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느낌의 변화를 분명히 알아야, 재가안거 75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0. 14. 12:31

느낌의 변화를 분명히 알아야, 재가안거 75일차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억만장자가 부럽지 않다. 부귀영화도 부럽지 않다. 그냥 이대로 앉아 있고 싶다. 밖에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고 천둥번개가 쳐도 눈을 감으면 이곳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피난처이다.
 

 
오늘은 재가안거 75일째이다. 오늘은 토요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모두 집에 있는 것 같다. 일터가 있는 빌딩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백권당에 6시 46분에 도착했다.
 

 
안거에 주말은 없다. 주말이라고 해서 안거를 쉬는 것은 아니다. 비 온다고 전쟁하지 않은 것은 아니듯이 안거는 날씨와 무관하다. 안거를 마치는 그날까지 강행군 하는 것이다.
 
이번 안거에서 목표로 둔 것이 있다. 그것은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이다. 한시간 앉아 있기가 힘들어서 목표로 잡은 것이다. 이제 목표는 달성된 것 같다. 한시간 앉아 있어도 다리저림이 없기 때문이다.
 
통증은 문제 되지 않는다. 좌선 중에 다리저림이 왔을 때 처음에는 겁을 냈다. 다리가 끊이질 듯 아팠을 때 혹시 불구가 되는 건 아닌지 염려 되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마치 ‘따로국밥’처럼 통증 따로 마음 따로가 된 것이다.
 
통증은 느낌이다. 느낌 중에서 괴로운 느낌이다. 이런 괴로운 느낌은 나의 것일까?
 
좌선할 때 주관찰대상은 복부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한다. 배가 부풀 때 부푼다고 새긴다. 배가 꺼질 때는 꺼진다고 새긴다. 여기서 부품과 꺼짐은 물질적 현상이다. 이를 새기는 마음은 정신적 현상이다.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여 새기는 것이다. 통증도 이와 다르지 않다.
 
통증이 발생 했을 때 통증이라고 새긴다. 통증과 마음을 분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통증 따로, 마음 따로’가 된다. 마치 남의 다리 보듯이 통증을 새기는 것이다.
 
통증을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관찰하면 나의 것이 아니다. 그저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조건이 다하면 통증은 사라진다. 통증뿐만 그런 것은 아니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모두 그렇다. 그래서일까 니까야를 보면 도처에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정형구를 볼 수 있다.
 
오늘 좌선에서 통증은 발생하지 않았다. 한시간 동안 꼼짝 않고 가만 앉아 있었어도 통증은 없었다. 이렇게 통증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앉아 있을 만 했다. 앉아 있는 것이 즐거운 것이다.
 

 
오늘 좌선에 들어가기 전에 사무실 구조를 바꾸었다. 화분을 이동한 것이 구조를 바꾸는 큰 요인이다. 명상공간을 더 넓게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 명상공간은 세 평 가량 된다. 아파트 거실 면적은 된다. 최대 15명은 앉을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데 이전에는 양 옆에 화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좁아 보였다.
 

 
화분을 한군데로 몰았다. 명상공간에 있는 화분은 잎이 무성하고 보기 좋은 것으로 배치했다. 앞으로 북콘서트 할 때 보기 좋으라고 한 것이다.
 

 
명상공간에 형광등을 새로 교체 했다. 그것도 두 개를 달았다. 그러자 갑자기 공간이 환해졌다. 공간이 밝으니 마음도 밝아지는 것 같았다.
 
마음이 우울 할 때 청소를 하면 산뜻해진다. 더 좋은 것은 가구 배치를 달리하는 등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백권당의 경우 화분을 재배치하여 분위기를 바꾸었다.
 

 
책상을 중심으로 하여 온통 화분이다. 화분 종류도 다양하다. 이렇게 화분만 바꾸어도 마음이 밝아지는 것 같다. 그러나 명상하는 것과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명상을 하면 세상 근심걱정 잊어 버린다. 일부러 뉴스도 보지 않는다. 뉴스를 보면 다급한 목소리로 큰 일 날 것처럼 보도한다. 일방적 보도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택적 보도를 하는 것이다.
 
뉴스를 보지 않으니 근심걱정이 없다. 무엇보다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념 투쟁에 휘말리지 않는 것과도 같다. 뉴스 하나 보지 않아도 세상은 살만 하다.
 
TV를 보지 않으니 세상 편하다. 집에서 TV를 보지 않은지 몇 달 되었다. 드라마는 물론 예능 등 갖가지 프로를 보지 않는다. 보면 거기에 빠진다. 보고 나면 허전하다. TV를 보지 않으니 세상이 고요하다.
 
