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인간은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

담마다사 이병욱 2024. 8. 22. 12:27

인간은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

 

 

삼십분이 금방 지나갔다. 이런 일은 좀체 없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은 날이다. 무엇보다 주변환경을 청정하게 해 놓았다. 오늘 삼십분 좌선은 성공이다.

 

재가우안거 34일째이다. 안거기간 동안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생업이 있는 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전만큼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예전에는 하루를 뉴스로 시작했다. 아침에 TV뉴스를 보는 것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정치환경이 바뀌면 뉴스를 보지 않는다. 정권이 엎치락뒤치락할 때마다 반복되었다.

 

요즘 뉴스를 전혀 보지 않는다. 뉴스 보지 않은지 삼년 되었다. 이것도 정치환경의 변화 때문이다. 요즘 아침에는 페이스북도 보지 않는다. 페이스북에 올려져 있는 글에 대한 반응을 보거나 타인들의 글도 보았으나 재가우안거가 본격화됨에 따라 그만 두었다.

 

하루를 주식으로 시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심심풀이로 하든 전업으로 하든 주식투자를 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주가에 관심 있을 것이다. 주식이 오르면 기분이 좋아지고 주식이 내리면 우울해질 것이다.

 

하루를 음악으로 시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으로 인하여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는 사람이다.

 

불과 삼사주전까지만 해도 이미우이 음악을 들었다. 아침에는 라따나경을 들었다. 듣고 있다 보면 마음이 안정되고 잔잔한 기쁨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삼주전 재가우안거가 본격화 되면서 그만 두었다.

 

아침에는 그 어떤 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 주로 언어적 개념에 대한 것이다. 뉴스, 페이스북, 유튜브, 음악 같은 것이다. 대화도 최소화 한다. 아니 대화가 없다. 이른 아침 모두 잠자고 있기 때문이다.

 

새벽에 일어나 샤워를 한다. 하루일과를 샤워로 시작하는 것이다. 샤워하고 나면 새로운 기분이다. 아침에 먹을 고구마와 계란을 찐다.

 

많이 먹지 않는다. 고구마 아주 작은 것 하나와 계란 하나가 전부이다. 백권당에 가져 가서 먹는다. 꿀물과 함께 먹는다. 오늘 아침에는 빠리바케트에서 식빵을 하나 사서 한조각을 치즈 하나와 함께 먹었다.

 

아침식사를 하고 나면 커피를 마셔야 한다. 절구커피이다. 이를 백권당표 절구커피라고 말한다. 볶아진 원두를 나무절구에 넣어 공이로 빻아서 만든 것이다. 여기에 얼음 두세 조각 넣어서 마시면 보약을 먹는 것 같다.

 

재가우안거는 행선과 좌선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환경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법복 바지로 갈아 입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정신법과 물질법을 새기는 것

 

모든 준비는 다 되었다. 이제 실행하기만 하면 된다. 먼저 행선부터 한다. 행선이 끝나면 좌선이다. 이런 수순이 우안거가 시작된 이래 계속되고 있다.

 

오늘 아침 행선은 잘 되었다. 행선하기 위해서 첫 발을 떼는 순간이 평소와 달랐다. 아마 컨디션 때문일 것이다. 오늘 새벽 잠을 잘 잔 것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몸 상태가 좋으면 집중도 잘 된다. 발을 떼려 할 때 의도가 보였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무심코 뗀다. 그러나 몸 상태가 최상일 때는 발을 움직이려는 의도가 보이는 것 같다.

 

발을 떼고, 올리고, 밀고, 내리고, 디디고, 누르는 육단계 행선을 했다. 단계단계 마다 새김이 분명했다. 이런 때는 드믈다. 오늘 좌선도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행선을 하는 목적은 법의 성품을 알기 위한 것이다. 이는 물질법과 정신법을 아는 것이다. 발을 움직이려 하는 것은 정신법을 아는 것이고, 발을 움직이는 것은 물질법을 아는 것이다. 또한 발을 뗄 때 움직임은 물질법이고, 발을 뗄 때 이를 아는 것은 정신법이다. 이와 같은 물질법과 정신법, 정신법과 물질법을 새기는 것이 위빠사나수행이다.

