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책을 보지 말라고 하는데, 재가안거 83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0. 23. 11:19

책을 보지 말라고 하는데, 재가안거 83일차
 
 
끊임없이 밀려온다.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밀려 오는 좀비 떼들 같다. 끊임없이 밀려 오는 것이 영화 미드웨이에서  급강하폭격기들 같다. 대공포화를 작열하여도 그 틈을 비집고 스며든다. 좌선 중에 번뇌망상이 밀려 드는 것이 좀비 떼들 같고 항공모함을 공격하는 급강하폭격기들 같다.
 

 
오늘은 재가안거 84일째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7시 49분에 앉았다. 앉을 때마다 다짐한다. 오늘 한시간도 배의 부품과 꺼짐을 한 개도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는다.
 
어느 때 망상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럴 때는 주관찰 대상으로 복귀해야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는 것이다. 이때 배를 새기는 것은 대공포화를 작열하는 것과 같다. 촘촘히 배치된 대공포가 불을 뿜을 때 침입하려는 급강하폭격기는 격추된다.
 

 
이 세상에 법 아닌 것이 없다. 번뇌와 망상도 법이다. 밖에서 나는 차 소리, 전철 지나가는 소리도 담마인 것이다. 여섯 가지 문으로 들어 오는 것은 모두 담마이다.
 
담마에는 특성이 있다. 고유특성과 일반특성을 말한다. 예를 들어, 탐욕은 거머쥐려는 고유특성이 있고, 성냄은 밀쳐 내려는 고유특성이 있다. 이들 탐욕과 성냄의 공통적인 일반특성은 무상, 고, 무아이다.
 
명상은 왜 하는가?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세속적인 것이다. 출세간을 지향하는 자라면 명상에서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무상, 고, 무아를 볼 수 있을까? 이럴 때 교학이 필요하다. 초기경전과 논서, 그리고 수행지침서에는 이들 삼특상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수행과 교학은 양날개와 같은 것이다. 수행만 있고 교학이 없다면 날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교학만 있고 수행이 없다면 역시 날 수 없을 것이다.
 
유튜브에서 들은 영상이 있다. 스님은 책을 보지 말라고 했다. 선사가 말한 것이 아니다. 테라와다 스님이 말한 것이다.
 
스님은 왜 책을 보지 말라고 했을까? 분석적으로 보기 때문에 책을 보지 말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책은 어떤 책일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경전을 포함하여 논서, 수행지침서 같은 모든 책을 말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부처님도 책을 보지 말라고 했을까? 부처님 당시에는 책이 없었던 것 같다. 수행승들이 책을 보았다는 글을 아직 보지 못했다. 그 대신에 맛지마니까야에서 “저희들은 닷새마다 밤을 새며 법담을 나눕니다.”(M128)라는 문구를 접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책을 보는 것은 아니지만 담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허용되는 것이다. 그것도 밤새도록 토론해도 좋다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제자들은 필기구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설법한 것을 잘 귀담아 들었을 것이다. 잘 들은 것을 기억하고 새겼을 것이다. 그리고 실천에 옮겼을 것이다.
 
가르침을 잘 새겨 듣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오늘날로 말하면 책을 읽는 것이나 다름 없다. 부처님 사후 가르침은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갔다. 나중에는 문자로 남겨졌다. 그것이 오늘날 보는 초기경전, 즉 니까야이다.
 
수행자들이 경전을 본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담마에 대한 것은 어떤 것이든지 보아도 좋다는 것이다. 담마에 대한 것은 아무리 보아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책을 보지 말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보아야 할까?
 
고귀한 침묵이 있다. 이는 부처님이 “법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고귀한 침묵을 지키는 일이다.” (M26)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고귀한 침묵은 명상주제를 놓고 잊지 않음을 말한다. 두 번째 선정의 단계가 이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명상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잡담을 금했다. 수행승들이 그대신 법에 대한 이야기는 밤을 세워서 토론해도 좋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승들이 해야 할 일은 두 가지가 된다. 그것은 수행과 교학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수행과 교학에 대한 것 이외의 것은 금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일반인들의 잡담이다. 이는 ‘우물가에 대한 이야기(kumbhaṭṭhānakatha)’가 대표적이다. 목욕장도 해당된다. 이에 대해서 주석에서는 “우물에서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춤추고 노래하기도 하는데, 우물가에서 잡담을 말한다.” (Srp.III.295)라고 했다.

둘째, 세속철학적 담론이다. 이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lokakkh
āyika)’가 이에 해당된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누구에 의해서 이 세상이 창조되었는가? 이러한 자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까마귀가 희다. 그 뼈가 희기 때문이다. 두루미가 붉다. 그 피가 붉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논의는 세속철학적인 궤변의 담론이다.”(Srp.III.295)라고 설명해 놓았다.

셋째, 육사외도의 가르침이다. 이는 ‘유무에 대한 이야기(itibhav
ābhavakatha)’가 대표적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여기서 존재는 영원주의, 비존재는 허무주의를 말한다. 존재는 성장이고 비존재는 포기이다. 존재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향락이고 비존재는 자신에 대한 학대이다.”(Srp.III.295)라고 설명해 놓았다.
 
