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오늘은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은 날

담마다사 이병욱 2024. 8. 31. 15:08

오늘은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은 날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다. 그렇다고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다. 단지 방향만 잡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했다.
 
오늘은 재가우안거 43일째이다. 오늘 새벽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 ‘담마짝까법문’을 읽고 크게 깨달았다. 순전히 글을 보고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명색, 즉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이다.
 
명색을 빠알리어로 나마루빠(nāmarūpa)라고 한다. 이를 정신과 물질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는 이 명색이 매우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위빠사나 수행에서 그렇다.
 
사람들은 명색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초기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거나 교학을 별도로 공부하지 않았다면 단지 명칭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정도론이나 아비담마를 보면 명색을 매우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을 보면 물질과 정신, 정신과 물질이라는 말이 수도 없이 나온다.
 
한국불교에서는 명색을 말하지 않는다. 어떤 선사의 법문에서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관찰하라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그 대신 내 마음 속에 있는 본래부처를 찾으라고 말한다.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명색은
 
명색은 십이연기에서 강조되고 있다. 십이연기 정형구에 명색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명색은 어떤 것일까?
 
쌍윳따니까야에 십이연기분석경이 있다. 분석경이라 칭하는 경은 대개 위방가숫따(vibhagasutta)라는 말이다. 연기상윳따(S12)에 있기 때문에 십이연기분석경(S12.2)라고 하는 것이다. 명색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Katamañca bhikkhave nāmarūpa?
Vedanā saññā cetanā phasso manasikāro,
ida vuccati nāma.
Cattāro ca mahābhūtā,
catunna ca mahābhūtāna upādāyarūpa,
ida vuccati rūpa.
Iti idañca nāma, idañca rūpa,
ida vuccati bhikkhave, nāmarūpa.
 
까따만짜 빅카웨 나마루빵
웨다나 산냐 쩨따나 팟소 마나시까로
이당 븃짜띠 나망
짯따로 짜 마하부따
짜뚠낭 짜 마하부따낭 우빠다야루빵
이당 븃짜띠 루빵
이띠 이단짜 나망, 이단짜 루빵
이당 븃짜띠 빅카웨, 나마루빵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명색이란 무엇인가? 그것에는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정신활동이 있으니 이것을 명이라고 부르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 또는 네 가지 광대한 존재에서 파생된 물질을 색이라고 한다.”(S12.2)
 

 
십이연기분석경을 빠알리원문으로 외운 바 있다. 지금으로부터 3년전인 2021년의 일이다. 그때 ‘경 외우기에 문자풀을 걸치고자’ (2021-12-23)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마지막 문단을 다 외우고 났을 때 “긴 길이의 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없이 외우고 나면 상쾌하다. 마치 득도한 듯한 기분이다.”라고 써 놓았다.
 
경을 다 외웠다고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다. 경 외운 것을 바탕으로 실천해야 한다. 경을 외우는 목적은 개념을 잡기 위한 것이다. 마치 방향을 잡는 것과 같다.
 
십이연기분석경에 명색에 대한 것은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이다. 정신에 대한 것으로는 ‘느낌(Vedanā), 지각(saññā), 의도(cetanā), 접촉(phasso), 정신활동(manasikāro)’이라고 했다. 그리고 물질에 대해서는 네 가지 광대한 존재, 즉 지, 수, 화, 풍 사대와 사대의 파생물질이라고 했다.
 
나마루빠에 대하여 명칭과 형태로 보면
 
수학문제를 잘 풀려면 정의된 것을 알아야 한다. 이는 미리 선언해 두는 것을 말한다. 초기불교의 교학도 이와 다르지 않다. 명색에 대하여 분명히 정신과 물질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의 L교수는 나마루빠에 대하여 명칭과 형태라고 말한다.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보는 것과 명칭과 형태로 보는 것은 아주 다른 것이다. 이는 명색에 대하여 개념을 달리 보는 것과 같다.
 
방향이 다르면 목적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명색에 대하여 문자 그대로 풀이하듯이 명칭(이름)과 형태(모습)으로 파악한다면 수행할 필요가 없다. 왜 그런가? 명색을 인식론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L교수는 명색에 대하여 인식론적으로 보았다. 그래서일까 루빠(색)에 대해서도 인식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L교수의 유튜브 영상을 보면 일체유심조로 강의한다. 
 