 

삼십분 동안 시체가 되기로

 

행선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스마트폰 타이머를 눌렀다. 삼십분을 향해 카운트 되었다. 평좌를 한다음 두 손은 선정인을 했다. 눈을 감고 허리를 곧게 폈다. 그 자세로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삼십분 동안 시체가 되기로 했다.

 

좌선을 할 때 몸은 나무토막이 되어야 한다. 의도가 없으면 손가락 하나 까닥 할 수 없는 시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마음의 문은 열려 있다. 또 하나 열려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귀의 문이다. 창 밖에서 들려 오는 차량소리는 어쩔 수 없다. 또한 실내 소형냉장고의 모터 돌아가는 소리도 어쩔 수 없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달려 가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집중이 되어야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면 집중이 된다. 그런데 오늘은 저절로 집중이 되는 것이었다. 행선에서 집중이 영향을 준 것이다. 행선에서의 집중을 좌선으로 도 가져 온 것이다.

 

오늘 좌선은 앉자 마자 잘 되었다. 갑자기 고요가 찾아 왔다. 아마 밖에 도로의 신호등이 빨간등이기 때문일 것이다. 순간적으로 차량 소리가 나지 않을 때 산사의 암자처럼 고요했다.

 

시체가 된 몸에는 마음의 문만 열려 있다. 마음의 문으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들어 오지만 힘을 쓰지 못한다. 새김이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새김이 확립되어 있지 않을 때는 생각이 망상의 집을 짓는다.

 

주관찰대상은 베이스캠프와도 같은 것

 

좌선이 편안할 때가 있다. 새김이 확립되어 있을 때이다. 마치 탄탄한 토대 위에 있는 집과 같다. 어떤 생각이 치고 들어 와도 힘을 쓰지 못하고 제압된다. 그 대신 경전이나 논서에서 읽었던 것들이 떠오른다. 모두 수행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러나 그만 두어야 한다. 주관찰대상인 배의 부품과 꺼짐으로 가야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는 것은 마하시방식의 위빠사나 수행에 있어서 주관찰대상이다. 마치 베이스캠프와도 같은 것이다. 또한 본진과도 같은 것이다. 전투를 치루다가 쉬는 곳이기도 하다.

 

초전법륜경을 알게 된 것은

 

오늘 좌선을 하면서 오늘 아침 읽은 것을 떠올렸다. 본래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 주관찰대상인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해야 한다. 그럼에도 논서를 떠올린 것은 모두 수행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마치 집중수행하는 선원에서 사야도가 새벽법문을 해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머리맡에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을 읽고 있다. 현재 고성제(苦聖諦)에 대한 것을 읽고 있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에 대한 것이다. 과연 이 진리에 대하여 얼마나 자세히 알고 있을까?

 

반야심경을 보면 무()자와 불()자의 행렬이다. 이는 없고, 없고, 없고의 연속이고, 또한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의 연속이다. 당연히 무고집멸도라 하여 사성제도 없다. 물론 이는 공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한국불교 불자들은 없는 것부터 배운다. 반야심경이 대표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조리 부정하는 것부터 배우는 것이다. 물론 공의 입장일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모조리 부정했을 때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알기 어렵다.

 

초전법륜경을 알게 된 것은 2010년이다. 2009년에 한국명상원에서 마하시 사야도의 빠띳짜사뭅빠다(십이연기)’ 법문집을 공부한 것이 시작이다. 피디에프로 되어 있는 것이다. 김한상 선생이 영문으로 된 것을 우리말로 번역해 놓은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을 다시 읽고 있다. 이번에는 한국마하시선원 일창스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일창스님이 미얀마어로 되어 있는 담마짝까법문을 집적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14년전에 읽었던 과는 맛이 다른 것 같다.

 

고성제를 알면 나머지 세 가지 진리도

 

담마짝까법문은 초전법륜경에 대한 것이다. 초전법륜경에서 핵심은 사성제이다. 부처님이 사성제를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설명한 것이다. 이를 삼전십이행상이라고 한다.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초전법륜경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반야심경에서는 무고집멸도라 하여 모조리 부정해 버렸지만 초전법륜경에서는 고귀하고 거룩하고 성스러운 진리로 간주하고 있다.

