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어떻게 해야 세계 끝에 이를 수 있을까? 해외방랑자가 되기보다는 내면여행의 구도자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4. 8. 25. 10:39

어떻게 해야 세계 끝에 이를 수 있을까? 해외방랑자가 되기보다는 내면여행의 구도자가
 
 
행선대에 서면 갑자기 거룩한 자가 된 것 같다. 발을 한발 한발 뗄 떼 성자가 된 것 같다. 미천한 존재도 이 순간만큼은 성스럽고 고귀하고 거룩한 자이다.
 
행선대는 길지 않다. 백권당 사무실 벽면 복도를 행선대로 만들어 놓았다. 칸막이로 구분한 것이다. 통로는 불과 72센티에 불과하다. 사람 하나 간신히 다닐 수 있다.
 
행선대에 금을 그어 놓았다. 이것이 행선대라는 표시도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정확한 발걸음에 대한 것이다. 한칸에 30센티 기준이다. 14칸 정도 되니 4.2미티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활용되는 거리는 3미터가 약간 넘는다.
 

 
나의 금강좌(金剛座)
 
사무실 공간을 둘로 나누었다. 열 평 가량 되는 사무실을 둘로 나누니 각각 다섯 평, 다섯 평 되었다. 사무공간과 명상공간을 균등하게 배분한 것이다.
 
행선을 마치면 명상공간으로 이동한다. 좌선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좌선공간은 매트 깔아 놓은 곳만 세 평 가령 된다. 행선대와 좌선대 합하여 모두 다섯 평 공간이 되는 것이다.
 
명상공간에는 바닥에 큰 격자형 매트가 여러 개 깔려 있다. 가로 3미터에 세로 3미터에 달한다. 가운데는 카페트가 깔려 있다. 카페트 위에는 푹신한 방석이 있다. 페이스북 친구가 선물로 준 것이다. 푹신한 방석 위에는 레자방석이 네 개 겹쳐져 있다. 이곳이 나의 금강좌(金剛座)이다.
 
금강좌에 앉으면 거룩한 자가 되는 것 같다. 행선대에서 발을 옮길 때 느끼는 마음과 같다. 또한 명상공간에 들어가면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다. 같은 공간임에도 사무용 공간은 세속적이고 명상공간은 출세간적 성소가 되는 것 같다.
 
어떠한 땔감에도 불이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행위에 의해서 규정된다고 했다. 태생이 좋은 바라문이라도 농사를 지으면 농부가 되고, 도둑질을 하면 도둑놈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가촉천민과 같은 미천한 태생이라도 그가 가르침을 실천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었다면 성자의 계보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이 있다.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하리.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비천한 가문에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기네.
부끄러움으로 자제하는 자가 고귀하네.” (S7.9)
 
 
어떠한 땔감에도 불이 생겨난다. 설령 그것이 소똥이건 전당향나무이건 불이 생겨난다. 그런데 불의 모양이나 광채, 빛깔도 역시 똑같다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빡빡 깍은 부처님 머리를 보고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에서는 사성계급이 있었다. 지금도 인도에는 사성계급이 있다. 그런데 사성계급에도 들지 못하는 ‘등외’의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불가촉천민을 말한다.
 
불가촉천민은 어떤 사람들을 말할까? 경전에서는 “짠달라 가문, 사냥꾼 가문, 죽세공 가문, 마차수리공 가문, 도로청소부 가문”(M93)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인도 사성계급 체계에 있어서 등 수에도 들지 못하는 등외 사람들이다. 그래서 접촉하는 것 자체를 터부시 했다.
 
부처님 가르침은 평등하다. 바라문이나 불가촉천민이나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 오면 모두 동등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라문들은 여전히 부처님 교단을 백안시 했다. 이는 탁발에 나선 부처님에 대하여 “이 자는 빡빡 깍은 까까중이네. 이 자는 빡빡 깍은 까까중이네.”(S7.9)라며 음식을 주지 않으려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 수행승들은 모두 머리를 깍았다. 사성계급 사람들, 그리고 불가촉천민의 사람들이라도 교단에 들어오면 모두 머리를 깍은 것이다.
 