L교수가 명색에 대하여 명칭과 형태로 본 것은 우파니샤드 철학에 따른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한 것이다. 그 결과 명색에 대하여 정신물질로 보는 것을 부정한다. 당연히 아비담마와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도 부정한다. 왜 그런가? 자신이 주장하는 이론과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에는 L교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남방 테라와다 가사를 두른 김해의 B스님도 이런 계열로 볼 수 있다. 또한 매일 영상을 올리는 H스님도 이런 계열이다. 공통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인식론적으로 본다.
 
부처님 가르침을 인식론적으로 보면 수행할 필요가 없다. 단지 머리로 깨우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나마루빠가 명칭과 형태에 불과한 것이라면 이는 언어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 생각 돌이키면 깨닫는 것이 된다. 수행한다고 하여 애써 앉아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일까 L교수는 수행무용론을 주장한다.
 
초기경전에 위방가숫따(분석경)라는 이름의 경이 여럿 된다. 십이연기를 포함하여 팔정도, 오력도 분석경이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이는 개념을 잡기 위한 것이다. 또한 개념정의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십이연기분석경(S12.2)이라고 하고 팔정도분석경(S45.8)이라 하는 것이다.
 
십이연기분석경과 팔정도분석경을 빠알리 원문으로 외운바 있다. 이 밖에도 담마짝까경(초전법륜경, S56.11)도 빠알리 원문으로 외웠다.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을 읽을 준비는 되어 있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보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초기불교를 대승에 접목하여 독특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는 전남대의 L교수는 명칭과 형태로 본다. 방향이 다른 것이다. 방향이 다르면 목적지도 다르게 되어 있다.
 
한국불교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명색이라는 말을 보기 힘들다. 그 대신 자신의 마음에서 본래부처를 찾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테라와다의 위빠사나 1단계를 제대로 알면 깨진다. 명색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하면 있을 수 없는 것이 된다. 본래불사상은 위빠사나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nāmarūpa-pariccheda ñāa)’를 제대로 알고 나면 허황된 것이 된다.
 
위빠사나 수행은 명색을 제대로 아는 것부터 시작된다. 청정도론 제18장에서 ‘견해청정(diṭṭhisuddhi)’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해 놓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마하시 사야도는 니까야와 아비담마를 근거로 해서 법문 했기 때문에 당연히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보석목걸이의 비유
 
오늘 새벽 작은 깨달음이 있었다. 그것은 책을 보고 이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본 것은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리가 된 것 같았다. 그것도 위빠사나 수행과 관련된 것이다. 어떤 것인가? 먼저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보석목걸이의 비유’를 들었다.
 
 
“ ‘veluriya’라는 묘안석 루비 안을 뚫어 검푸르거나 노랗거나 붉거나 희거나 연노랑인 어떤 하나의 줄로 깬 뒤 그 묘안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본다고 할 때, 눈이 좋은 이라면 보석과 줄을 따로 구별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석 안에 줄이 꿰뚫어 들어가 있는 것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관찰하여 알아지는 물질이 따로, 관찰하여 아는 의식이 따로 구별되어 알 수 있습니다. 관찰되어 알아지는 물질 쪽으로 관찰하여 아는 마음의식이 계속해서 달려가는 것처럼 알 수도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물질은 묘안적과 같습니다. 관찰하여 아는 마음은 줄과 같습니다. 줄이 묘안석 안으로 꿰뚫고 들어가 있는 것처럼 관찰하여 이는 마음의식이 관찰되어 알아지는 물질 대상 쪽으로 계속해서 달려갑니다. 그렇게 물질과 정신 두 가지를 구분하여 아는 모습을 설명해 놓으셨습니다. 이 설명에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게 설명하는 모습 중에 물질이 몇 종류와 몇 개, 마음과 마음부수가 몇 종류와 몇 개라고 알아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물질과 관찰하여 아는 마음의식 정도로 구분해서 아는 것만 포함됐습니다. 이것에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담마짝까법문, 360-361쪽)
 