 

초전법륜경에서 핵심은 사성제이다. 한국불자들은 사성제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마 , , ,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괴로움에 대하여 누군가 알려 주지 않는다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라고 했는지는 알지 못할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을 보면 왜 사성제가 거룩한 진리인지 알게 해 준다. 그 중에서도 괴로움에 대하여 왜 거룩한 진리라고 했는지 알게 해 준다. 그래서일까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렇게 아는 모습을 염두에 두고 부처님께서 “dukkhe ñāna”, 즉시 괴로움의 진리를 사실대로 아는 앎과 지혜를 바른 견해도 구성요소라고 설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관찰할 때마다 괴로움의 진리를 생겨남과 사라짐, 무상··무아의 특성을 통해 사실대로 알고 있으면 나머지 세 가지 진리도 알고 보는 작용이 저절로 성취됩니다.”(담마짝까 법문, 218)

 

 

고성제를 알면 나머지 세 가지 진리도 알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것도 저절로 성취됩니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마하시 사야도가 말한 것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이는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도 본다.” (S56.3)라는 부처님 가르침에 따른다.

 

고성제를 먼저 설한 이유는?

 

문제가 발생하면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야 한다. 지금 괴롭다면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는 원인과 결과에서 원인을 먼저 아는 것과 같다. 그런데 부처님은 원인을 알기 전에 먼저 결과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사성제에서 괴로움의 원인인 집성제보다 괴로움의 결과인 고성제를 먼저 설한 이유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인생을 고해의 바다라고 한다. 지금 행복한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일시적인 행복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생은 고해의 바다에서 잠시 행복감을 느낄 뿐이다.

 

괴로움의 바다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는 것보다 더 앞선다. 부처님이 사성제에서 고성제를 먼저 설한 이유에 해당된다.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사성제 중에서 고성제를 가장 먼저 설했다. 이렇게 설한 이유는 우리 모두가 괴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오취온고는 집성제가 아니라 고성제

 

부처님이 고성제를 먼저 설한 것은 존재자체가 괴로운 것임을 말한다. 이는 태어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고, 늙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고, 병드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고, 또한 죽는 것 자체가 괴로운 것임을 말한다.

 

고성제는 사고로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다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또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자체가 괴로운 것임을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고성제에서 이와 같은 모든 괴로움을 아울러서 상킷떼나 빤쭈빠다낙칸다 둑카 (sa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라고 했다. 오온에 집착된 것이 괴로움이라 한 것이다. 이를 오취온고(五取蘊苦)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오취온고에 대하여 집성제로 착각한다. 사고를 포함하여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가 오취온고로 수렴되는데 이 오취온고를 모든 괴로움의 원인으로 보는 것이다.

 

오취온고가 왜 모든 괴로움을 포괄하는 것일까? 이는 자아에 대한 집착에 따른다.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 내것, 나의 자아라고 갈애와 자만과 사견에 따른 것이다.

 

오취온고는 괴로움의 원인이 아니다. 오취온은 괴로움의 결과에 대한 것이다. 오취온고가 집성제가 아닌 고성제에 속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고성제는 사실상 오취온고에 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이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sa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S56.11)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은 이 오취온고를 전개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고성제에 대한 내용은 제4장 전체에 해당되어 224페이지부터 271페이지까지 무려 47페이지에 달한다.

 

인간은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

 

불교에 입문한지 20년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다. 2004년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한 이래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아니 어쩌면 필연인지 모른다. 인터넷과 정보통신이 발달한 글로벌 시대에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 모른다.

 

내가 만약 초기불교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백팔배를 하거나 관세음보살정근을 하거나 신묘장구대다라니철야기도회 등에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는 양이 차지 않았을 것 같다. 시간이 지나도 풀리지 않는 문제에 봉착 되었을 때 해결방법이 되지 않았다.

 

초기불교를 알고 나서 희망이 보였다. 그것은 팔고에서 원증회고에 대한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사건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다. 기도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뿌리를 알아야 한다.

 

초전법륜경을 접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인간은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존재자체가 괴로운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왜 그런가?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마치 초기설정된 것이나 다름 없다.