부처님 교단에서는 왕 출신도 머리를 깍았다. 바라문 출신도 머리를 깍았고, 상인 출신도 깍았고, 노예 출신도 깍았다. 불가촉천만 출신도 깍은 것이다. 부처님도 머리를 깍았다. 머리를 깍은 것에서부터 평등한 것이다.
 
바라문은 머리 깍은 부처님을 보고서 까까중이라고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부처님 교단에 노예도 있고 불가촉천민도 있었기 때문이다. 노예출신이 부처님 교단에 들어와 있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 교단을 노예출신교단이라고 매도한 것이다.
 
사회생활 하다 보면 종종 겪는 괴로움이 있다. 그것은 지연, 학연, 직연에 대한 것이다. 어떤 특정지역 출신에서 엽기적인 살인마가 출현했다면 그 지역 전체가 매도될 수 있다. 어떤 학교 출신이 큰 사기를 쳤을 때 그 학교출신 전체가 매도 될 수 있다. 부처님 당시 부처님의 교단도 그랬던 것 같다.
 
태생적 자만이 있는 바라문은 머리를 빡빡 깍은 부처님을 보자 노예취급 했다. 부처님의 교단에는 바라문, 왕족, 평민, 노예 등 사성계급에 있어서 차별이 없었다. 부처님 교단에 들어 오면 모두 동일했던 것이다. 그 표시가 아마도 삭발이 아닐까 생각한다.
 
바라문이 부처님을 까까중이라고 놀려 댄 것은 부처님 교단에 노예출신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누구나 계급과 관련 없이 깨닫기만 하면 모두 성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하리.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비천한 가문에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기네.”(S7.9)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열반의 불꽃으로 타올랐을 때
 
부처님은 비유의 천재이다. 부처님의 교단에 수많은 계급의 사람들이 있지만 일단 교단에 들어오면 출생을 묻지 않는다. 모두 평등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는 것으로 표현했다.
 
노예출신이라도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공양을 받을 수 있다. 이는 디가니까야 2번경에서 왕의 하인이 출가하자 “저는 그에게 인사하고 일어납니다.”(D2)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노예도 출가하면 왕도 예경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물며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성인이 되면 어떠할까?
 
부처님은 어떠한 땔감에도 불이 난다고 했다. 이는 계급에 있어서 태생의 차별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누구나 깨달음을 얻어 성자가 되면 모두 공양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땔감의 비유를 말하였다.
 
 
아쌀라야나여, 또한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 왕위를 이어 받은 왕족계급의 왕이 여러 출신의 사람 백여 명을 모아놓고 ‘존자들이여, 귀족 가문, 왕족 가문,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난 당신들이 사라수, 사라라수, 전단수, 또는 발담마수의 부싯목을 가져와서 불을 지펴서 불빛을 밝혀라. 존자들이여, 짠달라 가문, 사냥꾼 가문, 죽세공 가문, 마차수리공 가문, 도로청소부 가문에서 태어난 당신들도 개 먹이통, 돼지 먹이통, 세탁통이나 엘란다 나무의 부싯목을 가져와서 불을 지펴서 불빛을 밝혀라.’고 했다고 합시다. 아쌀라야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쌀라야나여, 만약에 귀족가문, 왕족 가문,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난 자들이 사라수, 사라라수, 전단수, 또는 발담마수의 부싯목을 가져와서 불을 지펴서 불빛을 밝힌다면, 바로 그 불꽃만이 화염이 있고, 광채와 광명이 있어, 바로 그 불꽃으로만 불을 만들 수 있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짠달라 가문, 사냥꾼 가문, 죽세공 가문, 마차수리공 가문, 도로청소부 가문에서 태어난 자들도 개 먹이통, 돼지 먹이통, 세탁통이나 엘란다 나무의 부싯목을 가져와서 불을 지펴서 불빛을 밝힌다면, 바로 그 불꽃만이 화염이 없고, 광채와 광명이 없어, 그 불꽃으로는 불을 만들 수 없습니까?”(M93)
 
 
모든 불꽃은 형태나 광명, 광채에 있어서 똑같다. 고급 전단향 나무의 불꽃이나 소똥의 불꽃이나 형태, 광명, 광채에 있어서 똑같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누구나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면 똑 같음을 말한다. 이는 열반 체험에 대한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려면 반드시 열반체험이 있어야 한다. 열반 없는 성자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런데 열반은 궁극적 경지라는 것이다. 자신을 가장 청정하게 했을 때 체험할 수 있는 경지이다. 이런 열반에 대하여 불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열반의 불꽃으로 타올랐을 때 모두 동등하게 된 것이다.
 
