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하다가 피곤하면
커피 맛이 새롭다. 신맛, 단맛, 쓴맛이 난다. 여기에 향기까지 있다. 다름아닌 ‘백권당표 절구커피’맛이다.
창 밖은 훤하다. 블라인드 커튼을 쳐서 햇볕을 차단했음에도 매우 밝다. 마음도 또한 밝아지는 것 같다. 무엇보다 방금 막 좌선을 마쳤기 때문이다.
오늘로서 재가우안거 29일째이다. 이제 안거 삼분의 일이 다 된 것 같다. 매일 백권당에서 삼십분 앉아 있는 것으로 안거를 한다.
오늘은 끝까지 달려 보았다. 삼십분 알람 소리가 났음에도 요즘 속된 말로 쌩깐 것이다.
알람소리는 거의 일분 난 것 같았다. 평소 같으면 소리가 커서 서둘러 껐으나 내버려 두었다. 현재 이 상태로 계속 있고 싶었던 것이다.
좌선이 늘 잘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날은 망상으로 보낸다. 그러나 마음 먹고 자리에 앉으면 결과도 달라진다. 오늘이 그랬다.
행선을 하다가 그만 두었다. 냉방도 되지 않은 사무실의 행선대를 왕복하다 보니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런 상태로 자리에 앉으면 가슴에 땀이 주르륵 계속 흐를 것이다.
자리에 앉았다. 늘 앉는 자리이다. 백권당 사무실에 명상공간을 만든지 사년 되었다. 틈만 나면 자리에 앉고자 했으나 드문드문 앉았다. 안거를 맞이 하여 매일 삼십분 앉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좌선 삼십분은 긴 시간은 아니다. 조금 집중하려다 보면 알람소리가 난다. 그러나 생업이 있는 재가불자에게 한시간은 너무 길다. 오전에 삼십분, 오후에 삼십분 앉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저녁에도 삼십분 앉아 있어야 하나 아직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명상은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 스마트폰을 보지 않았다. 어제 올린 글에 대한 반응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누가 ‘좋아요’나 ‘최고에요’ 이모티콘을 눌러 주었는지 궁금했다.
스마트폰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다. 늘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있다. 페이스북, 카톡, 밴드, 유튜브가 대상이다. 올린 글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공감해 준 사람들 이름을 하나 하나 새긴다.
뉴스없는 세상에서 살고자 한다. 이런 이유로 아침에 뉴스를 보지 않는다. 지난 대선 이후 TV는 물론 인터넷 뉴스도 보지 않는다. 그러나 에스엔에스에서 간접적으로 뉴스를 접해서 세상 돌아가는 것쯤은 알고 있다.
아침에 뉴스를 접하면 분노가 일어날 것이다. 화가 난 상태에서 명상을 할 수 없다.
아침에는 가능하면 말을 하려 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말만 한다. 말하는 것이 좌선에 영향 줄 수 있다.
명상은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눈을 감음으로 인하여 현실의 세상에서 또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욕망이나 분노, 들뜸 등 불선한 마음부수가 있어서는 안된다.
나는 잘 할 수 있을까?
백권당 명상공간에 앉았다. 지난 사년 동안 늘 앉는 그 자리이다. 오늘은 잘 집중이 될까? 매번 자리에 앉으면서 잘 할 수 있는지 의문해 보는 것이다.
명상은 이쪽 문에서 저쪽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인연을 끊어야 한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과 반대가 되어야 한다.
마음이 감각적 대상에 가 있으면 저쪽 문에 들어갈 수 없다. 욕망에 가득 차 있는 자는 들어갈 수 없는 문이다. 뉴스를 보고 흥분한 자 역시 저쪽 문에 들어갈 수 없다. 막연한 기대로 들떠 있는 자 역시 저쪽 문에 들어갈 수 없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려면 문을 통과해야 한다. 방석에 앉아서 눈을 감으면 다른 세상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자주 하지 않으면, 자주 연습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새김이 없는 삶은
얼마나 많은 세월 앉아 있었던가? 위빠사나 수행한다고 수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매번 앉을 때마다 새롭다.
