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자신이 존경스러울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8. 20. 12:05

자신이 존경스러울 때
 
 
시간은 상대적이다. 삼십분이 금방 지나간 것 같다. 이는 이전 삼십분과 매우 비교된다. 내 자신이 스스로 자랑스러워 보이는 것 같았다.
 
재가우안거 32일째이다. 오늘 좌선을 두 번 했다. 첫 번째 좌선은 실패했다. 망상으로 가득한 삼십분이었다.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알람이 울리자 학교 수업이 끝난 것처럼 반가웠다.
 
명상이 늘 잘되는 것은 아니다. 그날 그날 컨디션에 따라 다르다. 또한 환경에 따라 다르다. 그럼에도 삼십분 앉아 있기로 했으니 마치 고행하듯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오늘 오전 7시 날씨는 29도였다. 습도는 70프로가 넘었다. 더운 날씨라기 보다 무더운 날씨이다. 이런 날씨임에도 걸어 갔다.
 
새벽 5시 이전에 깬다. 새벽에 무엇을 해야 할까? 작년까지만 해도 글을 썼다. 스마트폰 메모앱에 엄지치기 한 것이다. 그러나 글을 완성하고 나면 매우 피곤하다. 올해부터는 그만 두었다.
 
새벽에 책을 읽는 것이 좋다. 머리맡에는 항상 경전이나 논서가 놓여 있다. 스탠드 불을 켜고 돋보기 안경을 쓰고 읽는다. 새기며 읽다 보니 고작 두세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머리맡에는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이 있다. 매일 조금씩 읽는다. 잠자기 전과 잠에서 일어나 조금씩 읽다 보면 언젠가 다 읽게 될 것이다. 이전에 읽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과 ‘아리야와사법문’도 그랬다.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읽다 보면 위빠사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 것 같다. 위빠사나 스승이 알려 주는 것보다 더 체계적이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어떤 구절은 깊게 각인된다. 어떤 지혜에 이르렀을 때 “자신이 매우 존경스러울 것입니다.”라는 말이 그렇다.
 
자신이 존경스러울 수 있을까? 남들이 나를 존경해 주면 이야기는 성립된다. 그럼에도 자신이 스스로 존경스러울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어떤 경지에 이르렀을 때 해당될 것이다. 또한 어떤 지혜가 생겨 났을 때도 해당될 것이다.
 
머리맡에는 마하시 사야도 법문집
 
아침이 되면 스마트폰도 보지 않는다. 뉴스 보지 않은지는 오래 되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블로그, 페이스북, 밴드에 올린 글을 스마트폰으로 확인 했다. ‘좋아요’나 ‘최고에요’이모티콘을 눌러 준 사람의 이름을 하나하나 새겼다.
 
아침에 스마트폰을 보지 않기로 했다. 어떤 언어적 정보도 차단하는 것이다. 오전 수행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심지어 이미우이 음악도 듣지 않는다.
 
아침에 걸어서 일터로 간다. 약 1.4키로 거리에 삼십분 가량 걸린다. 이렇게 느리게 가는 것은 “한걸음도 무심코 걷지 말라.”라는 레디 사야도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아침식사는 적게 한다. 찐계란 하나에 찐고구마 작은 것 하나가 고작이다. 여기에 꿀물을 마신다. 아침을 많이 먹으면 수행에 지장 있다.
 
어제 법복 바지가 도착 했다. 택배로 신청한지 무려 11일만이다. 왜 이렇게 늦은 것일까? 중국에서 오기 때문이다. 통관절차도 필요한 모양이다.
 

 
행선이나 좌선할 때 양복바지를 입고 하면 불편하다. 특히 좌선이 그렇다. 집에 있는 추리닝바지를 가져다 놓았다. 양복바지 보다 편하긴 하지만 허리부위 고무줄 밴드가 너무 꽉 끼인다. 그것도 겨울용이라 두텁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다. 법복바지을 입고 행선과 좌선을 하면 잘 될까? 확실히 추리닝바지보다는 나은 것 같다. 그러나 겨울용이라 요즘같이 무더위에는 불편하다.
 
