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즐거운 느낌을 왜 괴롭다고 보아야 하는가? 재가안거 79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0. 18. 10:53

즐거운 느낌을 왜 괴롭다고 보아야 하는가? 재가안거 79일차

 

 

다리를 쭉 뻗었다. 드러누워 온몸을 쭉 뻗었다. 좌선이 끝나는 알람 소리와 함께 그대로 드러누웠다. 나만의 공간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막바로 일어나는 것보다 이렇게 몸을 풀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한시간 좌선을 한 보상에 따른 것이다.

 

 

오늘은 재가안거 79일째이다. 모처럼 한시간 앉아 있었다. 주말과 주초에는 제대로 앉아 있지 못했다. 일감이 두 건 있어서 주말없이, 밤낮없이 매달려야 했었다. 생계에 대한 것이다. 납기는 지켜 주어야 한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가능하면 오전에 앉아 있고자 한다. 그것도 이른 아침이 좋다. 가장 좋은 시간대는 오전 7시부터 9시까지이다. 왜 그런가? 업체 근무시간이 시작되는 9시 이전에 좌선을 마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좌선 중에 전화오면 곤란하다.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을 때는 앉아 있기 힘들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앉아 있을 수 없다. 지금 품질문제가 생겼는데 이를 무시하고 앉아 있을 수 있을까?

 

오후에는 앉아 있기 힘들다. 마음이 이미 언어적 행위로 오염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에 지배 받는다. 저녁에도 앉아 있기 힘들다. 밖이 캄캄한 것이 크다. 더욱 큰 것은 저녁에는 일하기 싫다는 것이다.

 

저녁에 일하면 효율이 떨어진다. 이미 하루일과를 보낸 상황에서 지쳐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마음이 오염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차라리 새벽이 낫다. 새벽에 산뜻한 기분으로 일을 하면 효율이 배가 된다. 명상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 아침에는 오전 8시 정각에 앉았다. 한시간으로 세팅해 놓은 알람의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시간은 사정없이 제로를 향해 흘러 간다. 그러나 한시간은 긴 시간이다. 평좌를 한 상태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한시간 앉아 있기는 쉽지 않다.

 

언제나 그렇듯이 좌선에 임할 때 다짐 하는 것이 있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한시간 앉아 있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배의 부품과 꺼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겠다는 것이다.

 

좌선을 시작한지 몇 분 지났다. 처음 다짐과는 달리 생각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망상은 아니다. 새김(사띠)이 있는 상태에서 생각은 지혜에 가깝다. 왜 그런가? 새김은 선법(善法)이기 때문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은 선한 것이다. 이를 꾸살라(kusala)라고 한다. 꾸살라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착하고 건전한 법이라고 번역했다.

 

사띠는 52가지 마음부수에서 선법에 해당된다. 52가지 마음부수 중에서 선법은 19가지이다. 선법에 대하여 아름다운 마음부수(sobhanacetasika)’라고도 한다. 믿음, 새김, 부끄러움, 창피함, 무탐, 무진 등과 같은 마음부수를 말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 번뇌가 있을 수 없다.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선한 것이다. 그러나 새김이 없는 상태, 새김을 놓친 상태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망념이기 쉽다.

 

망념은 망상으로 전개되는데 자신도 모르게 된다. 망상의 집을 한창 쌓았을 때, 그제서야 알게 된다. 마음의 문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마치 집에 도둑이 든 것과 같다.

 

망념이나 망상은 불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새김이 없는 상태에서 생각이 치고 들어와 망상의 만리장성을 쌓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도와 무관한 것이다. 생각이 자신의 정신을 점령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이유로 새김이 없는 상태에서 생각은 불선이라고 보는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면 선한 상태가 된다. 이 상태에서 사유가 일어나면 지혜가 된다. 경전에서 보았던 것, 논서에서 보았던 것, 법문에서 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부처님 가르침을 새기는 것은 모두 지혜에 대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선한 것이고 지혜로 본다.

 

좌선 한시간 대부분을 사유로 보냈다.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사유했기 때문에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 선법이고 지혜에 대한 것이다. 이런 사유를 하면 마음에서 기쁨이 일어난다.