 
우리 속담에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다. 부처님은 보석목걸이의 비유를 들어 명색을 설명했다. 이는 부처님이 “우다인이여, 예를 들어 에머랄드가 아름답고 품질이 좋고 팔면으로 잘 깎이고 투명하고 청정하고 일체의 모습을 갖추어, 거기에 푸른색이나 노란색이나 붉은색이나 흰색이나 갈색의 실로 꿰뚫어져 있어, 눈 있는 사람이 그것을 보고 손에 올려놓고 ‘에머랄드가 아름답고 품질이 좋고 팔면으로 잘 깎이고 투명하고 청정하고 일체의 모습을 갖추어, 거기에 푸른색이나 노란색이나 붉은색이나 흰색이나 갈색의 실로 꿰뚫어져 있다.’라고 관찰하는 것과 같습니다.”(M77)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마하시 사야도는 철저하게 경전과 논서를 근거로 해서 법문 했다. 명색에 대하여 부처님의 보석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묘안석은 물질과 같은 것이고 줄은 정신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대로 이루어진 몸에 대하여 “그것은 나의 의식에 의존하고 그것에 관련된 것이다.”라고 했다. 나마루빠가 명칭과 형태가 아님을 말한다.
 
물질 따로, 정신 따로
 
위빠사나 수행 1단계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대한 것이다. 이런 지혜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먼저 정신과 물질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십이연기분석경(S12.2)에서는 명색에 대하여 명확하게 정의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철저하게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한다. 명색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규정해 놓았으면 그렇게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물질 따로, 정신 따로”라고 말했다.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구분해서 관찰했을 때 “그렇게 해서 나의 많은 제자들은 곧바른 앎의 완성과 그 구경에 도달했습니다.”(M77)라고 말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정신과 물질을 말하지 않으면 수행이라 말할 수 없다. 불교의 수행기법을 스트레스완화에 이용한 MBSR에는 명색이라는 말이 없다. 종교적 색채를 지웠기 때문이다. MBSR에는 불교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수행해도 위빠사나 1단계인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물질을 거듭 관찰할 때 정신법은 저절로 드러나
 
마하시 사야도는 명색에 대하여 청정도론을 근거로 해서도 설명했다.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빠알리 원문 대역한 것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Yathā yathā hissa rūpa suvikkhälita hoti nijjatar suparisuddhar, tathā tathā tadārammaņā arūpadhammā sayameva päkaşă honti.(Vism.18.15)
 

(대역)

“Hi맞다: 정신의 법이 드러나게 하려면 물질만 거듭 관찰해야 한다는 것은 진실로 맞다. assa그에게 그 수행자에게 그 수행자는 yath
ā yathā어떠어떠한 관찰하는 모습으로 rūpa물질이 suvikkhälita매우 깨끗하게 hoti되고, nijjatar가로막힘이 없으며 suparisuddhar매우 선명하게 되는데 tathā tathā그때마다. 그때마다; 그렇게 물질에 대한 관찰이 깨끗해지고 깨끗해지는 그때마다, 그때마다 tadārammaņā그 물질을 대상으로 하는 arūpadhammā정신법도 sayameva저절로 pākață honti분명하게 된다.”(담마짝까법문, 361-362쪽)
 
 
청정도론에서 비물질적 사실의 파악에 대한 것이다. 이는 정신을 파하는 것이다. 전제는 “정신의 법이 드러나게 하려면 물질만 거듭 관찰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렇게 물질을 거듭관찰 할 때 정신법도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했다.
 
마하시 사야도의 대역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그것은 “저절로(sayameva)”라는 말이다. 물질을 거듭 관찰할 때 정신법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저절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절로라는 말은 사양(saya)을 번역한 말이다. 영어로는 ‘self; by oneself’의 뜻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읽어 보면 ‘저절로 된다’라는 말이 종종 눈에 띈다. 물질법을 거듭 관찰했을 때 정신법은 저절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거울의 비유를 들었다. 어떤 것인가? 이는 “예를 들어, 눈 있는 자가 깨끗하지 않은 거울에서 얼굴의 인상을 보면, 인상을 인지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는 ‘인상을 인지하지 못한다.’라고 거울을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거듭해서 닦는다. 거울이 깨끗해지면, 인상은 스스로 분명해진다.”(Vism.18.16)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신과 물질이 상호의존하여
 
위빠사나 수행할 때는 청정도론과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마하시 사야도는 철저하게 니까야와 논서에 기반해서 법문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청정도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마하시 사야도는 청정도론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대역해 놓았다.
 
