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행선할 때 발의 모양(이미지)을 보지 않았더니

담마다사 이병욱 2024. 8. 16. 11:21

행선할 때 발의 모양(이미지)을 보지 않았더니
 
 
가슴골에 땀이 주르르 흐른다. 등 뒤에도 땀이 흐른다. 머리에서도 땀이 나는 것 같다. 마치 한증막에 앉아 있는 것 같다.
 
재가우안거 28일째이다. 오전 여덟 시부터 삼십분 좌선에 들어갔다. 아직 냉방이 공급되지 않을 시각의 사무실이다. 밀폐된 공간에서 행선이 끝난 다음 앉아 있었다.
 
오늘 행선은 거의 삼십분 했다. 행선하는 것이 좌선하기 위한 예비단계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선방에서 스님들이 참선이 끝난 다음에 몸풀기 위한 포행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행선을 중요시 여기고 있다. 좌선을 한시간 하면 반드시 행선도 한시간 하라고 한다. 이는 마하시 전통의 선원에서 시간표를 보면 알 수 있다. 짝수 시간에는 좌선을 하고 홀수 시간에는 행선을 하는 것이다.
 
행선을 하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건강이다. 행선을 함으로 인하여 다리의 힘도 키우고 움직임으로 인하여 건강도 유지하는 것이다. 한시간 걷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행선을 하는 가장 큰 이점은 행선으로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빤냐완따 스님은  ‘걷는 수행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라는 제목의 소책자에서  “돌이켜보면, 이승은 출가 초기부터 좌선수행보다는 걷는수행을 많이 해온 편입니다. 좌선보다는 주로 걷는수행을 통해 삼매의 근력을 길렀고, 걷는수행을 통해 더 많은 법들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3쪽)라고 말했다.
 
빤냐완따스님의 경행예찬론
 
빤냐완따스님에 따르면 좌선만으로는 부동의 삼매를 계발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좌선으로 얻어진 삼매는 온실속의 화초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밖에 나가면 이내 시들어 버리듯이, 좌선에서 벗어나면 여지없이 깨져버림을 말한다. 그러나 행선을 통해 계발된 삼매는 강력한 힘을 지녀서 깨지지 않는다고 했다.
 
부처님은 행주좌와어묵동정 간에도 언제 어디서나 깨어 있음을 강조했다. 그래서 “오라 수행승이여,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림을 성취하라. 앞으로 가건 뒤로 돌아오건, 올바로 알아차려라. 앞으로 바라보건 뒤로 바라보건, 올바로 알아차려라. 몸을 굽히건 몸을 펴건, 올바로 알아차려라.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지닐 때에도, 올바로 알아차려라. 먹거나 마시거나 삼키거나 소화시킬 때에도, 올바로 알아차려라. 대소변을 볼 때에도, 올바로 알아차려라. 가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깨거나 말하거나 침묵할 때에도, 올바로 알아차려라.”(M125.28)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빤냐완따 스님에 따르면 행선은 좌선과 일상생활수행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했다. 행선은 지나치게 정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동적이지도 않는 수행을 말한다.
 
행선을 하면 많은 이점이 있다고 했다. 행선수행을 하면 일상생활속에서도 알아차림이 유지되는데, 이는 좌선수행할 때 집중력과 통찰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좌선과 행선은 항상 함께 해야 하고, 그것도 동등하게 해야 함을 말한다. 
 
행선과 좌선이 서로 도움을 주었을 때 상호보완속에서 더 깊은 통찰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빤냐완따 스님의 경행예찬론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행선대
 
빤냐완따 스님의 경행예찬론을 보면 경전적 근거가 있다. 스님이“좌선수행할 때 집중력과 통찰력에 도움이 된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경행이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A5.29)라는 말에서 근거한 것이다.
 
경전을 보는 것으로 그치면 안된다. 주석도 보아야 한다. 주석을 보기 힘들면 각주를 보면 된다. 행선이 좌선에 도움이 된다는 말은 주석에서는 “경행할 때의 집중은 앉아 있는 것보다 어렵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면, 오래 지속되고 몸의 자세를 바꾸어도 그 인상이 사라지지 않는다.”(Mrp.III.236)라고 설명되어 있다.
 
