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괴로움의 진리는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파악해야

담마다사 이병욱 2024. 9. 4. 11:24

괴로움의 진리는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파악해야
 
 
온몸이 짜릿짜릿했다. 온몸이 나른했다. 몸 전체가 곤두서는 것 같았다. 눈앞은 환했다. 부품과 꺼짐은 선명했다. 오래 앉아 있은 결과에 따른 것이다.
 
재가우안거 47일째이다. 오늘은 어제 보다 나은 컨디션이다. 어제는 잠을 잘 자지 못해서 피곤했다. 오늘은 비교적 잠을 잘 편이다.
 
어제 잠 못 이룬 이야기를 올렸다. 독자들이 여기저기서 글을 주었다. 페이스북에서 어떤 이는 운동을 하라고 했다. 이에 ‘꿀팁을 주셔서 감사하다’라고 답했다.
 
어떻게 해야 잠을 잘 들 수 있을까?
 
오늘 새벽 몇 시에 깼는지 모른다. 시계를 보지 않았다. 잠에서 깨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작년에는 글을 썼다. 스마트폰 ‘메모앱’에 엄지치기를 한 것이다. 그러나 매우 피곤한 작업이다. 올해에는 일체 쓰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을 때 책을 읽으면 좋다. 책이 수면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머리맡에 있는 것은 논서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이다.
 
담마짝까법문을 열었다. 어제에 이어 계속 읽었다. 많이 읽지 않는다. 새기며 읽기 때문에 서너페이지가 고작이다. 책을 읽다 보니 집중하게 되었다. 중요부위는 형광메모리칠을 해가며 읽었다. 더 중요하면 연필로 밑줄 긋는다.
 
책을 읽고 나니 정신이 더욱더 또렷해졌다. 이대로는 잠을 이룰 수 없다. 스마트폰을 보니 2시 반이었다. 아마 한시간 읽었던 것 같다. 이대로 있을 수 없었다.
 
잠을 자지 못하면 그 다음날이 힘들다. 새벽에 잠을 깨서 정신이 또렷해졌을 때 오늘이 힘들 수 있다. 어떻게 해야 잠을 잘 들 수 있을까?
 
잠을 자는 하나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결의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잠을 자겠다고 마음 먹는 것이다.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지금 자야 한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숙면을 취하는데 있어서 자세도 중요하다. 똑바로 누워서 자면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시체처럼 똑바로 누웠을 때 잠을 이루기가 힘들다. 그러나 옆으로 해서 누우면 상황은 달라진다.
 
오늘 새벽 왼쪽 옆구리로 해서 잠을 청했다. 잠을 자야겠다고 결의한 상태에서 모로 누운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세는 초기경전에서도 확인된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은 오른쪽 옆구리로 해서 잠을 잤다. 이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어떻게 깨어있음에 전념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낮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밤의 초야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밤의 중야에는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 밤의 후야에는 일어나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것들로 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깨어있 음에 전념한다.”(S35.240)
 
 
부처님은 깨어 있음에 전념하라고 했다. 잠을 잘 때는 일어날 것을 염두에 두고 자는 것이다. 이는 새김(sati)이 잠들기 직전까지 유지 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잠에서 깼을 때 사띠가 있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잔다면 뒤척이거나 꿈을 꿀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은 잠을 잘 때 사자형상으로 잔다고 했다. 이는 시체처럼 똑바로 누워서 자는 것이 아니다. 오른쪽 옆구리로 자는 것이다.
 
오늘 새벽 잠을 청할 때 왼쪽 옆구리로 했다. 오른쪽 보다 왼쪽이 더 편하다. 베개 하나를 옆에 두고 더 나은 것 같다. 새벽 5시 반에 일어날 것을 염두에 두고 잠을 청했다.
 
눈을 떠 보니 창 밖이 훤하다. 여섯 시가 넘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확인해 보니 6시 반이었다. 오늘 새벽 성공적으로 잠을 잔 것이다. 포인트는 왼쪽 옆구리로 해서 잔 것이다. 그렇게 잠을 자겠다고 결의한 것이다.
 

 
최상의 아침 웰빙식단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다. 그날이 그날 같지만 매일 다른 날이다. 오늘도 좋은 날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향상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수행보다 좋은 것은 없다.
 
