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사람들은 저마다 즐길거리가 있어서

담마다사 이병욱 2024. 8. 28. 11:07

사람들은 저마다 즐길거리가 있어서
 
 
그냥 이대로 있고 싶다. 그러나 삼십분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까지 오기에 힘들었는데 예서 말 수 없다. 알람소리를 무시하고 더 달리기로 했다.
 
스마트폰 알람소리는 일분가량 울렸다. 소리가 꽤 크다. 귀에 거슬릴정도이다. 그러나 몸이 나무토막처럼 굳은 상태에서 알람소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로지 배의 움직임과 이를 아는 마음만 있는 것 같았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좌선이 끝나면 후기를 써야 한다. 삼십분 좌선하고 세 시간 쓰는 후기를 말한다. 후기가 끝나면 밀린 일을 해야 한다. 어제 주문 받은 일을 오후에는 메일로 발송해야 한다.
 
얼마나 더 달렸을까? 평좌한 다리를 풀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벌렁 누웠다. 마치 와선하듯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스마트폰 시계를 보았다. 십분 더 달린 것이다.
 
오늘 좌선은 쉽지 않았다. 몸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이다. 등에 한기를 느끼면 만사가 귀찮다. 삶의 의욕도 떨어진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백권당에 오면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해야 한다. 지금은 재가불자의 우안거기간이다.
 
오늘로서 재가우안거 40일째이다. 이제 더위도 한풀 꺽였다. 오늘 아침 백권당에 걸어 오는 길에 27도였다. 이 정도면 걸을만하다. 땀도 나지 않았다. 습도도 적당하다. 이제 가을이 시작되려나 보다.
 
재가자가 안거를 나고 있다. 안거는 출자자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재가자가 안거를 난다고 해도 시민선방과 같은 곳에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생업이 있는 재가자는 시간을 낼 수 없다. 사무실을 반으로 쪼개서 명상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마치 몸이 얼은 것처럼 감각이 없어질 때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삼십분 앉아 있는 것도 고역이다. 오늘이 그랬다. 행선을 해도 잘 집중되지 않았다. 오늘은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했다. 잘 집중이 되지 않아 “부푼다, 꺼진다”라며 미얀마식으로 동사형으로 명칭을 붙여 보았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삼십분 앉아 있기로 했으니 앉아 있어야 한다. 자신과의 약속이다. 설령 고행이 되더라도 견디어 내야 한다. 어느 순간 고요가 찾아 왔다.
 
일시적으로 마음이 밝아 졌을 때 눈 앞이 환해 지는 것 같다.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환한 마음에 마음을 두었다. 그러나 다시 어두워졌다.
 
환해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했다. 밖에서는 차 지나가는 소리가 시끄럽다. 도시에서 좌선은 쉽지 않다. 부처님이 빈집으로 가서 선정에 들라는 경전의 문구가 떠올랐다.
 
좌선 중에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떠올랐다. 정신을 차려 보니 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 그럼에도 끝까지 앉아 있었다.
 
앉아 있다 보면 어느 순간 몸이 딱딱 하게 굳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마치 나무토막 같다. 마치 목불처럼 꼼짝 앉고 앉아 있는 것이다. 마치 몸이 얼은 것처럼 감각이 없어질 때가 있다. 이럴 때 배가 “뽈록뽈록” 움직이는 것이 선명하게 보인다. 물론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한참 재미 보고 있는데
 
멈추면 보인다는 말이 있다. 몸이 나무토막처럼, 몸이 목불처럼, 몸이 얼은 것처럼 감각이 없어 졌을 때 배의 움직임만 보이는 것 같았다. 귀로는 바깥 차 소리가 계속 들려 거슬렸다. 이것도 기회이다.
 
기회가 오면 잡아야 한다. 몸이 내몸이 아닌 것처럼 되었을 때, 모든 것이 멈추어 있는 것처럼 보였을 때 배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좌선 초기에 부품과 꺼짐을 새기고자 명칭까지 붙였으나 몸이 마치 얼어 붙은 것처럼 꼼짝하지 못하고 있을 때 배의 움직임이 저절로 보이는 것 같았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오분 앉아 있기도 힘들다. 그럼에도 고행하듯이 앉아 있었다. 그래서일까 막판에 집중이 되었다. 아마 오분 남겨 놓고 몸이 얼은 듯 하다.
 
몸이 얼은 상태에서 마음만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상태가 되니 좌선 하기 전에 등이 시린듯한 것이 사라졌다. 좌선 전과 전혀 다른 상태가 되었다. 이대로 계속 앉아 있고 싶었다. 그런데 삼십분을 알리는 알람소리가 난 것이다. 한참 재미 보고 있는데 끝날 시간이 되는 것 같았다.
 
