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등불로 삼아

담마다사 이병욱 2024. 8. 30. 11:48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등불로 삼아

 

 

갈 길이 멀다. 언제 이 길을 다 갈까? 매일 길을 가지만 좀처럼 목적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야 한다. 가다 보면 무언가 보이지 않을까?

 

재가우안거 42일째이다. 이제 한달 보름을 향해서 가고 있다. 앞으로 사흘만 지나면 딱 절반이다. 그래서일까 모레 91() 담마와나선원에서는 한국테라와다불교 포살법회가 열린다. 열두 분의 상가스님이 참석한다.

 

늘 혼자 있는다. 백권당에 늘 홀로 앉아 있는다. 일이년도 아니고 십여년 되었다. 개인사업자로 살다 보니 원맨컴퍼니, 원맨사장이 되었다.

 

오늘도 아침을 먹는다. 집에서 준비해 온 찐 계란 하나, 찐 고구마 하나, 찐 감자 한쪽을 먹는다. 최소한의 식단이다. 여기에 소금이 곁들인다. 계란과 감자는 소금이 있어야 먹는다.

 

 

아침을 먹었으니 커피를 마셔야 한다. 아침에는 차보다 커피이다. 그것도 원두커피이다. 백권당표 절구커피를 말한다.

 

백권당표 절구커피

 

절구커피 맛은 최상이다. 카페의 아메리카노와 비할 바가 아니다. 아메리카노 스틱도 마셔 보았지만 쓰기만 하고 맛이 없어서 마시다 말았다.

 

절구커피는 재료가 좋아야 한다. 맛은 원두 품질에 달려 있다. 신맛과 단맛과 쓴맛이 골고루 섞여 있어야 한다. 여기에 향미가 있다면 최상이다. 이마트 안양점 노브랜드 매장에서 구입한 것이 최상이다. 1키로에 만8천원대로 저렴하다.

 

 

절구커피 만드는 법은 간단하다. 절구하나만 있으면 된다. 목재로 된 절구가 있어서 원두 반움큼 집어 넣고 공이질하면 된다.

 

절구가 없었을 때는 기계로 갈았다. 손잡이를 돌려서 갈았으나 무척 힘들었다. 입자는 미세했다. 이럴 경우 신맛이 강하다.

 

절구커피는 신맛과 단맛, 쓴맛이 골고루 난다. 이는 공이로 빻을 때 입자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가는 입자는 신맛이 나고, 중간입자는 쓴맛이 나고, 큰 입자는 단맛이 나는 식이다. 무엇보다 향이다.

 

 

어느 날 택배기사가 사무실에 왔다. 지난 십년 동안 자주 보는 기사이다. 기사는 커피향이 좋다고 말했다. 쭈그리고 앉아서 공이질 할 때 공중에 퍼진 커피향이 자극한 것 같다.

 

 

법복바지를 입고

 

커피를 마셨으니 이제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우안거 전에는 막바로 글쓰기에 들어 갔으나 안거가 시작되면서 명상먼저 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행선과 좌선을 하는 것이다.

 

명상을 잘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준비작업이 있어야 한다. 먼저 법복으로 갈아 입는다. 집에서 준비 한 법복바지를 말한다.

 

이주전 인터넷으로 법복 바지를 주문했다. 한번 입고 난 후 더 이상 입지 않는다. 중국산으로 겨울용이다. 마치 누비 바지를 입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허리가 쫄렸다. 고무줄 밴드가 너무 강한 것이다.

 

집에 법복이 있다. 언젠가 불교박람회 할 때 충동구매한 것이다. 십만원 이상 하는 고가의 법복이다. 가격만큼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마치 스님들이 입는 것과 같은 재질을 가진 진한 회색법복이다.

 

 

법복은 설날 때 입는다. 설날 차례 지낼 때 입는 것이다. 그리고 20181231일 미얀마 갔었을 때 입었다. 법복 입고 보름동안 산 것이다.