경행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짱까마(cakama)’라는 말을 번역한 말이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걷는 수행’이라 하여 행선이라고 한다. 영어로는 ‘워킹메디테이션(walking meditation)’이다.
 
부처님이 경행 했다는 말은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된다. 쌍윳따니까야 ‘쑤닷따의 경’에서는 “그래서 장자 아나타삔디까는 세존께서 계시는 씨따 숲으로 찾아왔다. 그런데 그 때 세존께서는 날이 밝아 일어나셔서 바깥을 거닐고 계셨다.”(S10.8)라고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거닐고 계셨다’라는 표현이 경행인 것이다.
 
경행은 산책하는 것과 다르다. 몸을 푸는 포행과도 다른 것이다. 빠알리어 사전에 따르면, 짱까마에 대하여 “a terraced walk; walking up and down.”라고 설명해 놓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일정한 거리를 왕복하며 걷는 것이다. 단지 걷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걸음으로 인하여 물질과 정신의 성품을 보는 것이다.
 
2018년 12월 31일 미얀마에 갔다. 2019년 1월 중순까지 보름가량 있었다. 두 주 동안 담마마마까 선원에서 집중수행했다. 귀국하기 하루 전에 선원투어를 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양곤 시내에 있는 마하시국제명상센터였다.
 
마하시국제명상선원에 가면 마하시 사야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행선대’였다. 마치 복도식으로 되어 있는데 길이가 20미터는 되는 것 같다. 바닥은 짙은 붉은 색이 나는 재질이 단단한 목재로 되어 있었다. 행선을 하면 발이 짝짝 달라 붙을 정도로 느낌이 좋을 것 같았다.
 

(마하시 사야도 행선대)

 
 
갈 때는 간다고 분명히 알아야
 
마하시 전통에서는 행선을 좌선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긴다. 행선을 통해서도 법의 성품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몸관찰’에 대한 것이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몸관찰을 중요하게 여긴다. 앉아서 좌선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선을 하게 하는 것도 몸관찰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본다. 이는 초기경전에 근거한다.
 
대념처경에 몸관찰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호흡새김을 포함하여 네 가지 행동양식에 대한 고찰, 몸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 서른 두 가지 양상에 대한 혐오, 광대한 세계에 대한 정신활동, 아홉 가지 묘지의 시체의 분류가 그것이다. 이런 몸관찰(신념처)은 느낌관찰(수념초), 마음관찰(심념처), 사실에 대한 관찰(법관찰) 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광범위한 것이다.
 
몸관찰에서 ‘네 가지 행동양식에 대한 고찰’은 행(行), 주(住), 좌(座0, 와(臥)에 대한 것이다. 이는 경에서 “또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알거나, 서 있으면 서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앉아있다면 앉아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누워있다면 누워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신체적으로 어떠한 자세를 취하든지 그 자세를 그대로 분명히 안다.”(D22)라고 표현에서 알 수 있다.
 
행, 주, 좌, 와에서 행에 대한 것을 보면“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안다.”라는 말이 있다. 이렇게 아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걷는다. 무심코 걷는 것이다. 이렇게 걸어서는 법의 성품을 보기 힘들다.
 
부처님은 “갈 때는 나는 간다고 분명히 안다.(Gacchanto vā gacchamīti pajānāti)”(D22)라고 했다. 이 말은 수행자라면 한걸음도 무심코 내딛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 말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려고 하는 마음이 제일 먼저 생겨난다. 그 마음 때문에 특별하게 앞으로 밀어 주는 동작들과 함께 앞으로 향하는 단계적인 움직임들이 생겨난다. 그러한 움직임들이 전체에 퍼져 생기기 때문에 몸이라고 부르는 모든 물질들의 한 동작, 한 동작들이 움직이며, 생멸하며 가는 것을 ‘간다’라고 부른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448쪽)
 
 
수행자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일상에서 수행 아닌 것이 없다. 걷는 것도 수행이다. 아무 생각없이 한걸음도 무심코 걸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늘 새김을 놓치지 말라는 말과 같다.
 
