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좌선 한시간에 후기는 두 세시간, 재가안거 84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0. 24. 12:21

좌선 한시간에 후기는 두 세시간, 재가안거 84일차

 

 

한번 잡은 기회는 놓치지 않아야 한다. 권투선수는 승기를 잡았을 때는 상대를 마구 몰아 부친다. 세렝게티 평원에서 먹이를 포착한 치타는 폭발적 스피드로 질주한다. 명상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좌선을 하다 보면 늘 같은 상태가 아니다. 하루도 이전과 같은 상태가 없다. 고요나 평온함도 매일 같은 것은 아니다. 시시각각 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딸깍하며 문을 열듯이 전환하는 포인트가 있다. 이것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오늘은 재가안거 84일째이다. 안거 해제일이 점차 다가온다. 반달은 점차 살이 붙는 것 같다. 앞으로5일만 지나면 해제날이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성과가 있었는가?

 

이번 재가안거에서 큰 성과를 바라지 않았다. 수행초보자의 입장에서 한시간 앉아있기 버릇한다면 큰 성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앉아 있다 보니 다리가 아픈 것이었다.

 

평좌한 오른쪽 다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다리가 마비되어 피가 통하지 않았다. 겁이 났다. 이러다가 불구가 되는 건 아닌지 염려 되었다. 지금은 다리가 아프지 않다. 아마 그것은 방석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안거 초창기 때는 얇은 방석을 사용했다. 당연히 다리가 저렸다. 그러나 법의 성품의 보기는 좋았다.

 

끊어질 듯 아픈 다리를 남의 다리 보듯 했다. 아픈다리는 아픈다리이고 이를 지켜보는 마음은 지켜보는 마음이 된 것이다. 그래서 다리따로 마음따로가 되었다. 이는 통증따로 새김따로가 된 것과 같다. 다리의 아픔을 정신의 아픔으로까지 가지 않게 한 것이다. 물질과 정신을 분리해서 본 것, 이것이 이번 안거에서 가장 큰 성과라고 본다.

 

요즘은 방석을 두껍게 하고 앉고 있다. 두께 10센티 되는 바닥방석 위에 역시 두께 10센티가량 되는 앉는 방석을 깔았다. 앉으면 푹 꺼질 것이다. 이렇게 방석문제를 해결하니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한시간 앉는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것 하나만 해도 이번 안거에서 성과라면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전에는 한시간은 커녕 십분도 앉아 있기 힘들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 통증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번 안거에서 최대성과라고 볼 수 있다.

 

오늘은 늦게 일어났다. 자리에서 650분에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새벽 2시에 잠에서 깨었다. 안거전에는 이렇게 일찍 일어났을 때 엄지치기를 했다. 생각해 두었던 것을 스마트폰에 쓰기 좋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제한다. 잠을 더 자야 한다. 그래야 산뜻한 정신으로 좌선에 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 2시에 잠에 깨자 할 것이 없었다. 이럴 때는 일어나야 한다. 가볍게 경행을 했다. 불과 5보도 되지 않은 방에서 왔다갔다 한 것이다.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경전을 보았다. 머리맡에 있는 통합본 상윳따니까야를 열어 본 것이다.

 

새벽에 경전을 보면 머리에 쏙쏙 들어 온다. 그리고 새길 것도 많다. 오늘은 보름날 밤의 경’(S22.82)을 읽었다.

 

불교에서 보름날은 성스런 날이라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포살의 날이기 때문이다. 승가에서는 이날 수행승들이 모여서 계본을 합송한다. 경에 따르면 부처님 설법이 있었다.

 

경에서는 오온과 오취온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어느 수행승이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은 무엇입니까?”라며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수행승이여,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은 욕망을 뿌리로 한다.”라며 답했다.

 

오온과 오취온의 다른 점은 집착에 달려 있다. 오온에 집착된 것이 있으면 오취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집착된 것은 욕망을 뿌리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때 욕망은 어떤 것을 말할까?