몸을 나무토막처럼, 몸을 푸대자루처럼, 몸을 시체처럼
 
행선을 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 행선을 할 때 몸을 나무토막처럼 생각하자는 것이다. 더 낫게 말하면 몸을 푸대자루처럼 보는 것이다.
 
몸을 왜 푸대자루처럼 보아야 할까? 몸은 정신기능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몸은 생명기능과 정신기능이 없으면 목석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왜 푸대자루같다고 하는가? 이는 다음과 같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예를 들어, 수행승들이여, 양쪽 입구로 육도, 적미, 강낭콩, 완두콩, 기장, 백미와 같은 여러 종류의 곡식으로 가득 채운 푸대 자루가 있는데 그것을 열어서 사람이 눈으로 ‘이것은 육도, 이것은 적미, 이것은 강낭콩, 이것은 완두콩, 이것은 기장, 이것은 백미’라고 관찰하듯이, 수행승은 이 몸을 이와 같이 ‘이 몸속에는 머리카락, 몸털, 손톱, 이빨, 피부, 살, 근육, 뼈, 골수, 신장, 심장, 간장, 늑막, 비장, 폐, 창자, 장간막, 위장, 배설물, 뇌수, 담즙, 가래, 고름, 피, 땀, 지방, 눈물, 임파액, 침, 점액, 관절액, 오줌이 있다.’라고 발가락 위에서부터 머리카락 아래에 이르고 피부의 끝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의 오물로 가득한 것으로 관찰한다.”(D22, M10)
 
 
부처님은 우리 몸을 푸대자루와도 같다고 했다. 그런데 입구와 출구가 있는 푸대자루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입과 항문이 있는 푸대자루인 것이다.
 
입구와 출구가 있는 푸대자루에는 갖가지 것들이 들어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몸 안에는 갖가지 혐오를 일으키는 장기 등 신체기관이 들어 있다. 이에 대하여 서른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몸은 푸대자루로 설명된다. 또한 몸은 도축된 고기로도 설명된다. 어떤 것인가? 사대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예를 들어 수행승들이여, 숙련된 도축업자나 그의 도제가 소를 도살하여 사거리에 따로따로 나누어 놓는 것처럼,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이 몸을 이와 같이 ‘이 몸속에는 땅의 세계, 물의 세계, 불의 세계, 바람의 세계가 있다.’라고 세계로서, 놓여있고 구성된 대로 관찰한다.”(D22, M10)
 
 
사람의 몸은 축생의 몸과 다르지 않다. 축생의 몸에서 볼 수 있는 장기와 살코기, 피 등 물질적인 몸을 볼 수 있다.
 
도축된 가축을 해체하면 갖가지 부위의 고기가 있게 된다. 도축업자는 칼로 해체해서 부위별로 판매 한다. 가축을 해체하면 남는 것은 절단된 부위의 고기만 있게 된다. 더 이상 돼지나 소와 같은 가축은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의 몸을 해체하면 가축처럼 부위별로 나누어질 것이다. 이런 인간의 몸은 지, 수, 화, 풍이라는 네 개의 광대한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가축을 도축해서 해체하면 더 이상 돼지나 소와 같은 가축은 보이지 않는다. 부위별로 해체된 고기만 남게 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몸을 지, 수, 화, 풍 네 개의 부위로 해체하면 더 이상 인간의 몸이라고 말할 수 없다.
 
행선 할 때 몸을 나무토막처럼 보고자 했다. 의도가 없으면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나무토막을 말한다. 또한 몸을 입구와 출구가 있는 푸대자루처럼 보고자 했다. 신진대사 기능이 있는 몸은 의도가 없으면 역시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비유는 ‘시체’이다.
 