행선할 때 발의 모양(이미지)을 보지 않았더니
 
오늘 아침 평소와 다르게 행선을 더 많이 했다. 평소에는 일이십분 했으나 삼십분 가량했다. 이는 하나의 행선하는 방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선원에서 집중수행하면 늘 듣는 말이 있다. 그것은 행선할 때 발의 모양을 보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좌선 할 때 배의 모양을 보지 말라는 말과 같다. 처음에는 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위빠사나 수행은 실재를 보는 수행이다. 실재하는 성품을 보는 수행을 말한다. 이 말은 결국 개념을 보지 않는 수행을 말하기도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개념으로 살아간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언어적 개념을 말한다. 발이 있다면 발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발의 모양을 떠 올리는 것이다. 배라는 말을 듣는 순간 배를 떠올린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실재를 보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개념을 배제해야 한다. 개념이라는 빳냣띠(paññatti)가 아니라, 실재라는 빠라맛타(paramattha)를 보기 위함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실재를 보는 수행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개념을 배제해야 한다. 행선할 때 발의 움직임이 있는데 발이라는 모양이나 모습을 떠올리면 안된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 행선을 하다가 발의 모양을 배제하고자 했다. 이는 발의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게 하는 것도 된다. 발을 떼서, 올리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를 반복할 때 발의 모양이나 모습, 이미지를 배제하는 것이다.
 
지수화풍 사대로 설명되는 행선
 
행선할 때 발의 이미지를 배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순수한 움직임만 남게 될 것이다. 발을 들 때의 경쾌함이 있고 발을 내릴 때의 무거움이 있다. 또한 발을 디딜 때의 차가움이 있고, 발을 누를 때의 딱딱함이 있다. 이른바 지, 수, 화, 풍 사대를 보는 것이다.
 
행선할 때 발의 이미지를 제거하였더니 지, 수, 화, 풍 사대가 보이는 것 같았다. 전에도 이런 것을 느끼기는 하였지만 오늘 특별하게 더 강하게 와 닿았다.
 
행선할 때 발의 이미지를 제거하였더니 의도도 잘 보이는 것 같았다. 전에는 발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여섯 단계 행선을 했을 때 의도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미지를 제거 했더니 의도가 드러나는 것이었다.
 
행선은 의도가 있어야 가능하다. 몸은 신진대사기능이 있는 나무토막과도 같은 물질이기 때문에 혼자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다. 움직이려는 의도가 있어서 발이 움직인다.
 
발이 움직이는 것은 의도가 있어서 움직인다. 여기서 의도는 정신적 현상이고 움직이는 것은 물질적 현상이다. 정신과 물질이 구분되어 있음을 안다. 또한 조건발생하고 있음을 안다. 이는 위빠사나 1단계와 2단계 지혜에 해당된다.
 
흔히 지식과 지혜는 다른 것이라고 한다. 머리로만 이해한다면 이는 지식에 해당된다. 책을 읽어서 이해 했을 때 지식이 된다. 그러나 지혜는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책을 읽어서 이해는 것과는 다르다. 산전수전 겪은 노인의 한마디 말은 삶의 지혜에서 나온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한다고 하여 단지 느낌으로만, 마음으로만, 현상으로만 이해한다면 지혜를 얻기 힘들다. 반드시 몸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왜 마하시 전통에서 몸관찰을 중요시 여기는 것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새로운 발견이다. 이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오늘 확실히 드러난 것 같다. 행선할 때는 발의 이미지를 보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선원에서는 늘 강조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발의 모양, 발의 이미지를 생각하게 않게 되자 발의 움직임만 보이는 것 같았다. 발을 떼어서 올릴 때 발의 모양이나 이미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벼움만 보는 것이다. 이는 풍대, 바람요소 또는 바람의 세계에 대한 것이다. 이런 과정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걷는 한 동작에도 다리를 들 때 가벼움이 불 요소, 앞으로 나아갈 때 뻣뻣함과 움직임이 바람 요소, 다리를 내릴 때 무거움이 물 요소, 다리를 디뎌서 바닥에 닿아 누를 때 지지함이 땅 요소, 이렇게 네 가지 요소로 구분돼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아리야와사법문, 225쪽)
 