 
 
Atha kho nāma nissāya rūpari pavattati, rūpa nissāya năma pavattati, nāmassa khaditukāmatāya pivitukāmatāya byāharitukāmatāya iriyāpatha kappetukāmatāya sati rūpa khadati, pivati, byāharati, iriyāpatharm kappeti.(Vism.18.34)

(
대역)

“Atha kho
사실은 nămam nissāya정신을 의지하여; 먹으려고 함 등의 정신을 의지하여 rūpa pavattati물질이 생겨난다: 먹음 등의 물질이 생겨난다. rūpa nissāya물질을 의지하여 눈 등의 물질을 의지하여 nāma pavattati정신이 생겨난다; 봄 등의 정신이 생겨난다. nāmassa정신이 khāditukāmatāya먹으려 하고, pivitukāmatāya 마시려 하고, byāharitukāmatāya말하려 하고, iriyāpatham kappetukāmatāya자세를 행하려고 함이; 앉음·섬·감·누움이라고 하는 자세를 행하려고 함이 sati있으면; 생겨나면 rūpa물질이 khādati 먹고, pivati마시고, byāharati말하고, iriyāpatha kappeti자세를 행한다; 앉음·섬·감·누움이라고 하는 자세를 행한다.”(담마짝까법문, 362쪽)
 
 
이 문단에서 핵심은 “정신을 의지하여 물질이 생겨난다.”라는 말과 “물질을 의지하여 정신이 생겨난다.”라는 말이다. 정신과 물질이 상호의존하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은 어떻게 상호의존할까? 먼저 정신을 의지하여 물질이 생겨나는 원리에 대하여 먹는 것으로 설명했다. 먹으려고 하는 의도가 있어야 먹는 물질이 생겨남을 말한다.
 
행선을 할 때 의도가 있어야 발이 움직인다. 의도가 없다면 발은 꼼짝도 못할 것이다. 왜 그런가? 발은 물질이기 때문이다. 발은 마치 나무토막과도 같다. 몸은 마치 시체와도 같다. 정신작용이 없으면 손가락 하나 까닥 할 수 없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먹으려고 하는 의도가 있어서 손이 움직인다. 이때 움직이는 손은 물질적 작용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정신을 의지하여 물질이 생겨난다. (nāma nissāya rūpari pavattati)”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질을 의지하여 정신이 일어난다. 이런 말은 다른 수행처에서 들어 볼 수 없다. 다른 종교전통에서도 볼 수 없다. 그러나 정신과 물질이 상호의존하여 발생하는 것으로 보는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가능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눈으로 보는 것을 예로 들었다.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본다. 이때 눈과 형상은 물질에 대한 것이다.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보았을 때 시각 의식이 생겨난다. 이는 “물질을 의지하여 정신이 생겨난다. (rūpa nissāya năma pavattati)”라는 말과 같다.
 
경전은 사실상 수행지침서
 
물질이라고 해서 반드시 몸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보았을 때 눈과 형상도 물질인 것이다. 귀가 있어서 소리를 들었을 때 귀와 소리는 물질인 것이다. 그래서 코와 냄새도 물질이고, 혀와 맛도 물질이다. 당연히 몸과 접촉도 물질이다.
 
물질은 사대와 사대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대에는 풍대도 있다. 풍대는 움직임과 관련된 것이다. 팔을 폈을 때 팔을 펴는 동작은 물질에 해당된다. 사대에서 풍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발을 바닥에 댈 때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느낌도 물질에 해당된다. 지대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몸은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각각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한무더기가 아님을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십연기분석경에서 명색에 대한 정의를 해 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위빠사나 수행은 철저하게 경전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경전은 사실상 수행지침서나 다름 없다.
 