행선할 때 몸을 시체로 보고자 했다. 신진대사기능이 있는 시체를 말한다. 푸대자루비유보다 좀도 적극적이다. 사람의 몸을 시체처럼 보았을 때 역시 의도가 없으면 시체처럼 누워 있을 것이다.
 
위빠사나수행 1단계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대한 것이다. 이는 몸 따로 마음 따로로 보는 것이다. 몸을 나무토막처럼, 몸을 푸대자루처럼, 몸을 시체처럼 보는 것도 해당된다.
 
인생을 좀비처럼 산다면
 
종종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사람들에 대하여 좀비처럼 보는 것이다. 이는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을 말한다.
 
축생은 아무 생각 없이 산다. 개나 돼지나 소와 같은 축생은 생각해서 사는 것은 아니다. 태어났으니 사는 것이다. 목숨이 붙어 있으니 사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산다면 축생이나 다름 없다.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산다면 좀비나 다름 없다. 사는데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냥 사는 것이다.
 
축생의 일생은 비참하다. 어쩌다가 축생으로 태어나서 인간의 고기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고기가 되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잡아 먹히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인간으로 살아도 아무 생각 없이 산다면 축생이나 다름 없다. 또한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 있는 것도 아닌 좀비와도 같다. 그러나 인간이 새기며 산다면 축생의 삶도 아니고 좀비의 삶도 아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늘 새김(sati)이 강조 되어 있다. 늘 깨어 있으라는 말과도 같다. 늘 새김을 유지하고 있을 때 더 이상 축생도 아니고 좀비도 아니다.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다. 천상의 존재도 수행할 수 있지만 너무 즐거워서 수행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지옥과 같은 악처 중생은 너무 괴로워서 역시 수행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살아 있을 때 수행해야 한다. 더 늙기 전에 수행해야 한다. 한살이라도 젊을 때 앉아 있어야 한다. 건강할 때 방석에 앉아 있어야 한다.
 
윤회의 방랑자가 되지 말고 윤회를 끝내는 수행자가
 
수행을 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 앉아 있어야 할까? 그런 수행이라면 이교도에게도 있을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스트레스완화기법에 해당되는 MBSR수행을 하면 될 것이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것 없이 앉아 있으면 고행이 된다.
 
나그네에게 갈 길은 멀다. 터벅터벅 걷다 보면 해질녘이다. 황혼이 산자락에 산그늘 질 때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가야 할 길은 먼 데 저녁이라니!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자에게 길은 멀다.
올바로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Dhp.60)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이 있다. 밤새도록 수행하는 자에게 밤은 길다. 마치 몸에 병이 있어서 병마에 시달리는 것처럼 열심히 수행하는 사람에게 밤은 긴 것이다.
 
길을 가는 나그네가 있다. 나그네는 목적지를 향하여 하루 종일 걸었다. 맞은 편에서 오는 사람에게 “마을이 여기서 얼마나 먼가?”라며 묻는다. 이에 그 사람은 한 요자나 정도 가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피곤에 지친 자에게는 두 요자나 거리처럼 길게 느껴질 것이다.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고 했다. 이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종식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윤회를 끝내는 ‘서른일곱 가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길(삼십칠조도품)’이 있다고 말했다.
 
윤회의 방랑자가 되지 말고 윤회를 끝내는 수행자가 되라고 했다. 수행을 하는 것도 윤회를 끝내는 수행자가 되기 위한 것이다.
 
오늘 좌선을 두 번 했는데
 
행선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오늘 좌선은 잘 할 수 있을까? 방석에 앉으면서 늘 의문하는 것이다.
 
좌선이 늘 잘되는 것은 아니다. 그날의 컨디션에 달려 있다. 그날의 환경에 달려 있다. 오늘처럼 날씨가 더운 날은 잘 되지 않는다.  
 
수행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강행하는 것은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알람소리가 울릴 때까지는 앉아 있어야 한다.
 
오늘 좌선은 두 번 했다. 첫 번째 좌선은 실패했다. 너무 더워서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핑계가 될 수 있다.
 