 

요즘 종종 쓰는 말 중에 디폴트(defalt)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본래 채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별도 설정을 하지 않은 초기값또는 기본 설정값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부처님은 모든 괴로움을 하나로 아울러서 오취온고로 설명했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존재는 기본적으로 괴로운 존재로 태어난 것이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인생이 고해의 바다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해당된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할 때 하나의 대전제를 깔았다. 그것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사고와 팔고를 설한 것이다. 부처님은 처음부터 괴로움의 진리를 먼저 설한 것이다.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라며 집성제를 먼저 설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며 괴로움을 먼저 설했다. 괴로움을 구구절절 먼저 알아야 괴로움의 원인도 알게 되고, 괴로움의 소멸도 알게 되고,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도 본다.” (S56.3)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상카라둑카(行苦)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을 읽으면 늘 새롭다. 이는 아마도 구구절절 옳은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진리의 말씀 아닌 것 없다. 이는 철저히 경전과 주석에 근거한 말이기 때문이다. 고성제에 대한 것도 그렇다.

 

마하시 사야도의 고성제 법문을 읽고 또 읽었다. 지금으로부터 십여년전에 읽었던 때와 느낌은 똑같다. 세월이 흘렀어도 감흥은 같은 것이다. 이번에 일창스님이 직역한 담마짝까 법문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상카라둑카에 대한 것이다.

 

 

평온은 그 자체로는 괴로움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행복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평온은 항상한 것도 아닙니다. 항상하지 않기 때문에 그 중간의 상태대로 생겨나게 하려면 관련된 여러 조건으로 끊임없이 형성시켜 주어야 합니다. 형성시켜 주어야 하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것, 바로 그것이 괴로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중간의 느낌인 평온한 느낌을 형성 괴로움(sańkhāradukkha)이라고 말합니다.”(담마짝까법문, 235)

 

 

괴로움에는 크게 둑카둑카, 위빠리나마둑카, 상카라둑카가 있다. 이를 각각 고통괴로움(苦苦), 변화괴로움(壞苦), 형성괴로움(行苦)이라고 한다. 이 세 가지 가운데 행고가 이해하기 가장 어렵다.

 

행고에 대하여 아라한만이 알 수 있는 괴로움이라는 말도 있다. 형성된 모든 것들이 괴로움이라는 말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데 마하시 사야도는 세간의 물질·정신법들도 항상 끊임없이 형성시켜 주어야 하기 때문에 형성 괴로움이라고 말합니다.”(235)라고 말했다. 또한 그대로 유지되도록 끊임없이 형성시켜 주어야 하기 때문에 부담이 커서 피곤하게 하는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235)라고 말했다.

 

한번 형성된 것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유지하고자 한다. 이 몸과 마음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런 것도 괴로움의 범주에 해당된다. 고통 그 자체도 아니고 변화됨에 따른 괴로움도 아닌 괴로움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행고는 존재하는 것 자체가 괴로운 것이라는 말도 된다.

 

구부득고(求不得苦)는 개념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고

 

마하시 사야도의 고성제 법문을 보면 새겨 두고 싶은 것이 많다. 구부득고(求不得苦)에 대해서 하지만 얻지 못하는 것이란 물질-정신 법체가 없습니다. 단지 개념일 뿐입니다.”(262-263)라고 말한 것은 놀랍다. 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관념에 지나지 않다고 일축한 것이다.

 

사람들은 허상에 매여 있는지 모른다. 그것은 언어적으로 형성된 개념에 대한 것이다. 구부득고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렇다고 재산과 지위 같은 세간적인 것만 것 말하지 않는다. 마하시 사야도에 따르면 팔정도법을 실천하지 않고 닦지 않으면서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 사라지기를 원하는 것, 슬픔 등이 사라지기를 원하는 것”249)도 구부득고의 범주로 본 것이다.

