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내 세울 것이 얼굴밖에 없는 사람은, 재가안거 85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0. 25. 11:06

내 세울 것이 얼굴밖에 없는 사람은, 재가안거 85일차

 

 

명상이 항상 잘 되는 것은 아니다. 그날의 컨디션에 달렸다. 잠을 푹 잘 자고 나면 좌선도 잘 된다. 그렇다고 한시간 내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기복이 있다.

 

오늘 한시간 좌선을 했다. 어제 약간 체험한 것을 시도하고자 했다. 그것은 좌선 중에 일시적으로 환한 순간이 있는데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계속 붙들고 있고자 한 것이다.

 

한시간은 매우 긴 시간이다. 일을 한시간 집중해서 한다면 엄청난 성과를 낼 수 있다. 한시간은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한시간을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적으로 산다. 감각적 욕망으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눈이나 귀 등으로 오욕락을 즐긴다. 그러나 수행자들은 이와 반대로 감각적 욕망을 여의는 삶을 살아간다.

 

감각적 욕망이 있으면 앉아 있을 수 없다. 욕망과 분노로 사는 사람들은 오분도 앉아 있기 힘들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자가 눈을 감고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다는 것은 큰 일 하는 것이다.

 

오늘은 재가안거 85일차이다. 이제 안거 해제까지 카운트 다운이 시작 되었다. 앞으로 4일 남았다. 이번 재가안거에서 나는 어떤 성과를 이루었는가?

 

안거는 처음 해본다. 재가안거라 하여 스스로 이름 붙여 놓고 하는 것이다. 생업이 있기 때문에 선원에 들어가서 하지 못한다. 일과 수행을 병행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전에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을 목표로 했다.

 

첫 숫가락에 배부를 리 없다. 사무실에서 오전 한시간 앉아 있었다고 해서 어떤 큰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다만 발판을 마련해 놓을 수 있다. 그것은 버릇을 들이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매일 하면 습관이 된다. 매일 글을 쓰는 것도 습관에 따른 것이다. 수행도 매일 하면 습관이 될 것이다.

 

지금은 습관들이기 단계이다. 어떤 성과를 기대하는 단계는 아니다. 수많은 수행자들이 이런 과정을 겪어 왔을 것이다. 그것은 깨달음을 향한 긴 여정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열반일 것이다. , , 치가 끊어진 상태를 말한다. 정신과 물질이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나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상태가 되었을 때 도와 과를 이루었다고 말한다.

 

흔히 도통한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도는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열반이다.

 

열반의 순간에 대하여 묘사한 내용이 있다.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도 열반의 순간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묘사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매우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이 대상과 새김들이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2) 
잡아당겨 움켜쥐던 곳에서 벗어나듯이 대상과 새김들에서 벗어나 버렸다.
3) 
매우 단단히 묶여 있던 속박에서 갑자기 벗어나듯이 대상과 새김들로부터 벗어나 버렸다.
4) 
대상과 새김들이 사라지는 모습이 마치 등불이꺼져 버리듯이 매우 빠르다.
5) 
어둠 속에서 밝음으로 즉시 도달하듯이 대상과 새김들로부터 벗어 나 버렸다.
6) 
얽매임 속에서 자유로운 상태로하며 이르듯이 대상과 새김들로부터 벗어나 버렸다.
7) 
물속에가라앉듯이 대상이나 새김이 모두 가라앉아 버렸다.
8) 
달려오던 이를 가로막아 갑자기 밀어내듯이 대상과 새김이 멈추어버렸다.
9) 
대상과 새기는 마음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 106-107)

 

 

 

이것이 열반의 순간이다. 정신법과 물질법이 모두 사라져 버린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고 단멸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열반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외도들은 부처님의 열반을 비난했다. 부처님의 열반을 단멸로 본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어떠한 이유로 나에 대하여수행자 고따마 는 단멸을 설한다.’고 말한다면 마땅히 그렇게 말하는 이러한 이유 가 있습니다. 바라문이여, 나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단멸을 설하고 여러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의 단멸을 설합니다. 바라문이 여, 어떠한 이유로 나에 대하여수행자 고따마는 단멸을 설한다고 말한다면 마땅히 그렇게 말하는 이러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A8.11)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단멸을 설했다. 그러나 외도들이 말하는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하는 단멸은 아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단멸은 탐, , 치에 대한 단멸이고 또한 불선법에 대한 단멸인 것이다.

