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김은 전천후 수행용어
몸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한다. 새벽에 잠에서 깼을 때 몸 상태부터 살핀다. 가장 염려 되는 것은 등의 한기이다. 찬 기운을 느낄 때 감기를 의심하게 된다. 다음으로 머리를 살핀다. 머리 한쪽이 묵직하면 그날 힘들게 보낼 수 있다.
머리가 묵직했다. 일어나기가 힘들 정도가 되었다. 혹시 뒷골 당기는 현상이 일어날까 염려 되었다. 골이 때리면 무조건 쉬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오늘 잘 보낼 수 있을까?
머리 묵직한 현상은 더 이상 나지 않는다. 깨어 있어서 그런 것일까? 평소와 다름 없이 걸어서 백권당으로 왔다. 그리고 계란과 고구마와 감자를 먹고 커피를 마셨다.
오늘도 절구커피를 마시며
커피가 보약이다. 이마트 안양점 ‘노브랜드’매장에서 샀는데 세 가지 종류 가운데 상품이다. 볶은 원두가 일키로에 만팔천원대이다. 신맛, 단맛, 쓴맛이 골고루 강하다. 무엇보다 향이다.
절구커피를 마신다. 왜 절구커피인가? 절구통에 절구질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쭈그리고 앉아서 원두를 한 움큼 집어 넣고 공이질 한다. 원두가 잘게 부서지는데 알갱이는 제각각이다.
절구커피 맛이 최상이다. 더운 날씨라 얼음조각 서너 개를 넣는다. 술술 잘 넘어간다. 보약 마시는 것 같다. 잘게 부서진 것이 큰 것, 중간 것, 작은 것 등 다양해서 신맛, 쓴맛, 단맛이 골고루 배합되어 있어서 최상의 맛이 된다. 여기에 향도 있어서 더 맛이 난다.
마음챙김 용어는 반쪽, 새김은 온전
오늘 하루 일과는 명상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행선과 좌선을 하는 것이다. 아침에 행선을 하면 고귀한 자가 되는 것 같다. 미천한 자라도 발의 움직임에 마음을 두고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좌선은 망상으로 보내기 쉽다. 삼십분 동안 집중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25분 망상으로 보내다가도 5분 집중이 이루어지면 보상이 되고도 남는다.
오늘 아침 좌선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싸띠의 용어에 대한 것이다. 흔히 ‘마음챙김’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반쪽짜리 말 밖에 되지 않는 다고 생각한 것이다. 반면에 ‘새김’이라는 말은 백프로 의미가 잘 전달된 말이라고 본다.
사람들은 큰 길로 가고자 한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 좋은 길로 여기는 것이다. 종교도 많은 사람이 믿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싸띠 용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널리 확산되어 있다. 그러나 좌선을 하다 보니 백프로 잘 전달되는 말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왜 그런가? 싸띠라는 말은 수행용어이기도 하지만 교학용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좌선을 하다 보면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떠오른다. 잡념도 있지만 경전에서 본 것도 있다. 후자는 번뇌라기 보다는 진리에 가깝다. 왜 그런가? 부처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축생과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사유능력이다. 사유능력이 없는 축생은 먹기에 바쁘다. 하루종일 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와 같은 축생은 먹지 않을 때는 새김질 하기도 한다.
새김이라는 말이 있고 되새김이라는 말도 있다. 새김이라는 말은 기억한 것을 강화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조각하듯이 새기는 것이다.
부처님이 설한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새겨두고자 할 때 집중이 요구된다. 기억해 두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회상해 본다. 중요하다고 여기면 외울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새기는 것이다.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오로지 수행용어에 해당된다. 좌선할 때만 쓰이는 것 같다. 행선할 때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잘 쓰이지 않는 것 같다.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해 내고자 할 때도 잘 쓰이지 않는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챙김 용어는 오로지 좌선용이라고 볼 수 있다.
새김이라는 말은 전천후용어이다. 좌선뿐만 아니라 행선에도 쓰이고 가르침을 기억해 내는 것도 해당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일상에서 새김이라는 용어가 폭넓게 사용된다는 것이다.
위빠사나선원에 가면 기본교육을 시켜 준다. 대개 세 가지이다. 행선과 좌선과 일상에서의 싸띠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가장 어려운 것은 일상에서 싸띠하는 것이다.
