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이 일상이 되도록, 재가 우안거 87일차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노래 ‘서른즈음’에 나오는 가사이다. 어느 테너 가수가 부른 것을 들었다. 언젠가 TV에서 본 것이다. 김광석 노래로 알려져 있다. 이십대 청춘을 보내고 나이 서른을 맞는 아쉬움에 대한 노래이다.
서른 살에서 배가 되는 나이에 이르렀다. 모두 사라지는 것도 배가 된 것 같다. 이럴 때 이런 게송이 생각난다.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S1.4)
상윳따니까야 ‘스쳐감의 경(accentisutta)’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세월은 스쳐간다고 했다. 이는 밤낮이 지나감을 말한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라고 했다. 이는 노래 ‘서른즈음’에서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라는 가사와 유사하다.
오래 살았다. 이순이 넘었으니 오래 산 것이다. 그러나 더 오래 산 사람들이 있다. 이들 앞에서 나이 자랑 하면 실례가 될 것이다.
어떤 이는 “너, 몇 살이야?”라며 나이를 따진다. 또 어떤 이는 속어를 써서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게.”라며 말한다. 이런 말은 세속에서 범부들이나 하는 말이다.
사람을 나이로 평가할 수 없다. 나이가 나보다 한 살이라도 많으면 “형님”이라고 부르거나 “언니”라고 부른다면 너무 세속적이다. 마치 조폭사회에서 나이에 따라 서열을 정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런 일은 조폭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사회단체 등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수컷들의 세계는 서열의 세계나 다름 없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생년에 따라, 학번에 따라, 사번에 따라 서열이 정해진다.
재가단체에서도 서열을 중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개 학번으로 따진다. 학번이 하나 높으면 형님이 된다. 조폭사회에서 나이에 따라 서열을 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렇게 형과 아우의 관계가 형성되면 어떻게 될까?
어느 단체나 모임에서 파벌이 없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 지연, 학연, 혈연을 확인하여 형님동생관계를 맺었을 때 단단한 파벌이 될 것이다. 이른바 ‘패밀리(family)’가 형성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가 남이가?”라고 하는 것이다.
마피아는 패밀리로 형성된다. 핏줄이 아니더라도 뜻을 함께 하면 패밀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시민단체나 사회단체에서 “형님” “아우”하면서 패밀리를 만들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반사람들은 나이로 위아래를 만들고자 한다. 그래서 자신보다 어리면 “머리에 피도 안마른 놈이.”라고 말한다. 조폭사회에서나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서열을 매겨야 제대로 매기는 것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인격의 성숙도’에 따른다.
나이만 먹었다고 해서 어른이 아니다. 이는 법구경에서는 “머리가 희다고 해서 그가 장로는 아니다.”(Dhp.260)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나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성숙도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격의 성숙도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는 “비록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 받은 인생의 초년생일지라도 때 맞춰 말하고, 진실을 말하고, 의미 있는 말을 하고, 가르침에 맞는 말을 하고, 계율에 맞는 말을 하고, 기억에 남는 말을 하고, 알맞은 말을 하고, 이유가 분명한 말을 하고, 한계가 있는 말을 하고, 내용이 있는 말을 한다면, 그를 두고 ‘슬기로운 장로’라고 한다.” (A4.22)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나이를 아무리 많이 먹었어도 탐, 진, 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사실상 어린아이나 같다. 그러나 어린아이라도 탐, 진, 치가 소멸된 상태라면 장로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칠세아라한이 나오는 것이다.
세월은 우리를 버린다. 청춘에서 중년에서, 중년에서 노년으로 되어 간다. 이를 게송에서는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린다.”라며 시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청춘은 우리를 버린 적이 결코 없다.
세월과 함께 살다 보니 버려진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젊은 이는 중년에 도달한 자를 버리고, 젊은이와 중년은 노년에 도달한 자를 버리고, 죽을 때가 되면 젊은이와 중년과 노년이 모두 우리를 버린다.”(Srp.I.23)라고 보는 것이다.
오늘은 재가 우안거 87일째이다. 이제 이틀 남았다. 내일은 담마와나선원 북콘서트하는 날이다. 모래는 음력 구월보름날로 테라와다불교 우안거가 공식적으로 끝나는 날이다. 오늘도 한시간 좌선을 했다. 오전 7시 51분부터 시작했다.