모든 연료는 불꽃을 낸다. 모든 계급의 사람들은 누구나 수행하면 궁극적 경지인 열반을 체험하여 성자가 될 수 있다. 진정한 계급평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수행승이 인내하여 참아 낼 때
 
부처님은 작다고 깔보지 말라고 했다. 또한 젊다고 무시하지 말라고 했다. 이는 왕족, 뱀, 불, 사미승에 대한 것이다.
 
왕족으로 태어난 어린 왕자는 커서 왕이 될 수 있다. 뱀은 아무리 작아도 독이 있다면 물릴 수 있다. 불은 아무리 작아도 부주의 하면 큰 불이 될 수 있다. 사미승은 어리다고 깔보아서는 안된다. 사미승은 자라서 위대한 장로가 된다. 특히 사미승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계행을 지키는 수행승이
청정의 불꽃으로 불타오르면
아들과 가축이 없어
그 상속자들은 재산을 알지 못하리.”(S3.1)
 
 
사미승을 작다고 하여 깔보지 말아야 한다. 사미승을 어리다고 하여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게송에서 “청정의 불꽃으로 불타오르면”이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청정의 불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수행승이 복수를 하려해도, 자신의 계행의 불로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없다. 수행승에게 죄를 범한 자는 수행승이 인내하여 참아 낼 때에만, 불태워진다.”(Srp.I.134)라고 했다.
 
다른 사람을 저주하면 저주하는 사람이 불태워진다.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거나, 태생이 미천하다고 무시한다면 무시하는 자가 불태워질 것이다. 왜 그런가 상대는 그런 무시나 저주의 밥상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무시 받을 때가 있다. 공개적으로 망신 주기도 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되갚아 주어야 할까? 그러나 부처님은 화 내는 이에게 화 내지 말라고 했다. 분노의 밥상을 받지 않는 것이다. 인내 했을 때 양자가 승리할 것이라고 했다. 서로 윈윈(win-win)하는 것이다.
 
나이 어린 사미는 무시 받기 쉽다. 단지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받을 수 있다. 태생이 미천해서 무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계행을 지켜 청정의 불꽃으로 불타오르면 어떻게 될까? 무시한 자가 불에 타 버릴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에게 죄를 범한 자는 수행승이 인내하여 참아 낼 때에만, 불태워진다.”(Srp.I.134)라고 한 것이다.
 
해외여행 방랑자들을 보면
 
오늘 여행 떠나는 날이다. 그렇다고 해외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국내여행이다. 속리산에 있는 자연휴양림에서 하루 머문다.
 
여행을 앞두고 글쓰기를 속도전 한다. 간단히 행선과 좌선을 마치고 오늘 해야 할 일을 다하고자 하는 것이다.
 
페이스북을 보다 보면 해외여행자들이 있다. 그들이 올리는 글을 보면 여행방랑자들 같다. 며칠도 아니고 몇 달 해외를 떠돌아 다닌다. 대부분 여행을 즐긴다고 말한다.
 
생업이 있는 자는 일주일 시간 내기도 힘들다.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은퇴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해외방랑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해외방랑자들을 보면 마치 여행하기 위해서 사는 것 같다. 여행이 좋아서 나가는 것이지만 생업이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 본다면 방랑자, 유행자, 무위도식자들 같아 보인다.
 
어떤 젊은이는 몇 달 노동해서 번 돈으로 해외로 나간다. 해외로 나가 마치 방랑자처럼 이 나라 저 나라 떠돌아 다닌다. 그들이 보내 온 사진을 보면 부럽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 허송세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들은 이 사회와 나라를 위해서 어떤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있는가?
 
