에 따르면, 삼매 도 구성 요소 세 가지는 바른 노력(정정진), 바른 새김(정념), 바른 삼매(정정)라고 했다. 팔정도에서 정학에 대한 것이다. 이 세 가지에 대하여 바른 삼매 도 구성요소라고 한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가 말한 삼매 도 구성요소는 수행에 대한 것이다. 팔정도분석경에 실려 있는 정형구와는 다른 것이다. 수행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새김(싸띠)이 빠지지 않는다.
수행에서 정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새김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정정진에 대해서는 “새길 때마다 그렇게 관찰하도록 애쓰고 힘을 실어주는 것이 바른 노력 도 구성요소”라고 했다. 이는 2018년 끝자락에 에인다까 사야도가 “사띠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정진입니다.”라고 말한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팔정도 분석경에서 바른 삼매(정정)는 네 가지 선정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관찰하는 대상에만 계속해서 밀착해 머무는 성품이 바른 삼매 도 구성요소”라고 했다. 부연설명으로 “위빳사나 찰나삼매 도 구성요소입니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위빠사나 수행에서 바른 삼매는 ‘찰나삼매’임을 뜻한다. 이 말은 2018년 끝자락에 에인다까 사야도가 “사띠가 성성하게 유지 되는 것이 정념입니다.”라고 말한 것과 일치한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정학과 팔정도분석경(S45.8)에서 정학은 다르다. 팔정도분석경에서의 정학은 교학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정학은 철저하게 새김(싸띠)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정정진에 대해서는 새길 때마다 관찰하도록 힘을 실어 주는 것이라고 했고, 정정에 대해서는 관찰하는 대상에만 계속해서 밀착해 머무는 성품이라 했는데 이는 찰나삼매를 뜻한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팔정도의 정학에 대한 설명은 다르다. 그렇다면 정념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했을까? 이는 팔정도분석경에 실려 있는 그대로이다. 이는 마하시 사야도가 “몸의 움직임을 새기는 것이 몸 거듭관찰 새김확립이고 느낌과 마음과 법 성품을 새기는 것이 각각 느낌 거듭관찰, 마음 거듭관찰, 법 거듭관찰 새김확립입니다.”라고 설명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위빠사나 정견과 정사유는 무엇인가?
교학과 수행은 다른 것이다. 팔정도분석경에 실려 있는 정형구와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정견과 정사유는 어떻게 다를까? 먼저 정견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위빳사나 통찰지 도 구성요소가 생겨나는 모습’으로 설명된다.
“관찰하는 대상을 사실대로 계속해서 아는 것이 바른 견해도 구성요소입니다. 마음청정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때 새겨 알아지는 물질대상과 새겨 아는 마음-정신을 사실대로 구분해서 압니다. 이렇게 앎이 분명해졌을 때 견해청정(ditthi visuddhi)이 생겨납니다. 그 뒤에 계속 관찰해 나가면 원인과 결과를 구분해서 알게 됩니다. ‘굽히려는 마음이 있어서 굽힌다. 펴려는 마음이 있어서 편다. 움직이려는 마음이 있어서 움직인다. 눈이 있어서 본다. 보이는 대상이 있어서 본다. 귀가 있어서 듣는다. 소리가 있어서 듣는다. 업이 좋아서 행복하다’라는 등으로 원인과 결과만 있음을 사실대로 계속해서 알게 됩니다. 그 뒤에 다시 계속해서 관찰할 때마다 처음 생겨나는 것도 알게 됩니다. 마지막에 사라져버리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관찰되는 대상이든, 관찰해서 아는 마음이든 ‘항상하지 않다’라고도 사실대로 압니다. ‘순간도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할 만한 것일 뿐이다. 좋아할 만한 것이 없는 괴로움일 뿐이다.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무아다. 지배 할 수 없는 성품법들일 뿐이다’라고도 사실대로 압니다. 이렇게 알 때 마다 계속해서 알고 보는 성품이 바른 견해도 구성요소들입니다.”(담마짝까법문, 217-218쪽)
이것이 위빠사나 정견이다. 팔정도분석경에 실려 있는 교학적인 정견과는 다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했을 때, 물질과 정신이 구분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견해청정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런 것도 정견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원인과 결과를 구분해서 알게 되었을 때 무상, 고, 무아일 뿐이라 사실대로 알게 되었을 때, 이처럼 성품법을 알고 보는 것에 대하여 정견, 즉 바른 견해라고 했다.
팔정도에서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에서 정견은 물질과 정신을 구분해서 알고 조건발생하는 것으로 아는 것이다. 이는 수행적 관점이다. 구체적으로 ‘굽히려는 마음이 있어서 굽힌다’라든가, ‘소리가 있어서 듣는다’라는 것을 예로 들었다. 육문에서 발생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새겼을 때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어서 집착할 것이 없다고 아는 것이 정견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사유는 어떤 것일까?
정사유는 팔정도분석경에서 출리, 분노없음, 해침없음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에서 정사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하지만 위빳 사나 관찰에 포함되는 생각은 법을 생각하는 그러한 종류가 아닙니다. 물질과 정신의 성품, 생겨남과 사라짐의 성품,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사실대로 바르게 알도록 향하고 이끌 듯이 마음을 기울여 주는 성품 입니다. 바로 그것을 바른 생각이라고 말합니다.”(담마짝까법문, 221쪽)
위빠사나에서 정사유는 성품법에 대한 것이다. 이는 물질과 정신을 새겨서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알 수 있도록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라고 했다. 부연하자면 “그렇게 사실대로 알고 볼 수 있도록 물질·정신 성품의 생겨남과 사라짐. 무상·고·무아의 양상으로 마음을 기울여주는 것이 바른 생각 도 구성요소입니다.”(218쪽)라고 말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말하는 팔정도와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팔정도는 다르다. 수행처에서 말하는 팔정도는 철저하게 새김에 기반한다. 모든 것이 새김 위주로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위빠사나 스승들은 언제나 “늘 새김을 유지하십시오.”라고 말한다.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와 법문집을 보고서 희망을
삼십분 좌선하고 후기를 두세 시간 쓰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것도 수행이라 할 수 있을까?
반드시 다리 꼬고 앉아 있는 것만이 수행은 아닐 것이다. 또한 수행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다. 수행은 골방과도 같은 공간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또한 수행은 내면에서 체험한 것에 대하여 쓰는 것이다.
명상에는 여러 명상이 있듯이 수행에는 여러 수행이 있다. 그 중에서도 위빠사나수행을 한다. 그런데 위빠사나 수행을 하려면 스승을 잘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위빠사나를 접한지 십년이 넘었다. 2018년 연말에 한국명상원에서 처음 접한 이래 16년 되었다. 이 긴 기간 동안 위빠사나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와 법문집을 통해서 제대로 알게 되었다.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와 법문집을 읽으면 마음이 충만된다. 아마 그것은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책을 접하는 것은 행운이다. 그런데 미얀마 사람들은 이미 60년도 전에 접했다는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가 위빠사나 수행방법론을 저술한 것은 1940년대 말이다. 이 저서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을까? 아마 마하시 사야도의 손상좌 뻘인 담마마마까의 에인다까 사야도도 영향 받았을 것이다.
2018년 끝자락에 에인다까 사야도의 말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위빠사나 지혜에 이르는 자는 만명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이 말에 낙담 했지만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와 법문집을 보고서 희망을 갖게 되었다. 2018년 끝자락에 미얀마에 간 것이 얼나마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2024-08-1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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