좌선에 들어가기 전에 예비동작이 있다. 한시간 좌선을 잘 하기 위한 것이다. 가장 먼저 음식을 조심해야 한다. 맵고 짜고 자극적인 것을 먹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집에서 쪄온 계란과 고구마, 그리고 동그란 모닝빵에 치즈 넣은 것을 먹는다. 여기에 꿀물을 곁들인다.
아침식사가 끝났다고 해서 곧바로 앉지 않는다. 커피타임을 가져야 한다. 커피도 신중하게 선택한다. 그것은 절구커피를 말한다.
커피는 절구질해서 마신다. 사무실에 절구통이 있어서 원두를 으깨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절구질 할 때 커피 향내가 진하게 난다는 것이다. 절구질 할 때 원두가 분쇄되는데 그때 향이 튀어 나오는 것이다.
절구질 커피가 최상이다. 커피전문점에서 아메리카노나 라떼를 마셔 보았지만 절구커피에 미치지 못한다. 기계로 간 커피도 그렇다. 그렇다면 왜 절구커피가 최상인가? 그것은 입자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절구질 하다 보면 큰 알갱이도 있고 작은 알갱이도 있다. 이를 종이필터 위에 올려 놓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특유의 절구커피가 만들어진다. 이른바 커피의 세 가지 맛, 즉 신맛, 쓴맛, 단맛이 모두 다 있는 것이다. 이는 입자의 다양성 때문일 것이다.
오늘 좌선은 스펙터클했다. 그렇다고 신비한 체험을 한 것은 아니다. 한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 수많은 사고, 수많은 반조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오토바이 한대에 의지하여 대륙횡단을 하는 바이커를 보았다. 페이스북에 육개월동안 실시간 중계하듯이 매일 소식을 알려 주었다. 주로 사진을 보여 준 것이다. 이런 사진과 질주를 접하면 스펙터클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명상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여행하면서 장쾌한 풍광이 있는 사진을 올려 놓는다. 글보다는 사진으로서 말하는 것 같다. 이런 스펙터클한 사진을 보면 장엄해 보인다. 그러나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이다. 불과 몇 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그런데 명상도 이와 같이 스펙터클하다는 것이다. 다만 오래 길게 접하는 것이 다르다.
좌선을 하면 언제나 그렇듯이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긴다. 다른 것은 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실재를 보기 위한 것이다. 어떤 이미지나 언어를 대상으로 한다면 이는 실재가 아니라 개념이다.
실재와 개념은 다른 것이다. 실재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언어적 개념을 걷어 내야 한다. 주관찰 대상을 새기면 언어적 개념을 제거할 수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 “하나도 놓치지 않으리라!”라며 다짐한다. 그러나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새김이 분명하지 않을 때 그 틈새를 비집고 생각이 들어 온다.
생각도 하나의 법이다. 이 세상에 법 아닌 것이 없다. 형상도 법이고 소리도 법이다. 냄새도 법이고 맛도 법이다. 당연히 생각도 법이 된다.
법에는 고유한 특성이 있고 일반적인 특성이 있다. 고유한 특성은 그 법에만 적용되는 독특한 것이다. 욕망이라는 법은 거머쥐려 하는 것이 고유한 특성이다. 성냄이라는 법은 밀쳐 내려 하는 것이 고유한 특성이다. 그런데 모든 법에는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상, 고, 무아라는 특성을 말한다.
좌선을 하다 보면 수많은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고 있을 때도 생멸한다. 새김이 없다면 망상으로 전개될 것이다. 그러나 새김이 있을 때는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순간적으로 사라진다. 이를 ‘찰라생찰라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모든 법은 생멸한다. 그런데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 일어나는 법은 매우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 정도 빠르기일까?
아비담마에 따르면 물질이 한번 일어날 때 마음은 16번 일어난다고 말한다. 여기서 물질은 눈의 감성 물질 같은 것이다.
눈이 있어서 대상을 볼 때 대상은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눈의 감성물질은 계속 생멸한다. 매우 짧은 기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눈의 감성물질에 대한 생멸을 1초로 본다면 그 1초 동안에 마음은 16번 생멸한다. 이렇게 본다면 좌선하는 도중에 생각이 생멸한다면 16분의 1초가 될 것이다.