아침이 되면 먹어야 한다. 이제 이년 이상 된 것 같다. 아침에는 간단히 먹는다. 찐계란 하나, 찐고구마 하나, 찐감자 한쪽이다. 여기에다 오늘은 특별히 밤호박을 한쪽 곁들였다.
 

 
먹는 것도 수행이다. 먹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 사람이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알 수 있다. 수행자라면 새기며 먹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소박하게 먹는 것이다.
 
어제 이마트 안양점에서 밤호박 한박스를 샀다. 특별 세일하는 것을 샀다. 작은 사이즈 밤호박 일곱 개에 9,800원이다.
 
밤호박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해남으로 귀촌한 친구가 해남특산물 밤호박 농사를 짓는다. 해마다 칠월 밤호박철이 되면 홍보해준다.
 
이마트 밤호박맛은 어떤 것일까? 해남 밤호박맛과는 어떻게 다를까? 전자레인지에 강으로 하여 5분 돌렸다.
 
밤호박 맛을 보았다. 해남 것과는 약간 달랐다. 해남 밤호박은 파근파근한 밤맛이다. 마트 밤호박도 파근파근하기는 하지만 약간 부족하다.
 

 
아침식단은 최상의 웰빙식단이다. 첨가제는 전혀 없다. 인트턴트 식품도 아니다. 다만 소금 하나만 필요로 한다. 계란과 감자는 소금을 찍어 먹어야 한다. 그러나 고구마와 밤호박은 소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늘 네 종류의 음식을 먹었다. 가공하지 않은 것으로 모두 찐 것이다. 이 가운데 밤호박 맛이 최상이었다. 먹는 것만으로 몸이 정화될 것 같은 기분이다. 꿀물과 함께 먹었다.
 
아침을 먹고 나면 커피를 마셔야 한다. 백권당표 절구커피를 말한다. 원두를 절구질하여 필터링해서 마시는 것이다. 얼음 서너 조각 넣고 마시면 최상이다. 하루일과의 시작이다.
 
행선할 때 여실지견(如實知見)하면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셨으니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아침 행선과 좌선을 하는 것이다. 보통 오전 일곱 시대가 된다.
 
행선을 할 때는 천천히 걷는다. 눈을 감고 발을 옮긴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의 행선이다. 이때 발모양을 떠올리면 안된다. 가벼움이나 무거움, 또는 부드러움이나 딱딱함과 같은 운동성을 보아야 한다.
 
개념으로 보면 수행이 될 수 없다. 수행은 실재를 보는 것이다. 실재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다. 이를 ‘야타부따냐나닷사나(yathābhūtañāṇadassana)’라고 한다. 한자어로 ‘여실지견(如實知見)’이다.
 
행선할 때 여실지견하면 발이 바닥에 닿는 느낌을 갖지 않는다. 바닥에서 떠서 걷는 것 같다. 왜 그런가? 발이라는 개념을 거두어 냈기 때문이다. 오로지 운동성만 보는 것이다. 풍대라는 실재를 보는 것이다.
 
여실지견은 좌선에도 적용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 배의 모양이나 형상을 보지 않는 것이다. 단지 부품과 꺼짐이라는 운동성만을 보는 것이다. 여실지견하는 것이다.
 
야간좌선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자리에 앉아 있는다고 해서 좌선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시간을 필요로 한다. 마치 잠을 자기 위해서 누워 있다 보면 스르르 잠이 들듯이, 좌선도 시간을 필요로 한다.
 
좌선할 때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긴다. 배의 모양을 생각하지 않는다. 부품과 꺼짐이라는 운동성만을 본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끊임 없이 보다 보면 어느 정도 집중이 형성된다.
 
좌선에서 집중이 형성되면 몸 상태는 이전과 다른 상태가 된다. 이전에는 약간 들뜬 상태였으나 어느 정도 집중이 되면 안정된 상태가 된다. 계속 있고 싶어지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좌선은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 또한 오전이 다르고 오후가 다르다. 몸 상태에 따라 다르고 주변환경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새김이 확립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제 저녁좌선을 했다. 이를 야간좌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백권당에 명상홀을 만들어 놓고 하기는 두 번째이다. 나흘 전에 처음으로 야간좌선 했었다.
 
야간좌선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것은 어두움 속에서 좌선하기 때문이다. 좌선할 때는 불을 끄는데 밤에 좌선할 때도 불을 끈다.
 
