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노년수행이 어려운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4. 8. 24. 12:00

노년수행이 어려운 것은

 

 

감기가 스멀스멀 밀려오는 것 같다. 전조가 있다. 그것은 등이 시려운 것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날 때 삶의 의욕은 떨어진다. 표정은 굳어진다.

 

어떻게 해야 감기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일단 타이레놀 한알을 먹었다. 나에게 있어서 타이레놀은 만병통치약과도 같다. 머리가 아플 때, 잠이 잘 오지 않을 때 타이레놀을 먹으면 효과가 있는 것 같다. 편의점에서도 파는 약이다.

 

비가 온다고 해서 전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감기 증상이 있다고 해서 좌선을 멈추지 않는다. 몸이 아파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재가우안거 36일째 날에

 

재가우안거 36일째이다. 보름달 같던 달도 기울어 하현이 되어 간다. 91일에는 담마와나선원에서 포살법회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본래 음력 71일은 양력으로 83일이지만 이틀 당겨서 일요일에 시행하는 것이다.

 

한국테라와다불교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우안거 기간 동안 포살법회는 없었다. 올해 들어서 매달 음력초하루 가까이 되는 일요일날에 포살법회가 열린다. 이번 법회에는 한국테라와다불교 소속 열두 분의 상가스님이 참여한다.

 

재가자라 하여 안거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본래 재가자는 칠일에 한번 포살을 하기로 되어 있다. 경장과 율장에 따르면 재가자는 매월 음력 신월과 보름, 그리고 상현과 하현, 이렇게 네 번 포살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업이 있기 때문에 양력으로 매주 일요일 포살하는 것으로 대체 한다.

 

재가우안거라 하여 스스로 안거에 들어가고 있다. 매일 삼십분 앉아 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엄밀히 따진다면 매일 오후불식도 해야 한다. 그러나 생업이 있어서 곤란하다.

 

먹지 않으면 힘이 없어서 버틸 수 없다.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등이든 일을 해서 먹고 사는 사람은 하루 세 끼 먹어야 한다. 그러나 쉬는 개념인 일요일 하루만큼은 저녁을 먹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직 시행하지 않고 있다.

 

행선할 때는 눈을 감고

 

컨디션이 좋지 않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오늘으 백권당 사무실에 평소보다 한시간 늦게 나왔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행선부터 시작했다.

 

처음 행선을 하면 자리가 잘 잡히지 않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자세가 잡힌다. 의도적으로라도 발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행선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새김이 선명할 때가 있다. 오로지 발의 움직임에만 집중 했을 때 가능하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행선할 때 눈을 감아야 한다.

 

눈을 감고 행선한다. 어떻게 눈을 감고 걸을 수 있을까? 불과 오미터 밖에 되지 않는 행선대에서는 가능한 것이다. 빤냐와로 스님도 행선을 눈을 감고 하면 좋다고 했다. 심지어 뒤로 걸으면서도 행선할 수 있다고 했다.

 

눈을 감고 행선하면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발모양을 보면 안된다. 발모양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개념이 아니라 실재를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 , , 풍 사대로 보아야 한다.

 

눈을 감고 행선할 때 발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발을 떼어서 들 때 가벼움을 느낀다. 이를 화대로 설명한다. 마치 불은 위로 향하는 것처럼 발을 들 때 가벼움이 있는 것이다.

 

발을 들어서 밀 때 풍대를 느낀다. 풍대는 운동성이다. 풍대는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발을 내릴 때는 수대를 느낀다. 물은 응집성이 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발을 내릴 때 무거움을 느낀다. 발을 바닥에 디디며 누를 때 지대를 느낀다. 지대는 부드럽거나 딱딱한 느낌에 대한 것이다. 차갑거나 뜨겁기도 하다.

 

발을 바닥에 디디고 누를 때 약간 차가움을 느끼는데 이는 지대에 대한 것이다.

 

오늘 행선은 이십여분 했다. 평소보다 십분 가량 많이 했다. 눈을 감고 발모양을 생각하지 않고 마음의 눈으로 단지 위로 올릴 때 경쾌함, 발을 밀 때 운동성, 발을 내릴 때 약간 무거움, 그리고 발이 바닥에 닿을 때 약간 차가움만 느낀 것이다.