 

요즘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다. 오래전 법문이다. 유튜브에서 8년전 법문을 듣고 있다. 사념처 수행에 대한 것이다. 요즘 나에게 딱 맞는 법문이다. 8년전에 법문한 것이 시절인연이 되어서 듣게 되었다.

 

빤냐와로 스님 법문 중에서 느낌에 대한 것이 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느낌을 잘 관찰해야 한다고 했다. 왜 느낌일까? 그것은 삼빠자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느낌은 깨달음의 길로 가는데 있어서 무상, , 무아의 특성을 보기 쉽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띠와 삼빠자나가 있다. 사띠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김으로써 확립된다. 이렇게 새김이 확립되면 현상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이는 범위를 한정 지어 놓고 보는 것과 같다.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사유를 하면 지혜가 된다. 이것을 삼빠자나라고 볼 수 있다.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느낌을 보면 존재의 세 가지 특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무상, , 무아이다.

 

느낌에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있다. 그런데 모든 느낌은 괴로운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즐거운 느낌도 괴로운 것이 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이 수행승이여,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있다는 사실은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는 것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S36.11)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이다. 부처님 사후 2500년이 지난 현재 어느 재가수행자가 이렇게 부처님 말씀을 새기는 것은 니까야가 우리말로 번역되어서 나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니까야를 열어 보면 놀라운 말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특히 모든 느낌은 괴로운 것이다라는 가르침이 그렇다.

 

부처님 가르침은 세상사람들의 흐름과 반대로 간다. 세상사람들이 탐, , 치로 살 때 부처님은 무탐, 무진, 무치로 살라고 했다. 바로 이런 것이 흐름을 거슬러 가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역류도(逆流道: paisotagāmī)라고 한다.

 

역류도로서 부처님 가르침 중의 하나가 느낌에 대한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즐거운 것으로 보고 즐거움을 추구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즐거운 느낌은 괴로운 것일 뿐이라고 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아야 하며, 괴로운 느낌은 화살이라고 보아야 하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보아야 한다.”(S36.5)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괴로운 느낌은 괴로움 그 자체이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 맞다. 그런데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괴롭다고 보라고 했다. 그렇다면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괴로운 것이라고 어떻게 알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것은 조건적이지 조건 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이 몸을 조건으로 한다. 그런데 이 몸은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이 몸을 원인으로 생겨난 즐거운 느낌이 어떻게 항상할 것인가?”(S36.7)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즐거운 느낌이 괴로운 것은 무상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즐거운 느낌은 오래 가지 않음을 말한다. 즐거운 느낌은 조건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조건이 다하면 즐거운 느낌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사람의 마음은 자꾸 변한다. 어린 아이를 보면 시시각각 웃었다가 울었다가 한다. 어른의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다. 변덕이 죽 끓듯 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즐거운 느낌도 오래 가지 않는다.

 

갑자기 상황이 바뀌면 즐거운 느낌은 이전의 느낌이 되어 버린다. 즐거운 느낌이 오래 지속되지 않아 불만이다. 불만족스러운 것은 괴로움의 범주에 들어간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은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아야 하며”(S36.5)라고 말씀 하셨을 것이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설했다. 그런데 연기법은 조건법이라는 것이다. 이는 연기법을 뜻하는 빠띳짜사뭅빠다(paiccasamuppāda)라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빠띳짜라는 말은 ‘by means of, on account of, by reason of’의 뜻으로 조건을 뜻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현상이 항상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모두 조건발생임을 말한다. 느낌도 역시 조건발생한다.

 

즐거운 느낌은 조건발생한 것이다. 즐거운 느낌은 몸을 조건으로 해서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몸도 조건발생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느낌은 조건에 조건이 거듭되어서 발생한 것이다.

 

조건에 조건이 거듭한다는 것은 무상함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느낌은 무상한 것이다. 당연히 즐거운 느낌도 무상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이여,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있다는 사실은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는 것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S36.11)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좌선 중에 경안이 일어날 때가 있다. 갑자기 머리가 환해지는 것 같다. 마치 전등이 켜진 것처럼 환해지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되면 새김도 분명해진다. 배의 부품과 꺼짐이 자동으로 새겨지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상태를 즐기지 말라고 했다.