 

욕망에 대하여 주석을 보았다. 놀랍게도 찬다(chanda)를 욕망이라고 했다. 찬다가 긍정적으로 쓰일 때는 의욕, 의도의 뜻이라고 한다. 부정적으로 쓰이면 욕망이라는 것이다.

 

이제까지 찬다에 대하여 좋은 의미로만 알고 있었다. 욕망과 달리 열의로 본 것이다. 그런데 아비담마에 따르면 찬다는 선법도 아니고 불선법도 아니다. 중립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찬다는 상황에 따라서 긍정적 의미의 열의도 되고 부정적 의미의 욕망도 되는 것이다.

 

수행승은 거듭해서 묻는다. 이번에는 그 집착이 오취온과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 것 물어 본다. 이에 부처님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서는 정확히 말하면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에 대한 욕망과 탐욕이 있는데, 그것이 거기서 집착이다. (apica yo tattha chandārago ta tattha upādānanti)”라고 했다. 대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경전을 읽을 때 본문만 읽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주석까지 읽어 보아야 한다. 그런데 한역아함경은 주석이 없다는 것이다. 본문만 있는 것이다. 더구나 한자는 이미지 문자로 되어 있어서 정확한 뜻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니까야의 경우 소리글자로 되어 있어서 본문만 읽어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더 좋은 것은 주석을 읽는 것이다.

 

먼저 빠알리원문을 보았다. 오온에 욕망과 탐욕이 있는 것이 오취온이라고 했다. 여기서 욕망과 탐욕은 찬다라가(chandaraga)를 말한다. 열의를 뜻하는 찬다가 컬러 또는 오염, 집착을 뜻하는 라가와 결합했을 때 찬다라가가 된다. 그런데 바로 찬다라가가 집착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집착은 우빠다나(upādāna)를 말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찬다라가에 대하여 욕탐이라고 번역했다. 그래서 한국빠알리성접협회의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에 대한 욕망과 탐욕이 있는데, 그것이 거기서 집착이다.”라는 번역한 것에 대하여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욕탐이 거기서 취착이다.”라고 번역했다.

 

한국불자들에게는 행운이 있다. 그것은 두 종류의 니까야 번역서가 있기 때문이다. 두 종류의 번역을 비교해 보면 더 이해하기 쉽다. 그렇다면 오온과 오취온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집착이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 같은 것이 아닌 이유는 다발들은 단순히 욕망과 탐욕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집착이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 다른 것이 아닌 이유는 집착은 다발들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발들은 집착과 동시에 생겨나는 것이자 대상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갈애와 결합된 마음이 일어날 때에 그 마음에 의해 생성된 물질은 물질의 다발에 속한다. 갈애를 제외한 나머지 정신적 상태는 다른 네 가지 다발에 소속된다. 그러므로 집착은 다발과 동시에 생겨나는 것으로 다발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집착은 다발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다발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집착이 일어날 때, 다발들 가운데 하나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Srp.II.307)

 

 

한국빠일리성전협회본 각주에서 옮긴 것이다. 대단히 어려운 내용이다. 신중하게 읽어 보아야 한다. 난해하고 심오한 말이다.

 

주석에 따르면 오온과 집착은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다. 오온에 욕망과 탐욕(찬다라가)이 붙으면 오취온이 되는데 모두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오온은 물질과 정신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주석에서는 색과 수상행식을 분리해서 설명했다. 그래서 갈애와 결합된 마음이 일어날 때에 그 마음에 의해 생성된 물질은 물질의 다발에 속한다. 갈애를 제외한 나머지 정신적 상태는 다른 네 가지 다발에 소속된다.”라고 했다. 여기서 갈애가 물질과 정신을 가른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빅쿠보디 상윳따니까야가 책장에 있다. 작년 202212월 스리랑카 순례 갔었을 때 불치사 옆에 있는 서점에서 사온 것이다. 영역을 보면 관련 구문은 다음과 같다.