처음에 자리에 앉을 때 나의 몸과 나의 몸은 하나라고 본다. 팔을 들어도 무심코 든다. 걸음을 걸어도 무심코 걷는다. 소리가 들려도 무심코 듣는다. 새김이 없이 행위하는 것이다.
자리에 앉으면 새김을 유지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강한 대상을 보는 것이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가장 강한 대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호흡이다.
방석에 평좌하고 앉으면 그 순간부터 몸은 시체와도 같다고 보아야 한다. 마음의 문 하나만 남겨 놓고 나머지 감각의 문은 모두 닫아 버리는 것이다. 눈을 감고 가만 앉아 있는 이유가 이에 해당된다.
여섯 가지 감각의 문에서 마음의 문 하나만 열어 둔다. 이는 새김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마음의 문까지 닫아 둔다면 어떻게 될까? 잠을 자는 상태와 같다. 또는 요즘 속된 말로 ‘멍때리기’ 하는 것과 같다.
새김 없는 명상은 상상할 수 없다. 새김, 즉 싸띠가 없다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다. 새김이 없다면 축생의 삶이나 다름 없다.
새김이 없으면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 것이다. 마음은 늘 감각대상에 가 있을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을 즐기며 살아간다. 대부분 사람들은 눈과 귀 등으로 오욕락을 즐기며 살아간다.
일반사람과 수행자는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일반사람은 탐, 진, 치로 살아간다. 그러나 수행자는 이와는 반대로 무탐, 무진, 무치로 살아간다. 세상의 흐름을 거슬로 사는 것이다.
명상은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사는 것과 같다. 남들이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아 갈 때 무감각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방석에 앉아 눈을 감아 버리는 자체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 가는 것이다.
마음으로만 새겨야
늘 그렇듯이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했다. 그러나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서는 안된다.
잘 보면 보인다. 배의 부품과 꺼짐도 잘 보면 보인다. 그렇다고 육안으로 보라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따라서 배가 부풀 때마다 꺼질 때마다 그 생겨나는 순간과 잘 일치하도록 ‘부푼다, 꺼진다, 부푼다, 꺼진다’하며 끊임없이 새겨라, 마음으로만 새겨야 한다. 입으로 소리를 낼 필요는 없다. 부품과 꺼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호흡을 거칠게 해서도 안 된다. 호흡을 일부러 느리게 하거나 빠르게 바꾸어서도 안 된다. 일부러 호흡을 바꾸면 머지 않아 피곤해져서 잘 새길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평상시 호흡하던 그대로 자연스럽게 숨을 쉬면서 (대상과) 잘 일치하도록 새겨 보라.”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63-64쪽)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 “마음으로만 새겨야 한다.”라고 말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좌선한다고 눈을 감고 앉아 있기 때문에 육안으로 볼 수 없어서 마음의 눈으로만 보는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 배의 모양을 보아서는 안된다. 배의 이미지를 보아서 안된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마음의 눈으로 무엇을 보며 새겨야 할까?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다 보면 잘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있다. 자리에 처음 앉았을 때이다. 이럴 때 잡념이 치고 들어 온다. 마음은 늘 감각대상에 가 있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감각대상에 가 있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의 놀이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을 어느 한 곳에 묶어 두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청정도론에서는 “호흡의 기둥에 새김의 밧줄을 묶으면, 그 마음이 여기저기 날뛰어도 이전에 습관화된 대상을 얻을 수 없고 새김의 밧줄을 끊고 도망갈 수가 없고, 그 대상에 대하여 근접삼매와 근본삼매를 통해서 가까이 앉고 누울 수 있게 된다.”(Vism.8.153)라고 했다. 마음을 새김이라는 밧줄로 호흡이라는 기둥에 꽁꽁 묶어 두는 것이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철저하게 몸관찰 위주
마하시 전통에서는 호흡을 보지 않는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본다. 이는 위빠사나를 하기 위한 것이다. 위빠사나는 움직이는 대상을 새김하는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은 풍대를 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움직이는 대상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과 물질을 함께 새기기 위한 것이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철저하게 몸관찰 위주이다. 느낌 위주로 관찰하는 전통도 있고 마음 위주로 관찰하는 전통도 있지만 몸관찰하는 것은 몸을 이용하여 지혜를 터득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지식과 지혜는 다른 것이다. 책을 읽어서 또는 들어서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지식이다. 그러나 지혜는 몸으로 체득되는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의 말 한마디에 삶의 지혜가 있는 것과 같다.