 

열반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런가? 열반은 언어적 개념을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말이나 글로 설명해도 자세히 설명할 수 없다.

 

부처님은 언어로써 열반을 설명했다. 어떻게 설명했는가? 비유로 설명했다. 이는 이띠붓따까에서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열반에 대한 게송이 대표적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계가 있는데,

거기에는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고,

무한공간의 세계도 없고, 무한의식의 세계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세계도 없고,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태양도 없고 달도 없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의처依處)를 여의고,
전생(轉生)을 여의고, 대상(對象)을 여읜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Ud.80)

 

 

부처님은 괴로움의 종식이 열반이라고 했다. 이런 열반은 언어로써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에 비유로써 설명했다. 그래서 열반의 세계에 대하여 해도 없고, 달도 없고라는 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도와 과를 이루려면 열반을 체험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오염원을 단계적으로 소멸시켜 나가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구출세간법, 즉 사향사과와 열반을 실현하는 것을 말한다.

 

깨달음은 자신에게 남아 있는 오염원을 소멸시켜 나가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한번에 깨닫게 되는 경우는 없다. 설령 그런 깨달음이 있다면 수행이 축적된 것이다. 수행을 해서 무르익었을 때 어떤 계기가 되어 터지는 것이다.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다고 했다. 낮은 단계의 도에도 깨달음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깨달음은 열반을 말한다. 성자의 흐름, 즉 사향사과의 첫 번째 단계인 수다원 단계에서도 깨달음이 있게 되는데 이는 열반을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수다원 단계를 견도(見道)라고 한다. 사다함과 아나함 단계를 수행도(修行道)라고 한다. 아라한의 단계는 무학도(無學道)가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네 단계의 깨달음, 즉 열반은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수행자가 열반을 체험하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다. 그런 열반은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열반과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 견도라고 한다. 궁극적 진리를 본 것이다.

 

수다원 단계에서 열반을 체험한 것은 궁극적 진리를 본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수타니파타 라따나경(보배경, Sn2.1)에 따르면, “궁극적인 길을 본 사람은 그것을 감출 수 없습니다.”(Stn.232)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라따나경을 다 외웠다. 외우게 된 동기는 이미우이 음악 때문이다. 이미우이 음악 중에 라따나경이 있는데 너무 아름다웠다. 하루 종일 듣다시피 했다. 지금도 듣고 있다.

 

이미우이의 라따나경 음악은 2007년에 알았다. 이후 매일 들었다. 지금까지 17년째 듣고 있다. 그런데 이 음악은 묘한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들으면 들을수록 환희심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음악은 명상음악으로 사용되고 더 나아가 치료음악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라따나경에 매료 되었다. 그것은 음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외워 보기로 했다, 그것도 빠알리어로 외우는 것이다. 마침내 2011 17개에 달하는 긴 길이의 게송을 모두 다 외웠다. 한달 보름 걸렸다.

 

음악도 알고 들으면 더 신심이 있다. 이미우이의 라따나경 음악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내용을 알고 들으면 기쁨과 환희는 배가 된다.

 

라따나경은 삼보에 대한 예경과 찬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서도 수다원 도와 과에 대한 게송도 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가장 와 닿는다.

 

 

Ye ariyasaccāni vibhāvayanti
Gambh
īrapaññena sudesitāni

Kiñcāpi te honti bhusappamattā

Na te bhava aṭṭhama ādiyanti,
Idampi sa
ghe ratana paīta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예 아리야삿짜-니 위바-와얀띠

감비-라빤녜나 수데시따-

낀짜-삐 떼 혼띠 부삽빠맛따

나 떼 바왕 앗타망 아-디얀띠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심오한 지혜를 지닌 님께서 잘 설하신,

성스런 진리를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

아무리 크게 방일하더라도,

여덟 번째의 윤회를 받지 않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Stn.230)

 

 

이 게송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수행자를 찬탄한 것이다. 열반이라는 궁극적 진리를 맛 본 수행자에게는 많이 잡아도 일곱 생 남은 것이다. 그래서 여덟 번째의 윤회를 받지 않습니다. (Na te bhava aṭṭhama ādiyanti)”(Stn.230)라고 했다.

