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찰나의 마음 하나됨, 위빠사나찰나삼매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24. 8. 10. 10:51

찰나의 마음 하나됨, 위빠사나찰나삼매에 대하여
 
 
지금시각 오전 8시 17분, 평온한 백권당의 아침이다. 왜 평온한가? 방금 좌선을 마쳤기 때문이다.
 
자영업자에게 주말은 없다. 토요일과 일요일도 백권당에 나온다. 평일과 똑 같은 것이다.
 
오늘은 음력으로 칠월칠석이다. 절에서는 칠석날 행사를 할 것이다. 천장사에 가려 했으나 낮에 할 일이 있어서 그만 두었다. 또한 오전에도 해야 할 일이 있다.
 
재가우안거 22일째이다. 토요일이다. 평일과 다름 없이 행선을 하고 좌선하는 것으로 하루일과를 시작한다.
 
좌선을 마친 다음에 여백을 대하면 새롭다. 마치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이 된다. 바닥에 있는 돌맹이나 물고기가 보일 정도로 맑은 정신상태가 되었을 때 글이 술술 나온다.
 
금요니까야시간에 전재성 선생으로부터 들은 것이 있다. 전선생은 번역에 임하기 전에 반드시 좌선을 한다고 했다. 머리가 맑은 상태에서 번역하는 것이다. 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이 갑자기 조용해졌을 때
 
명상은 마음을 채워주기에 충분하다. 명상 없이 곧바로 글을 썼을 때 무언가 충족되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마음이 탁한 상태에서 글에 임했을 때 잘 써지지 않는다.
 
하다 안되면 앉아야 한다. 무언가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방석에 앉는 것이다. 마치 산책하여 머리를 식히는 것과 같다.
 
좌선하면 전혀 다른 상태가 된다. 외부로 향해 있던 마음이 내부로 향하게 된다. 눈과 귀 등 다섯 감각영역을 막아 놓고 마음의 문 하나만 열어 놓는 것이다.
 
마음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마음은 늘 대상에 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감각대상이다. 형상, 소리 등 다섯 감각대상이다.
 
백권당은 좌선하기에 그다지 좋은 환경은 아니다. 왕복 4차로 도로 바로 옆에 있어서 차 지나가는 소리가 시끄럽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조용할 때가 있다. 아마 빨간신호등이 켜 있을 때일 것이다.
 
세상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바라던 것이다. 마치 동굴에 있는 것처럼 고요해졌을 때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만끽한다. 이런 상태가 오래 계속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또다시 차 지나가는 소리가 시작된다.
 
새김이 없으면 정신이 나간 것
 
일시적으로 고요한 상태가 되었을 때 잘 보인다. 배의 부품과 꺼짐이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눈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눈으로 본다.
 
위빠사나수행은 움직이는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행선할 때 발의 움직임이나 좌선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이 대표적이다.
 
발을 여섯 단계로 관찰할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의도부터 시작해서 발의 움직임, 그리고 움직임을 아는 마음을 새겨야 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새김이 핵심이다. 이를 싸띠(sati)라고 한다. 어떤 이는 마음챙김이라고 말한다. 왜 새김이 중요한가?
 
새김이 없으면 정신이 나간 것이나 다름 없다. 마음이 감각대상에 가 있는 것이다. 눈과 귀도 감각대상이지만 생각도 감각대상에 해당된다.
 
위빠사나 스승들은 늘 새김을 유지하라고 말한다. 한시도 새김을 놓치지 말라고 말한다. 무심코 행위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새김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찰나삼매’로 설명한다.
 
찰나삼매는 초선정과 같은 상태
 
찰나삼매, 이 말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선정삼매라는 말은 들어 보았어도 순간을 포착하는 찰나삼매라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찰나삼매는 어떤 것일까?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에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것은 어떠한 몰입삼매(appanā samādhi)의 근처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짜 근접삼매는 아니라는 사실, 진짜 근접삼매와 장애가 사라진 모습이나 마음이 집중된 모습으로 서로 같기 때문에 동질비유(sadisūpacā)로 근접삼매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위숫디막가 마하띠까’에 설명해 놓았습니다(Pm. 1436). 그것을 위빳사나로 말하자면 ‘위빳사나 찰나삼매(vipassanā khanika samādhi)’라고 부릅니다.”(담마짝까법문, 191쪽)
 
 
찰나삼매라는 말은 빠알리어 ‘카니까 사마디(khanika samādhi)’를 번역한 말이다. 여기서 카니까는 영어로 ‘momentary; temporary; changeable’의 뜻이다. 일시적인, 순간적인, 변화되는 뜻을 가진 말이다.
 