컴컴한 공간에 혼자 앉아 있으면 두려운 마음이 든다. 저녁시간 오피스텔에는 불이 꺼진 방이 많다. 3층 복도 양 옆에 있는 작은 사무실에는 사람들이 없다.
 
어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그렇다고 형광등을 켜놓고 좌선할 수 없다.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스마트폰 ‘손전등앱’을 활용하는 것이다.
 
스마트폰 손전등을 켰다. 마치 호롱불을 밝히는 듯 했다. 이 정도면 안심이다. 삼십분 앉아 있었다.
 
어떤 일이든지 좌선을 하고 나서 임하면 효율은 배가 된다. 어제 밤이 그랬다. 야간좌선 삼십분을 하고 밀린 일을 했다. 수주 받은 일감으로 단계적으로 조금씩 해야 한다. 몰입도는 높았다.
 
하루일과를 좌선으로 마친다면
 
하루 가운데 저녁이 최악이다. 왜 그런가? 유튜브 시청으로 마음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하루 일과에서 오전, 오후, 저녁이 있는데 오전은 최상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일체 뉴스도 보지 않고 스마트폰도 보지 않는다. 명상이 끝나고 글쓰기가 끝나야 스마트폰을 열어 본다. 오전은 가장 마음이 청정한 상태가 된다.
 
오후는 일하는 시간이다. 일감이 없으면 유튜브 시청으로 보낸다. 그러나 우안거철인 요즘에는 오후좌선을 한다. 오전과 마찬가지로 삼십분이다.
 
저녁시간에는 좌선을 하지 않았다. 어둠이 내리면 마음도 어두워지는 것 같다. 마음이 오염되어서 명상할 마음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저녁좌선을 시도했다.
 
저녁에는 마음이 혼탁되어 있다. 마치 흙탕물이 일어난 것 같다. 더구나 컨디션도 좋지 않아 마음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이런 상태를 어떻게 해야 타개할 수 있을까? 좌선 밖에 없을 것 같았다.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사방이 캄캄한 공간에서 홀로 앉아 있을 때 두려운 마음이 있었으나 산에서 홀로 사는 사람을 생각했다. 또한 묘지에서 수행하는 사람도 생각했다.
 
야간좌선을 마쳤을 때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치 흙탕물이 가라 앉은 것 같았다. 이렇게 본다면 야간좌선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하루일과를 좌선으로 마치는 것은 성공적인 하루가 되기 쉽다.
 
어제는 세 번 좌선했다. 오전에 삼십분, 오후에 삼십분, 저녁에 삼십분 명상했다. 이런 케이스는 처음이다. 앞으로도 이런 기조를 계속 이어갈까? 노력하기에 달려 있다.
 
성자와 범부가 보는 것이 180도 다른 것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고, 내일이 어제 같은 삶이다.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지만 늘 같은 일상임을 말한다. 단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감각적인 삶을 산다면 축생의 삶과 다름 없을 것이다.
 
매일 똑 같은 일상이지만 어제보다 나은 삶이 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행해야 한다. 수행이라 하여 반드시 평좌한 상태만은 아닐 것이다. 책을 보는 것도 수행이고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수행이다.
 
매일 머리맡에 있는 책을 보고 있다. 요즘 보고 있는 것은 마하시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이다. 잠자기 전후 보는데 볼 때마다 새롭다. 새겨두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오늘 잠에서 깨었을 때 다음과 같은 내용이 와 닿았다.
 
 
“지금 볼 때마다. 들을 때마다, 맡을 때마다, 먹어서 알 때마다, 닿아서 알 때마다, 생각해서 알 때마다 분명하게 경험하고 있는 것들이 다섯 취착무더기입니다. 그것들은 성자들의 시각으로는 매우 두려운 것이어서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봅니다.
 