삼십분 좌선하고 두세 시간 후기 쓰기
 
삼십분 좌선하고 두세 시간 후기를 쓴다. 이런 것에 대하여 담마와나밴드에서 어떤 이는 “좌선을 세 시간 하고 후기를 삼십분 쓰십시오.”라고 써 놓았다.
 
글쓰기는 생활화 되었다. 2006년부터 글쓰기를 시작한 이래 매일 쓰고 있다. 지난 18년동안 7800개가량 글을 썼다. 매일 한 개 이상 글을 쓴 것이다. 과거에 쓴 글을 모아서 책을 만들었다. 이제까지 만든 책은 134권이다. 이쯤 되면 글쓰기는 밥 먹는 것과 같다. 매일 밥 먹듯이 쓰는 것이다.
 
글쓰기는 일종의 갈애라고 말 할 수 있다. 미리 생각해 둔 것을 자판만 두드리면 된다. 매일 쓰다 보니 생활화 되었고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더구나 경전이나 논서에서 읽었던 것을 글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는 어쩔 수 없다. 이를 ‘글쓰기갈애’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즐길거리가 있어서
 
갈애는 좋은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갈애는 다음 생을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사성제의 집성제에 대한 것이다.
 
머리맡에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이 있다. 요 며칠 동안 읽은 것은 집성제에 대한 것이다. 집성제에서 “따뜨라따뜨라비난디니(tatra tatrābhinandinī)” 라는 말과 “뽀노바위까(ponobhavikā)”라는 말이 와 닿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즐길거리가 있다. 부자는 부자의 즐길거리가 있고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의 즐길거리가 있다. 어른은 어른의 즐길거리가 있고 아이는 아이의 즐길거리가 있다. 이를 “따뜨라따뜨라비난디니”라고 하는데, 이 말은 “여기저기에 환희하며”(S56.11)라고 번역된다.
 
종로3가는 노인들의 천국이다. 노인들이 장기를 두거나 바둑을 두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훈수하는 사람도 있고 구경하는 사람도 있다. 하루를 그렇게 때우는 것이다. 이것도 즐길거리가 된다.
 
어린아이들은 모래놀이를 한다. 모래로 성을 쌓고 탑을 만든다. 그리고 허물어 버린다. 어른이 보기에는 하찮고 재미 없어 보일지 몰라도 아이들에게는 즐길거리가 된다.
 
부자는 즐길거리를 즐기는데 있어서 예산에 한계가 없다. 가난한 자가 세 끼 먹는다면 부자는 열 끼, 백 끼를 먹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질로 승부한다. 가난한 자가 삼겹살에 소주 먹을 때 부자는 소고기에 와인을 먹는 것이다.
 
부자는 즐기는데 있어서 한계가 없다. 먹는 것도 질로 승부한다. 그래도 돈이 남아 돌면 어떻게 할까? 가난한 자들이 못하는 것을 한다. 도박이 대표적이다. 도박을 하게 되면 먹는 것보다 더 자극적이다. 먹는 것에는 몸에 한계가 있지만 도박에는 한계가 없다. 주기도 빠르다. 밤새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부자가 도박에도 싫증 난다면 어떻게 할까? 아마 이번에는 마약에 손 댈지 모른다. 먹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도박에도 즐기는데 한계가 있지만 마약은 한계가 없다. 그러나 깰 때는 금단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이를 극복하고자 또다시 마약을 하게 될 것이다. 예산에 있어서 한계가 없는 재벌이세나 재벌삼세가 마약에 빠지는 이유에 해당된다.
 
갈애라는 즐기는 성품이 있어서
 
즐길거리를 즐기는데 있어서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이 있을 수 없다. 심지어 축생도 즐길거리를 즐긴다. 돼지가 우리에서 돼지죽을 보면 꼬리를 흔들며 폭풍흡입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즐김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 세상만을 숙고해 본다면 하류층의 여건은 상류층 사람들로서는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즐길 만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조건이 여의치 않아 그 처지에 이르게 되면 그 도달한 생에서 즐깁니다.
 