 
마하시 사야도는 행선에 대하여 지수화풍 사대로 설명했다. 육단계 행선을 하면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동작을 반복하는데 이를 지, 수, 화, 풍 사대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발의 이미지를 제거하고 행선할 때 사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발을 올릴 때 가벼운 느낌이 있다. 이를 화대(火大)라고 했다. 아마 불요소는 가벼워서 위로 올리는 성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발을 수평으로 밀 때는 풍대(風大)라고 했다. 아마 바람요소에는 운동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발을 내릴 때는 수대(水大)라고 했다. 아마 물요소는 무거워서 아래로 흐르는 성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발을 바닥에 디디고 누를 때는 지대(地大)라고 했다. 아마 땅요소는 지탱하는 딱딱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행선을 함으로 인하여 지, 수, 화, 풍 사대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의도가 있어서 보는 것이다. 의도가 없다면 몸은 “양쪽 입구로 육도, 적미, 강낭콩, 완두 콩, 기장, 백미와 같은 여러 종류의 곡식으로 가득 채운 푸대자루”(D22)같은 것이어서 움직이지 않는다.
 
행선을 하면 몸과 마음을 구분해서 관찰할 수 있다. 움직이려는 의도가 있어서 몸이 움직이는 것을 관찰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몸의 여러 동작, 물질의 여러 양상을 새길 때마다 계속해서 대상을 알지 못하는 몸과 물질이 따로, 아는 정신이 따로, 이렇게 구분돼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정신-물질 구별의 지혜(nāmarūpapariccheda ñāņa)입니다.”(아리야와사법문, 225쪽)라고 말했다.
 
행선을 하면 법의 성품을 알 수 있다. 특히 위빠사나 1단계 지혜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를 ‘나마루빠빠릿체다냐나(nāmarūpapariccheda ñāņa)’라고 하여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라고 말한다. 왜 마하시 전통에서 행선을 중요시 하는지 알 수 있다.
 
발을 움직이게 하는 어떤 실체도 없어
 
오늘 아침 행선을 하면서 발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발의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더니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런 느낌에 대하여 찬먜 사야도의 법문집에서는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같다.’라고 표현했다.
 
행선 할 때 발의 이미지를 제거했더니 발의 움직임만 남았다. 그리고 의도만 남았다. 한쪽 발을 이동하고자 했을 때 먼저 의도가 앞서는데 이 의도를 본 것이다. 그 다음은 여섯 단계 발의 움직이다. 새김이 깊으면 이 여섯 단계에서도 의도를 볼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갈 때는 간다고 분명히 안다’라고 말했다. 또한 굽힐 때는 굽힌다고 분명히 안다’라고 말했다. 이는 의도가 실린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의도하는가?
 
부처님 가르침에서 “누가 고통을 느낍니까?”라고 물어 보면 우문이 된다. 우문에 답을 하면 우답이 된다. 존재론적 질문에는 답이 없는 것이다. 그대신 부처님은 “어떻게 고통을 느낍니까?”라는 질문에는 연기법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앞으로 갈 때, 팔을 굽힐 때 “누가 가고 누가 굽힘니까?”라며 존재론적으로 질문하면 답이 없다. 이럴 때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다음과 같은 마하시 사야도의 설명에 답이 있다.
 