범부들의 시각으로는 그것을 고통이나 괴로움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행복하고 좋은 것들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름답고 좋은 것을 보아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소리나 부드러운 소리를 들어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것을 들을 수 있어서, 혹은 좋은 소리가 들려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냄새를 맡는 것, 좋은 맛을 맛보는 것, 좋은 감촉과 닿는 것을 좋다고 생각합니다. 욕계 탄생지 중생들은 그러한 좋은 감촉을 제일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뻐할 만한 것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원하는 대로 생각할 수 있는 이러한 것들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이나 사유가 모두 사라진다고 하면 좋아하지 않습니다. 매우 크게 손실이나 손해를 보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보게 된 것이나 듣게 된 것은 모두 취착무더기들일뿐입니다. 진정한 괴로움인 괴로움의 진리법들일 뿐입니다. ‘순간도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어서 항상하지 않다’라는 등으로 그것들을 알고서 두려워할 만한 괴로운 것으로 사실대로 알고 볼 수 있도록 위빳사나 관찰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위빳사나 도 구성요소를 완벽하게 닦으셔서 아라한 도의 지혜로 제일 훌륭하고 제일 거룩한 열반의 행복을 알고 보셨습니다. 그렇게 제일 훌륭하고 제일 거룩한 열반의 행복을 알고 보셨기 때문에 순간도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는 그 다섯 취착무더기를 두려워할 만한 진짜 괴로운 것으로만 알고 보십니다. 그렇게 알고 보는 것도 다른 이에게 들어 보아서가 아닙니다. 알라라 선인이나 우따까 선인에게 서 배운 방법으로 알게 된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의 지혜로 팔정도를 닦아서 알게 되신 것입니다.”(담마짝까법문, 381-382쪽)
 
 
이 법문은 고성제에 대한 것이다. 오취온에 대하여 성자의 시각과 범부의 시각이 180도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여섯 가지 감각대상을 보는 것이 범부들이 보는 것과 완전히 다르게 된다. 이는 쌍윳니까야 ‘여섯 감역의 모음’(S35)에서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하네.”(S35.136)라는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성자와 범부는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다르다. 정반대이다.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이는 열반과 관련이 있다. 열반을 체험한 성자는 여섯 문에서 발생하는 느낌에 대하여 모두 괴로운 것으로 보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는 법문에서 “열반의 행복을 알고 보셨기 때문에 순간도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는 그 다섯 취착무더기를 두려워할 만한 진짜 괴로운 것으로만 알고 보십니다.”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을 즐기기에 바쁘다.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보았을 때 즐거우면 거머쥐려 하고 싫으면 밀쳐내려고 한다. 이것이 탐욕과 분노이다. 탐욕과 분노로 살기 때문에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된다. 듣는 것, 닿는 것,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명상한다고 자리에 앉아 있다. 고작 삼십분 앉아 있는다. 그럼에도 마음은 편안하다. 평좌를 하고 배의 부품과 꺼짐을 지속적으로 새겼을 때 일시적으로 고요가 찾아 오는데 이런 고요는 유튜브 시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즐거움이다. 하물며 열반을 체험했다면 어떠할까?
 
괴로움의 진리는 구분하여 알아아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 담마짝까법문에서 고성제에 대한 것을 읽고 있다. 고성제 중에서도 삼전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이 고성제를 세 번 굴린 것을 말한다.
 
초전법륜경을 빠알리원문으로 외운바 있다. 2013년의 일이다. 빠알리원문으로 외운 초전법륜경에 삼전에 대한 것이 있었다. 사성제를 세 번 굴린 것이다.
 
사성제를 세 번 굴리면 열두 가지 형태가 된다. 그래서 빠알리어로 “띠빠리왓땅 드와다사까랑(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ṃ)”라고 하는데, 이를 한자어로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이라고 한다.
 
삼전십이행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그것은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 (Idaṃ dukkhaṃ ariyasaccanti)”,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상세히 알려져야 한다. (dukkhaṃ ariyasaccaṃ pariññeyyanti),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가 상세히 알려졌다. (dukkhaṃ ariyasaccaṃ pariññātanti)”(S56.11)라는 말이다. 이를 차례로 초전(初轉), 이전(二轉), 삼전(三)轉이라고 한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마치 문제를 풀려면 먼저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 것과 같다. 그런데 부처님은 먼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사고와 팔고를 설했다. 그런데 한번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번 더 굴린 것이다. 그래서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상세히 알려져야 한다.”라고 하여 한번 더 굴린 것이다. 이때 빠알리어 빠린네이얀띠 (pariññeyyanti)라는 말을 썼다.
 