 

법복 바지는 장점이 있다. 그것은 허리가 쫄리지 않는 것이다. 좌선할 때 허리 단추를 풀어 놓으면 허리에 압박이 없다. 이런 이유로 법복 바지를 입는다.

 

좌선에 임하기 전에 준비할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소형냉장고 전원을 끄는 것이다. 멀티콘센트 스위치를 끄면 된다. 좌선 중에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몹시 거슬리기 때문이다.

 

잘 하려고 하면 할수록 안되는

 

모든 준비는 끝났다. 행선도 끝났다. 이제 앉기만 하면 된다. 지난 4년 동안 늘 앉아 있는 그 자리이다. 십센티 이동도 없다. 어제도 앉았고 그제도 앉았다.

 

어떻게 해야 명상을 잘 할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잘 하려고 하면 할수록 안된다는 사실이다. 마치 잠을 잘 자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

 

잠은 잠이 와야 자는 것이다.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잠이 오면 자지?”라고 생각해야 한다. 잠이 오지 않으면 편안하게 쉰다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좌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좌선 할 때는 잘 하려는 마음을 내려 놓아야 한다. 주관찰 대상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밝아져 올 때가 있다. 이런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방에 불이 밝으면 잘 보인다. 아주 밝으면 개미 지나가는 것도 보일 것이다. 좌선 중에 마음이 밝으면 잘 보인다. 배의 부품과 꺼짐도 선명하다.

 

좌선은 어느 정도 시간을 필요로 한다. 눈을 감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고 있다 보면 집중이 된다. 마치 자연스럽게 되는 것 같다. 잘 하려는 마음을 내려 놓아야 한다.

 

정신과 물질을 지속적으로 새겨야

 

좌선의 성패는 새김의 확립에 달려 있다. 새김의 토대가 탄탄해야 흐트러지지 않는다. 새김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오분도 견디기 힘들다. 좌선이 고행이 되어서 끝내고 싶어 진다.

 

좌선을 할 때 무엇을 관찰해야 할까? 마하시 전통에서는 복부를 보라고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이다.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호흡을 관찰하면 사마타가 되어 버린다.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은 물질과 정신, 정신과 물질을 새기기 위한 것이다. 몸은 마치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은 상태에서 오로지 배의 움직임만 있게 되는데, 배의 움직임은 물질적 현상이고 이런 움직임을 아는 것은 정신적 현상이다. 이 두 가지 현상, 즉 물질과 정신, 정신과 물질을 지속적으로 새기는 것이다.

 

종종 페이스북에서 명상에 대한 글을 본다. 거의 대부분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글을 보면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마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유튜브에서 MBSR에 대한 것을 보았다. 미국에서 MBSR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설명하는 것을 보았는데 거기에도 정신과 물질을 새긴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오로지 마음 이야기만 하는 것 같았다.

 

위빠사나에서 마음 이야기만 하면 반쪽짜리가 되어 버린다. 설령 심념처에 대한 것이라도 몸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몸관찰부터 하는 것이다.

 

한국테라와다불교 어떤 스님은 싸띠만 이야기한다. 법문하면 싸띠 하나로 한시간 채우는 것이다. 그러나 듣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왜 그럴까? 거기에 몸관찰에 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정신과 물질, 물질과 정신을 새기는 이야기가 없어서 공허하게 들린다.

 

위빠사나에 대하여 하나의 기준이 마련 되었다. 순전히 개인적인 것인지 모른다. 위빠사나 소개하는 데 있어서 물질과 정신, 정신과 물질을 새긴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불신(不信)하는 것이다.

 

 

마하위하라 카톡방에 공지가 하나 떴다. 스리랑카 고승 삿다와지 스님의 법회를 알리는 글이었다. 나중에 어떤 이가 고승의 법문을 요약해서 올렸다. 그런데 글에서 놀랍게도 명색에 대한 것이 있었다. 또한 무상, , 무아에 대한 것이 있었다.