알아지는 물질과 아는 정신
 
청정도론에서는 명색이 상호 의존한다고 했다. 그리고 정신에 의존하여 물질이 생겨나고, 물질이 의존하여 정신이 생겨난다고 전제를 달아 놓았다. 그런데 실참 수행에서는 단지 명색을 새기기만 하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렇게 설명하는 곳에서도 개수와 함께 아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생겨나는 모습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종류나 숫자로 숙고하여 아는 정도만으로는 진정한 정신·물질 구별의 지혜가 생겨나지 않고 실제로 생겨나고 있는 물질·정신을 관찰하고 있으면서 알아지는 물질과 아는 마음 정신이 서로 구별되어 아는 것만 진정한 정신·물 질 구별의 지혜라고 기억해야 합니다.”(담마짝까법문, 363쪽)
 
 
법문에서 “실제로 생겨나는 모습만 보였습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명색만 관찰하라는 말이다. 이후 것까지 볼 필요가 없음을 말한다.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는 다음과 같은 말로 알 수 있다.
 
 
지금 말한 대로 몸의 현상인 물질을 관찰할 때 알아지는 물질과 아는 정신이 두 가지가 구별되어 아는 것도 바로 알고 보는 바른 견해 입니다. 관찰하기 전이나 갓 관찰을 시작했을 때는 몸과 마음·정신 을 <책을 읽어 아는 것으로는 구별하고 있으나> 직접적인 경험의 지혜로 아는 것으로는 아직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 지혜에 이르게 되면 알아지는 물질과 아는 정신이 저절로 구별됩니다. (담마짝까법문, 363쪽) 
 
 
책으로 접하는 지식이 있다. 그러나 체험을 하지 않으면 언어적으로 이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명색을 관찰하는 것도 그렇다. 초보자는 단지 명색만 새겨야 한다. 그런데 자주 새기다 보면 보인다는 것이다. 명색 이후가 보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저절로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잘 할 수 없다. 수행한다고 하여 정신과 물질을 새기지만 삼매와 지혜의 힘이 부족하면 명색 이후 것을 보기 힘들다. 그러나 자주 관찰해 보면 물질 따로, 정신 따로인 것이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알아지는 물질’과 ‘아는 정신’으로 말했다.
 
위빠사나 1단계 지혜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대한 것이다. 이런 지혜를 구족하기 위해서는 정신과 물질, 물질과 정신을 면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이를 새김이라고 한다. 그래서 물질 따로, 정신 따로인 것으로 구별되는데, 이 때 물질은 수동형으로 알아지는 물질이라고, 정신은 능동형으로 아는 정신이라고 말한다.
 
물질은 수동이 될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물질은 정신 기능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시체와도 같다. 그러나 몸은 신진대사 기능이 있다. 나의 의지와 관계 없이 살아 있는 한 숨을 쉬고 소화를 한다. 그리고 피와 살을 만들어 낸다. 이런 물질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알아지는 물질’이라고 하여 수동태로 표현하고 있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물질
 
물질이 수동적이라면 정신은 능동적이다. 그래서 ‘아는 정신’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는 생각이 나는 것을 말한다.
 
초기불교에서는 마음도 감각기능으로 보고 있다. 이는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마음의 문에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도 마치 눈으로 형상을 보는 것처럼, 귀로 소리를 듣는 것처럼 감각 기관이 작동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각한다; 아프다>라는 등으로 관찰하여 알 때도 생각하여 아는 것과 그것이 의지하는 물질, 아픈 것과 아픈 장소인 몸 물질 등으로 저절로 구별됩니다. 이렇게 물질과 정신을 서로 구별하여 아는 것이 바르게 사실대로 아는 바른 견해입니다.”(담마짝까법문, 363쪽) 
 
 
생각이 일어났을 때 생각을 관찰할 수 있다. 이때 생각의 대상은 무엇일까? 만약 그 사람이 생각났다면 그 사람은 생각으로 인하여 생겨난 물질이 된다. 마음이 물질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를 마음의 물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몸 어딘가가 아플 때가 있다. 상처 난 부위가 쓰릴 때 그 아픈 장소가 물질인 것이다. 이는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이다. 아는 정신과 알아지는 물질에 대한 것이다. 정신 따로, 물질 따로가 되는 것이다.
 
물질인 몸과 아는 정신-마음, 이 두 가지만 있구나!”
 
위빠사나 수행에서 가장 기본은 1단계의 지혜이다. 이를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라고 한다. 이 지혜가 생겨나지 않으면 다음 단계가 진행되지 않는다. 이는 명색을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마침내 다음과 같은 견해에 이르게 된다.
 
