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 우안거 88일을 회향하며
온몸이 나른하다. 몸은 깃털처럼 가볍다. 평좌한 다리와 엉덩이의 감촉을 느끼지만 마치 솜처럼 가볍다. 선정인을 한 두 손도 감촉은 느끼지만 무게를 느끼지 않는다. 그냥 이대로 있고 싶다.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이대로 있고 싶다.
날씨가 매우 청명할 때가 있다. 거기에다 햇살까지 비치면 살 맛 난다. 명상도 그런 것 같다.
매일 한시간 좌선을 하지만 항상 좋은 상태는 아니다. 마치 날씨처럼 변화무쌍하다.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크게 좌우 된다. 오늘 아침 명상은 좀처럼 볼 수 없는 특별한 체험이었다.
오늘은 재가 우안거 해제날이다. 어제 마하위하라 카톡방에 올려진 담마끼띠 스님 글을 보니 공식적인 해제날은 어제이다. 음력으로 구월보름인 오늘은 까티나 축제가 시작되는 날이다.
음력으로 보름 하루 전에 우안거가 해제 되는 날이다. 다음날인 보름날부터 다음달 보름달까지 한달은 까티나 축제기간이다. 한달 중에 특정한 날을 선택하여 행사를 치루는 것이 테라와다불교의 전통이다.
어제 날자로 공식적인 우안거가 끝났다. 재가수행자의 재가 우안거 역시 어제 날자로 끝났다. 꼬박 88일 걸렸다.
재가 우안거는 급작스럽게 시작되었다. 우안거 입제법회가 있기 전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담마와나선원에서 7월 30일 우안거 입제법회에서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을 듣고 발심했다.
법회 다음날부터 안거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날은 음력으로 6월 14일이었다. 6월 15일부터 정식으로 카운트 된다. 재가안거는 6월 14일(8월 1일)부터 시작하여 어제 9월 14일(10월 28일)까지 88일 달린 것이다.
김도이 선생 수행기를 읽은 적이 있다. 미디어붓다에 실린 수행기를 2010년대 초반에 보았다. 그때 선생은 간화선 수행한 것에 대하여 “피가 철철나도록” 수행했다고 한다. 결과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 재가 우안거에서도 피가 철철나도록 해보고 싶었다.
이번 우안거에서 결심한 것이 있다. 그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루 한시간 앉아 있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그래서 스마트폰에 알람을 한시간으로 설정해 놓고 좌선에 임했다. 또 한가지 다짐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배의 부품과 꺼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겠다는 것이다.
두 가지를 다짐했다. 하나는 지켜졌고 하나는 지켜지지 않았다. 한시간 앉아 있기가 지켜지지 않는 날도 있었다. 재가의 삶을 살다 보니 갖가지 일로 인하여 30분 앉아 있는 날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 한시간 앉아 있었다. 한시간 버티기를 했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그러나 배의 부품과 꺼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번뇌와 망상의 나날을 보냈기 때문이다.
재가 우안거가 시작되었을 때는 여름이었다. 8월의 여름에는 땀을 비 오듯 흘렸다. 방석에 가만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다. 이럴 때 “피가 철철나도록”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한여름에는 “땀이 철철나도록” 앉아 있었던 것이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더 이상 땀은 철철 나지 않았다. 다리통증도 사라졌다. 안거 초반기 때는 다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이것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 날 통증과 맞짱 떴다. 통증이 이기는지 내가 이기는지 해보는 것이다. 다리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견디어 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든 생각은 “혹시 통증은 심리적인 것 아닐까?”라는 마음이 일어났다.
심리적인 것이 많다. 밤중에 자다가 화장실에 가는 것도 일종의 심리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좌선 중에 졸리는 현상도 일종의 심리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심리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개념에 지배 받는 것을 말한다. 생각에 지배 받는 것을 말한다. 공포 같은 것이다. 한번 무섭다고 생각되면 무서워서 견딜 수 없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통증도 심리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는 통증에 대한 공포를 말한다. 그런데 공포는 언어적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통증이 일어 났을 때 공포를 떼어 버리면 어떻게 될까? 견딜만 하게 된다. 이는 “통증 따로, 마음 따로”가 되는 것이다.