일상은 행, 주, 좌, 와로 표현된다. 그런데 행, 주, 좌, 와는 몸관찰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일상에서의 싸띠는 신념처에 해당된다.
일상에서 어떻게 싸띠를 유지할 수 있을까? 누군가와 대화한다면 싸띠는 깨질 것이다. 책을 보아도 싸띠는 깨질 것이다. 무언가 언어적 행위를 하면 싸띠는 깨지게 되어 있다.
어떤 스승은 책을 보지 말라고 한다. 책을 보면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부처님 가르침이 실려 있는 책을 보지 말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위빠사나선원에 집중수행 들어가면 법문을 해 준다. 매일 아침 법문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교학과 수행이 함께 가는 것이다. 오로지 행선과 좌선만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도 싸띠하는 것이다. 싸띠의 본래 뜻이 기억이기기 때문에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새기는 것도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가르침을 마음챙김한다는 말은 어색한 표현이다.
선정에서 지혜가 나온다고 말한다. 법구경에서는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Dhp.372)라고 했다. 이 말은 주석에 따르면 “선정에 들지 않는 자에겐은 지혜가 없다. 선정에 드는 자에게는 지혜가 있다. 그의 마음은 통일되어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본다.”(DhpA.IV.110)라고 설명되어 있다.
매일 아침 자리에 앉아 있는다. 평좌하고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본다. 그러나 망상의 시간을 보내기가 쉽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경전문구가 떠오른다. 갑자기 새김이라는 말이 마음챙김이라는 말보다 의미가 잘 전달된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싸띠해야 한다. 이때 마음챙김이나 싸띠라는 말을 함께 사용해도 좋다. 그러나 경전의 문구를 기억하고 사유하고 외우는 것에 대하여 마음챙김한다고 표현하는 것은 어색하다. 새김이라고 말하면 자연스럽다. 그러나 무엇보도 일상에서 행위에 대한 것이다.
일상은 행, 주, 좌, 와에 대한 것이다. 대변을 눌 때나 오줌을 눌 때도 해당된다. 머리를 감을 때도 싸띠 해야 한다. 이럴 때 마음챙김한다는 말은 어색하다. 그러나 새긴다는 말은 와 닿는다.
저열한 구함과 고귀한 구함
사람들이 많이 사용한다고 하여 진리는 아니다. 왜 그런가? 사람들은 탐, 진, 치로 살기 때문이다. 욕망의 존재인 사람들이 자주 가는 길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욕망이 없는 상태, 즉 선정의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진리에 가깝다. 그래서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Dhp.372)라고 했다. 또한 주석에서는 "그의 마음은 통일되어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본다.”(DhpA.IV.110)라고 했다.
논서를 읽으면 늘 마음에 자극이 된다. 기억하고 싶은 문구가 발견되면 글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난다. 이런 것도 새김에 해당된다.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에 저열한 구함과 고귀한 구함에 대한 것이 있다.
저열한 구함은 일반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다. 탐, 진, 치에 절어 사는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다. 어떤 것인가? 이는 “자기 스스로 늙기 마련이면서 역시 늙기 마련인 처자식이나 금은 등 생명 있고 생명 없는 감각욕망 대상들을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찾고 구하고 거머쥐는 것”(54쪽)을 말한다.
저열한 구함이 있다면 고귀한 구함도 있다. 고귀한 구함은 저열한 구함의 반대에 해당된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가 늙기 마련이고 병들기 마련이고 죽기마련이기 때문에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법을 구하는 것”(54-55쪽)을 말한다.
일반사람들은 저열한 삶을 살아간다. 수행자는 고귀한 삶을 살아간다. 일반사람들은 생, 노, 병, 사로 살아가지만 수행자는 생, 노, 병, 사를 극복하기 위해서 살아간다. 그래서 수행자는 생, 노, 병, 사의 삶에서 허물을 본다. 이는 생, 노, 병, 사의 성품을 보는 것과 같다.
생, 노, 병, 사에서 허물을 보면 벗어나고자 할 것이다.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법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불사의 경지인 열반을 지향한다.
부처님은 왜 출가했을까?
