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끝을 보고자 했으나
반가운 손님이 찾아 왔다. 오랜만에 온 손님이다. 그 동안 오지 않아서 기다리기도 했다. 통증이 찾아 온 것이다.
매일 의무적으로 한시간 앉아 있기로 했다. 스스로 약속한 것이다. 이를 ‘결정바라밀’이라고도 할 수도 있다.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결심을 하면 목표로 하는 것이 달성될 수 있다.
백권당에 명상공간이 있다. 사무실 반을 칸막이로 막아 놓아 명상공간으로 활용한 것이다. 2020년 1월에 만들었다.
명상공간은 세 평이 약간 넘는다. 매트 깐 면적만 계산 한 것이다. 매트 위에는두께가 10센티 되는 두꺼운 방석이 있다. 대단히 푹신하다. 페이스북친구가 선물해 준 것이다.
처음에는 방석을 반으로 말아 앉았다. 그러다 보니 엉덩이 닿는 면적이 좁았다. 올 여름부터는 두께가 3센티 되는 암갈색 레자방석 세 개를 겹쳐 놓고 앉고 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좌선이 안정되었다.
명상공간을 만든지 3년 10개월 되었다. 처음에는 대단한 결심을 했다. 매일 하루 한시간 앉아 있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명상공간을 만든 것은 생업이 있기 때문이다.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다. 언제 전화가 걸려 올지 모른다. 마치 비상대기 하는 것처럼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어야 한다. 이러다 보니 십일코스와 같이 선원에서의 집중수행은 꿈도 꾸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사무실에 명상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루 한시간 앉아 있기가 쉽지 않다. 처음 결심과는 달리 지켜 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초심을 잃지 않고자 했다. 드문 드문 기간이라도 한시간 좌선을 이어 나갔다.
수행을 하면 반드시 후기를 남겼다. 행선, 좌선, 암송 등 수행을 하면서 느낀 것을 구체적으로 써 놓았다. 이것이 모이고 모여서 책이 되었다. 이는 2020년 기록인 ‘96권 위빠사나수행기 II 2020’, 2021년 기록인 ‘108권 위빠사나수행기 III 2021’, 2022년 기록인 ‘109권 위빠사나 수행기 IV 2022’, 그리고 2023년 기록인 ‘110권 위빠사나 수행기 V 2023’으로 나타났다.
위빠사나 수행기 책을 하나 더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2023년 ‘우안거’에 대한 기록이다. 한국테라와다불교에서 우안거를 말한다. 음력으로 7월 보름에서부터 9월 보름까지 3개월동안 안거를 했다. 이는 양력 8월 1일부터 10월 29일까지 기간에 해당된다.
우안거 기간 동안에 ‘재가안거’를 했다. 안거 장소는 백권당 명상공간을 활용했다. 매일 오전에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을 목표로 했다.
재가우안거 88일동안 기록을 남겼다. 한시간 좌선하면 후기는 두 시간 쓰는 식으로 했다. 경전 문구를 곁들이며 쓰기도 했다.
이제 재가우안거 삼개월동안의 기록을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야 한다. 목차는 90개에 달하고 아마 500페이지가 넘을 것 같다.
재가안거하면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이번 안거에서는 몸을 만들고자 했다. 한시간 앉아있기를 생활화 하고자 한 것이다.
몸을 조복받고자 했다. 몸을 조복받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번 재가우안거 기간은 몸 만들기를 목표로 했다.
재가안거는 끝났다. 목표하는 대로 성취된 것 같다. 한시간 앉아 있어도 다리가 아프지 않은 것이다. 두 시간 가까이 앉아 있어도 전혀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
다리 문제가 해결되니 명상에 재미가 붙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겼을 때 평화가 찾아 온 것이다. 고요함이 계속 되었을 때 그대로 계속 머물고 싶었다. 이런 세계도 있었던 것이다.
재가안거가 끝났다고 해서 좌선을 그만 둔 것은 아니다. 몸이 만들어졌으니 매 일한시간 앉아있기를 계속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마치 애써 외운 빠알리경을 잊어 버리지 않기 위해 매일 암송하는 것과 같다.
우안거가 끝난 지 한달이 다 되어 간다. 처음 결심했을 때와 같이 매일 한시간 앉아 있고자 했다. 일감이 있어서 시간이 없을 때, 외출을 해서 시간이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한시간 앉아 있었다.
한시간 앉아 있는다고 하여 좌선이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한시간 앉아있기가 실패할 때도 많다. 이런 경우는 시간대를 달리 하여 앉는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목표로 하는 한시간을 채운다.
좌선은 보통 오전에 한다. 그러나 일이 있으면 오후에도 한다. 그러나 오후에 하면 오전보다 집중력이 떨어진다. 나른하기도 하고 졸립기도 한 것이 큰 이유이다. 오늘 좌선이 그랬다.