 

늦은 나이에 앉아 있다.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이 목표이다. 나에게 성자의 흐름에 드는 것은 언감생심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 생에 되지 않으면 다음 생을 기약하면 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다음 생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 놓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이러한 앎을 갖춘 통찰수행자를 두고 부처님의 교법에서 안식을 얻은 님발판을 얻은 님존재의 운명이 정초된 님작은 흐름에 든 님이라고 한다.(Vism.19.27)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번 생에 수다원이 못되면 준수다원(cūasotāpanna)’이라도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준수다원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위빠사나 1단계 지혜인 물질과 정신을 구별하는 지혜’, 그리고 2단계 지혜인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계발되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그러므로 의혹에 대한 극복을 원하는 수행승이라면, 항상 새김을 확립하여 널리 명색의 조건을 파악해야 한다.”(Vism.19.27)라고 했다.

 

재가안거 85일째를 맞이 하여 오늘 좌선은 832분부터 시작 되었다. 한시간으로 설정해 놓은 알람이 울릴 때까지 앉아 있었다. 이번 안거에서는 한시간 앉아 있기가 목표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라도 앉아 있고자 한 것이다.

 

한시간 동안 마음의 고요와 평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음은 요동쳤다. 그러다가 막판에 안정을 찾았다. 밝음을 대상으로 하여 마음을 기울였을 때 새김이 분명했다.

 

배의 부품과 꺼짐, 그리고 엉덩이의 닿음을 새겼다. 이렇게 부품, 꺼짐, 닿음을 반복적으로 새겼을 때 마음은 점차 고요해지고 평안해졌다. 이런 상태로 주욱 가고 싶었다. 그러나 갑자기 재채기 기운이 올라 오는 것이었다.

 

좌선 중에 재채기를 하면 흐트러져 버리고 만다. 억누루고자 했다. 참고자 했다. 그러나 참을 수 없었다. 마침내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그에 따라 새김도 깨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좌선을 하다 보면 번뇌망상이 엄습한다. 새김을 놓쳤을 때 발생한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내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런데 재채기가 엄습했을 때도 역시 몸이 내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이 몸과 마음을 내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이는 큰 착각이다. 오늘 새벽에 경을 하나 읽은 것에서도 알 수 있었다.

 

머리맡에 상윳따니까야가 있다. 오늘 새벽 경을 읽다가 매우 인상적인 구절을 발견했다. 새기고 싶은 내용이다. 이는 거울에 대한 비유의 가르침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벗이여 아난다여, 예를 들어 여자든 남자든 소년이든 소녀이든 치장을 좋아하는 자가 깨끗하고 밝은 거울이나 맑은 물그릇에 자신의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볼 때 의존하기 때문에 보이고 의존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듯이, 벗이여 아난다여, 이와 같이 물질에 의존하기 때 문에나는 있다.’고 생각하며 의존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습니다. 느낌에 의존하기 때문에나는 있다.’고 생각하며 의존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습니다. 지각에 의존하기 때문에나는 있다.’고 생각하며 의존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습니다. 형성에 의존하기 때문에나는 있다.’고 생각하며 의존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습니다. 의식에 의존하기 때문에나는 있다.’고 생각하며 의존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습니다.”(S22.83)

 

 

이 경을 접하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페이스북에서 셀카놀이하는 사람들이 생각난 것이다.

 

페이스북은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가상의 공간이다. 거의 대부분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드러내는데 열중인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얼굴을 올리는 것이다. 이른바 셀카놀이를 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처음 접하는 것은 새롭다. 그러나 자주 접하면 식상하게 된다. 어떤 이가 자신의 얼굴을 자주 올렸을 때 처음에는 봐줄만하다. 그러나 매번 자신의 얼굴을 올리게 되었을 때 목불인견(目不忍見)’이 된다.

 

페이스북에 자신의 얼굴을 자주 올리는 사람 중에는 스님들도 있다. 삭발하고 승복을 입은 모습을 자주 올리는 것이다. 이런 스님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처님은 수행승들에게 당부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득과 명예와 칭송은 두렵고 자극적이고 거친 것으로 멍에를 여읜 위없는 안온을 얻는 데 장애가 된다.”(S17.1)라고 했다.