 

행선을 제대로 하면 내가 걷는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로지 발의 움직임에만 마음을 두었을 때 경쾌함, 가벼움, 무거움, 딱딱함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어떤 이는 바닥 위를 걸어가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구름 위를 걷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행선을 이십여분 하다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 감기 전조인지 등의 차가움으로 인하여 컨디션이 엉망이었는데 행선 이십여분에 다른 상태가 된 것이다. 새김이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행선과 좌선할 때 새김이 확립되었다. 새김이 확립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마치 성문이 열린 것과 같다. 마치 집 대문이 열려져 있는 것과 같다. 도둑이 들어와서 활개칠 것이다.

 

새김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마음은 생각의 놀이터가 된다. 더 나아가 망상의 집을 짓게 된다. 그러나 새김이 확립되어 있으면 어림없다. 새김이 확립되어 있는 상태에서 생각은 힘을 쓰지 못한다. 망상의 집을 지으려고 해도 주관찰 대상에 새김에 확립되어 있다면 즉시 제압된다.

 

경 이름을 싸띠빳타나(satipatthāna)라고 한 것은

 

행선이 끝나고 자리에 앉았다.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그대로 가져 왔다. 이는 새김의 확립을 가져 온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일까 방석에 앉자마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었다.

 

행선 없이 자리에 앉으면 어떻게 될까? 아마 마음을 고요히 하기 위해서 꽤 애 써야 할 것이다. 호흡을 본다든가 배의 움직임을 보는 등으로 집중을 해야 한다. 그러나 행선에서 새김이 확립되었다면 이를 그대로 가져 오기만 하면 된다. 좌선하기 전에 반드시 행선을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새김이 확립되면 좌선이 쉬워진다. 무엇보다 잡념으로부터 강해진다. 마치 쓰레기 더미와 같은 생각이 밀려 들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고 있으면 힘을 쓰지 못한다. 망상의 집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새김확립이 중요한가?

 

맛지마니까야에 싸띠빳타나숫따(satipatthāna Sutta)’ (M10)가 있다. 이를 한역으로는염처경(念處經)’이라고 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새김의 토대에 대한 경이라고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마음챙김의 확립 경이라고 번역했다. 왜 이렇게 다르게 번역했을까?

 

경 이름을 싸띠빳타나라고 한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단지 싸띠경이라 하지 않고 싸띠빳타나경이라고 한 것에는 싸띠에 대한 토대 또는 확립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집이든지 토대가 탄탄하면 잘 무너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새김의 토대가 탄탄하면 쓰레기 같은 생각이 망상의 집을 지을 수 없다. 이때 토대라는 말 대신에 확립이라는 말도 사용할 수 있다.

 

빠알리어 싸띠빳타나(satipatthāna)는 싸띠(sati)와 빳타나(paṭṭhāna)의 복합어이다. 여기서 빳타나의 뜻은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setting forth; putting forward; starting point’의 뜻이다. 첫 번째 ‘setting forth’의 뜻은 출발하다의 뜻이다. 새김이 시작되는 점이 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싸띠빳타나에 대하여 새김의 토대라고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마음챙김의 확립이라고 번역했다. 빅쿠보디는 새김의 생성이라고 영역했다.

 

아버지의 영역과 악마의 영역

 

싸띠빳타나에 대한 용어는 염처경(M10)이나 대념처경(D22)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쌍윳따니까야 원숭이의 경’(S47.7)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자신의 의지처, 아버지의 영역을 거닐어라. (gocare, bhikkhave, caratha sake pettike visaye)라고 했다.

 

아버지의 영역은 어떤 것일까? 이는 오욕락이 아닌 곳이다. 여기서 오욕락은 낯선 영역이다. 경에서는 심지어 악마의 영역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영역에 있으면 안심이다. 이는 새김이 있는 영역이다. 여기서 영역을 뜻하는 고짜라(gocara)라는 말은 소가 풀을 뜯어 먹는 영역을 말한다.

 

새김이 없으면 악마의 영역에 가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매혹적인 대상에 마음이 빼앗겨 있다면 악마의 대상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매혹적인 대상에 대하여 단지 보는 것으로 그치는 새김이 있다면 아버지의 영역에 있어서 안심이다.

 

아버지의 영역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이는 소가 풀을 뜯은 영역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소의 목줄을 놓아 버린다면 소는 다른 영역에 가 있을 것이다.