오늘은 오후 1시 36분에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앉자마자 졸음이 왔다. 혼침이 계속되었다. 이런 상태로 한시간을 채운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좌선을 중단했다. 그 자리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그렇다고 잠이 온 것은 아니다. 혼침 상태에서 한참 누워 있었다.
마침내 한시간을 알리는 알람소리가 울렸다. 한시간이 매우 길게 느껴졌다. 이렇게 본다면 한시간은 매으 긴 시간이다. 한시간 동안 일을 하면 엄청나게 진도가 나갈 것이다. 한시간 동안 글을 쓰면 몇 페이지 쓸 수 있다. 한시간 동안 운전을 하면 100키로 이상 갈 수 있다.
좌선을 하면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는다. 이런 상태로 한시간 앉아있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새김(사띠)이 확립되면 수월해진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겼을 때 세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오늘 첫번째 좌선은 실패했다. 두 번째로 좌선을 시도했다. 3시 51분부터 좌선에 들어갔다. 첫 번째 시도했을 때 보다 상황은 나았다. 졸음도 혼침도 없었다. 이대로 주욱 가면 될 것 같았다.
오늘 목표로 하는 한시간을 채워야 한다. 두 번째 좌선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한시간 앉아 있기로 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고자 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자 망념이 비집고 들어 왔다.
좌선 중에 망념이 들어 오면 힘들어진다. 마치 생각의 무게를 느끼는 것 같다. 망념이 망상이 되면 허탈해진다. 좌선을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마치 마음이 탈탈 털린 것 같다.
오늘 좌선은 힘들었다. 새김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번뇌망념에 시달렸다. 그런데 번뇌도 법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번뇌를 깨달음과 동일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새김이 없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번뇌망념은 괴롭다. 급기야 통증까지 야기하는 것 같다.
좌선에 임할 때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오늘 어떤 일이 있어도 배의 부품과 꺼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라며 다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김이 확립되지 않으면 번뇌망념에 지배당한다. 또한 통증이 생겨나는 것 같다.
재가우안거 삼개월 동안 초반 통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어느 순간 통증은 사라졌다. 통증을 객관적으로 분리해서 본 것이다. 이는 “통증 따로, 마음 따로”가 된 것이다. 통증이 마음에까지 영향을 주지 않은 것이다.
오늘 오랜만에 손님이 찾아 왔다. 통증이라는 반가운 손님이다. 통증을 이미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 온 것이다.
손님이 왔으면 반갑게 맞이 해야 할 것이다. 오랜만에 찾아 온 손님을 맞았다. 우안거 초기에 했던 방식대로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을 분리해서 본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11월 첫번째 금요니까야모임에서 합송한 경이 있다. 그것은 ‘몸은 병들어도 어떻게 하면 마음은 병들지 않을까’에 대한 것이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나꿀리삐따의 경’(S22.1)을 말한다.
금요니까야 모임에서 진도가 잘 나가고 있다. 이제 ‘존재의 다발 상윳따’(S22)에 이르렀다. 오온에 대한 것이다.
나꿀리삐따의 경은 정신과 물질을 분리하여 아는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나의 몸은 괴로워하여도 나의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S22.1)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좌선 중에 통증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위빠사나 스승들은 참고 견디라고 한다. 통증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관찰하라고 한다. 이는 수념처에 대한 것이다.
좌선 중에 다리가 끊어질 듯 아플 때가 있다. 이럴 때 겁을 먹는다. 마치 불구가 되는 것 아닌지 염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리에 통증이 시작되면 공포가 지배된다. 그런데 다리의 통증이나 공포는 심리적 현상이기 쉽다는 것이다. 좌선이 끝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듯이 깨끗하게 사라지기 때문이다.
다리에 통증이 온다고 해서 겁 먹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법을 관찰하기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야 한다. 통증이라는 고통스러운 느낌과 마주 했을 때 “이것이 법이다.”라며 새기는 것이다.
좌선 중에 일어나는 통증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심리적 공포가 더 크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나의 몸은 괴로워하여도 나의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S22.1)라고 안다면 “통증 따로, 마음 따로”가 되어 마음까지 아프지 않게 된다.
오늘 오랜만에 통증을 보았다. 통증이 있는 상태에서 마음을 통증과 분리해서 본 것이다. 육체적으로는 아프지만 정신적으로는 아프지 않았다.
통증은 영원히 계속 되지 않는다. 통증은 일어날만해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위빠사나 스승들은 가능하면 자세를 바꾸지 않고 통증을 남의 다리 보듯 지켜 보라고 말한다.
지켜 보면 사라진다는 말이 있다. 이는 알면 사라진다는 말과 같다. 마치 캄캄한 방에 불을 켜면 다 보이는 것과 같다. 통증도 지켜 보면 사라진다고 말한다. 마치 남의 다리 보듯 지켜 보면 사라짐을 말한다.
통증을 끝을 보고자 했다. 그러나 한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다리를 풀었다. 언제 통증이 있었느냐는듯이 다리는 멀쩡했다. 통증의 끝, 고통의 끝을 보고자 했으나 아직 보지 못했다.
2023-11-2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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