찰나삼매는 선정삼매와 다른 것이다. 또한 선정삼매 이전에 형성되는 근접삼매와도 다른 것이다. 하나의 고정된 표상을 대상으로 하는 사마타명상과 달리 위빠사나명상은 움직이는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순간 포착해야 한다.
 
찰나삼매라고 해서 집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순간에 집중 했을 때 근접삼매와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하시 사야도는 이와 같은 위빠사나 찰나삼매에 대하여 “그 근접삼매도 장애들을 사라지게 하는 것으로 초선정과 같습니다.”(담마짝까법문, 199쪽)라고 했다. 찰나삼매가 초선정과 같은 상태라는 것이 놀랍다.
 
몸과 마음에서 생멸현상을 관찰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명상한다고 앉아 있다. 대부분 호흡을 볼 것이다. 그러나 단지 들숨날숨만 새기며 관찰한다면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과 같다. 표상이라는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법의 성품을 볼 수 없다.
 
왜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가? 이는 염처경에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는 몸에 대해 몸을 안으로 관찰하거나, 몸에 대해 몸을 밖으로 관찰하거나, 몸에 대해 몸을 안팎으로 관찰한다. 또는 몸에 대해 생성의 현상을 관찰하거나, 몸에 대해 소멸의 현상을 관찰하거나, 몸에 대해 생성과 소멸의 현상을 관찰한다. 단지 그에게 순수한 앎과 순수한 새김이 있는 정도만큼 ‘몸이 있다.’라고 하는 새김이 이루어진다. 그는 세상의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M10)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핵심은 생멸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몸은 나도 모르는 동안 끊임 없이 신진대사 작용을 하고 있다. 마음은 늘 감각대상에 가 있다. 몸과 마음은 나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것이다. 이런 몸과 마음을 나의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몸과 마음이 나의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런 몸과 마음을 나의 것으로 만들려면 제어해야 할 것이다. 마치 왕국이 왕에 의해 다스려질 때 왕의 것과 같음을 말한다. 그러나 제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몸과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면 나의 것이 아니다. 이럴 때는 관찰해야 한다. 마치 남의 다리 보듯이 제삼자가 되어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에서 생멸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 바른 길일까?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은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한다. 또한 논서와 주석을 근거로 한다. 위빠사나 수행에 대하여 “볼 때마다 들을 때마다 맡을 때마다 알 때마다 생각해서 알 때마다 생겨나는 모든 물질-정신 대상들을 관찰하여 무상-고-무아의 성품일 뿐이라고 사실대로 안다.”(담마짝까법문, 174-175쪽)라고 했다.
 
몸과 마음은 늘 변화된다. 이는 오온이 변화되는 것과 같다. 몸,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은 여섯 가지 감각대상에 따라 늘 변화되는 것이다. 이는 마음이 늘 감각대상에 가 있는 것과 같다. 이럴 때 새김이 없으면 느낌에 휘둘린다. 즐거운 느낌이면 거머쥐려 하고 괴로운 느낌이면 밀쳐내려 한다. 한마디로 탐욕과 성냄으로 사는 것이다. 어리석은 삶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탐, 진, 치로 살아간다. 이렇게 욕망과 분노와 무지로 살아 가는 사람들이 가는 길이 옳은 길일까?
 
여기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의 길은 많은 사람들이 가는 대도(大道)이다. 사람들이 자주 가는 길이라고 해서 바른 길일까?
 
자주 가는 길은 길이 넓어진다. 대로라고 해서 바른 길일까? 그 반대일 수 있다. 왜 그런가? 탐욕으로 살고 분노로 살고 무지로 사는 사람들이 가는 길은 가서는 안되는 길이다.
 
부처님은 두 갈래 길에서 바른 길로 가라고 했다. 왼길로는 가지 말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왼길은 대부분 사람들이 가는 길이다. 대로도 해당된다. 그 길은 욕망의 길, 분노의 길, 무지의 길이다. 그 길로 가면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다.
 
부처님은 바른 길로 가라고 했다. 두 갈래 길에서 오른 길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바른 길은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이라는 사실이다. 극히 일부 소수의 사람들만이 가는 길이다. 그 길은 다름 아닌 팔정도의 길이다. 팔정도의 길로 가면 불사의 길로 가게 된다.
 