 

명색과 무상, , 무아, 이런 이야기가 없으면 위빠사나라고 말할 수 없다. 오로지 싸띠만 이야기하거나 오로지 마음챙김만 이야기한다면, 오로지 깨어있음만 말한다면 반쪽짜리 밖에 되지 않는다. 종교성을 배제한, 불교를 배제한 MBSR에서 도 볼 수 있다. 정신과 물질을 지속적으로 새겨야 진정한 위빠사나가 된다.

 

마하시 전통에서 몸관찰을 중시하는 것은

 

작년 처음으로 재가우안거를 했다. 작년에는 매일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리고 매일 후기를 작성했다.

 

작년 우안거 하게 된 동기가 있다. 그것은 빤냐와로 스님의 입재법회를 듣고 나서부터이다. 스님은 이번 안거 기간 동안 정신과 물질을 잘 관찰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을 했다. 이 말에 매료가 되어서 안거를 하게 되었다.

 

불교와 인연 맺은지 20년 되었다. 수많은 법문을 들어 보았다. 그러나 정신과 물질, 물질과 정신을 살피는 법문을 들어 보지 못했다. 오로지 마음 이야기만 한다.

 

지혜는 몸으로 체득되는 것이다. 노인의 지혜는 산전수전 다겪어서 형성된 것이디. 장인의 노우하우는 몸으로 익힌 것이다. 위빠사나 지혜 역시 몸으로 익혀야 한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몸관찰을 중시한다. 행선을 좌선과 동등하게 여기는 것도 몸관찰에 따른 것이다. 이는 대념처경에서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안다.”(D22)로 시작되는 네 가지 행동양식에 대한 고찰을 보면 알 수 있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좌선할 때도 몸관찰을 한다. 이는 주관찰 대상을 복부로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이다. 단지 호흡만 새기는 것과는 다르다. 몸을 이루는 지수화풍 사대 중에서 풍대를 관찰하기 위한 것이다.

 

위빠사나 지혜는 몸관찰로 이루어진다. 행선할 때 발의 움직임을 새기는 것도 몸관찰에 대한 것이고, 좌선할 때 복부의 움직임을 새기는 것도 몸관찰하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상에서도 육문에 일어나는 것도 새겨야 한다.

 

눈이 있어서 대상을 본다. 이때 눈이라는 감성물질이 있어서 형상을 본다. 이때 눈과 형상은 물질에 해당된다. 그리고 보는 것은 정신에 해당된다. 물질과 정신 양자를 새겨야 한다.

 

귀가 있어서 소리를 듣는다. 귀라는 감성물질이 있어서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때 귀와 소리는 물질에 해당된다. 듣는 것은 정신에 해당된다. 위빠사나 수행은 이와 같은 양자를 새긴다. 물질과 정신,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새기는 것이다. 이는 위빠사나 1단계 지혜, 정신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해당된다.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볼 때 시각의식이 있게 된다. 경에서는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M18)라는 정형구로 표현된다. 이는 조건발생에 대한 것이다. 정신과 물질을 새길 때 원인과 결과를 구별하여 새기는 것이다. 이는 위빠사나 2단계,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에 해당된다.

 

위빠사나지혜는 몸으로 체득되는 것이다. 물질과 정신, 정신과 물질을 새겨야 체득할 수 있다. 몸으로 지혜를 체득하는 것과 같다. 마하시 전통에서 몸관찰을 중시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스승 없이 위빠사나 수행을

 

스승 없이 위빠사나 수행하고 있다. 스승 없이도 위빠사나 수행이 가능할까? 마하시 사야도에 따르면 가능한 일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담마짝까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승이 없이 혼자서 수행한다면 위숫디막가에서 설해 놓은 대로 무더기, 감각장소, 요소, 진리, 기능, 연기들을 자세하게 읽고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담마짝까법문, 358)

 

 

이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청정도론 하나만 있어도 스승 없이 수행이 가능함을 말한다. 그 중에서도 무더기, 감각장소, 요소, 진리, 기능, 연기를 보라고 했다.