우안거 입제 법회 때 빤냐와로 스님이 당부한 것이 있다. 스님은 수행자들에게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볼 수 있는 안거가 되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이 사무쳐서 안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번 우안거를 급작스럽게 하게 된 동기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말이다. 이런 말은 좀처럼 듣기 힘들다. 특히 한국스님들은 이런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 테라와다 스님이라도 잘 쓰지 않는다. 그런데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보라고 했다.
왜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보아야 할까? 그것은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함이다. 이는 언어적 개념으로 보지 않기 위함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한다.
우안거를 시작 하면서 경행대를 만들었다. 사무실 벽면 통행로에 검정 테이프를 붙여 놓은 것이다. 한보에 30센티 간격으로 열 네 걸음 되는 길이의 경행대를 만든 것이다.
경행대를 만들어 행선을 했다. 행선은 육단계로 했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를 말한다. 발을 뗄 때는 뒷쿰치부터 든다. 앞쿰치는 나중에 뗀다. 발을 디딜 때는 수평으로 해서 동시에 닿도록 한다.
행선은 일 없이 해야 한다. 똑 같은 행위를 무한반복하듯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각단계마다 새기면서 움직이면 재미가 붙는다는 것이다. 집중이 잘 되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무의미해 보이는 일이 의미가 있게 된다.
오늘 행선을 이십분 동안 했다. 오랜만에 한 것이다. 그런데 척척 달라 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여섯 단계 동작을 새길 때 새김이 분명해진 것이다. 이런 날은 드물다. 갑자기 좌선도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좌선으로 가져 올 수 있다. 막바로 자리에 앉기 보다는 행선을 하여 형성된 집중을 가져 오면 효과적이다. 이는 “경행이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A5.29)라고 경전의 구절로도 알 수 있다
행선을 왜 하는가? 이는 행선에서 얻는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들어올림’에서 생겨난 세계들과 거기서 파생된 물질들이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은 ‘앞나아감’에 도달하지 않고 바로 그곳에서 소멸한다. 그러므로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Vism.20.65)라고 설명해 놓았다.
수행을 왜 하는가? 궁극적으로는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먼저 견해를 청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라는 개념과 관련이 있다.
나는 개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개념은 실재를 보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는 목적이 이에 해당된다.
행선을 할 때 앞으로 나갈 때 여러 단계를 거친다. 그러나 각 단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앞단계와 뒷단계가 같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무상한 것이다.
좌선을 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긴다. 부품에도 여러 단계가 있다.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계의 연속으로 되었다. 각 단계는 끊어짐이 있다. 이런 끊어짐이 있어야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은 끊어짐의 연속이다. 그렇다고 앞단계가 뒷단계로 넘어가지 않는다. 그 단계에서 끝난다. 이는 다름 아닌 무상이다.
무상은 무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을 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S22.17)라고 말씀하셨다.
어제 담마와나 북콘서트가 백권당에서 열렸다. 담마와나 수행자 열 명이 왔다. 그 중에 어느 수행자는 자신의 간화선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위빠사나 수행하기 전에 체험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체험해 보니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 1단계인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번 우안거 입제법회 때 빤냐와로 스님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보라고 했다. 이는 견해를 청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현상을 빤냣띠(개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빠라맛타(실재)로 보기 위한 것이다.
현상을 실재로 보면 무상한 것을 알게 된다. 배의 부품을 새겼을 때 움직임과 이를 아는 마음 두 가지만 있음을 알게 된다. 여기에 나라는 개념이 들어 갈 수 없다.
견청정 또는 견해의 청정은 빤냣띠(개념)을 부수기 위한 것이다. 언어적 개념이 들어가면 언어적 개념에 놀아날 수 있다. 이는 심리적 현상과도 같다. 밤중에 화장실에 간다든가, 다리에 통증이 발생했을 때 공포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먼저 견해를 청정하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다. 그것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으로 실현된다. 그런데 간화선과 위빠사나 모두를 경험한 수행자에 따르면, 간화선에서 화두를 타파했다는 것은 견청정 단계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는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 가장 첫 번째 지혜인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해당된다.