마하시 사야도는 법문집에서 빠린네이얀띠 (pariññeyyanti)에 대하여 “구분하여 알아야할 법이다.”(390쪽)라고 해석했다. 이런 해석은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상세히 알려져야 한다.”와 초기불전연구원의 “철저하게 알려져야 한다.”라고 해석된 것과 대조적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빠린네이야에 대하여 괴로움의 진리는 구분하여 알아아 하는 법이라고 설명했다. 구분을 강조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성스러운 도과와 열반을 얻으려 한다면, 열반에 이르고자 한다면 태어남을 시작으로 하고 취착무더기를 끝으로 하는 괴로움의 진리를 구분하여 알아야 한다. 구분하여 알도록 노력햐여 한다.”(390-391쪽)라고 확실히 기억해 두자고 했다.
 
다섯 가지 집착무더기를 구분해서 새기지 않는 다면
 
위빠사나 16단계 지혜가 있다. 첫 번째 지혜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이다. 육문이나 행주좌와에서 일어나는 정신과 물질, 물질과 정신을 구분해서 새겨야 위빠사나 지혜가 생겨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정신과 물질을 따로따로 새기는 것이다.
 
위빠사나 명상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떤 변치 않는 고정적 실체를 상정하게 된다. 본마음이나 참나 같은 것이다. 본래불도 해당된다. 이는 오취온, 즉 다섯 가지 집착무더기를 구분해서 새기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새길 것을 말한다.
 
 
“볼 때마다, 들을 때마다, 닿을 때마다, 알 때마다 여섯 문에서 분명 하게 생겨나고 있는 법들입니다. 그 법들을 생겨날 때마다 계속 따라서 관찰해서 직접 경험을 통해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관찰하여 땅 요소의 단단하고 거칠고 부드럽고 미끄러운 성품을 구분하여 알게 됩니다. 물 요소의 흐르고 결합하고 축축한 성품을 구분하여 알게 됩니다. 불 요소의 뜨겁고 차갑고 따뜻하고 서늘한 성품을 구분하여 알게 됩니다. 바람 요소의 팽팽하고 밀고 움직이는 성품을 구분하여 알게 됩니다.
 
알 수 있는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새김과 지혜로 집중하여 자신의 어느 한 곳 의 감촉이나 닿음을 관찰하고 있으면 그 네 가지 요소 중 어느 한 가지를 그 요소의 고유성품이나 특성을 통해 구분하여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도 자세하게 설명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 네 가지 요소를 안 뒤 <봄; 들음>라는 등으로 관찰할 때 봄의 의지처나 들음의 의지처 등 의지하는 물질들도 압니다. 형색이나 소리 등 대상 물질도 압니다. 보아서 앞 등의 마음이나 마음부수도 압니다. 그렇게 안 뒤 <부푼다, 꺼진다; 앉음, 닿음; 안다; 저림; 뜨거움; 아픔; 봄; 들음>이라는 등으로 계속해서 관찰할 때마다, 관찰하여 알아 지는 대상이든, 관찰하여 아는 마음이든 새로 생겨나서는 즉시 사라져 버리는 것을 직접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관찰하고 있으면서 ‘hutvā abhāvto aniccā 생겨나서는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다’라고 구분하여 압니다. ‘udayabbaya pațipīļanatthena dukkhā 생멸이 끊임 없이 괴롭히기 때문에 두려워할 만한 괴로움이다’라고도 구분하여 압니다. ‘avasvattanatthena anattā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그 성 품대로 생멸하고 있기 때문에 자아가 아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성품 법들일 뿐이다’라고도 구분하여 압니다.
 
이렇게 생겨나고 있는 물질· 정신을 관찰하여 무상·고·무아의 양상으로 직접 아는 것이 구분하여 알아야 할(pariññeyya) 괴로움의 진리를 구분하여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분하여 알아야 한다는 것을 잘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담마짝까법문, 391-392쪽)
 
 
마하시 사야도는 구분해서 아는 것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로 아는 것이라고 했다. 육문과 행주좌와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여 따로따로 관찰하면 어떤 고정된 실체, 예를 들면 참나, 본마음, 본래불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유튜브를 보면 수많은 법문이 있다. 한국이 선불교의 영향권에 있어서일까 잘 나가다가 어긋나는 것 같다.
 
유튜브에서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바보붓다’라는 유튜브 채널이다. 달변에 박식한 스님의 언변을 듣고 있다 보면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듣다 보니 본마음, 참나, 본래불 이야기를 한다.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한국불교에서는 좀처럼 무상, 고, 무아를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와 정반대인 상, 락, 아, 정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육문에서 또는 행주좌와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여 보지 않기 때문이다. 무더기로 보기 때문에 무상, 고, 무아를 말하지 않는 것이다. 당연히 열반을 말하지 않는다. 당연히 사성제를 말하지 않는다.
 
