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사띠 번역어 오염에 대하여, 재가안거 82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0. 21. 12:08

사띠 번역어 오염에 대하여, 재가안거 82일차
 
 
순간적으로 기쁨이 일어났다. 그것은 환희에 가깝다. 눈 앞이 훤한 상태에서, 미치 전구가 켜진 것 같은 상태에서 기쁨과 환희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극히 짧은 순간이다. 그럼에도 밝은 상태에서 새김은 분명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이 분명히 보였다. 배의 부품과 꺼짐이 있어서 새기고 있는지, 새김이 있어서 배가 부풀고 꺼짐이 있는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거의 동시라고 본다.
 
오늘은 재가안거 82일째이다. 점점 90일을 향해서 간다. 내일 10월 22일 일요일에는 담마와나선원에서 법회가 있다. 이번 안거와 관련된 것이다. 아직 안거가 일주일 남았지만 안거를 마치는 법문이 될 것 같다. 울산 붓다의 길따라 선원에서 빤냐와로 스님이 참석한다.
 
이 글은 좌선이 끝난지 5분이 지나서 쓰는 것이다. 요즘 속된 말로 “따끈따끈한” 것이다. 있는 그대로 쓸 수 있다. 좌선하면서 사유한 것, 새롭게 깨우친 것을 쓸 수 있다. 잊어 버리기 전에 써 놓고자 한다.
 
꿈에서 좋은 생각이 날 때가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깨어나면 잊어 버린다. 떠 올리려고 해도 떠 올리지 않는다. 그럴 때는 기록해 놓으면 좋을 것이다. 머리 맡에 필기구가 있어서 키워드라도 적어 놓으면 기억날지 모른다. 그렇다면 좌선 중에 떠오른 좋은 생각은 어떠할까?
 
꿈속의 상태와 명상의 상태는 다르다. 꿈속의 상태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무의식이 작동되는 것이다. 그러나 명상의 상태에서는 의식이 있다. 이런 이유로 명상의 상태에서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은 기억할 수 있다.
 
오늘 오전 8시 30분부터 한시간 좌선 했다. 한시간 좌선 동안 마음이 심일경성이 된 것은 아니다. 사마타 수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움직이는 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대상에 마음을 딱 붙일 수 없다. 어느 정도 떨어져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유가 가능한 것이다.
 
좌선하면서 사유하는 것은 망상과 다르다. 망상은 새김(사띠)를 놓쳐 버렸을 때 일어난다.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 탈탈 털린 듯한 기분이다. 문단속을 하지 않아 도둑이 활개를 치고 다닌 것과 같다. 그러나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사유는 문단속이 된 상태에서 집안에 있는 것과 같다.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사유는 차라리 지혜에 가깝다. 왜 그런가?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칠각지에 대한 정형구에서 새김에 대한 것을 보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 때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시작한다.”(S46.3)라고 했기 때문이다.
 
사띠에 대하여 여러 번역어가 있다. 현재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번역어는 사띠를 표현하기에 상당히 부족하다. 일견 그럴듯한 보이는 말이기는 하지만 사띠를 정확하게 표현하는데 한계가 많은 것이다.
 
사띠에 대하여 영어로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라고 한다. 영어 마인드풀니스는 마음(mind)과 채움(fullness)의 결합이이다. 이를 한글로 직역하면 ‘마음채움’이 된다. 그런데 초기불교와 위빠사나를 소개하던 사람들이 이를 마음챙김이라고 바꾸었다.
 
마인드풀니스가 어떻게 마음챙김이 되었을까? 초기불전연구원 각묵스님은 자신의 저서 ‘초기불교이해’에서 분명히 밝혔다. 그것은 ‘화두챙김’이라는 말과 관련 있다고 했다.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서양의 마인드풀니스와 한국불교의 화두챙김이라는 말이 결합된 것이라고 했다.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사띠를 설명하기에 매우 부족하다. 지운스님에 따르면 한박자 템포가 느린 것이라고 했다. 마음이 대상을 접했을 때 즉각적인 앎이 있는데 이를 마음챙김이라고 했을 때 한템포가 늦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마음을 챙긴다는 것은 느낌과 지각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삼사화합촉에 의해서 일어난다. 감각기관과 감각대상과 감각의 마음이 결합되었을 때 접촉이 일어난다. 이와 같은 접촉은 느낌의 조건이 된다. 그런데 느낌은 지각의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지각은 오온에서 두 번째로 일어나는 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느낌이 첫 번째이다. 지각 다음에는 식별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18번 경에서 망상과 희론이 발생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다.
 