몸관찰하는 것은 몸으로 지혜를 터득하기 위한 것이다. 마치 운전할 때 직접 운전대를 잡아 보는 것과 같다. 수영할 때 직접 물에 들어가보는 것과 같다. 이름 모를 열대 과일을 직접 먹어 보는 것과 같다. 절구커피가 좋다고 하는데 직접 맛을 보는 것과 같다. 모두 몸과 관계 되는 것들이다.
마음챙김 보다 새김이 더 빠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마음의 눈으로 관찰했다. 그러다 보니 온 몸으로 부품과 꺼짐을 보는 듯 했다. 배라는 모양이나 이미지가 아닌 몸 전체로 부품과 꺼짐이 새겨지는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할 때 새김이라는 표현을 한다. 이 말은 싸띠를 번역한 말이다. 어떤 이는 마음챙김 또는 알아차림이라고 말한다.
한국마하시선원에 일창스님이 있다. 일창스님이 미얀마어로 된 마하시 사야도의 저서나 법문집을 번역할 때 새김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런 새김이라는 용어는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선생이 사용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용어는 얼마나 중요할까? 어떤 용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성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새김이라는 말은 순수한 우리말이다. 가슴에 새긴다는 말이 있다. 뼈에 새긴다는 말도 있다. 마치 조각하듯이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새김이라는 말은 기억이라는 말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지금 여기서 기억하여 조각하듯이 새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새김은 마음챙김이나 알아차림이라는 말보다 더 빠르다.
위빠사나 수행은 순간집중을 특징으로 한다. 늘 변화하는 대상에 집중하려 하다 보니 찰나삼매가 되어야 한다. 변화된 그 순간을 기억하고 새겨야 한다. 그럼에도 마음챙김이라 하여 ‘마음을 마음챙김한다’라고 한다면 이중으로 아는 것이 되어 늦어 버린다. 알아차림이라는 말도 늦기는 마찬가지이다.
행선할 때 발의 움직임을 관찰해야 한다. 발의 움직임은 물질적 현상이고 발의 움직임을 아는 것은 정신적 현상이다. 이 두 가지, 즉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을 새겨야 한다. 전광석화와도 같이 물질과 정신을 새기는 것이다.
물질과 정신을 마음챙김한다고 했을 때 어떠할까? 발을 들 때 물질적 현상을 마음챙김 해야 하고 발을 들 때 드는 것을 아는 마음을 마음챙김해야 한다. 이중으로 챙기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늦다. 물질과 정신이 일어나는 그 순간 새겨야 한다.
새김과 집중이 상호 상승작용 했을 때
어떤 이는 싸띠에 대하여 바로 이전 것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했다. 움직이는 대상에 대하여 바로 이전 행위를 기억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싸띠라고 했다.
마음은 매우 빠르게 변한다. 아비담마 이론에 따르면 마음은 물질보다 열일곱 배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진다고 한다. 발을 들 때도 한번에 드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확장하면 드는 것도 여러 단계가 있을 것이다. 배의 부품은 한번에 부푸는 것은 아니다. 시간을 확장해서 본다면 여러 단계일 것이다. 이런 것을 보려면 매우 세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발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관찰하고자 한다면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동작 하나하나를 관찰하고자 한다면 대단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행선을 천천히 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해당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은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배의 모양이나 이미지로 보지 않고 몸전체로 느끼게 된다. 그런데 집중이 되면 될수록 더 잘 보인다는 사실이다.