해외로 평생 떠도는 사람들이 있다. 지구 끝까지 가보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이 대륙, 저 대륙 이동하면 몇 달, 아니 몇 년 세월을 보낸다.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
 
어떤 이들은 여행하면서 배운다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즐기는 것이다. 여행에 대한 욕망과 갈애가 없다면 여행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구 끝까지, 하늘 끝까지 가서 무엇을 얻겠다는 것인가?
 
걸어서 세계의 끝에 이르고자 했으나
 
초기경전을 보면 ‘로히땃싸’라는 선인이 있었다. 로히땃싸는 걸어서 세계의 끝에 이르고자 했다. 마치 오늘날 지구촌 방랑자들을 보는 것 같다. 이는 “세존이시여, 그 때 저에게 ‘나는 걸어서 세계의 끝에 이르겠다.’라는 욕망이 생겨났습니다.”(A4.45)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선인이 걸어서 세계 끝에 이르고자 한 것은 욕망과 갈애 때문이다. 저 세상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여행방랑자들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행방랑자들은 내일이 없는 삶을 사는 것 같다. 그들은 속된말로 ‘다쓰죽’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재산이 얼마나 많길래 ‘다 쓰고 죽자’라는 것일까?
 
방랑자들은 오로지 현실을 사는 것 같다. 오늘 즐겁게 살면 그만인 것이다. 세계의 끝에 이르러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욕망의 여행, 즐기는 여행이 되었을 때 남는 것은 허(虛)와 무(無)밖에 없을 것이다.
 
걸어서는 결코 세계 끝에 이를 수 없다. 탈것으로도 이를 수 없다. 우주선을 만들어 우주 끝까지 갈 수 있을까? 가기도 전에 죽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일까 로히땃싸 선인은 “세존이시여, 제가 이와 같은 빠르기와 이와 같은 걸음걸이를 갖추고 밥을 먹거나 대소변을 보고 잠자리에 들어 피로를 푸는 일 이외 에 백 년의 수명을 누리며 그 백 년의 생애를 살면서 걸었는데도 세계의 끝에는 이르지 못하고 중도에 죽고 말았습니다.”(A4.45)라고 말했다.
 
걸어서 세계 끝까지 가고자 하는 것은 욕망과 갈애에 따른 것이다. 설령 탈 것을 타고 간다고 해도 허망한 것이다. 그런데 여행이라 하여 반드시 외면의 여행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면의 여행도 있는 것이다.
 
내면 여행을 하면 세계의 끝에
 
부처님은 내면의 여행을 말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러나 벗이여, 세계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괴로움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 벗이여,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나는 가르칩니다.”(A4.45)라고 말했다.
 
걸어서 세계 끝까지 갈 수 없다. 탈 것으로 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주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끝에 도달하기도 전에 죽어 버릴 것이다. 욕망과 갈애로 사는 한 결코 세계 끝에 이를 수 없다. 그러나 내면 여행을 하면 세계의 끝에 이를 수 있다.
 
내면 여행은 어떤 것인가? 명상하는 것이다. 방석에 평좌하고 앉아서 눈을 감고 여행하는 것이다. 새김이 확립되었을 때 얼마든지 달릴 수 있다. 그것은 외면 여행과 비교되지 않는 흥미가 있다. 내면여행에는 기쁨, 행복, 평온이 있다. 욕먕과 갈애를 떠났을 때 가능한 것이다.
 
걸어서, 또는 탈 것으로 세계 끝까지 여행하는 사람들은 여행의 즐거움을 전한다. 그러나 욕망으로 여행하는 한, 갈애로 여행하는 한 결코 세계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
 
이 사회와 이 나라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야
 
방랑자가 되면 이 나라 저 나라 떠돌아 다닌다. 국제 떠돌이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것도 멋일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여행은 내면을 여행하는 것이다.
 
오늘 재가우안거 37일째이다. 작은 공간에서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는 것도 내면여행 하기 위한 것이다. 해외여행이 좋다고 하지만 더 좋은 것은 내면여행이다. 해외방랑자가 되기보다는 내면여행의 구도자가 되는 것이 더 낫다.
 
오늘 여행을 떠난다. 일박이일 속리산 자연휴양림 여행이다. 생업을 가진 자가 최대한 시간 낼 수 있는 여행이다. 여행방랑자가 아니라 구도의 여행이 되어야 한다. 이 사회와 이 나라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2024-08-2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