 
지혜가 무르익으면 굽히거나 펴기 전에 굽히려 하고 펴려 하는 마음들이 생겨나는 것을 분명하게 경 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마음을 <굽히려 함, 굽히려 함; 펴려 함, 펴려 함> 등으로 먼저 새겨야 합니다. 그 뒤 굽히고 펴는 동작들을 <굽힌다. 굽힌다; 편다. 편다>라고 새겨야 합니다. 그래서 ‘굽힘과 폄 이라는 동작은 굽히려 하고 펴려 하는 마음이 있어서 생기는구나. 조건이 있어서 결과가 있구나. 굽히거나 펴도록 만드는 어떤 실체는 없구나. 굽히고 있고 펴고 있는 어떠한 존재도 없구나. 조건과 결과만 있구나’라고 이해하게 됩니다.”(아리야와사법문, 226쪽)
 
 
앞으로 나아갈 때 의도가 있어서 나아간다. 이런 것에 대하여 자아가 있어서 나아간다고 말하면 위빠사나 지혜가 없는 것이다. 이는 내가 나아가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나는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조건으로 설명했다. 의도가 있어서 나아가는 것이다. 내가 있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찬먜 사야도의 법문집을 보면 “의도는 원인이고 발의 동작은 결과임을 깨닫게 됩니다.”(위빳사나 수행 28일, 213쪽,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출간)라고 말했다.
 
의도는 정신적 과정이고 발의 동작은 육체적 과정이다. 그래서 정신적 과정은 원인이 되고 육체적 과정은 결과가 된다. 여기에는 발을 움직이게 하는 어떤 실체도 없다. 자아라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오로지 원인과 결과만 있을 뿐이다. “조건과 결과일뿐이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행선 등으로 체험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빳짜야빠릭가하냐나(paccayapariggahaa)’라 하여, 조건발생의 지혜라고 한다. 위빠사나 2단계 지혜이다.
 
아침에 스마트폰 열어보지 말아야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 스마트폰을 보지 않았다. 다만 어제 올린 글에 대한 반응만 보았다. ‘좋아요’라거나, ‘최고에요’라는 이모티콘을 눌러 준 사람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새겼다.
 
아침에 뉴스를 보면 속된말로 기분이 잡친다. 아침에 뉴스를 보면 속이 뒤집어 질 수 있다. TV뉴스 보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인터넷 뉴스도 보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뉴스는 보지 않을 권리도 있다.
 
뉴스를 보지 않는 것은 불선심(不善心)이 자극되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영향을 줄 수 있다. 안보는 것이 최상이다. 피함으로써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아침에 뉴스도 보지 않고 스마트폰도 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유튜브도 보지 않았다. 어제까지는 조금씩 보았었다. 그 결과 페이스북에서 읽은 것이 영향을 주었다. 그에 따라 불선심이 일어났다.
 
하루를 불선심으로 시작할 수 없다. 하루를 뉴스 없이 시작하고자 한다. 하루을 스마트폰 보지 않고 시작하고자 한다. 잠에서 깨었을 때 그 마음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한다. 최소한 오전까지는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스마트폰을 열어 보지 말아야 한다.
 
이제 방법을 알았으니 매번 시행해보고자
 
오늘 아침 스마트폰을 열어 보지 않았다. 그 결과 글에 영향 받지 않았다. 백권당에 오자마자 준비한 음식으로 간단히 식사를 하고 행선에 임했다.
 
행선을 하다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발의 이미지를 제거하는 것이다. 발의 모양을 떠올리지 말고 행선하라는 말은 이전에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불현듯 다가온 것이다.
 
발의 이미지를 떠 올리지 않고 행선 했다. 그 결과 발의 움직임만 보이는 것 같았다. 발을 올릴 때의 경쾌함, 발을 밀 때의 움직임, 발을 내릴 때의 무거움, 발을 디딜 때의 딱딱함이다. 지, 수, 화, 풍 사대를 발의 움직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수행할 때 책을 읽지 말라고 말한다. 행선할 때 지, 수, 화, 풍 사대에 대한 것도 책의 영향일 수 있다. 그럼에도 발모양을 제거 했을 때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의도이다.
 
발의 모양과 함께 행선하면 사대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의도도 파악하기 힘들다. 그런데 발의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도록 노력했더니 발의 움직이려는 의도가 어렴풋이 보였던 것이다. 새로운 발견이다.
 
행선할 때 발의 모양을 보지 말라는 말은 수없이 들었다. 오늘 아침에야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이제 방법을 알았으니 매번 시행해보고자 한다.
 
 
2024-08-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