 

오온과 육처를 결합하면

 

마하시 사야도의 고성제를 보면 입체적이다. 이는 오온과 육처가 결합된 것이다. 어떤 것인가? 물질에 대하여 볼 때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위빳사나 관찰을 하지 않는 이들, 또는 관찰하더라도 생멸이나 무상··무아를 아직 알지 못하는 이들은 그렇게 볼 때 분명한 눈이나 형색 등을라거나나의 것등으로 집착합니다. 집착하는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깨끗한 눈이 나다. 내 눈이다. 항상 유지되고 있다라고 눈물질에 집착합니다. 자신의 손 등을 볼 때내 몸을 내가 본다. 내 손이다. 항상 유지되고 있다라는 등으로 집착합니다. 다른 이를 볼 때도 영혼이 있는 어떤 개인이나 중생, 항상 존재하는 것 등으로 집착합니다. 그렇게 집착하기 때문에 눈과 형색 물질을 물질 취착무더기라고 말합니다.”(담마짝까법문, 251)

 

 

이런 법문은 불교입문 20년 동안 들어 보지 못했다. 한국의 어떤 스님도 이런 법문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테라와다 스님에게서도 이런 법문을 들어 보지 못했다. 오로지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에서 접한다.

 

사람들은 볼 때 아무 생각 없이 본다. 마하시 사야도의 설명에 따르면 무더기(칸다)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무더기로 보면 법의 성품을 볼 수 없다. 무상, , 무아의 성품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보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듣는 것도 잘 구분해서 들어야 한다. 어떻게 듣는가? 이는 들을 때마다 계속해서 <듣는다, 듣는다>라고 즉시 따라서 관찰하는 것은 지금 말한 다섯 취착무더기, 물질·정신들을 사실대로 알아서 단지 듣는 것 정도에서 멈추도록, ‘나다. 나의 것이다. 항상하다. 행복 하다. 좋다라는 등으로 집착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254-255)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여섯 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어느 것 하나 놓쳐서는 안된다. 이는 무심코 지나치지 않음을 말한다. 닿는 것은 어떠할까?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알 수 있다.

 

 

“<간다; 선다; 앉는다; 눕는다; 굽힌다; 편다; 움직인다; 부푼다; 꺼진다>라는 등으로 몸의 동작들을 관찰하고 새기는 것은 닿아서 아는 것과 관련된 취착무더기들을 알도록 관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다> 라는 등으로 동작을 관찰할 때 특히 분명한, 뻣뻣하고 밀고 움직이는 바람 요소를대상을 알지 못하는 물질 성품으로 사실대로 알 수 있습니다. 관찰하여 아는 성품은대상을 아는 정신 성품으로 사실대로 알 수 있습니다. 관찰할 때마다 관찰해서 알아지는 물질과 관찰해서 아는 정신이라는 물질·정신 두 가지를 스스로의 지혜로 구분해서 안 뒤, ‘가려는 마음이 있어서 가는 물질이 생겨난다라는 등으로 원인과 결과도 구분하여 알게 됩니다. 그렇게 알고서 알아지는 물질·정신이든, 아는 마음이든 새로 거듭 생겨나서는 계속해서 사라져 버리는 것을 관찰 할 때마다 분명하게 경험하기 때문에무상한 것들이다. 괴롭고 좋지 않은 것들이다. 자기 성품대로 생멸하고 있는 성품법들인 무아인 것들 이다라고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이렇게 알기 때문에 감, , 앉음 등과 관련하여, 나의 것등으로 더 이상 집착하지 않습니다.”(담마짝까법문, 259)

 

 

이런 법문을 접하면 가슴이 뛴다. 그 동안 궁금했던 것이 단번에 풀리는 것 같다. 왜 수행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아는 것 같다.

 

, , , , , 의 육처에서 신()에 대하여 간다; 선다; 앉는다; 눕는다; 굽힌다; 편다; 움직인다; 부푼다; 꺼진다로 설명했다. 몸의 감촉에 대한 것이다. 이는 대상과 아는 마음에 대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두 가지 모두를 새기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물질과 정신을 새기는 것이다.

 

물질은 아는 마음이 없다. 의도 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대상을 알지 못하는 물질 성품이라고 한 것이다. 반면에 정신에 대해서는 대상을 아는 정신 성품이라고 했다. 마치 나무토막과 같은 몸과 이를 움직이게 하는 정신이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구분해서 새김 하는 것이 물질과 정신,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새기는 것이다. 위빠사나 1단계 지혜에 해당된다.