 

 

“Bhikkhus, that clinging is neither the same as these five aggregates subject to clinging, nor is the clinging from the five aggregates subject to clinging. But rather, the desire and lust for them, that is the clinging there”(S22.82)(빅쿠보디 영역 상윳따니까야 924)

 

 

 

이 문장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Spk: "Clinging is neither the same as the five aggregate subject to clinging" because the aggregates are not reducible simply to desire and lust; "nor is the clinging s thing apart from the five aggregates subject to clinging Some because there is no clinging apart from the aggregates either as conascent factors or as object. For when a citta associated with craving occurs, the form produced by that citta belongs to the form aggregate, and the remaining mental states except craving belong to the other four aggregates: thus there is no clinging apart from the aggregates as conascent factors. (Craving is excepted because craving is what clings to the aggregates, and a mental factor cannot cling to itself.) Then, too, there is no clinging apart from the aggregates as object, because when clinging arises takes as object one of the aggregates such as form.

(빅쿠보디 영역 상윳따니까야 140번 각주, 1076)

 

 

읽기가 매우 난해하다. 모르는 단어도 많다. 여기서 conascent라는 말은 어학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요즘은 번역기시대이다. 구글 번역기로 각주의 설명을 돌려 보았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집착은 단순히 욕망과 탐욕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에 집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와 같지 않습니다. 또한 오온 외에 집착하는 것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동시성 요인으로 또는 객체로. 갈애와 관련된 마음이 일어날 때 그 마음에 의해 생성된 형태는 형태 더미에 속하고 갈애를 제외한 나머지 정신 상태는 다른 네 가지 더미에 속합니다. 따라서 발생하는 요소인 더미로부터 분리되는 집착은 없습니다. (갈애는 무더기에 달라붙는 것이기 때문에 갈애는 제외됩니다. 정신적인 요소는 그 자체에 달라붙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대상으로서의 무더기로부터 분리되는 집착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집착이 일어날 때 오온 중 하나를 대상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형태로.”(구글 번역기)

 

 

구글번역기로 돌려 본 결과 괄호 안에 있는 번역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것은 “(Craving is excepted because craving is what clings to the aggregates, and a mental factor cannot cling to itself.)라는 말에 대하여 “(갈애는 무더기에 달라붙는 것이기 때문에 갈애는 제외됩니다. 정신적인 요소는 그 자체에 달라붙을 수 없습니다.)”라고 번역해 놓았기 때문이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니 그제서야 어렴풋이 이해되는 것 같다. 그것은 괄호안에 있는 것이다. 갈애(craving)는 무더기에 달라붙는 것이기 때문에 갈애는 제외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정신적인 요소는 그 자체에 달라붙을 수 없다고 했다.

 

빅쿠보디는 ‘conascent’라는 말을 사용했다. 구글번역기에서는 동시성이라고 번역했다. form에 대하여 형태로 번역했다. 영어 form물질을 뜻한다.

 

빅쿠보디에 따르면, 어떤 물질에 대한 갈애가 일어날 때 그 갈애로 인하여 물질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는데 이를 물질에 대한 집착이라고 했다. 그런데 물질을 제외한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대한 갈애가 일어날 때 이에 대하여 갈애를 제외한 나머지 정신 상태는 다른 네 가지 더미에 속합니다. (and the remaining mental states except craving belong to the other four aggregates”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괄호를 이용하여 갈애는 무더기에 달라붙는 것이기 때문에 갈애는 제외됩니다. 정신적인 요소는 그 자체에 달라붙을 수 없습니다. (Craving is excepted because craving is what clings to the aggregates, and a mental factor cannot cling to itself.)”라고 부연 설명해 놓았다.

 

빅쿠보디는 갈애에 대하여 craving이라고 했다. 그런데 오온에서 물질은 정신적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물질에 대한 욕망과 탐욕이 생겼을 때 이를 물질에 집착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정신적인 것, 즉 수온, 상온, 상온, 식온에 대하여 욕망과 탐욕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는 갈애로 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갈애는 무더기에 달라붙는 것이기 때문에 갈애는 제외됩니다. 정신적인 요소는 그 자체에 달라붙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대체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나라 두 종류의 번역서의 각주를 보았다. 빅쿠보디의 각주와 유사하다. 그러나 왜 갈애가 색온에만 적용되고 다른 것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불분명하다. 이에 반하여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어렴풋이라도 짐작할 수 있게 설명해 놓았다.