법구경에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Dhp.372)라는 가르침이 있다. 위빠사나 지혜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먼저 선정을 닦아야 한다.
선정이라 하여 사마타 네 가지 선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움직이는 대상, 변화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찰나삼매를 필요로 한다. 순간집중 하는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할 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분명해진다. 배의 부품과 까짐을 새김에 따라 집중이 되고, 집중이 됨에 따라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이 더욱더 분명해진다.
법구경에서는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라고 했다. 지혜가 있으면 선정이 있고, 선정이 있으면 지혜가 있게 되는데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 집중이 되고 또한 새김이 분명해지는 것도 서로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행선과 좌선 할 때 눈을 감는 것은
어제 행선에서 발의 모양이나 이미지를 제거하고 움직임만 보았다. 그 결과 지, 수, 화, 풍 사대를 느낄 수 있었다. 책을 보고 느낀 것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발의 모양이나 이미지를 보지 않고 발의 움직임만 새겼을 때 ‘의도’도 볼 수 있었다.
행선할 때 눈을 감고 한다. 백권당의 약 오미터 길이의 행선대를 눈감고 왕복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발의 모양을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발의 이미지는 남아 있다. 이미지 마저 보지 않았을 때 운동성만 남게 되었다. 배의 부품과 꺼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행선도 눈을 감고 하고 좌선도 눈을 감고 한다. 마음의 눈으로 본다. 발이나 배의 모양이나 이미지를 제거하고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의 눈으로 보았을 때 운동성을 확실하게 볼 수 있다.
좌선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밝아져 온다. 어느 정도 집중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마음의 눈으로 배의 부품과 꺼짐을 지속적으로 새길 때 집중이 있게 되고, 집중이 있음으로 인하여 새김도 분명해진다.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기분 좋은 뻐근함과 나른함
어느 시점이 되자 평좌한 다리가 뻐근해졌다. 기분 좋은 뻐근함이다. 평좌한 장딴지와 허벅지가 뻐근 했을 때 쾌한 느낌이 된 것이다. 이를 유쾌, 상쾌, 통쾌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다리가 뻐근해졌을 때 몸과 마음이 분리해지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몸은 마치 나무토막과도 같은 상태가 되었다. 호흡도 하고 신진대사도 하는 나무토막을 말한다.
좌선을 하면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 어딘가 가려워도 참는다. 다리가 저려도 참는다. 다리가 뻐근 했을 때 내 다리가 아닌 것 같았다. 꼼짝 하지 않고 앉아 잇는 몸은 정신의 명령이 없으면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집중이 되면 될수록 새김은 분명해졌다. 처음 앉았을 때는 잘 보이지 않던 부품과 꺼짐이 잘 보이기 시작했다. 부품이 시작되는 것과 부품이 꺼지는 것도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흙탕물이 정화되었을 때 바닥의 자갈이 보이는 것과 같다.
새김이 분명할수록 점점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전과는 다른 상태가 되었다. 특히 방석에 처음 앉아 있을 때와 비교하면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이쪽 문에서 저쪽 문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다리의 뻐근함은 이제 다리의 나른함으로 바뀌었다. 마치 몸이 이완 되었을 때 나른함 같은 것이다. 동시에 집중도 더 잘 되었다. 새김도 분명해졌다. 마음을 새김이라는 밧줄로 배의 부품과 꺼짐이라는 기둥에 묶어 놓았는데, 이제 새김이 기둥이 된 것 같았다.
한번 새김이 확립되면 탄탄해진다. 새김의 토대가 확립되면 여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다. 잡념으로 망상의 집을 짓는 일은 없게 된다. 잡념이 치고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금방 진압된다.