 

오온과 오취온에 대하여

 

초기불교를 접했을 때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 중에 하나는 오취온이었다. 오온은 무엇이고 오취온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렇게 자아라거나 나라고 잘못 생각해서든, 나의 것으로 즐겨서 붙잡아서든, 집착할 수 있는 물질·정신 무더기 법들을 취착무더기(upādānakkhandhā)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갈애와 사건으로 집착할 수 없는 정신법 무더기는 그냥 무더기(khandha)라고만 말해야 합니다. 취착무더기(upādānakkhandhā)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단지 무더기에만 해당되는 것은 네 가지 도와 네 가지 과에 포함된 느낌, 인식, 형성, 의식이라는 법들입니다. 그 출세간의 느낌, 인식, 형성, 의식들은 그냥 느낌 무더기, 인식 무더기, 형성 무더기, 의식 무더기라고만 말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취착으로 집착할 수 있는 취착 더기란 무엇인가 하면, 앞에서 거듭 말했던 세간의 물질, 느낌, 인식, 형성, 의식이라는 물질·정신 무더기법들입니다.”(담마짝까법문, 268-269)

 

 

오취온과 오온의 차이에 대한 설명을 보면, 오취온은 세간법이고 오온은 출세간법이다. 오온에 집착되어 있는 삶은 세간적 삶에 대한 것이고, 오취온에서 집착이 떨어져 나간 오온에 대한 것은 출세간적 삶에 대한 것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오온에 대한 설명이 많다. 아라한이 되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모두 오취온을 가진 자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초기경전에 오온이라고 하면 이는 오취온과 동의어라고 보아야 한다.

 

진리의 길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을 만난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아니 필연이다. 언젠가 만나도 만나야 하는 것이다. 좀도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시절 인연이 되어서 읽고 또 읽는다. 다음과 같은 구절도 새기고 싶다.

 

 

따라서 볼 때마다, 들을 때마다, 냄새 맡을 때마다, 먹어서 알 때마다, 닿아서 알 때마다생각하여 알 때마다 여섯 문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그 모든 <눈과 형색, 귀와 소리 등의 물질 취착무더기, <보아서 앎, 들어서 앎 등의 정신 취착무더기들을 관찰하고 새겨 생겨남과 사라짐, 무상·고무·무아의 성품들을 사실대로 알아다섯 취착무더기, 물질·정신법들이야말로 진짜 괴로움, 괴로움의 진리(dukkhasacea)구나라고 스스로의 지혜로 알아야 한다는 점도 확실하게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새김확립 방법에 따라 드러나는 모든 것을 관찰하고 새겨 방금 말한 대로 사실대로 알고 있는 이들은 매우 기뻐할 만합니다. “ ‘san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간단히 말해서 다섯 취착무더기가 괴로움이다)’라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대로 나는 알게 됐구나라고 숙고하고서 매우 기뻐할 만합니다.”(담마짝까법문, 269-270)

 

 

이 법문의 핵심은 육문에서 분명히 아는 것이다. 물질법과 정신법을 새겨서 생겨남과 사라짐, 무상·고무·무아의 성품들을 사실대로 아는 것이다. 이렇게 알았을 때 부처님이 말씀하신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선언한 의미를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인생은 고해의 바다이다. 어느 것 하나 괴로운 것 아닌 것이 없다. 인생은 즐겁다고 말한다면 그는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인간 존재자체가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먼저 받아 들여야 한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진리의 길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었어도 탐, , 치로 산다면 어린 아이나 다름 없다. 아무리 나이가 적어도 탐, , 치가 없다면 어른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은 어른이 되가는 길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육문에서 물질법과 정신법을 새겨야

 

삼십분 좌선이 끝났다. 더 달리고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오늘은 가만 있어도 저절로 집중이 잘 되는 것 같았다. 몸 컨디션이 좋은 것에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정보와의 차단이다. 뉴스를 보지 않고, 페이스북을 열어 보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매일매일 오전은 명상과 글쓰기로 보낸다. 좌선 삼십분에 글쓰기는 세 시간 가량 된다. 쓰다 보니 A4사이즈 시트에 열 장이 되었다. 이 긴 글을 누가 읽을까?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글쓰기이다.

 

수행이라 하여 반드시 다리 꼬고 앉아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일상이 수행이 되어야 한다. 여섯 문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새겨야 한다. 물질법과 정신법을 새기는 것이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진리를 알면 나머지 세 가지 진리는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는 괴로움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함을 말한다. 이와 같은 괴로움에 대하여 사람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2024-08-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