 

청정도론을 알게 된지 십년이 넘었다. 초기불교를 알고 나서 자연스럽게 청정도론을 알게 되었다. 이는 초기불전연구원에서 2004년 청정도론이 번역된 것이 크다.

 

청정도론을 처음 본 것은 2010년인 것 같다. 처음 이 논서를 보았을 때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방대한 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다 읽어 보았다. 궁금했던 것이 모두 다 들어 있었다.

 

청정도론을 수도 없이 보았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2018년에 완역 되었는데 그때 교정자로 참여 했다. 무려 두 번 읽어 보았다.

 

청정도론을 읽고 수 많은 글을 썼다. 특히 명색, 즉 정신과 물질과 관련된 부분은 읽고 또 읽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위빠사나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단계에 대한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는 니까야와 논서에 기반한다. 그러다 보니 경전과 주석서를 중요시 한다. 이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경전에서의 부처님 말씀과 제자들의 주석을 중시한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스승 없이도 위빠사나수행이 가능하다고 했다. 청정도론을 스승으로 삼으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제14장 존재의 다발(무더기), 15장 감역과 세계(감각장소와 요소), 16장 능력과 진리(진리), 17장 지혜의 지평(연기)에 대한 것이다.

 

스승 없이 수행하는 것에는 한계가

 

스승 없이 수행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논서를 보고 어느 정도는 가능하지만 더 깊게 들어가기 위해서는 스승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지만 견문을 구족한 훌륭한 선지식 스승에게서 수행지도를 받는 이라면 지금 근거로 든 성전이나 주석서에 일치하게모든 법은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다라는 정도로 배워 놓았으면 들어서 아는 지혜가 충분하다고 기억해야 합니다. ‘범부의 상속에 다섯 무더기는 괴로움의 진리다. 갈애가 생겨남의 진리다. 이렇게 원인과 결과의 세간 진리 두 가지만 있다라는 정도로 듣고 배워 놓았으면 들어서 아는 지혜가 충분하다고 기억해야 합니다. 미얀마에서 불교도라면 이 정도의 듣고 배움은 이미 갖추고 있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만약 이전에 갖추지 못했어도 수행하기 전에 수행지도 스승의 설법을 듣는 것으로 충분 합니다. 수행 중에 법문을 듣는 것으로도 충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들어서 아는 지혜와 관련해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견문과 배움을 구 족한 훌륭한 선지식 스승이 지도하는 대로 노력하기만 하면 됩니다.”(담마짝까법문, 358)

 

 

스승 없이 책을 통해서 수행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훌륭한 스승 아래서 닦는 것이다. 스승으로부터 법문을 듣고 수행지도를 받아야 함을 말한다.

 

스승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수행한다고 하여 모두가 스승이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승의 지도를 받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그것도 제대로 된 스승에서 지도를 받아야 한다.

 

스승이라 해서 아무에게나 지도 받아서는 안된다. 도와 과를 이룬 스승에게 지도 받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이미 가 본 사람, 이미 경험해 본 사람에게 지도 받는 것이다.

 

책상탕탕 이것타령

 

요즘 유튜브를 보면 이것을 말하는 자들이 있다. 아마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아니면 따라 하는 것인지 모른다.

 

한국불교에 이상한 흐름이 하나 있다. 이것만 알면 깨닫는다는 말이다. 부산에 어떤 선원의 재가법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것만 말한다. 그래서 이것 뿐입니다. 이것 뿐이라나까요. 다른 것 없습니다. 오로지 이것 뿐입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을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갈증만 난다. 대체 이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해 주지 않는다. 그 대신 책상을 탕탕치며 이것입니다. 이것뿐입니다. 이렇게 명백히 드러나 있는 이것뿐입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의 법문을 수년동안 여러 번 들어 보았다. 그들이 아무리 이것을 말해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최근 유튜브를 보니 그들의 아류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채널에서 한결 같이 이것을 말한다. 책상을 탕탕 치며 이것뿐입니다.”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이다.