계속 달리고 싶었다
몸이 나른하고 고요한 상태가 지속되고 새김이 분명해졌을 때 계속 달리고 싶었다. 끝까지 가보는 것이다. 갈데까지 가보는 것이다. 그때 삼십분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알람소리가 났을 때 지켜만 보았다. 요즘 속된 말로 쌩깐 것이다. 일분 가량 지났을 때 알람이 멈추었다. 이제 부터는 시간이 구애 받지 않고 무한질주하는 것이다.
새김이 있고 고요한 상태가 되면 앉아 있을 만하다. 이대로 몇 시간도 앉아 있을 것 같다. 이는 오래 동안 앉아 있을 만한 조건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마하시 전통에서 주관찰대상은 배의 부품과 꺼짐이다. 배의 움직임을 새겨서 암의 집중을 이룬다. 마음이 집중 되면 새김이 더욱 더 분명해진다.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키면 몸과 마음이 나른해진다. 이대로 계속 있고 싶어진다. 계속 달리고 싶은 것이다.
위빠사나 하다가 피곤하면
위빠사나 수행은 변화하는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주관찰대상인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다가 이 보다 강력한 대상이 나타나면 그쪽으로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위빠사나 스승들의 법문에서 종종 듣는 말이 있다. 위빠사나를 하다가 피곤하면 선정에 들어서 쉰다는 말이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참으로 낙담했다. 나는 언제나 저런 경지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하여 낙담한 것이다.
위빠사나 스승들이 말한 것은 마하시 사야도의 저작물에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빠사나 하다 피곤하면 선정에 들어서 쉰다는 이야기가 담마짝까법문에 있다.
위빠사나 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선정에 든 후에 출정해서 위빠사나 하는 방식이 있고, 또 하나는 선정 없이 찰나삼매로 순수위빠사나 하는 방식이 있다. 마하시 방식은 후자이다.
선정에 든 후 위빠사나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이는 “자신이 얻은 선정에 입정한 뒤 그 선정에서 출정했을 때 그 선정의 마음, 마음 부수, 물질 중에 분명한 것을 관찰한 뒤 닿음, 생각함, 들음, 봄 등 물질-정신이 드러나는 그대로 따라서 관찰하는 것입니다.”(담마짝까법문, 213쪽)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반드시 출정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위빠사나는 힘들고 피곤한 것일까? 이는 “그렇게 드러나는 대로 따라서 관찰하다가 몸과 마음이 피곤할 때 선정에 다시 입정할 수 있습니다. 피곤이 풀리면 드러나는 물질-정신을 따라서 다시 관찰하면 됩니다.” (담마짝까법문, 213쪽)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선정에 드는 것은 쉼터와 같은 역할이 된다.
위빠사나는 정신과 물질을 새기는 것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대하여 면밀하게 새기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피곤할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순수위빠사나행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다음과 같은 마하시 사야도 말로 알 수 있다.
“선정이 없는 이들의 경우는 닿음, 생각함, 들음, 봄 등 드러나는 혼합된 형성들만을 끊임없이 따라서 관찰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드러나는 것들을 끊임 없이 따라서 관찰하다 피곤해지면 선정이 없기 때문에 선정에 입정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 익숙하게 실천해 놓은 부품과 꺼짐 등 관찰하던 원래 대상으로 돌아와서 관찰해야 합니다. 기본 대상으로 돌아와 관찰하면 마음과 몸의 피곤함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드러나는 혼합된 형성들을 끊임없이 따라서 관찰해야 합니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으로 위빳사나 삼매와 지혜가 무르익어 구족됐을 때 몸과 마음의 피곤함이 없이 밤낮으로 드러나는 것들을 끊임없이 따라서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는 대상도 마치 저절로 드러나는 것처럼 지혜에 드러나게 되고, 관찰해서 아는 새김과 지혜도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새길 수 있게 되어 사실대로 계속해서 알게 됩니다. 무상·고·무아의 성품 들도 저절로 드러납니다. 이렇게 계속 알아 나가다가 특별히 매우 빠르고 예리한 앎들이 생겨났을 때, 알아지는 대상도, 계속해서 알아 나가던 성품도 끊어져서 소멸한 성품에 도달합니다. 이것이 성스러운 도로 열반에 도달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담마짝까법문, 215-216쪽)
선정 없는 위빠사나행자를 순수위빠사나행자라고 한다. 사마타선정 없이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여 찰나삼매의 선정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하시 사야도의 글에 따르면 이렇게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이 선정상태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마하시 방식에서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긴다. 배의 움직임을 새겨서 어느 정도 집중이 되면 찰나삼매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배의 부품과 꺼짐은 가장 기본이라는 사실이다. 마치 베이스캠프와도 같은 것이다.