빤냐와로 스님은 입제법회 때 정신과 물질을 보라고 했다. 이는 초보수행자에게는 견해를 청정하게 하라는 말로 이해 되었다. 그래서 육단계 행선과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는 좌선을 통하여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보고자 노력했다.
오늘 오전 좌선은 8시 3분에 시작 되었다. 출발부터 좋았다. 이미 행선할 때 조짐이 보였다. 평소와 달리 육단계 행선할 때 새김이 분명했다. 이 여세를 몰아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지 오래 되지 않아 순간적으로 멈춤현상이 일어났다. 갑자기 사변이 고요해진 것이다. 이는 차량소음과도 관련이 있다.
우안거를 시작할 때 소음에 민감했다. 차 지나가는 소리, 전철 지나가는 소리,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 건물 전체에서 나는 알 수 없는 기계음 등 각종 소음에 스트레스 받았다. 그래서 귀마개까지 구매했었다.
오늘 좌선은 달랐다. 일시적으로 멈춤 현상이 온 것이다. 그것은 타이밍이 절묘했다. 차나 전철 지나가는 소리의 공백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깊은 산속에서 소음 없는 곳에서 앉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순간적으로 멈춤이 왔을 때 일시적으로 세상이 고요해졌다. 그리고 평온해졌다. 기쁨과 환희, 가벼운 황홀감, 그리고 행복이 왔다. 이는 몸의 나른함과 함께 왔다.
좌선을 할 때 몸이 나른할 때가 있다. 마치 잠을 푹 자고 났을 때 그 나른함과 같다. 순간적으로 멈춤이 있었을 때, 몸의 나른함이 왔을 때,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동시에 마음도 편안해졌다.
몸이 나른하고 마음이 평온할 때 이것 이상 좋은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이런 맛에 명상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날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치 청명한 날이 며칠 되지 않듯이 이번 우안거 동안 며칠 되지 않는다.
고요함과 평온함에 안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 고요함과 평온함이 있어야 법을 잘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때보다도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것이다.
고요함과 평온함을 맛보기 위해서는 조건이 형성되어야 한다. 먼저 오계를 지켜야 한다. 이번 안거기간 동안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취하도록 마신 적은 없다. 다만 분위기 때문에, 예의 때문에 한두잔 마신 적은 있다.
이번 안거기간 동안 음식을 절제했다. 특히 아침 식사는 매우 간단하게 했다. 그것도 제철에 나는 밤호박이나 밤고구마 같은 것으로 했다. 위에 부담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번 우안거에 대하여 ‘재가 우안거’라고 이름 붙였다. 생업과 함께 하는 안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루일과 중에서 오전은 수행으로 보냈다.
수행을 하면 반드시 수행기를 작성했다. 한시간 좌선을 하면 두 시간 후기를 쓴 것이다. 때로 후기를 세 시간 쓰기도 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오전은 수행으로 다 보내게 되었다.
2023년 우안거가 끝났다. 처음으로 재가 우안거를 해 보았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다. 필요에 따라 스스로 한 것이다. 더 나이 먹기 전에, 한살이라도 젊을 때 해 보고자 한 것이다.
우안거 삼개월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후기를 남겼다. 그것도 장문의 후기를 말한다. 좌선을 막 끝낸 상태에서 자판을 두드렸다. 있는 그대로 쓰고자 했다. 생생하게 기록하고자 한 것이다.
이번 안거에서 목표는 ‘한시간 앉아있기’였다. 앉아 있는 버릇을 들이기 위한 것이다. 삼개월 앉아 있다 보니 이제 몸이 길들여진 것 같다. 안거가 끝나도 계속 앉아 있고자 한다. 그러나 후기는 매일 쓰지 않는다. 드문드문 쓸 것 같다.
안거가 끝났다고 해서 만행을 떠나는 것은 아니다. 재가수행자는 삶의 현장을 떠날 수 없다. 안거가 끝났어도 안거하는 것처럼 매일 한시간 좌선은 계속될 것이다. 일생에서 큰 일 한 것 같다.
재가 우안거를 회향한다. 그 동안 애쓴 것을 나누고자 한다. 그래서 “모두 가져 가십시오, 모두 당신 것입니다.”라며 회향한다.
2023-10-2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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