 

청정도론에는 새김과 관련해서 흥미 있는 비유가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이 장시간 형상 등의 대상을 추구하여 흐트러진 마음은 호흡에 대한 새김의 삼매라는 대상을 지향하길 원하지 않고 마치 야생소가 끄는 수레처럼 잘못된 길로 치닫는다그러므로 또한 예를 들면목우자가 야생의 암소의 모든 우유를 삼키고 성장한 야생의 송아지를 제어하고자 암소에게서 떼어내어 한쪽 구석에 커다란 기둥을 박고 거기에 밧줄로 묶으면그 송아지가 여기저기로 날뛰어도 도망 갈 수가 없고 그 기둥에 가까이 앉거나 누울 수 있듯이그 수행승은 오랜 시간 형상 등의 대상의 맛에 심취한 사악한 마음을 제어하고자 형상 등의 대상에서 떼어내어 숲으로 가거나 나무 밑으로 가거나 빈집으로 가게 해서 그곳에서 호흡의 기둥에 새김의 밧줄을 묶으면그 마음이 여기저기로 날뛰어도 이전에 습관화된 대상을 얻을 수 없고 새김의 밧줄을 끊고 도망갈 수가 없고그 대상에 대하여 근접삼매와 근본삼매를 통해서 가까이 앉고 누울 수 있게 된다.”(Vism.8.153)

 

 

송아지는 천방지축 날 뛰어 다닌다. 이런 송아지는 기둥에 붙들어 매어 두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수행자의 마음도 천방지축이다. 그래서 호흡의 기둥에 새김의 밧줄을 묶어 놓으라고 했다.

 

수행자는 새김의 밧줄 길이만큼 움직일 것이다. 새김의 밧줄이 느슨하면 쓰레기같은 잡념이 치고 들어 온다. 그러나 배의 부품과 꺼짐이라는 기둥에 새김이라는 밧줄로 단단히 묶어 두면 그 밧줄의 길이만큼만 움직일 것이다. 이것이 고짜라, 즉 새김의 영역이다.

 

새김의 영역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이는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에게 자신의 의지처, 아버지의 영역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네 가지 새김의 토대이다.”(S47.7)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영역(pettike visaye)’에 있으면 안심이다. 이는 네 가지 새김의 토대에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네 가지 새김의 토대는 자신의 의지처도 된다고 했다.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가 되면

 

새김의 토대가 확립되면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가 된다고 했다. 이는 caratha sake’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자기자신의 길을 걸어라!”가 된다.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가 되면 다른 것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이니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되리.”(Dhp.160)라고 했다.

 

자신이 자신에게 의지하기 위해서는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성자의 흐름에 들기 위해서는 궁극적인 진리를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열반이다.

 

열반을 체험하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다. 앞으로 많이 잡아 입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되어 있다. 이렇게 성자의 흐름에 들게 되었을 때 다른 것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그때부터는 자신에게 의지한다. 자신을 수호자로 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자신이 등불이 되어서 남은 생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이다.”(Dhp.160)라고 한 것이다.

 

오온의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성품을 보기 위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면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가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늘 새김의 토대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새김의 토대가 되어 있을 때 몸과 마음은 무상한 것으로 본다. 이는 좌선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도 해당된다.

 

좌선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은 새김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새김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김으로써 무엇을 보는가? 다음과 같은 부처님 가르침이 잘 말해 준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무상하고 변괴하고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을 알고 과거의 물질이나 현재의 물질이나 모든 물질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이다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지혜로서 보면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끊어진다. 그것들을 끊어버리면 두렵지 않고 두렵지 않으면 지복을 얻게 된다. 수행승이 지복을 얻으면 오로지 열반으로 향한 이라고 불린다.”(S22.43)

 

 

물질은 근본적으로 부수어지기 마련이다. 사대로 형성되어 있는 이 몸도 부수어기지 마련이다. 느낌도 부수어지기 마련이고, 지각도, 형성도, 의식도 부수어지기 마련이다.

 

행선이나 좌선을 하는 것은 오온의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성품을 보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새기고 새겼을 때 궁극에 이를 것이라고 했다. 이런 수행자에 대하여 경에서는 오로지 열반으로 향한 이라고 했다.