사람으로서 축생의 생을 살펴보면 즐길 것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매우 혐오스럽고 두려운 것으로만 생각됩니다. 뱀의 몸속에, 벌레의 몸속에 들어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매우 혐오스럽고 두려워할만합니다. 하지만 업에 따라 그러한 종류의 생에 이르게 되면 자기몸이라 생각하고 좋아하며 즐깁니다. 이것은 갈애라는 것이 이르는 생, 도달한 대상을 좋아하고 즐기는 성품이 있어서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 갈애를 ‘tatratatrābhinandinī’, 각각의 생. 각각의 대상들을 좋아하고 즐기는 것이라고 설하신 것입니다.”(담마짝까법문, 277쪽)
 

 
즐기는데 있어서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모래놀이하면서 즐기는 것이나 구슬치기 놀이 하면서 즐기는 데는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 시골에서 노인들이 노인정에서 화투놀이 하는 것도 큰 돈이 들어 가는 것은 아니다.
 
돈 많은 부자만 즐기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자도 돈을 모아서 해외여행을 즐길 수 있다. 몇 개월 점원생활 하면서 모은 돈으로 동남아국가와 같은 저렴한 비용이 들어 가는 나라에서 왕족처럼 살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오토바이여행을 즐긴다. 주로 동남아나 인도 등 비교적 가난한 나라에 가서 최소의 예산으로 몇 달 사는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오지를 탐험하는 것도 즐길거리를 즐기는 것이다. 이는 갈애라는 즐기는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권태와 무료를 참지 못하는 중생
 
사람들은 심심한 것을 참지 못한다.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뭐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마음은 늘 감각대상에 가 있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집성제)를 설했다. 이는 늘 즐길거리를 찾는 중생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야양 딴하 뽀노바위까 난디라가사하가따 따뜨라 따뜨라비난디니(yāya tahā pono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S56.11)라고 했다. 이 말은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라고 번역된다.
 
사람들은 잠시도 잠시도 권태와 무료를 참지 못한다. 눈을 늘 두리번거리며 매혹적인 대상을 찾는다. 유튜브 시대인 요즘에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도 즐길거리를 찾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재미를 찾는 것이다. 이것이 갈애이다.
 
사람들이 즐길거리를 찾아서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 것은 갈애 때문이다. 눈이나 귀 등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즐길거리를 찾고자 하는 갈애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 갈애에 대하여 ‘뽀노바위까(ponobhavikā)’, 즉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했다.
 
초전법륜경을 빠알리 원문으로 외웠는데
 
초전법륜경을 빠알리어로 외운바 있다. 지금으로부터 11년전인 2013년의 일이다. 그때 감격에 대하여 ‘초전법륜경을 외우고’(2013-07-09)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다. 그때 글에서 “지난 5월 28일 실크로드 여행을 떠나면서 발원한지 40여일 만이다.”라고 써 놓았다.
 
초전법륜경을 빠알리원문으로 외웠다. 외우기로 발원한지 딱 40일 걸렸다. 매일 밤낮으로 외웠다. 문단을 나누어서 매일 한문단씩 외웠다.
 
외우는 것에도 요령이 있다. 어제 외운 것을 확인하고 새로운 문단을 외웠다. 이렇게 벽돌쌓기 식으로 외우면 마지막 문단 외울 때는 다 외우게 되는 것이다.
 
경 외우는 초전법륜경이 처음은 아니다. 2004년 처음으로 정식불자가 되었을 때 금강경을 외웠다. 금강경 32분을 매일 한분씩 외웠다. 어제 외운 것을 확인하고 새로운 분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마지막 32분을 외웠을 때 자동적으로 다 외우게 되었다.
 
2004년 5,249자에 달하는 금강경을 45일만에 외웠다. 벽돌쌓기 방식으로 외운 것이다. 이런 외우기 방식을 빠알리경 외우기에도 도입했디.
 
2011년에는 라따나경(Sn2.1, 보배경)을 빠알리 원문으로 외웠다. 거의 천수경 정도 되는 글자수이다. 이후 멧따경(Sn1.8), 망갈라경(Sn2.4)을 외웠다. 그리고 초전법륜경(S56.11)을 외웠다.
 
이후에도 빠알리경 외우기는 계속되었다. 법구경을 1품에서 3품까지 빠알리원문으로 외웠다, 팔정도분석경(S45.8)과 십이연기분석경(S12.2)을 빠알리 원문으로 외웠다. 이 밖에도 ‘죽음의 게송’ 등 몇 개 더 있다.
 
초전법륜경을 빠알리원문으로 외웠을 때 상쾌했다. 마치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다. 이에 대하여 “선정삼매 수행, 간화선 수행, 위빠사나 수행이 좋다고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경전외우기만한 수행이 없다고 본다. 일단 외우고 나서 느끼는 그 희열은 경에서 말하는 선정삼매의 희열, 행복, 평온에 못지 않기 때문이다.” (2013-07-09)라고 써 놓았다.
 