 
그때는 ‘물질인 몸과 아는 정신-마음, 이 두 가지만 있구나. 이 두 가지 외에 다른 어떤 살아 있는 실체라는 것은 없구나’라고도 압니다. 이것도 바르게 아는 바른 견해입니다.”(담마짝까법문, 363쪽) 
 
 
수많은 바른 견해(정견)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정신과 물질을 아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아는 것이다. 이는 육문에서 관찰하는 것으로 알 수 있고, 행주좌와와 같은 네 가지 행동양식을 고찰함으로서도 알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다 보면 작은 깨달음이 있게 된다. 이는 위빠사나 지혜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물질인 몸과 아는 정신-마음, 이 두 가지만 있구나. 이 두 가지 외에 다른 어떤 살아 있는 실체라는 것은 없구나!”라고 알게 된다는 것이다.
 
명색을 새기지 못하면 윤회하는 삶을
 
위빠사나에는 16단계 지혜가 있다. 이 가운데 나는 몇 단계에 해당될까? 지난 십여년 위빠사나 한다고 행선도 하고 좌선도 했다. 그리고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도 보고 니까야 경전도 읽었다. 그리고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도 읽었다. 그러나 잘 잡히지 않았다.
 
위빠사나에 대하여 알듯 모를 듯 했다. 그런데 오늘 새벽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 담마짝까법문에서 명색에 대한 것을 읽고서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이는 단지 글을 읽고서 공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의 삶을 바꾸어 놓기에 충분하다. 어쩌면 나는 오늘 이전과 이후로 갈릴지 모른다. 특히 다음과 같은 내용에 크게 공감했다.
 
 
그 뒤 삼매와 지혜가 한 단계 더 향상됐을 때 <부푼다, 꺼진다; 앉음, 닿음> 등으로 관찰하면서 ‘몸과 닿을 것이 있어서 닿아 안다. 눈과 보이는 형색이 있어서 볼 수 있다. 귀와 소리가 있어서 들을 수 있다. 굽히려는 마음이 있어서 굽힌다. 관찰하지 못해서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해서 좋아하고 즐긴다. 좋아하고 즐겨서 집착한다. 집착해서 행하고 말한다. 행하고 말해서 좋은 결과나 나쁜 결과가 생겨난다. 업이 좋아서 좋은 결과를 얻는다. 업이 나빠서 나쁜 결과를 얻는다’라는 등으로 원인과 결과를 연결하여 바라밀 지혜에 따라 압니다. 이것도 바르게 아는 바른 견해입니다.”(담마짝까법문, 363-364쪽) 
 
 
이 법문은 분명히 위빠사나 2단계 지혜에 대한 것이다.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를 말한다.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라고도 한다.
 
법문에서는 네 가지 상태를 말하고 있다. 이는 ‘부푼다, 꺼진다; 앉음, 닿음’을 말한다. 좌선할 때 상태에 대한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고 또한 엉덩이 닿음을 새기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육문에 대한 것이 추가 되어 있다.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보고, 귀가 있어서 소리를 듣는다는 말이다. 이런 것을 관찰하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대부분 사람들은 눈이 있어서 보고 귀가 있어서 듣는다. 새김이 없는 상태에서 보고 듣는 것이다. 이럴 경우 좋고 싫음에 끄달릴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법문에서는 “관찰하지 못해서 알지 못한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무지가 큰 죄라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연기적 삶을 살아간다. 이는 십이연기가 회전하는 삶을 말한다. 명색에 대한 새김이 없는 삶이다. 이렇게 살았을 때 다시 태어남의 원인이 된다. 이에 대하여 법문에서는 “관찰하지 못해서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해서 좋아하고 즐긴다. 좋아하고 즐겨서 집착한다. 집착해서 행하고 말한다. 행하고 말해서 좋은 결과나 나쁜 결과가 생겨난다. 업이 좋아서 좋은 결과를 얻는다. 업이 나빠서 나쁜 결과를 얻는다.”라고 했다. 이는 원인과 결과를 모르는 것에 해당된다. 위빠사나 2단계인 조건파악의 지혜가 없는 것이다.
 
생멸의 지혜와 무상, 고, 무아
 
마하시 사야도는 명색에 대한 설명을 했다. 이는 위빠사나 수행 출발에 해당된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새기지 못하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도 된다. 그런데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새기고,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가 갖추어지면 더 높은 지혜가 생겨난다. 다음과 같은 생멸의 지혜이다.
 