 

한국의 자칭타칭 깨달았다는 자들이 말하는 이것은 무엇일까? 어느 정도는 어렴풋이 알만하다. 아마도 진리는 언어로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마치 벙어리가 냉가슴 앓듯이 이것타령 하는 것으로 본다.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말로 설명하는 순간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비유로서 설명했다.

 

진리를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하여 침묵한다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아 발견한 진리는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진리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오로지 마음과 뜻으로만 전승가능하다고 한다면 사자상승(師資相承)이 될 것이다. 마음과 마음으로, 뜻과 뜻으로 스승에게서 제자로만 진리가 전승된다면 일반사람들은 진리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은 언어로서 진리를 설명했다.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서 알기 쉽게 설명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으로 알려 주었다. 그럼에도 진리는 오로지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에서 뜻으로 전승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부처님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버린다.

 

부처님도 이것을 말했다. 이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iti imasmi sati ida hoti)”라는 연기송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것만 말한 것이 아니다. 십이연기라 하여 언어를 사용하여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답답하면 책상을 탕탕친다. 소리로서 알려 주려 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론적 배경이 없는 것이다. 논리가 없기 때문에 이것타령하는 것이다.

 

이것타령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이론이 없다. 이는 교학이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일까 대부분 선불교 계통 사람들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이론이 있다. 이는 십이연기, 사성제, 팔정도와 같은 교학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탄탄한 이론하에 논리가 전개된다. 답답하다듯이 책상을 탕탕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볼 때마다 들을 때마다 닿을 때마다 알 때마다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에 이것타령은 보이지 않는다. 책상을 탕탕 칠 필요도 없다. 어떤 것인가? 이는 다음과 같은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볼 때마다 들을 때마다 닿을 때마다 알 때마다 여섯 문에서 분명 하게 드러나고 있는 모든 다섯 무더기, 물질·정신법들은 항상하다고, 행복하다고, 자아라고 집착하기에 적당하지 않다. 항상하지 않고 괴롭고 자아가 아닌 성품법들일 뿐이다.”(담마짝까법문, 355)

 

 

볼 때는 볼뿐이다. 들을 때는 들을 뿐이다. 여섯 가지 감각의 문에서 드러나는 현상에 대하여 새기는 것이다. 어떻게 새기는가? 명색, 즉 정신과 물질을 새기는 것이다.

 

책상을 칠 때 탕탕 소리가 난다. 소리는 물질적 현상이다. 이를 듣는 것은 정신적 현상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이 양자를 새기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새겼을 때 물질법과 정신법의 성품은 항상하지 않고 괴롭고 자아가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명색을 새겼을 때 책상을 탕탕치며 이것타령 하지 않는다. 자칭타칭 깨달았다는 자들이 이렇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라고 답답하다듯이 말 할 때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정신법과 물질법을 새겨서 무상, , 무아의 성품법이 드러난 것입니다.”라고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등불로 삼아

 

스승이 없는 시대에 유튜브 법문을 스승으로 삼는 이들도 있다. 이것타령 하는 자를 스승으로 삼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부처님에게 어리석은 자여, 그것은 실로 그대를 오랜 세월 불이익과 고통으로 이끌 것이다.”(M22)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스승이 없는 시대에는 경전이 스승이 될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이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 “(M60)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모두 다 스승을 가질 수 없다. 제대로 된 스승은 드물다. 이럴 때는 부처님 말씀이 스승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에 들기 전에 아난다여, 내가 가고 난 뒤에 내가 가르치고 제정한 가르침과 계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스승삼아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먼저 경험한 스승을 찾아 가야 할 것이다. 아직 알지 못하는 것도 많고 아직 깨우치지 못한 것도 많다. 먼저 명상을 생활화 해야 한다.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등불로 삼아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 나아간다.

 

 

2024-08-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