부처님은 금한 것은 잡담, 세속철학, 육사외도의 가르침으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왜 금했을까? 이는 “수행승들이여, 그러한 논의는 이치에 맞지 않고, 청정한 삶을 시작하는데 맞지 않고, 싫어하여 떠남에 도움이 되지 않고, 사라짐에 도움이 되지 않고, 적멸에 도움이 되지 않고, 곧바른 앎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올바른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고, 열반에 드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S56.10)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어느 스님은 책을 보지 말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책은 경전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책을 말하는 것 같다. 책을 보면 분석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가안거 84일 째이다. 하루에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동시에 책을 본다. 경전과 논서, 수행지침서를 본다. 수행과 교학을 병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책을 통해서 얻는 것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수행에 있어서 등불과도 같은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이제 초보 단계이다. 수많은 단계가 있는데 낮은 단계에서부터 다져 나가야 한다. 그럼에도 높은 단계에 대한 것을 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최근 가장 감명 깊게 본 게송이 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모든 물질과 정신 형성들은
무상하다고
무너짐의 지혜의 정점에 이르렀을 어느 때
직접관찰 지혜에 따라 생겨나는
추론관찰 지혜로 본다.
그렇게 보았을 때
두려움의 지혜, 허물의 지혜 등에 의해
위험하다’라고 생각하고 보고 나, 허물을 보고 난
그 물질과 정신이라는 괴로움에 대해
즐기지 않고 염오하게 된다.
그 염오의 지혜가
번뇌의 때로부터 청정하게 하는
길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331쪽)
 
 
이 게송은 법구경 277번 게송을 대역한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가 법구경 게송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 놓은 것이다.
 
법구경 277번 게송은 “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라는 짤막한 내용이다. 그런데 대역을 보면 여러 단계의 위빠사나 지혜가 담겨 있다. 특히 염오의 지혜에 대한 것이 두드러진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세상을 아름답다고 보면 이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 대하여 상, 락, 아, 정으로 보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이 세상을 무상, 고, 무아, 부정(不淨)으로 보면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영원론자들은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영원주의적 견해를 가지면 이 세상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가장 먼저 세상을 무상하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법구경에서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sabbe sakhāra anicca)”(Dhp.277)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대역에서는 염오가 일어나는 과정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공통적으로 무상, 고, 무아를 기반으로 한다. 담마의 세 가지 공통적인 특성을 철견했을 때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염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무너짐의 지혜, 허물의 지혜, 염오의 지혜가 무르익었을 때 염오의 지혜가 일어나는 것이다.
 
니까야를 보면 반복적인 정형구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이는 빠알리어 ‘닙비다(nibbidā)’ ‘비라가(virāgā)’ ‘니로다(nirodhā)’를 번역한 말이다. 그래서 “현재의 물질에서 싫어하여 떠나고,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수행한다.”(S22.9)라고 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현재의 물질에 대하여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게 하고 소멸하기 위해서 도를 닦는다.”라고 번역했다.
 
깨달아서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세상을 염오해야 한다. 세상에 싫어하는 마음을 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아름답게 보아서는 안된다. 세상을 상, 락, 아, 정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와 정반대로 무상, 고, 무아, 부정으로 보아야 함을 말한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로 보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무상, 고, 무아로 보아야 해탈과 열반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물질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하게 하기 위하여 수행한다.”(M60)라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역류도(逆流道)로서의 가르침을 설했다. 세상 사람들이 상, 락, 아, 정을 말할 때 부처님은 무상, 고, 무아, 부정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상, 고, 무아, 부정으로 보는 것이 정견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수행과정에서 드러난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것이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공통적으로 무상, 고, 무아인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S22.15)
 
 
부처님은 오온에 대하여 무상한 것, 괴로운 것,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어느 것 하나 집착할 것이 없다.
 
집착은 윤회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세세생생 윤회하는 것은 오온에 대한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수행을 하는 것은 오온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집착하는 삶에 대하여 싫어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염오의 마음이다.
 
지금 이대로가 좋은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는 “인생 별거 있어? 자, 막걸리나 마시자고!”라고 말한다. 그러나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는 이 세상을 떠나고 싶어할 것이다.
 
이 세상에 대하여 두려운 마음이 일어날 때가 있다. 이는 윤회의 두려움이다. 나의 행위가 윤회를 유발한다고 생각할 때 행위의 두려움도 있게 된다.
 
윤회에 대하여 두려움이 일어날 때  이 세상을 싫어 하는 염오의 마음도 일어난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에 대하여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해탈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물질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하게 하기 위하여 수행한다.”(M60)라고 했다.
 
오온에 대하여 싫어하는 마음을 내야 해탈할 수 있다. 수행을 하면 해탈과 열반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지금 내가 정해주는 훌륭한 상속법은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고, 소멸하고, 고요해지고, 곧바로 알고, 올바로 깨달아 열반으로 결정적으로 이끈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지금 내가 정해준 어떠한 훌륭한 상속법이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고, 소멸하고, 고요해지고, 곧바로 알고, 올바로 깨달아 열반으로 결정적으로 이끄는가? 참으로 그것이야말로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니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M83)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싫어하는 마음을 내어야 한다. 그래야 해탈과 열반에 이를 수 있다. 그 수단은 팔정도이다. 팔정도 수행을 하면 해탈과 열반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수행과 교학은 함께 해야 한다. 그럼에도 어떤 스승들은 책을 보지 말라고 한다. 심지어 어떤 테라와다 스님도 책을 보지 말라고 한다. 분석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책을 보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스님이 책을 보지 말라고 했을 때 이를 세속철학에 대한 책을 보지 말라는 것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경전이나 논서, 수행지침서까지 보지 말라고 말했다면 잘못된 것이다.
 
새는 양날개로 날아간다. 수행자는 수행과 교학으로 해탈과 열반을 향해 나아간다. 경전과 논서, 율서, 수행지침서는 꼭 봐야 하는 것이다.
 
 
2023-10-2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