부처님은 왜 출가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담마짝까법문에서 보살의 출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보살이 네 번째로 성을 나서 공원으로 갔을 때 사문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 사문은 보살에게 자신은 출가해서 선법을 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보살에게 재가자의 삶을 떠나 사문이 되어 늙음 과 병들과 죽음이 없는 법을 구해야겠다는 거룩하고 훌륭한 생각이 생겨났습니다.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법을 스스로 구한 뒤 다른 많은 중생도 그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법을 얻도록 설하고 제도해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매우 거룩하고 드높은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담마짝까법문, 58쪽)
부처님의 출가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든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거창한 서원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 당면하고 있는 괴로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한 것이다.
출가수행자들이 있다. 그들은 왜 출가했을까? 참으로 궁금한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님은 왜 출가했습니까?”라고 물어 본다.
여러 출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도피의 수단으로 출가한 사람도 있고 생계수단으로 출가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출가는 어떤 것일까? 이는 맛지마니까야 ‘랏타빨라경’(M82)에 실려 있는 네 가지 출가이유를 보면 알 수 있다.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랏타빨라의 출가이유를 보고서 출가했다고 한다. 그 네 가지는 어떤 것인가? 이는 1) “이 세계는 불안정하여 사라진다”라는 것과, 2) “이 세계는 피난처가 없고 보호자가 없다.”라는 것과, 3) “이 세계는 나의 것이 없고 모든 것은 버려져야 한다.”라는 것과, 4) “이 세계는 불완전하며 불만족스럽고 갈애의 노예상태이다.”라는 이 네 가지 이유로 출가한 것이다.
랏타빨라의 출가이유를 보면 출가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으로 출가한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도피형 출가, 생계형 출가가 많은 것이다. 그런데 마하시 사야도는 법문집에서 “더욱이 출가는 ‘saṃsāra vaṭṭadukkhato mocanaṭṭhāya nibbānassa sacchikaraṇaṭṭhāya 윤회윤전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120쪽)라고 했다.
부처님은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했다. 결국 윤회윤전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출가,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출가가 되었다. 그렇다면 윤회를 벗어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저열한 삶과 고귀한 삶으로 설명한 것이 초전법륜경이다.
감각을 추구하는 삶은 왜 저열한가?
초전법륜경에 대하여 흔히 ‘고락중도’라고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여러 가지 중도가 있지만 고행과 쾌락의 추구라는 양극단을 떠난 중도를 말한다.
법문집을 읽다가 새겨 두고 싶은 것이 많다. 담마짝까법문에서 고행과 쾌락에 대한 것도 그렇다. 먼저 쾌락에 대한 것이다.
고락중도에서 락은 감각욕망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은 이런 감각적 쾌락에 대하여 저열한 것(hina)이라고 했다. 왜 저열한가? 탐, 진, 치로 살아가는 일반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각을 추구하는 삶이 저열한 것은 저열한 번뇌가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열한 번뇌는 생, 노, 병, 사가 될 것이다. 그런데 감각을 추구하는 삶이 저열한 것은 축생의 삶과 다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축생이나 인간이나 동물이라는 것에서는 같다. 인간이 감각만을 추구한다면 동물적 삶만 사는 것과 같다. 감각쾌락욕망은 저열한 축생들이나 아귀들이나 심지어 구더기들도 즐기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노인 성문제를 다른 영화가 있다. 제목은 ‘죽어도 좋아’이다. 그런데 개나 돼지나 닭 등 축생, 벌레들도 “좋구나, 좋구나”라며 감각 쾌락을 즐긴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생, 노, 병, 사의 반복이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는 감각을 즐기는 삶에 대하여 “그런 저열한 중생들이 즐기는 것과 같기 때문에도 저열합니다.”(119쪽)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 것은
사람들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늘 즐길거리를 찾는다. 눈으로는 매혹적인 형상을 찾고자 두리번거린다. 귀로도 역시 매혹적인 소리를 찾는다. 다섯 가지 감각영역을 한시도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마음은 내버려 두면 감각대상에 가 있기 마련이다. 눈으로, 귀로, 코로, 혀로, 몸으로 끊임 없이 감각대상을 찾는다. 여기에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초전법륜경 집성제에서는 “난디라가사하가따 따뜨라 따뜨라비난디니 (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라고 했다. 이 말은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한다.”(S56.11)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감각적 즐거움을 찾아 여기저기 찾아 다닌다. 마음은 늘 감각대상에 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다시 태어남을 유발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딴하 뽀노바위까(taṇhā ponobhavikā)”, 즉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S56.11)라고 한 것이다. 윤회하는 삶을 말한다.