 
그 뒤 삼매와 지혜가 다시 한 단계 더 향상됐을 때 마찬가지로 <부푼다, 껴진다; 앉음, 닿음> 등으로 관찰하면서 관찰되는 대상의 처음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사라져 버리는 끝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렇게 알게 되어 ‘생겨나서는 사라지 버리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다’라고도 직접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순간도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할 만한 괴로움이다’라고도 알게 됩니다. ‘원하는 대로 마음 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아다’라고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아는 것도 바르게 아는 바른 견해입니다.”(담마짝까법문, 364쪽) 
 
 
생멸의 지혜는 위빠사나 4단계 지혜이다. 이 지혜에 이르면 수행에 큰 진전이 있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16단계 지혜 중에서 1단계(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례, 2단계(조건을 파악하는 지계), 4단계(생멸의 지혜), 5단계(무너짐의 지혜)가 큰 변곡점이라고 한다.
 
생멸의 지혜에 이르면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게 된다. 이는 명색을 관찰했을 때 생멸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상에 대해서는 “생겨나서는 사라지 버리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다.”라고 하는 것이다. 고에 대해서는 “순간도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할 만한 괴로움이다.”라고 아는 것이다. 무아에 대해서는 “원하는 대로 마음 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아다.”라고 아는 것이다.
 
생멸의 지혜가 더욱 강화된 무너짐의 지혜
 
생멸의 지혜를 보면 좌선할 때에 대한 것이다. 이는 ‘부푼다, 껴진다; 앉음, 닿음’이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배의 부품과 꺼짐, 그리고 엉덩이 닿음에 대한 생멸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 단계를 보면 다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보다 한 단계 더 삼매와 지혜가 향상됐을 때라면 <부푼다, 꺼진다; 앉음, 닿음; 굽힘, 폄; 듦, 감, 놓음> 등으로 관찰하고 있어도 몸과 배, 손과 발 등의 이러한 모습이나 형체가 드러나지 않고서 ‘획’, ‘획’, 매우 빠르게 사라져버리는 것만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는 관찰하여 알아지는 대상도, 관찰하여 계속 알고 있는 마음도 매우 빠르게 사라져 버리는 것만 경험하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다. 두려워할 만한 괴로움이다. 자아가 아닌 성품법뿐이다’라는 성품을 더욱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드러나는 대상도 즉시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자아라고 집착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관찰하여 계속해서 아는 마음도 즉시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자아나 나라고 집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관찰 할 때마다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는 앎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다’ 라고 사실대로 아는 모습이 매우 분명합니다. 이렇게 아는 것도 바른 견해입니다.”(담마짝까법문, 364쪽) 
 
 
이 법문은 무너짐의 지혜에 대한 것이다. 위빠사나 5단계의 지혜이다. 그런데 이 지혜는 4단계 생멸의 지혜가 더욱 더 강화 된 것이라고 했다. 마치 십이연기에서 집착에 대하여 갈애가 더욱 더 강화된 것이라고 보는 것과 같다.
 
무너짐의 지혜를 보면 좌선상태에서만 경험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부푼다, 꺼진다; 앉음, 닿음; 굽힘, 폄; 듦, 감, 놓음’이라는 말로 알 수 있다. 행선 상태에서도 경험되는 것이다. 여기서 놓쳐서는 안될 말이 있다. 그것은 “몸과 배, 손과 발 등의 이러한 모습이나 형체가 드러나지 않고서 ‘획’, ‘획’, 매우 빠르게 사라져버리는 것만 경험하게 됩니다.”라는 말이다. 이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보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개념이 아니라 실재를 보는 것
 
위빠사나 수행하면서 가장 피해야 할 것은 개념적으로 보는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 배의 형태나 모양을 마음의 눈으로 보면 잘못 보는 것이다. 배의 형태와 모양을 보지 않고 단지 부품과 꺼짐이라는 운동성을 보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풍대를 보는 것이다.
 
행선을 할 때 눈을 감고 한다. 이때 발모양을 떠올리면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운동성만 보아야 한다. 발을 올렸을 때 경쾌함, 발을 내렸을 때 무거움, 그리고 바닥에 닿았을 때 딱딱한 느낌을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는 몸과 배, 손과 발 등의 이러한 모습이나 형체가 드러나지 않게 하라고 했다.
 