밥만 먹고 살 수 없는 사람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과의 인연은 오래 되었다. 2013년 초전법륜경을 빠알리 원문으로 외울 때도 후기에 마하시 사야도가 법문한 담마짝까 법문 내용이 들어가 있다. 그때 후기에서도 “따뜨라비난디니”와 “뽀노바위까”에 대해서도 언급해 놓았다.
 
2008년 한국명상원에서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 ‘빠띳짜사뭅빠다(십이연기)’를 접한 이래 초기불교를 알게 되었다. 이후 초기경전을 읽고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읽었다.
 
최근에는 사부니까야를 모두 다 읽었다. 시중에 번역되어 나온 빠알리경전은 거의 다 읽었다. 그러다 보니 이 경전에 있는 것과 저 경전에 있는 것이 매칭 되는 것이었다. 그 중에 하나가 사식, 네 가지 식사에 대한 것이다.
 
쌍윳따니까야 인연상윳따를 보면 ‘자양분의 품’이 있다. 여기에 네 가지 식사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한 네 가지 자양분이 있다. 그 네 가지 자양분이란 무엇인가? 첫째, 거칠거나 미세한 물질의 자양분, 둘째, 접촉의 자양분, 셋째, 의도의 자양분, 넷째, 의식의 자양분이다. 수행승들이여, 이 네 가지 자양분은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해 존재한다.”(S12.11)
 
 
식사라고 하여 먹는 것만이 식사는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먹는 식사를 포함하여 접촉하는 것도 식사이고, 의도하는 것도 식사이고. 의식하는 것도 식사라고 했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없다. 사람이 책을 보려 하는 것은 마음의 양식을 먹는 고자 하는 것이다. 유튜브를 보고자 하는 것도 알음알이에 대한 갈망에 따른 것이다. 이런 것도 식사로 본다. 이를 식식(識食), 의식의 자양분이라고 한다.
 
사람은 매일 네 가지 식사를 한다. 밥만 먹고 살 수 없는 것이다. 접촉도 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어느 법사는 밥만 먹고 해야 할일 하지 않는 남편에게 아내가 말한 것을 들려 준다. 그 말은“야, 이 도둑놈아, 사람이 밥만 먹고 사냐?”라는 말이다. 촉식, 즉 접촉의 식사도 식사라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네 가지 식사하는 것으로 일생을 살면 다시 태어남을 가져 온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이 네 가지 자양분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근거로 하고 무엇을 원천으로 하는가? 이 네 가지 자양분은 갈애를 원인으로 하고 갈애를 근거로 하고 갈애를 원천으로 한다.”(S12.11)라고 했다.
 
죽어도 좋아
 
경전을 읽다 보면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 이는 초기경전이 체계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전에서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는 것이 다른 경전에서는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는 경우에도 해당된다.
 
초전법륜경에서는 즐길거리를 찾아 즐기면 다시 태어남을 가져 온다고 했다. 그런데 이와 똑 같은 가르침이 ‘자양분의 경’(S12.11)에도 있는 것이다.
 
즐길거리를 찾아 즐기면 다시 태어남을 가져 온다. 윤회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네 가지 식사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중생의 보양을 위한 자양분”(S12.11)이라고 한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아무 생각 없이 산다고 보아야 한다. 마음은 늘 감각대상에 가 있기 때문에 즐길거리를 찾아서 늘 즐기는 삶을 살아간다.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권태와 무료를 참지 못한다. 이런 삶은 모두 윤회의 원인이 된다.
 
사람은 감각을 즐기기 위해서 산다. 감각적 갈애로 살아가는 것이다. 노인의 성문제를 다룬 영화 ‘죽어도 좋아’에서처럼 감각적 쾌감에 목숨 거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감각적 갈애는 축생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로 태어나면 개의 생을 즐깁니다. 돼지로 태어나면 돼지의 생을 즐깁니다. 닭으로 태어나면 닭의 생을 즐깁니다. 벌레로 태어나면 그렇게 태어난 곳에서 즐깁니다. 사람의 한생에서조차 일부는 매우 부자인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여러 이유로 가난하게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도 그가 도달한 생의 상황에서 즐깁니다. 일부 사람들은 부모들이 다시 불러도 부자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자기 삶을 자기가 즐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달한 생, 얻는 대상에서 즐긴다’라 는 바로 이 갈애 때문입니다.” (담마짝까법문, 287쪽)
 