망상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이는 삼사화합촉에 이어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일어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M18)로 되어 감을 보면 알 수 있다.
 
마음챙김은 ‘마음을 마음챙김하는 것’이다. 두 단계로 진행된다. 마치 화두를 화두챙김하는 것과 같다. 이런 마음은 식별하는 마음과 같다. 그렇다면 식별하는 마음은 어느 단계의 마음에 속해 있을까? 상윳따니까야 ‘희생되는 것에 대한 경’(S22.79)에 식별에 대한 것이 있다.
 
경에서는 오온에서의 지각과 의식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물론 느낌과 형성도 마음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경에서는 마음에 진행에 대하여 두 다발을 비교해서 설명해 놓은 것이다.
 
지각의 다발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왜 지각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지각하기 때문에 지각이라고 한다. 무엇을 지각하는가? 푸른색을 지각하고 노란색을 지각하고 붉은색을 지각하고 흰색을 지각한다. 수행승들이여, 지각하기 때문에 지각이라고 한다.”(S22.79)라고 설명한 것이다.
 
지각은 느낌 다음에 일어난다. 이는 오온이 순서적으로 되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색온과 수온 다음에 상온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각에 대하여 색깔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지각을 시각과 관련하여 예로 들어 설명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맨느낌’에 대한 것이다.
 
눈이 있으면 보지 않을 수 없다. 귀가 있으면 듣지 않을 수 없다. 이중에서 시각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가장 먼저 시각대상이 들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각대상을 접할 때 분별력은 없다. 단지 색깔로 구분할 뿐이다. 그래서 “푸른색을 지각하고 노란색을 지각하고 붉은색을 지각하고 흰색을 지각한다.”(S22.79)라고 했다.
 
분별은 어디서 일어나는가? 그것은 식온에서 발생한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왜 의식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식별하기 때문에 의식이라고 한다. 무엇을 식별하는가? 신맛도 식별하고 쓴맛도 식별하고 매운맛도 식별하고 달콤한 맛도 식별하고 떫은맛도 식별하고 떫지 않은 맛도 식별하고 짠맛도 식별하고 싱거운 맛도 식별한다. 수행승들이여, 식별하기 때문에 의식이라고 한다.”(S22.79)라고 했기 때문이다.
 
오온에서 분별하는 마음은 식온에서 일어난다. 이를 식별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그래서 “식별하기 때문에 의식이라고 한다.”(S22.79)라고 한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하여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처럼 식별한다고 해서 알음알이라 한다.”라고 번역했다.
 
빠알리어 빈냐나(viññāa)에 대하여 두 가지 번역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의식(한국빠알리성전협회)’이고 또 하나는 ‘알음알이(초기불전연구원)’이다. 어느 번역어가 더 타당한지는 독자들 몫이다.
 
빈냐나에 대하여 알음알이라고 번역한 것은 원어 본래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빠일리어 빈냐나가 문자 그대로 ‘구분하여 알다’라는 뜻이다. 이는 비(vi: 分)’와 냐나(ñāa: 智)의 합성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알음알이라고 했을 때 원래 뜻과 동떨어진 번역어가 되는 것 같다.
 
빈냐나는 의식이라고 번역된다. 이는 식별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식별하는가? 경에서는 맛을 식별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지각하는 것과 다르다.
 
지각하는 것은 ‘산자나띠(sañjānāti)’를 번역한 말이다. 그런데 지각을 설명할때 시각을 예로 들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시각은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어떤 색깔인지 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의식은 맛을 예로 들었다. 맛은 직접적으로 식별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오감으로 식별하는 것이다. 그래서 맛을 식별한다고 해서 ‘비자나띠(vijānati)’라고 한다.
 