여기 게으른 자가 있다. 어느 정도로 게으른가? 이는 디가니까야 31번 경에서 “너무 춥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덥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이르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늦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배고프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배부르다고 일을 하지 않습니다.”(D31)라는 말로 알 수 있다.
 
게으른 자는 핑계도 많다. 너무 춥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덥다고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배가 고파서 일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배가 부르면 배가 불러서 일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아침 좌선에서 너무 더워서 집중이 되지 않았다. 집중이 되지 않으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고자 했으나 집중 되지 않았다.
 
새김이 없는 상태에서 앉아 있으면 고행이 되기 쉽다. 정신은 망상에 지배 받는다. 잠시도 가만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참고 견디어야 한다. 알람소리 날 때까지는 앉아 있어야 한다.
 
마침내 고대하던 삼십분 알람이 울렸다. 마치 수업을 마치는 벨소리 듣는 것처럼 반가웠다. 그런 한편 분했다. 아무 소득 없이 고행하듯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것이 부끄러웠다. 남이 보았다면 창피한 일이다.
 
만족할만한 결과에 이르지 못했을 때 다시 해야 한다. 좌선을 다시 하기로 했다. 십여분 누워서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방석에 앉았다.
 
두 번째 좌선에서 성공하기 쉽다. 첫 번째 좌선에서 실패한 것을 만회하기에 충분하다. 몸은 이미 어느 정도 길들여져 있다. 단지 앉아서 지켜만 보면 된다.
 
부푼다, 꺼진다”라며 동사형 명칭붙이기
 
두 번째 삼십분 좌선에 들어갔다. 처음부터 강하게 밀어 붙였다. 처음부터 배의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기울였다. 잡념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부푼다꺼진다 라며 명칭을 붙였다.
 
좌선할 때 잘 집중이 되지 않으면 명칭 붙이는 것이 효과적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 명칭을 붙이는 것이다. 이번에는 미얀마식으로 “부푼다, 꺼진다”라며 동사형 명칭을 붙여 보았다.
 
명칭 붙일 때 명사형이 더 좋을까 동사형이 더 좋을까? 이제까지 “부품, 꺼짐”이라며 명사형 명칭을 붙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 “부푼다, 꺼진다”라며 동사형 명칭을 붙이니 집중이 훨씬 더 잘되었다.
 
동사형 명칭은 현재진행형이다. 배가 부푸는 것에 대하여 “부푼다”라고 현재진행동사형 명칭 붙이는 것이 단지 부품으로 그치는 명사형명칭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행선과 좌선을 하면서 방법을 하나 둘 알아간다. 실제로 체험해서 아는 것이다. 이런 것을 알았을 때 다음에도 계속 적용하고자 한다. 이런 것은 책에 나오지 않는다. 마치 장인의 노우하우(Knowhow)처럼 경험해서 아는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대하여 “부푼다, 꺼진다”라고 동사형 명칭을 붙이자 효과가 나타났다. 이런 것도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다음에도 계속 적용할 예정이다.
 
동사형 명칭붙이기로 인하여 효과를 보았다. 동사형 명칭붙이기를 이삼십회 반복했더니 집중이 형성되었다.
 
무엇이든지 반복적으로 하면 집중이 된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대하여 동사형 명칭을 반복적으로 붙였더니 어느 순간 고요해졌다. 어느 정도 새김이 확립된 것이다.
 
좌선의 성패는 새김 확립에
 
좌선의 성패는 새김의 확립에 달려 있다. 새김이 확립되지 않으면 망상속에서 보내다가 시간을 보내기 쉽다. 또한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괴로워서 고행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한번 새김이 확립되면 더 이상 망상에 시달리지 않는다. 또한 앉아 있는 것이 괴롭지 않아 앉아 있을 만한 것이다.
 
한번 새김이 확립되자 마치 잘 닦여진 고속도로를 무한질주 하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새김이 확립되면 더 이상 명칭을 붙이지 않아도 된다.
 