 

새김을 확립하여 대상에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묶어 놓아야

 

수행을 왜 하는 것일까? 수행한다고 다리 꼬고 앉아 있는 것이 단지 마음의 안정이나 평화를 위한 것이라면 다른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라면 열반을 향해야 한다. 그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새김의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한다고 하여 단지 싸띠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새김의 토대를 확립해야 한다. 영역을 탄탄히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여기 송아지를 제어하고자

사람이 기둥에 묶는 것과 같이,

새김을 확립하여 대상에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묶어 놓아야 한다.”(Vism. 8.154)

 

 

행선할 때 발의 움직임에 마음을 두는 것은 새김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발이라는 대상에 마음을 묶어 놓는 것과 같다. 좌선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두는 것은 마음을 배라는 기둥에 새김의 밧줄로 묶어 놓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해야 마음이 대상 밖으로 돌아 다니지 않는다.

 

새김을 놓치면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다. 늘 감각 대상에 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새김이 있으면 마음은 밖으로 돌아 다니지 않는다. 아무데나 가 있지 않는다. 여섯 문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새기면 마음은 늘 아버지의 영역에 있는 것과 같다.

 

악마의 영역이 있고 아버지의 영역이 있다. 아버지의 영역에 있으려면 새김이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새김의 토대가 탄탄해져 있을 때 아버지의 영역에 있게 되어서 안심이다. 이럴 경우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가 된다. 자신이 자신의 수호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새김을 확립하여 대상에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묶어 놓아야 한다.”(Vism. 8.154)라고 했다.

 

몸을 관찰하는 새김의 토대를 닦는다고 하는 것은

 

명상한다고 하여 앉아만 있다면 고행이 될 수 있다. 새김의 토대 없이, 새김의 확립 없이 앉아 있으면 오분도 앉아 있기 힘들다. 이럴 때는 주관찰 대상을 새겨야 한다. 마하시 방식에서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긴다. 이와 같이 새기는 것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신체의 형성을 멈추게 하는 들숨과 날숨이 신체이고, 토대는 새김이고, 관찰은 앎이다. 신체는 토대이지만, 새김은 아니다. 새김은 토대일 뿐만 아니라 새김이다. 그 새김과 그 앎으로 신체를 관찰한다. 그래서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는 새김의 토대를 닦는다고 하는 것이다.”(Vism.8.185,  Patis.I.184-185)

 

 

좋은 문구를 발견하면 새겨야 한다. 새김의 토대에 대한 문구도 새겨야 한다. 그런데 이 문구는 청정도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 있는 문구라는 것이다. 빠띠삼비다막가(무애해도)에 실려 있는 문구이기도 하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 할 때 두 가지를 새기게 된다. 배가 부풀 때 이는 물질적 현상이다. 이를 아는 것은 정신적 현상이다. 이 두 가지를 새기는 것이 위빠사나이다. 찰나삼매로 새기는 것이다.

 

물질은 정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좌선한다고 앉아 있을 때 몸은 마치 시체와도 같다. 손가락하나 까닥 할 수 없다. 그런데 배의 부품과 꺼짐은 정신과 무관하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는 신진대사에 따른 것이다.

 

배의 부품은 물질적 현상이다. 이를 새겨야 한다. 배의 부품을 새기는 것이다. 배가 부풀 때 이를 아는 마음이 있다. 이는 정신적 현상이다. 이를 새겨야 한다. 이렇게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을 구분하여 새겨야 한다. 이것이 위빠사나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 세 가지 일이 있게 된다. 배의 움직임과 이를 아는 것, 그리고 양자를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새기다 보면 토대가 마련된다. 새김이 확립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애해도에서는 새김은 토대일 뿐만 아니라 새김이다.” (Patis.I.184-185)라고 했다. 이는 몸을 관찰하는 새김의 토대가 된다. 그래서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는 새김의 토대를 닦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노년수행이 어려운 것은

 

삼십분 좌선이 끝났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행선에서 형성된 새김의 토대, 새김의 확립을 가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대가 약하면 금방 무너진다.

 

약간의 감기 기운이 있다. 등에 차가움을 느꼈을 때 새김의 토대는 약화 된다. 병이 있는 사람이 수행하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힘이 없을 때도 새김의 토대는 약화된다. 노년수행이 어려운 이유가 된다.

 

매일매일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한다. 몸이 불편해도 삼십분 앉아 있는다. 새김이 토대가 탄탄하지 못할 때, 새김이 확립되어 있지 않을 때 앉아 있으면 고역이다. 그럼에도 삼십분 버텨야 한다.

 

삼십분 좌선하고 후기는 세 시간 쓰는 것 같다.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체험한 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수행일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스승이 있어서 지도 받는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체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물어 볼 수 없다. 오늘도 내일도 앉아 있을 뿐이다.

 

 

2024-08-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