 

십이연기에서 갈애와 집착이 있다. 이 두 용어에 대하여 같은 뜻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십이연기에서 갈애와 연기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십이연기에서 갈애가 더욱더 강화된 것이 집착이다. 그런데 한번 집착되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를 오취온적 존재라고 하는데 이는 오온과 집착이 붙어 있는 경우에 해당된다. 뗄레야 떼어질 수 없는 관계에 대한 것이다.

 

물질에 대한 집착이 있다. 가진 것이 얼굴밖에 없는 사람은 얼굴에 상처라도 나면 큰일 날 것처럼 생각한다. 얼굴을 나의 것, 내것, 나의 자아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얼굴에 대한 집착이다. 오온에서 물질에 대한 집착, 색온이 이에 해당된다.

 

정신적인 집착이 있다. 수온, 상온, 행온, 식온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집착하고 있다면 수온에 해당된다. 누군가 아름다운 형상에 대하여 집착하고 있다면 상온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미 집착된 존재는 갈애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 이런 이유로 빅쿠보디는 갈애는 무더기에 달라붙는 것이기 때문에 갈애는 제외됩니다. 정신적인 요소는 그 자체에 달라붙을 수 없습니다.”라고 설명했을 것이다.

 

흔히 오취온이라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오취온적 존재로 태어났다. 오온에 대한 집착이 있었기 때문에 태어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결코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욕망으로 세팅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취온은 물질과 정신으로 나눌 수 있다. 몸에 대한 것은 색취온이 된다. 정신에 대한 것은 수취온, 상취온, 행취온, 식취온이 된다. 그런데 물질에 대한 집착은 정신에 대한 집착과 다르다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은 갈애에 따른 집착이다. 이는 물질이 정신적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것들은 이미 집착된 것들이다. 그래서 한국빠알리성전협회 각주에서는 갈애와 결합된 마음이 일어날 때에 그 마음에 의해 생성된 물질은 물질의 다발에 속한다. 갈애를 제외한 나머지 정신적 상태는 다른 네 가지 다발에 소속된다.”라고 설명해 놓았다.

 

수행을 왜 하는가? 마음이 편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오온에서 집착된 몸과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신과 물질을 분리해서 관찰해야 한다.

 

이번 안거에서는 정신과 물질을 분리해서 관찰하고자 노력했다. 통증을 관찰한 것이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런 논리를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다.

 

명상을 하면 정신과 물질을 분리해서 볼 수 있다. 물질은 물질이고 정신은 정신인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깊게 들어가야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밝아질 때가 있다. 마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 같다. 마치 딸깍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이럴 때가 기회이다. 더 깊게 들어갈 수 있는 찬스가 생긴 것이다.

 

기회가 왔으면 잡아야 한다. 승기를 잡았을 때 몰아 부쳐야 한다. 먹이를 잡았을 때 놓치지 않아야 한다. 조금 더 깊게 들어 갔을 때 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좀 더 깊은 상태가 되었을 때 이전 보다 더 고요해진다. 이럴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의 새김도 분명해진다. 그런데 이럴 때 새기는 마음만 있게 되는 것 같다. 부품이라는 물질적 현상과 이를 새기는 정신적 현상만 있게 되는 것 같다.

 

명상을 하면 요령이 생기는 것 같다. 좀더 깊게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오늘 그랬다. 어느 순간 딸깍 하고 전환이 일어났을 때 이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방법을 알았으니 다음 번에도 들어가 보고자 한다.

 

 

오늘 재가안거 84일째를 맞아 또다시 긴 글을 쓰게 되었다. 명상이 막 끝난 상태에서 절구커피를 마시면서 쓰는 것이다. 뉴스 등 다른 것에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쓰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좌선 한시간에 후기는 두 세시간 되었다.

 

 

2023-10-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