 
축생의 생을 살펴보면 즐길 것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축생은 자기 몸이라 생각하고 좋아하며 즐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는 담마짝까 법문에서 “조건이 여의치 않아 그 처지에 이르게 되면 그 도달한 생에서 즐깁니다.”(277쪽)라고 말했다. 이는 자기 삶을 자기가 즐기는 것이 된다. 감각을 즐기는데 있어서 죽어도 좋은 것이다.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인간만이 수행을 할 수 있다. 물론 천상의 존재도 수행할 수 있지만 희로애락이 있는 인간만이 수행하기 좋은 환경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이는 마하시 사야도가 다음과 같이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이야기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 ‘경행하면서’라고 하면 “gacchanto vã gacchāmīti pajānāti(갈 때는 ‘간다’라고 안다)”라는 새김확립의 가르침 에 따라 <간다. 든다; 간다. 놓는다>라는 등으로 끊임없이 관찰하며 노력하면 됩니다.

그렇게 노력하다가 삼매의 힘이 생겨나게 됐을 때 지탱하고 움직이는 물질과 새겨 아는 정신이라는 이 정신·물질 두 가지를 관찰할 때마다, 관찰할 때마다 구분하여 알게 됩니다.

 
그 다음 삼매가 단계적으로 향상되어 힘이 매우 좋아졌을 때에는 ‘가려는 마음 때문에 가는 물질이 생겨난다. 알아지는 대상이 있기 때문에 앎이 생겨난다’라는 등으로 원인과 결과도 구별하여 알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가려고 하는 마음이나 가는 물질이나 관찰하여 아는 마음 정신이나 그 순간마다 생겨나서는 사라져 가는 것을 마치 손으로 잡아서 보는 것처럼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렇게 생겨나서는 사라져 가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다’라고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순간도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두려운 것, 괴로운 것이다’라는 것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자신의 바람 대로 되지 않고 그 성품대로 생멸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무아의 성품법일 뿐이다’라고도 분명하게 압니다.”(담마짝까법문, 305쪽)
 
 
위빠사나 수행은 무상, 고, 무아의 성품법을 아는 것으로 귀결된다. 갈 때는 간다고 분명히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이는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여 아는 것이다. 이것이 위빠사나 1단계 지혜이다. 다음으로는 가려는 의도가 있어서 발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서 원인과 조건으로 구분하여 알게 된다. 이는 위빠사나 2단계 지혜에 해당된다.
 
더 들어가면 어떤 세계가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오늘 삼십분 죄선을 지나쳐서 더 달렸다. 그래 보았자 십분 더 했다. 더 앉아 있을 수도 있으나 해야 할 일이 있다. 선원에서 집중수행한다면 두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더 앉아 있을 것 같았다.
 
몸이 마치 얼은 것처럼 되었을 때 몸은 나무토막이 되고 목불이 되는 것 같았다. 마치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았을 때 움짐임이 보였다. 배의 꿈틀거림이다.
 
멈춤이 있을 때 배의 움직임은 분명했다. 깊숙이 들어간 것 같았다. 더 들어가면 어떤 세계가 있을까? 배의 움짐임도 멈추고 모든 것이 멈추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 질 것이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
 
부처님이 나무 밑이나 빈 집에 가서 수행하라고 한 것은
 
좌선을 하다 보면 차소리가 거슬린다. 번잡한 도시에서 차량 소리 들어가며 명상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아난다여, 여기가 나무 밑이고 여기가 빈 집이다. 아난다여, 잘 정밀하게 사유하고 방일하지 말고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 이것이 내가 그대에게 주는 가르침이다.”(M106)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이런 문구는 정형구로서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부처님은 나무 밑이나 빈 집에 가서 수행하라고 했다. 이는 다섯 가지 문을 닫아 놓고 마음의 문 하나만 열어 놓는 것과 같다. 그래서 눈을 감고 좌선하는 것이다. 그러나 귀는 닫기 힘들다.
 
귀의 문을 닫으려면 깊은 산중에 있어야 할 것 같다. 동굴도 좋을 것 같다. 도시에서 버스 지나가는 소리, 오토바이 파열음과 폭탄음 소리, 마치 천둥치는 것처럼 전철 지나가는 소리는 최악이다.
 
등 시린 것도 잊어 버리고
 
오늘도 삼십분 좌선하고 후기를 세 시간 쓰게 되었다. 좌선할 때 몸이 얼어 버린 것처럼 꼼짝하지 않고 있어서일까 등 시린 것이 멈추었다. 또한 이렇게 정신 없이 자판을 두드리다 보니 등 시린 것을 잊어 버렸다.
 
 
2024-08-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