위빠사나 수행은 실재를 보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개념을 본다면 수행의 진척이 없을 것이다. 행선할 때 발모양을 본다면 개념을 보는 것이다. 발모양을 보지 않고 사대를 보는 것이다. 특히 풍대를 보는 것이다. 운동성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운동성을 보았을 때 마치 바닥에서 떠 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오늘 매우 긴 글을 쓰고 있다. 삼십분 좌선하고 나서 오전과 오후에 걸쳐서 쓰고 있다. 대체로 긴 글을 쓰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긴 글은 좀처럼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늘 새벽 작은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서 이해한 것도 깨달음이라 말할 수 있을까? 오늘 새벽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 담마짝까법문을 읽고서 그 동안의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오늘 읽은 명색에 대한 것을 깊이 새겨 두고자 했다. 그래서 보고 또 보았다. 이렇게 긴 글로 또 확인하고 있다.
 
오늘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그 동안 궁금하게 생각 했던 의문이 풀렸기 때문이다. 이는 앞으로 수행방법의 방향을 정하는 것과 같다. 마치 목적지가 확실히 정해진 것 같았다.
 
선불교에서는 본래불을 찾으라고 말한다. 이는 방향을 정해 놓는 것과 같다. 내가 본래부처임을 안다면 내가 부처인 것을 증명하는 수행을 하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을 읽고서 방향이 정해졌다면 이제 주욱 그 길로 가면 된다. 이제 방법을 알았으니 실천만 하면 된다.
 
오늘 새벽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을 접하고 마음이 충만 되었다. 그 동안 풀리지 않았던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는 것 같았다. 법구경에 있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떠올랐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못보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3)
 
 
생멸에 대한 게송이다. 이런 게송이 나오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명색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육문과 행주좌와에서 정신과 물질을 새겼을 때 오온의 생멸을 말한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 가장 첫 번째 지혜인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가 생겨 났을 때도 이런 게송은 유효한 것으로 본다.
 
오늘 새벽 죽어도 좋다는 말이 떠올랐다. 알 것을 알았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방법을 알았으니 방법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위빠사나 1단계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오늘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그것은 깨달음의 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승무처럼 춤추는 것이다. 조용히 천천히 추는 춤이다. 팔을 하나 올리고 또 다른 팔을 올리고 그 상태에서 회전한다면 깨달음의 춤이 될 것이다. 그것은 명색에 대하여 알게 된 것에 대한 기쁨의 춤이다.
  
왜 마하시 전통에서는 행선을 중시하는가?
 
명색에 대하여 알게 되자 행선에 대해서도 다시 알게 되었다. 왜 마하시 전통에서 행선을 중시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명색과 관련이 있다. 발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명색에 대한 것이다.
 
행선에서 발을 뗄 때 먼저 의도가 있어야 한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정신을 의지하여 물질이 생겨난다. (nāma nissāya rūpari pavattati)”라는 말에 따른 것이다. 의도가 있어서 발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는 정신에 의지하여 물질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 또한 의도는 원인이고 발이 움직이는 것은 결과이다. 이렇게 본다면 행선하는 것은 위빠사나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와 2단계 ‘조건파악의 지혜’를 모두 만족한다.
 
행선은 발을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다. 이를 춤이라고 할 수 있다. 발춤이라고 해야 할까? 의도에 따라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의 동작을 말한다. 마치 학이 춤을 추는 것과 같다.
 
오늘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날
 
위빠사나도 춤이 될 수 있다. 명색을 관찰하는 것도 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행선하듯이 정신과 물질을 새기는 것이다. 가만 서서 한팔을 올릴 때 이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팔이 올라가는 것은 물질적 현상이다. 이때 의도라는 정신과 움직임이라는 물질을 새기는 것이다.
 
한팔을 올리고 난 다음 다른 팔을 올린다. 이때 양팔이 수평으로 된다. 이 상태에서 회전하면 춤이 될 것이다. 또한 팔을 서서히 돌려도 될 것이다. 물론 명색을 새기며 움직이는 것이다. 이를 위빠사나 춤이라 해야 할 것이다. 아니 승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명색춤이라도 할 수 있다. 오늘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날이다.
 
 
2024-08-3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