히말라야 설산을 정복할 때 베이스캠프를 설치한다. 정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베이스캠프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사마타선정을 위주로 한 위빠사나에서는 사마타선정상태가 베이스캠프가 된다. 사마타선정 없는 순수위빠사나에서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이 베이스캠프가 된다.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이 되어야
알람이 울리는 것을 지나쳐 계속 앉아 있었다.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감이 오지 않는다. 다만 그만 두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다리를 풀고 시계를 보았다. 아마 삼사십분 더 앉아 있었던 것 같다.
매일매일 새로운 날이 되어야 한다.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좌선은 새로운 것이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마음의 눈으로 새겼을 때 집중이 되었다. 고요한 상태에도 이르렀다. 새김도 분명해졌다. 마치 다른 세상에 가 있는 것 같았다. 저쪽 문에 들어간 것 같았다.
방석에 앉을 때 ‘나는 잘 할 수 있을까?’라며 의문한다. 그러나 일단 앉고 나면 상황은 달라진다. 눈을 감고 꼼짝 없이 앉아 있을 때 삼십분은 채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반복적으로 하면 집중이 된다. 똑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하면 집중이 될뿐더로 재미도 있게 된다. 좌선도 이와 다르지 않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지속적으로 새겼을 때 마음을 새김이라는 밧줄로 배의 움직임에 꽁꽁 붙들어 매는 것과 같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지속적으로 새기면 몸이 다른 상태가 된다. 내몸이 아닌 생태로 되는 것이다. 의도가 없으면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다. 몸 따로 정신 따로가 된 것이다.
좌선하다 보면 다리가 뻐근할 때가 있다. 이는 다리저림에 따른 통증과는 다른 것이다. 평좌한 장딴지와 허벅지가 뻐근할 때 유쾌, 상쾌, 통쾌가 있게 된다. 좀더 지나면 몸이 나른해진다. 이 상태가 되면 몸이 완전히 이완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몇 시간이든지 앉아 있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오늘은 한시간 이상 좌선 했다. 알람소리를 무시하고 계속 앉아 있었던 것이다. 재가우안거 29일 동안 처음 있는 일이다. 더구나 새김도 분명했다. 집중이 있게 되니 새김이 분명한 것이다. 새김이 계속 유지되니 몸과 마음은 다른 상태가 되었다.
오늘은 새벽에 일어났을 때 스마트폰을 보지 않았다. 올린 글에 대한 반응도 보지 않았다. 일체 뉴스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좌선에 임했다. 그러나 이 글을 마치고 나서부터는 세상과 접촉해야 한다. 메일도 열어보고 밀린 일도 해야 한다. 당연히 스마트폰도 보고 유튜브도 본다.
글을 쓰다 보니 오전 열한 시가 넘었다. 글에 소제목을 다는 등 교정하여 인터넷에 올리다 보면 오전이 다 가게 될 것이다. 하루 일과 중에 오전은 수행과 글쓰기로 보낸다. 오늘은 갈 데까지 가보고자 했다.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이 되고자 한다.
2024-08-1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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