죽음의 길과 불사의 길
 
왜 수행을 하는가? 불사의 길로 가기 위해 수행을 한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 대부분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로 가는 것이다. 그 길은 험난할 수도 있다. 아무고 가지 않으니 험난한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오래 전에 깨달은 자들이 간 길이다.
 
바른길로 가고자 수행한다. 죽음의 길로 가고자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불사의 길로 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새겨야 한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어떻게 새겨야 하는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새겨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멸현상을 관찰해야 한다. 그래서 염처경에서는 “몸에 대해 생성과 소멸의 현상을 관찰한다.”(M10)라고 했다.
 
사람들이 자주 길은 넓은 길이다. 그러나 그 길로 가면 죽음이다. 탐욕으로 살고, 분노로 살고, 무지로 사는 사람들이 가는 길의 종착지는 죽음이다. 반면에 무탐, 무진, 무치로 사는 길은 작은 길이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다. 그런데 그 길은 불사의 길이라는 사실이다. 왼길과 바른 길, 두 갈래 길에서 어느 길로 갈 것인가?
 
지혜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통일을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멸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멸현상은 매우 빠르게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생멸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순간집중이 요구된다. 찰나삼매가 있어야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마하시 사야도는 찰나삼매에 대하여 초선정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왜 그런가? 이는 마하시 사야도가 “사유-고찰-희열-행복-하나됨이라는 다섯 가지 선정구성요소가 있는 것으로 같습니다.”(담마짝까법문, 199쪽)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찰나삼매는 근접삼매와도 같은 것이고 초선정과도 같은 상태라고 했다. 이는 초선정에서 볼 수 있는 위딱까, 위짜라, 삐띠, 수카, 그리고 찟따에까각가따라는 다섯 가지 선정요소를 구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Dhp.372)라는 가르침이다. 지혜와 선정은 항상 함께 함을 말한다.
 
법구경에서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라고 했다. 이 가르침에 대한 주석을 보면 “그의 마음은 통일되어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본다.”(DhpA.IV.110)라고 설명되어 있다. 지혜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이 통일 되어 있어야 함을 말한다.
 
찰나의 마음 하나됨, 위빠사나찰나삼매
 
마음이 통일 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선정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선정이라 하여 반드시 사마타선정만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위빠사나찰나삼매(khaikacittekaggatā)’도 이에 해당된다고 했다.
 
위빠사나찰나삼매에 대한 비판도 있다. 임승택 선생은 논문에서 근거가 빈약하다고 말한다. 비판을 생명으로 삼는 학자들의 견해는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경지에서 말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위빠사나 초보 수행자이다. 스승이 없는 상태에서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에 크게 의존한다. 먼저 가 본 사람들의 길을 따라 가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를 문자로 남겨 놓았다.
 
마하시 시야도는 찰나 삼매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이 찰나삼매가 힘이 좋아졌을 때를 시작으로 관찰해야 하는 물질-정신 대상들은 새로 바뀌어도 관찰하는 마음의 집중은 하나로 이어지는 듯이 된다. 첫 번째 관찰하는 마음의 집중처럼 두 번째, 세 번째 관찰하는 마음 등도 마찬가지로 집중된다. 그때에는 마치 사마타 선정들과 비슷한 상태가 되기도 한다. (사마타 수행과) 다른 점은 사마타 선정의 대상은 바뀜이 없이 하나의 대상이다. 물질과 정신일 뿐으로도 드러나지 않는다. 생겨남과 사라짐으로도 드러나지 않는다. 위빳사나 삼매의 대상들은 새로운 것이어서 계속 바뀐다. 물질과 정신일 뿐으로도 드러난다. 지혜가 성숙되었을 때는 생겨남과 사라짐도 드러난다. 이것만 차이가 난다. 집중되는 모습은 다르지 않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172-173쪽)
 