감각을 추구하는 삶은 미래 새로운 존재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윤회하고 윤전하는 삶을 말한다. 그럼에도 어른이나 아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여기저기서 즐기는 삶을 살아간다.
아이는 끊임 없이 재미를 찾는다. 모래놀이 하는 것도 재미가 있어서 하는 것이다. 어른이 볼 때는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몰라도 아이에게 있어서는 즐길 거리인 것이다.
부자는 즐길거리가 많다. 예산이 풍족하여 해외여행도 한다. 더 풍족하면 도박도 할 것이다. 그것도 만족하지 못하면 마약을 하게 될 것이다.
가난한 자라고 해서 즐기지 말라는 법은 없다. 아이가 모래놀이하면서 즐기는 것처럼 자신의 예산 한도 내에서 즐기는 것이다. 부자가 소고기에 와인을 먹을 때 가난한 자는 삼겹살에 소주를 먹는 것이다.
부자라고 해서 감각적 쾌락을 마음껏 즐기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자도 감각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이는 “재산이 없는 이들도 할 수 있는 만큼 구해서 즐깁니다. 성년이 되면 으레 결혼해서 감각욕망의 행복을 누리려고 생각합니다.”(담마짝까법문, 119쪽)라는 말로도 알 수 있다.
몸을 힘들게 해서 이전의 업들을 다하게 하고자
수행자에게 있어서 감각적 욕망을 마음껏 추구하는 삶은 극단이다. 그런데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또 하나의 극단이 있다. 그것은 자신을 학대하는 고행이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기 전에 6년동안 고행했다. 그러나 스스로 힘들게 하는 고행은 무익한 것이라고 했다.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큰 이유에 해당된다.
부처님 당시에는 고행이 유행했었던 것 같다. 서양이라 볼 수 있는 그리스 철학자들은 고행에 대하여 일종의 동경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고행은 자이나교도에게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자이나교도들은 오늘날에도 고행을 한다. 부처님 당시에도 고행을 했었다. 그들이 고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몸을 힘들게 해서 이전의 업들을 다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담마짝까법문, 129쪽)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자이나교에서는 업을 지으면 업을 소멸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업이라는 것이 그 보이는 형색과 자아가 결합해서 새로운 업이 생겨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의도가 업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다.
보는 것마다 업이고 듣는 것마다 업이라면 언젠가 업의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 언젠가 받게 될 과보를 지금 받게 된다면 과거에 지은 업이 해소될 것이다. 그래서 고행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몸을 힘들게 해서 이전의 업들을 다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과거의 업들은 소멸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양극단을 배제 했다. 초전법륜경에서는 고락중도가 된다. 결국 연기의 가르침이다. 고락중도는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으로 성취된다.
새김은 전천후 수행용어
수행을 왜 하는가? 교학적 배경 없이 오로지 수행만 했을 때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다. 정견을 갖추지 않으면 과녁을 벗어난 화살처럼 될 수 있다.
수행은 반드시 행선이나 좌선하는 것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명상홀에서 행선이나 좌선하면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남 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수행은 새기는 것이다. 늘 새기는 것이 수행이다. 늘 싸띠 하는 것이 수행임을 말한다. 행선할 때도 새김이 있어야 하고, 좌선할 때도 새김이 있어야 한다. 일상에서도 새김이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하여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좌선에만 적용되는 말이 될 수 있다.
경전을 보는 것도 수행이다. 논서를 보는 것도 수행이다. 경전이나 논서의 문구를 기억하고 사유하고 새기는 것도 수행인 것이다. 또한 수행기를 작성하는 것도 수행에 해당된다.
재가우안거 18일째이다. 좌선은 30분 했을 뿐인데 이렇게 쓰다 보면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이렇게 쓰는 행위도 수행에 해당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늘 기억하고 사유하고 새기면 수행이 된다. 수행이라 하여 행선이나 좌선하는 것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일상이 수행이 되려면 늘 새김이 있어야 한다.
글을 쓰는 것도 새김이 있어서 가능하다. 이렇게 본다면 새김은 전천후 수행용어가 된다. 행선, 좌선, 일상에서 모두 적용가능한 용어이다. 마음챙김이라는 말보다 새김이라는 말이 더 수승한 이유에 해당된다.
2024-08-0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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