결국 모두 사라지게 되어 있다. 일어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어난 것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한번 태어난 자가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먹다 남은 음식물을 버렸는데 썩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모두 사라져 가는 것이다. 서른 살 즈음에 이십대 청춘을 되돌아 보았을 때 모두 사라져 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물며 서른 살 보다 배나 더 산 자가 이 세상을 보았을 때 역시 모두 사라져 가는 것으로 볼 것이다.
청년은 나를 버렸다. 중년은 또 나를 버렸다. 이제 노년에 이르렀다. 언젠가 죽음이 나를 버릴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명상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 나이 먹어서 할 수 있는 것은 명상밖에 없는 것 같다. 세월의 수레바퀴에 치이여 여기까지 왔다. 세월을 넘어 설 수 있는 것은 명상 밖에 없다.
명상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 마치 중앙시장에서 호떡장수가 호떡을 눈을 감고도 만들 수 있듯이 명상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매일 앉아 있어야 한다.
명상의 달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호떡장수가 매일 호떡을 만들듯이 똑같은 행위를 반복해야 한다. 그것은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는 것이다.
백 번이든, 오백 번이든, 천 번이든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아야 한다. 마치 의미없는 행위를 하듯이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의미 없는 것 같은 일에 의미를 부여하면 고귀한 일이 된다는 사실이다.
달인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년, 이년, 오년, 십년, 이십년, 삼십년에 걸쳐 이루어진다. 호떡장수도 일이년 한 것이 아니다. 줄을 설 정도로 사람이 몰리는 것은 호떡의 달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명상의 달인이 될 수 있을까? 피나는 수련을 할 수밖에 없다. 피가 철철나게 대상을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무사가 수련하는 것과 같다.
무사는 어떻게 수련하는가? 일본 NHK 대하드라마 ‘아츠히메’를 보면 사츠마번 무사들이 수련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지겐류(示現流)’라는 무술을 연마한다. 어떻게 연마하는가? 하루에 통나무치기를 만 번 하는 것이다.
지겐류 검법은 독특하다. 오로지 ‘내려베기’ 기술 하나에 의존한다. 이 검법으로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렸다. 그런데 이 검법을 닦기 위해서는 목검으로 통나무를 만 번 친다는 것이다. 그것도 원숭이 소리와 함께 검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리 치는 것이다. 연기가 날 정도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진검승부하면 일격필살이다.
진검승부에서는 오로지 삶과 죽음만 있다. 공격을 해서 실패하면 죽음이다. 그래서 일격필살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통나무치기를 만 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명상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이런 게송이 있다.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까닭에, ‘수행승’인데, 그가 ‘그 결박을 풀 수 있으리라.’라는 것은 그가 그 계행과 그 마음을 표제로서 서술된 삼매와 세 가지 지혜로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여섯 가지 원리를 갖춘 수행승은, 예를 들어 남자가 땅 위에 서서 잘 드는 칼을 들어서 커다란 대나무 덤불을 잘라내는 것처럼, 이와 같이 계행의 땅에 입각해서 선정의 돌로 연마된 통찰의 지혜라는 칼을 정진력으로 책려된 예지적 지혜의 손으로 움켜잡고 일체의 자신의 상속 중에 생겨난 갈애의 결박을 풀고 절단하고 파괴해 야 한다.”(Vism.1.7)
참으로 통쾌한 게송이다. 마치 무사가 검으로 일격필살하는 것 같다. 그것은 갈애라는 대상이다. 수행자가 계, 정, 혜 삼학을 닦아서 지혜의 검으로 갈애를 일격에 베어 버리는 것이다.
이번 재가 우안거 목표가 있었다. 처음 안거를 맞이하는 입자에서 커다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다만 한시간 앉아있기 습관을 들이면 되는 것이다. 우안거가 끝나도 명상이 일상이 되고자 한다.
요즘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86일동안 매일 한시간 앉아 있다시피 하다 보니 이제 길이 든 것 같다. 설령 다리에 통증이 오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법을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기 때문이다.
한시간 명상 중에 갖가지 체험을 하게 된다. 어떤 때는 새김이 분명할 때가 있다. 갑자기 환해지면서 어두운 곳을 비추듯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김이 분명할 때 일어나는 생각은 찰라생찰라멸이라는 것이다. 이럴 때 ‘서른살 즈음’이라는 노래에서 “멀어져 간다.”라는 말이 실감난다.
2023-10-2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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