 
찰나삼매에 대하여 가장 알기 쉽게 설명해 놓았다. 사마타 선정은 고정된 대상이지만 위빠사나 선정은 생멸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대상이 자꾸 바뀌기 때문에 매우 세밀한 집중이 요구 된다. 어쩌면 찰나삼매는 선정삼매보다 더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찰나삼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접한 용어이다. 지혜는 선정이 있어야 생겨난다고 하는데 찰나삼매도 선정이기 때문에 당연히 지혜가 생겨난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는 복주석을 인용하여 카니까찟떼각가따(khaikacittekaggatā), 즉 ‘찰나의 마음하나됨’또는 ‘위빠사나찰나삼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 의미는 ‘근접삼매, 본삼매만 마음을 고요히 머물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빳사나 찰나삼매도 고요히 머물게 할 수 있다’라는 뜻이다. “어느 정도 힘이 있으면 고요히 머물게 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다면 “ārammane nirantaram ekakärena pavattamano(대상에 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생겨나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근접삼매와 비슷하게 되었을 때 관찰하는 사이에 이런저런 생각 등의 장애들이 생겨나지 않게 된다. 관찰하는 것만 계속 이어져 생겨난다. 그렇게 되었을 때 고요히 잘 머물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pațipakkhena anabhibhūto appito viya(반대되는 장애법들과 섞이지 않고 마치 본삼매처럼)”이라는 구절을 통해 생멸의 지혜, 무너짐의 지혜 등과 결합하는 찰나삼매는 그것보다 더 힘이 좋아져서 본삼매처럼 위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삼매는 반대되는 법들이 괴롭힐 수 없고 방해할 수 없어 본삼매처럼 마음을 고요히 머물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173-174쪽)
 
 
이 설명은 대복주서를 근거로 한 것이다. 대복주석에서는 “찰나의 마음 하나됨(khaikacittekaggatā)이라고 하는 것은 위빠사나 마음의 그 찰나만 머무는 삼매이다.”(Pm.i.342)라고 했다. 그런데 이 찰나삼매에 대하여 “관찰하는 물질-정신 대상에 한 종류의 집중된 모습으로 끊임없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관찰해야먄 변화하는 대상에 대한 성품을 관찰 할 수 있다. 그 성품은 다름 아닌 무상, 고, 무아이다.
 
가장 먼저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여 관찰해야
 
왜 위빠사나수행을 하는가?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바란다면 사마타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단지 호흡만 보는 것도 사마타수행에 해당된다. 또한 불수념처럼 부처님을 계속 생각하는 것도 사마타수행이다. 자애의 마음을 계속 내는 것도 사마타수행이다.
 
 
사마타수행만으로 지혜가 생겨나지 않는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지혜가 생겨난다. 이를 위빠사나 지혜라고 한다.
 
선정에서 지혜를 얻고자 한다면 먼저 몸과 마음에서 생멸하는 현상을 관찰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먼저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여 관찰해야 한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관찰하고자 할 때 찰나삼매 상태가 되어야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 했을 때 여러 단계가 있다. 여러 부품의 과정과 여러 단계의 꺼짐의 과정도 관찰해야 한다. 마치 현미경을 들여다 보듯이 미세하게 관찰해야 한다. 마음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카니까찟떼각가따(khaikacittekaggatā)에 대하여 ‘찰나의 마음하나됨’또는 ‘위빠사나찰나삼매’라고 이름 붙였을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스승으로 삼아
 
우안거를 맞이 하여 매일 오전과 오후에 한시간 앉아 있는다. 행선을 할 때는 여섯 단계로 한다. 가능하면 발의 움직임과 이를 아는 마음을 새기고자 한다. 새김이 좋을 때는 잡념이 일어나지 않는다.
 
좌선 할 때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고자 한다. 배의 부품에도 여러 단계가 있어서 세밀하게 보고자 한다. 이럴 때 마음이 밝은 상태이면 잘 보이는 것 같다. 마치 불이 밝은 방에서 개미가 지나가는 것도 보일 정도가 되는 것이다.
 
찰나삼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접하게 된 용어이다. 사마타수행만 하는 사람은 이런 용어를 모른다. 오로지 화두만 들고 있는 수행자도 카니까찟떼각가따(khaikacittekaggatā), 즉 ‘찰나의 마음하나됨’또는 ‘위빠사나찰나삼매’라는 말을 모를 것이다.
 
수행초보자이다. 십년 전에도 초보자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초보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훌륭한 스승을 만났다. 그것은 마하시 사야도가 60년도 전에 써 놓은 논서나 법문집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가 나의 스승이다. 오늘도 내일도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 가다 보면 끝이 있을 것이다. 어느 대승위빠사나 스승은 “이제 고통의 끝장을 봅시다.”라고 말했다. 나도 끝장 볼 날 있을까?
 
 
2024-08-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