새김이 확립된 상태에서는 자동으로 부품과 꺼짐을 보게 된다. 또한 부품과 꺼짐의 시작과 끝도 분명하게 보인다. 고요한 상태에서 보는 것과 같고 밝은 상태에서 보는 것과 같다.
 
새김이 확립되면 주욱 그 상태로 있고 싶어진다.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없어진다. 현재 앉아 있는 그 자리가 마치 안방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한 이 상태로 계속 가고 싶어진다. 잘 닦여진 도로를 달리는 것과 같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담마짝까법문을 보면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많다. 찰나삼매를 바탕으로 위빠사나를 관찰하는 모습에 대한 것을 보면 “물질-정신의 바른 성품을 알도록 집중해서 관찰하고 있으면 위빳사나 삼매가 저절로 생겨나는 것입니다.”(209쪽)라고 했다.
 
무엇이든지 집중해서 관찰하면 삼매가 생겨난다. 반드시 수행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뜨개질 할 때 때도 삼매가 생겨날 수 있고 독서할 때도 삼매가 생겨날 수 있다. 하물며 배의 부품과 꺼짐을 지속적으로 새기고 있을 때 삼매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위빳사나 삼매가 저절로 생겨나는 것입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위빠사나 한다고 자리에 앉아 있다. 그렇다고 마음의 평화나 안정을 위해서 앉아 있는다면 반감된다. 위빠사나 지혜를 얻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물질법과 정신법을 관찰해야 한다.
 
행선할 때 발의 움직임을 새기는 것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또한 조건발생을 관찰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좌선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배가 부풀 때 이는 물질적 현상이다. 또한 배가 부풀 때 이를 아는 것은 정신적 현성이다. 배의 부품은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 두 가지가 있게 되는데, 이와 같은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 두 가지를 모두 새기는 것이 위빠사나이다.
 
위빠사나 지혜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면밀하게 새겨야 한다. 찰나를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면밀하게 촘촘하게 지속적으로 삼매가 생겨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그때는 대상도 저절로 새길 수 있게 되어 사실대로 계속해서 알게 됩니다. 무상-고-무아의 성품들도 저절로 드러납니다.”라고 말했다.
 
수행이 어느 정도 진전이 되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많은 것 같다. 정신과 물질을 지속적으로 새겼을 때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은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도의 순간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따라서 제일 마지막 목표인 성스러운 도를 얻고자 한다면, 앞부분 도인 위빳사나 도를 닦아야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성스러운 도가 저절로 생겨날 것입니다. 개울을 뛰어넘으려면 멀리서 힘차게 달려온 뒤 뛰어넘어야 합니다. 뛰어넘은 뒤에는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저절로 반대편 둑에 도달하게 됩니다. 위빠사나 도를 닦는 것은 힘차게 달려온 뒤 뛰어넘는 것과 같습니다. 뛰어넘은 뒤에 신경 쓰지 않고서 반대편에 저절로 도착하는 것은 위빳사나의 힘 때문에 성스러운 도가 생겨나는 것과 같습니다.”(담마짝까법문, 221-222쪽)
 
 
열반의 순간에 대한 설명이다. 열반을 이루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음을 말한다. 열반을 이루기 위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짐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뜀뛰기비유’를 들었다.
 
형성평온지혜의 단계(sakhārupekkhā ñāna)에 이르면
 
흔히 어느 정도 수행이 되면 그 다음은 지혜가 이끌어 간다고 말한다. 마치 배의 부품과 꺼짐에 대하여 명칭을 붙여 새길 때 어느 순간 저절로 새김이 확립되는 것과 같다.
 
새김이 확립 되었을 때 명칭 붙이지 않아도 된다. 새김이 확립된 상태에서는 부품과 꺼짐이 분명하게 보이고 처음도 보이고 끝도 보인다. 저절로 되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높은 단계 위빠사나 지혜에 이르렀을 때 그 다음부터는 지혜에 맡겨 두면 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11단계 형성평온의 단계(sakhārupekkhā ñāna)를 지나 12단계 수순의 단계(anuloma ñāna)에 이르면 지혜가 이끌어 가는 것으로 본다.
 