 

경안은 즐거운 느낌에 대한 것이다.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을 때 한없이 머물고 싶어진다. 좌선하는 것이 피난처이고 도피처가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위빠사나 스승들은 여기서 머물지 말라고 한다. 청정도론에서는 이를 위빠사나를 오염시키는 경계로 보았다.

 

위빠사나 수행은 여러 단계로 진행된다. 정신법과 물질법을 구분하여 보는 것이 위빠사나 1단계 지혜이다. 그런데 이 단계에 이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할 때 가능하다. 그래서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는 것이다. 또한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등 행선 6단계로 보는 것이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 수행의 전환점은 4단계 생멸의 지혜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 단계의 지혜에 이르기 전에 함정에 빠지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빛을 보는 등 열 가지 위빠사나 장애에 대한 것이다.

 

위빠사나 열 가지 장애는 4단계를 지나 더 높은 단계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생멸의 지혜에 이르기 전에 빠져 버리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빛을 보았을 때 나에게 이런 빛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것은 무상한 것이고, 유위적인 것이고, 조건적으로 생겨난 것이고, 파괴되기 마련이고, 괴멸되기 마련이고, 사라지기 마련이고, 소멸되기 마련이다.”(S20.126)라고 보라고 했다.

 

생멸의 지혜에 이르지 않은 자가 빛이나 경안에 안주한다면 수행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수행의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즐거운 느낌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괴롭다고 보라고 했다. 이는 무상하기 때문이다. 조건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들 세 가지 느낌은 무상한 것이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지어진 것이고 파괴되는 것이고 소멸하는 것이고 사라짐의 원리를 지닌 것으로 지멸하는 것이다.”(S36.9)라고 했다.

 

오늘 한시간 좌선 대부분을 사유로 보냈다. 그러나 이것은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사유한 것이기 때문에 망상이 아니다. 오히려 지혜에 가깝다. 경전이나 논서, 법문에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후기를 장문으로 장시간 쓰는 것도 좌선에서 사유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좌선 한시간은 짧지 않다. 매우 긴 시간이다. 하루 일과에서 한시간은 매우 긴 시간이다. 좌선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사유를 중단하고 배의 부품과 꺼짐을 제대로 관찰하고자 했다. 집중이 잘 되지 않자 명칭을 붙였다. 배가 부풀어 오를 때는 부품이라고 붙이고, 꺼질 때는 꺼짐이라고 붙이고, 꺼짐과 부품 사이에 간격은 엉덩이 닿음이라고 명칭을 붙였다.

 

새김이 잘 되지 않을 때는 명칭을 붙이면 효과적이다. 오늘 좌선 말미에 부품, 꺼짐, 닿음하며 명칭을 붙여 보았다. 똑 같은 행위를 백번이든 천번이든 해야 한다. 그렇게 새기다 보면 마음이 평안해진다.

 

평안을 즐긴다면 사마타가 될 것이다. 이런 경우 빠져 나와야 한다. 어떻게 빠져 나오는가? “즐거운 느낌은 괴로운 것이다.”라며 빠져 나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즐거운 느낌은 나의 것이 아님을 말한다.

 

경안도 나의 것이 아니다. 조건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몸이 있어서 형성된 것이고, 좌선해서 형성된 것이고, 부품과 꺼짐 그리고 닿음을 새겨서 형성된 것이다. 결국 무상한 것이다. 조건이 바뀌면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나의 것이라고 움켜 쥐며 즐긴다면 나중에 허망할 것이다. 이럴 때는 차라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라며 벗어나는 것이 좋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탐심이 일어났을 때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분심이 일었났을 때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 났을 때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 좌선에서 경안 상태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라고 해 보았다.

 

 

즐거움이나 또는 괴로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과

내적이거나 외적이거나

어떠한 것이든 느껴지는 것이 있네.

 

그것은 괴로움이라 알고

괴멸되는 허망한 사실을 경험하고,

경험하여 그 파멸을 보니

거기서 이처럼 욕망을 떠나네.”(S36.2)

 

 

2023-10-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