오온에서 지각(saññā)과 의식(viññāa)은 다르다. 또한 분명히 안다는 뜻을 가진 ‘빠자나띠(pajānāti)’와도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산자나띠와 비자나띠와 빠자나띠는 각각 어떻게 다른가? 빠알리성전협회 각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여기서 지각과 의식에 대한 설명이 아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것이라면 인식하는 감각대상의 유형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Srp.II.293에 따르면, 지각은 대상의 색깔이나 형상을 포착하는데 분명한 것이 있기 때문에 시각을 통해 설명되고, 의식은 색깔이나 모양이 없어도 대상 속에서 특수한 구별을 포착하기 때문에 미각으FH 설명된다. 따라서 역자의 견해로는 맛에 대한 지각은 없고 형상에 대한 의식은 없다는 식으로 그 두 가지는 배타적인 인식이 아니라, 의식은 지각보다 대단히 섬세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Srp.II.293에 따르면, 이러한 의식에는 의식의 세 가지 단계, 즉 1)알아채다 (sañjānāti), 2)식별하다(vijānati), 3)분명히 알다(pajānāti)가 있다.”(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상윳따니까야 3권, 257번 각주)
 

 
오온에서 수, 상, 행, 식은 마음에 대한 것이다. 이는 마음의 인식이 전개되는 순서대로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최종적으로는 식별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비자나띠이다. 그런데 수행을 하면 더욱더 잘 알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분명히 아는 것를 말한다. 이를 빠자나띠라고 한다.
 
대념처경에 분명한 앎에 대한 것이 있다. 이는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안다.”(D22.3)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안다는 말은 빠자나띠를 번역한 말이다.
 
분명한 앎은 신념처에서 네 가지 행동양식에 대한 관찰에서도 일어난다. 이는 행, 주, 좌, 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안다.”(D22.5)라고 했다. 여기서 분명히 안다는 것은 빠자나띠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빠자나띠는 수행용어라고 볼 수 있다.
 
새김이 확립되면 분명한 앎이 생겨난다. 그런데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앎은 지혜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신념처의 ‘몸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에서도 확인된다.
 
일상에서도 알아차림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드는 것에 대해서도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춘다고 했다. 심지어 대변보고 소변보는 것에 대해서도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춘다고 했다. 이렇게 올바로 알아차리는 것에 대하여 삼빠자나(sampajāna)라고 한다.
 
삼빠자나는 빠자나띠를 근간으로 한다. 분명히 안다는 뜻의 빠자나띠(pajānāti) 에다 올바름을 뜻하는 삼(sam)이 결합된 복합어이다. 그래서 삼빠자나는 ‘올바른 알아차림’으로 번역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삼빠자나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으로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분명한 앎’으로 번역했다. 올바름을 뜻하는 삼(sam)이 빠져 있다. 마치 빠자나띠를 번역한 것처럼 보인다.
 
대상을 아는 것에는 세 가지가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산자나띠, 비자나띠, 빠자나띠를 말한다. 이를 각각 지각한다, 식별한다, 분명히 안다로 번역된다. 이 중에서 지각한다와 식별한다는 일상의 용어이다. 수행에서는 ‘분명히 안다’가 된다. 그런데 분명히 아는 것은 올바로 분명히 아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올바로 분명하게 아는 것에 대하여 삼빠자나라고 한다. 그런데 삼빠자나는 항상 사띠와 함께 쓰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에 있어서 사띠 있는 곳에 삼빠자나가 있고, 삼빠자나 있는 곳에 사띠가 있다. 마치 바늘 가는 곳에 실이 있는 것과 같다.
 
사띠와 삼빠자나에 대하여 번역자들은 달리 번역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이를 ‘새김’과 ‘올바른 알아차림’으로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를 ‘마음챙김’과 ‘분명한 앎’이라고 번역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번역어는 마음챙김이라는 말이다.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사띠를 잘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런가? 사띠라는 말은 즉각적이기 때문이다. 판단을 하기 전에 하는 일이다.
 