 

스님들이 페이스북과 같은 에스엔에스에 자신의 얼굴을 자주 알리는 것은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바라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후대 이런 행위를 예견한 것 같다. 그래서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바라는 것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어부가 미끼를 단 낚싯바늘을 깊은 연못에 던지면 눈을 가진 어떤 물고기가 그것을 삼키는 것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부의 낚싯바늘을 삼킨 물고기는 불행에 빠지고 재난에 빠져서 어부가 원하는 대로 이끌리게 된다. “(S17.1)라고 했다.

 

페이스북에 자신의 얼굴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일반사람들이나 심지어 스님들도 자신의 얼굴을 알린다. 그것도 식상할 정도로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올린다. 그런데 경에서는 이런 행위에 대하여 거울이나 맑은 물그릇에 자신의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것과 같다고 했다.

 

물에 자신을 비추어 볼 때 자신의 얼굴이 보일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얼굴이 가장 잘 생겼다고 착각이 일어날 것이다. 얼굴을 자아와 동일시하는 나르시스트가 되는 것이다.

 

나르시스트는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다. 얼굴 밖에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은 얼굴에 집착할 것이다. 거울을 보면 스스로 만족해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경에서는 이런 나르시스트에 대하여 여자든 남자든 소년이든 소녀이든 치장을 좋아하는 자가 깨끗하고 밝은 거울이나 맑은 물그릇에 자신의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볼 때 의존하기 때문에 보이고 의존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듯이, 벗이여 아난다여, 이와 같이 물질에 의존하기 때 문에나는 있다.’고 생각”(S22.83)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얼굴을 자아로 여기면 나르시스트가 된다. 자신의 얼굴에 크게 의존하는 것이다. 얼굴에 상처라도 나면 큰 일 난다. 얼굴이 자신이고 얼굴이 생명인 것이다. 이는 물질적인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물질뿐만 아니라 느낌, 지각, 형성, 의식도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과 같다고 했다.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면 자신의 얼굴인 것을 확인하게 된다. 잘 생긴 것에 대하여 만족할지 모른다. 자신의 지위, 명예, 권력, 재산 역시 거울에 비추어 볼 수 있다. 자신의 것임을 확인하고 만족해 할지 모른다.

 

사람들은 얼굴, 재산, 지위, 명예, 권력을 자아와 동일시 한다. 그래서 과시하고 싶어 한다. 페이스북과 같은 에스엔에스에 자신의 얼굴을 지속적으로 올리는가 하면 삼각뿔이 있는 벤츠 마크가 있는 차를 몰고 다닌다. 마치 , 이런 사람이야!”라며 벤츠를 자아와 동일시 하는 것이다.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며 얼굴을 만족해 한다면 얼굴을 자아와 동일시 하는 것이다. 이는 물질을 나의 것으로 보는 것과 같다. 재산을 자아와 동일시하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이렇게 오온에 대하여 자아와 동일시하면 자만이 생겨난다. 대개 부자의 자만, 배운자의 자만, 태생의 자만이기 쉽다.

 

일반사람과 수행자는 차이가 있다. 경에 따르면 일반사람은 배우지 못한 범부와 같다고 했다. 수행자에 대해서는 잘 배운 성스런 제자와 같다고 했다. 이 두 부류의 차이는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인지,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인지에 달려 있다.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면 괴로운 삶을 살게 된다. 오온에 의존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라고 여기거나 나는~이다라고 여기는 것이다. 얼굴이나 재산과 같은 물질적인 것에 대하여 나는 있다라고 여기고, 지위나 명예, 권력에 대하여 나는~이다라고 여기는 것이다.

 

잘 배운 부처님 제자들은 거울이나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서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오온에서 느낌, 지각, 형성, 의식도 나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렇게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을 때, 나에게 의존하지 않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것이라고 했다.

 

오늘도 한시간 좌선하고 난 다음 후기를 썼다. 쓰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나 이렇게 쓰는 것도 수행이다. 앉아서 다리 꼬고 앉아 있는 것만이 수행은 아니다. 수행의 결과를 반조하는 것도 수행인 것이다.

 

 

2023-10-2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