위빠사나 수행의 끝은 어디인가? 범부는 11단계인 상카루뻬카냐나단계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성자의 마음의 상태와 같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형성평온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금 설명하고 있는 여섯 구성요소 평온(chaagupekkha)은 진실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겨날까요? 형성평온의 지혜에 도달하면 볼 때마다 계속해서 형색을 관찰해서 생멸하는 것을 사실대로 압니다.
 
그 때는 좋아할 만한 대상을 만나더라도 기뻐하지 않고 단지 알기만 알면서 관찰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경험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아직 범부인 데도 경험합니다. 하지만 형성평온의 지혜는 마치 성자들이 경험하는 것처럼 매우 좋습니다.
 
아무리 좋아할 만한 대상을 보더라도 좋아함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싫어할 만한 대상을 보더라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참을 수 있습니다. 단지 알기만 아는 상태로 알아 나갑니다.
 
생겨나면 사라져 버리고, 다시 생겨나면 사라져 버리고, 이렇게 생멸하는 성품만 계속 알아 나갑니다. 그래서 이 지혜단계에 이른 수행 자라면 아라한이 갖춘 이 여섯 구성요소 평온의 덕목을 자신도 갖췄다는 사실을 알 때 자신이 매우 존경스러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해 자신을 존경하지 않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자신 스스로 성자의 상태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매우 존경하는 것입니다.
 
마음도 매우 미묘하고 부드럽습니다. 탐욕이 생길 만한 대상에 대해 탐욕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성냄이 생길 만한 대상에 대해 성냄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좋아할 만한 것에 대해 좋아하지 않습니다. 싫어할 만한 것에 대해 싫어하지 않습니다. 계속 평온하게 지냅니다.
 
한 시간 수행하면 한 시간 내내, 두세 시간 수행하면 두세 시간 내내, 하루 종일 수행 하면 하루 종일 단지 알기만 아는 상태로 계속 끊임없이 관찰합니다. 방해나 장애가 전혀 없습니다. 매우 좋습니다. 이러한 법의 맛을 경험 하고 싶으면 직접 수행해 보십시오. 스스로 수행해야 경험할 수 있습니다.”(아리야와사법문, 245-246쪽)
 
 
단락은 편의상 나눈 것이다. 이 단계는 위빠사나 11단계 형성평온의 지혜에 대한 설명이다. 범부로서 올라 갈 수 있는 최상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성자의 평온과 같다고 했다. 아라한의 평온과 같음을 말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자신이 성자인 것을 알게 된다. 누군가 알려 주지 않아도, 누군가 인가해 주지 않아도 자신이 수다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형성평온의 지혜에 이르면 “자신이 매우 존경스러울 것입니다.”라고 했다. 누군가 알아 주지 않아도, 누군가 존경해 주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이 자랑스러워짐을 말한다. 그래서 자신이 자신을 존경하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됨을 말한다.
 
자신이 존경스러울 때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알아 주기를 고대한다. 페이스북과 같은 에스엔에스에 열심히 글을 쓰고 사진을 올리는 것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페이스북에 대놓고 손주자랑 하는 것도 알아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인정투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좀처럼 자신을 알아 주지 않는다. 이럴 때 마치 스토커처럼 찔러 볼 것이다. 그래도 알아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 찾아 갈지도 모른다. 또한 그 사람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무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군자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고 성을 내지 않는다고 했다. 이른바 군자삼락에 나오는 말이다. 부처님은 “만족할 줄 알면서 만족할 줄 안다고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A8.30)라고 했다. 스스로 만족할 줄 알면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슬퍼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수행을 해서 형성평온의 지혜에 이르렀다면 인정투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신이 존경스러울 때 누군가 존경해 주지 않아도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낙담하거나 인정투쟁하지 않는 것이다.
 
2024-08-2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