세상의 흐름과는 정반대로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이 있다. 이는 깨달은 자가 세상을 보는 눈과 범부가 세상을 보는 눈이 다름을 말한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사실의 모든 것들 원하는 것,
사랑스런 것, 마음에 드는 것,
존재라고 하는 모든 것.

그것들은 하늘사람과 인간의 세상에서
즐거운 것이라 여겨지지만
그들이 소멸될 때가 되면
그들은 그것들을 괴로운 것이라 여기네.

개체가 소멸하는 것은 거룩한 님에게는
즐거운 것이라 여겨지지만
모든 세상을 통해 보이는 것은
거룩한 님에게 그와는 정반대가 되네.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하네.

이 알기 어려운 원리를 보라.
무지한 자는 여기서 미혹되니,
미혹된 자에게는 암흑이며
보지 못한 자에게는 어둠이다.

참사람에게는 열려있고
보는 자에게는 광명이라
위대한 가르침을 아는 자들은
가까이에서 그것을 인식하네.

존재의 탐욕에 굴복하여
존재의 흐름을 따라 흐르면
악마의 영토에 들어가
이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네.

거룩한 이를 빼놓고
누가 도대체 그 길을 잘 알아
번뇌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드는 님은
길을 바로 깨달을 수 있으리.”(S35.136)
 
 
부처님은 역류도를 설했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것을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즐겁다고 말하는 것을 괴롭다고 말하는 것은 역류도에 해당된다. 이는 열반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정신과 물질을 새기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이
 
매일 아침 삼십분 좌선을 한다. 요즘에는 오후에도 한다. 어제는 두 번째로 야간좌선을 했다. 그래서 어제는 세 번 좌선을 했다. 각각 삼십분씩해서 한시간 반 좌선 한 것이다.
 
앉아 있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앉아서 ‘멍때리기’하고 있다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새겨야 한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복부의 움직임을 새긴다. 배가 부풀 때, 부푸는 것은 물질에 대한 것이다. 또한 부푼 것을 아는 것은 정신에 대한 것이다. 이 양자를 새겨야 한다. 알아지는 물질 따로, 아는 정신 따로 양자를 새겨야 한다.
 
정신과 물질을 새기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이 필요 하다.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을 따로 따로 새긴다는 것은 순간적인 집중을 요구한다 찰나삼매(khaṇikasamādhi)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채질 할 때도 구분해서 알아야
 
오늘 새벽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에서 빠린네이야에 대한 것을 보았다. 고성제는 물질과 정신을 구분해서 아는 것이다. 이렇게 구분해서 알게 되면 무상, 고, 무아로 구분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알아야 한다. 걸어가면서도 구분해서 알아야 한다.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볼 때도 물질과 정신으로 구분해서 따로따로 알아야 한다. 걸어 갈 때 발을 옮길 때도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알아야 한다. 부채질 할 때도 구분해서 새겨야 한다.
 
오늘 부채질하며 느낀 것이 있다. 정신과 물질, 물질과 정신을 구분해서 관찰하기 좋았다는 것이다.
 

 
부채질 할 때 손을 움직이게 한 것은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의도는 정신이고 손을 움직이는 것은 물질이다. 정신과 물질을 따로 새기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1단계 지혜가 된다. 또한 의도는 원인이고 손 움직임은 결과이다. 원인과 조건을 구별하는 2단계 지혜가 된다.
 
이제 야간좌선 시동 걸었으니
 
오늘도 긴 글을 썼다. 삼십분 좌선하고 두세 시간 쓴 것이다. 시계를 보니 11시가까이 되었다. 글을 정리해서 인터넷에 올리면 삼십분이 지나갈 것이다. 이렇게 오전은 명상과 글쓰기로 가버린다.
 
오후에는 일을 해야 한다. 밀린 일감을 마무리 하는 것이다. 오후 좌선도 해야 한다. 이번 우안거에서 오후좌선을 계속하고 있다. 저녁에 야간좌선 할 수 있을까? 이제 시동 걸었으니 오늘도 달려 보는 거다.
 
 
2024-09-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