배의 부품을 관찰할 때 판단이 들어 가지 않는다. 단지 부품의 순간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품도 부품 나름이라는 것이다.
 
부품에도 단계가 있다. 꺼짐에도 단계가 여럿 있다. 단지 부품과 꺼짐이라는 한 과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부품과 꺼짐 사이에는 머묾의 단계가 있다. 그러나 유지의 단계는 극히 짧다. 부품이 정점에 달하면 곧바로 꺼짐이 시작된다. 찰나적 유지가 있는 것이다.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띠하는 것이다. 부품에도 단계가 있기 때문에 이를 단계적으로 새긴다. 그래서 부품 안에도 여러 단계의 생멸도 있다. 결국 사띠한다는 것은 찰라생찰라멸을 관찰한다는 말과 같다.
 
사띠는 식별하는 단계가 아니다. 차라리 지각하는 단계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럼에도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했을 때 여러 템포가 늦다.
 
마음을 챙긴다는 것은 화두를 챙긴다는 말과 같다. 이는 각묵스님이 초기불교이해라는 책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과연 사띠에 대하여 화두 챙기듯이 사띠를 챙길 수 있을까?
 
마음음 챙긴다는 것은 오온에서 식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아니 수행에서 빠자나띠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마치 화두를 놓치지 않고 챙기고자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화두는 언어적 개념을 챙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뭐꼬?”했을 때 언어적 개념이 들어가는 것이다.
 
화두를 챙기듯이 사띠를 챙기기 힘들 것 같다. 일상에서 행, 주, 좌, 와를 챙기는 것은 가능할지 모른다. 이럴 때 챙기는 것은 사띠가 아니다. 그것은 삼빠자나에 대한 것이다.
 
사띠를 마음챙김이라고 하는 것은 삼빠자나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본다. 마음챙김한다는 것은 또한 식별한다는 것과 같다. 그런데 식별은 마음을 인식하는 여러 단계에서 가장 바깥 쪽에 있다는 것이다. 오온에서 빈냐나를 말한다.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이 지연이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지운스님은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으로 사용하기를 꺼려 했다. 원어 그대로 사띠로 사용하고자 했다. 그런데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 자꾸 “샤띠”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수행용어는 대단히 중요하다. 한번 정착된 수행용어를 바꾸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원어 그대로 사용한다.
 
용어를 잘못 사용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것은 번역어의 오염이 된다.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이라고 하는 것은 영어 마인드풀니스를 우리말로 풀어서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다 화두챙김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본래 의미와 동떨어진 개념이 되었다.
 
용어의 오염은 심각하다. 어떤 이는 사띠에 대하여 ‘온마음’이라고 번역했다. 왜 온마음이라고 번역했을까? 이는 영어 마인드풀니스를 순수한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풀니스가 가득 찬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온마음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온마음은 사띠의 본래 의미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말이다.
 
좌선을 하다 보면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일어난다. 그러나 새김(사띠)이 확립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지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이“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 때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시작한다.”(S46.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명상중에 좋은 생각이 일어나면 기억해 두고 싶다. 꿈속에서 좋은 생각은 꿈이 깸과 동시에 사라지지만 명상 중에 일어난 좋은 생각은 기억이 난다. 그것은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사유했기 때문이다.
 
명상을 하면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진다. 밖에 날씨가 우중충하지만 눈을 감은 명상의 세계는 전천후 날씨가 된다. 항상 밝고 평화로운 날씨와 같다.
 
명상중에 경전이나 논서에서 본 것이나 법문에서 들었던 것이 떠오른다. 이런 것은 좋은 것이다. 왜 그런가?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좋은 것은 내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새겼을 때 내것이 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정신적 재산이 된다. 한번 본 것으로 지나지 않고, 한번 들은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명상중에 떠 올랐다면 확실히 내것으로 된다. 이런 것도 작은 깨달음이라 해야 할 것이다.
 
 
2023-10-2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