노래를 듣지 않으니 세상이 조용하다. 안거 전에는 종종 좋아하는 노래를 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듣지 않게 되었다.
 
노래와 춤은 사람의 감정을 자극한다. 그래서일까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노래는 울음이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춤은 광기이다.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것은 장난이다."(A3.103)라고 했다.
 
 
안거에 들면서 변화가 많다. 사람 만나는 것을 자제하고 있다. 홀로 조용히 있는 것이 좋다. 백권당에서 명상할 때가 최상이다. 이런 것도 행복일 것이다.
 
명상한다고 하여 나홀로 방식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경전이나 논서, 그리고 유튜브 법문을 이용한다. 머리맡에 상윳따니까야와 위빳사나 방법론이 있어서 기회만 되면 열어 본다. 유튜브에서는 빤냐와로 스님의 지난 영상을 본다.
 
어제 잠결에 빤냐와로 스님의 영상을 들었다. 현재 재가안거 중에 있는 나에게 매우 적절한 것이다. 이는 ‘대념처경 5강. 수행의 기본 패턴(핵심)--앞 법문 총 정리(20110305)’(https://youtu.be/4GuWjQ3DtEg?si=Diie1i5iw1Lug2aG)라는 제목의 영상이다. 무려 8년전에 설해진 영상이다.
 
인터넷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인터넷의 바다에 올려진 콘텐츠는 누군가 보게 되어 있다. 빤냐와로 스님의 위빠사나 수행과 관련된 법문도 시절인연이 되어서일까 주의 깊게 들었다.
 
법문은 1시간 9분이나 된다. 이 중에서 느낌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에 다가 왔다.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느낌으로 알면 수행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고 했다.
 
스님은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에 대하여 설명했다. 대념처경에 있는 게송이다. 여기서 아따삐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사띠마는 알아차림을 지니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아따삐와 사띠마가 결합되면 지속적인 알아차림이 된다.
 
새김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 노력이 없으면 새김을 놓칠 것이다. 그 결과 번뇌망상에 지배당하기 쉽다. 마치 집에 도둑이 든 것처럼 마음이 탈탈 털리는 것 같다.
 
사띠는 지속적으로 유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띠만 유지만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집중이 되어 편안한 상태로 계속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명상을 왜 하는가? 편안하자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눈을 감고 마음을 대상에 집중하면 세상 근심걱정 없을 것이다. 단지 이런 상태를 즐긴다면 불교수행자라고 볼 수 없다.
 
불교수행자라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빤냐와로 스님은 알아차림(sati,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아, 이것이 무상한 성품이구나! 이것이 괴로움의 성품이구나! 이것이 무아라고 하는 성품이구나!”라고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다름아닌 삼빠자나에 대한 것이다.
 
삼빠자나는 오온의 현상에 대한 특성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이는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알게 해 주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삼빠자나는 지혜의 영역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삼빠자나할 것인가?
 
삼빠자나는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알기 위한 것이다. 사마타에서는 움직이는 대상이 없어서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알 수 없다.
 
삼빠자나는 위빠사나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삼빠자나는 항상 아따빠와 사띠와 함께 사용된다. 이는 부단한 노력(아따삐)과 새김의 확립(사띠마)과 올바른 알아차림(삼빠자노)에 대한 것이다. 이 세 가지가 함께 했을 때 무상, 고, 무아라는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을 다시 듣고 있다. 후기를 쓰면서 필요한 부분을 듣고 있는 것이다. 스님은 “사띠를 놓치면 죽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말은 처음 듣는다.
 
사띠(새김)는 얼마나 중요할까? 이에 대하여 스님은 “알아차림이 없이 백년을 사는 것보다 알아차림을 지니고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라는 문구를 인용했다. 여기서 알아차림은 사띠를 말한다.
 
스님이 인용한 문구를 찾아 보았다. 법구경에 비슷한 게송이 있다. 이는 “게으르고 정진 없이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정진하고 견고하게 노력하며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2)라는 게송을 말한다.
 
위빠사나에서 아따빠와 사띠와 삼빠자나는 항상 함께 한다. 이는 정진과 사띠와 지혜에 해당된다. 정진이 있는 곳에 사띠가 있고, 사띠가 있는 곳에 지혜가 있는 것과 같다. 이 중에서 가장 핵심은 사띠이다. 그래서 사띠를 놓치면 죽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이다.
 
무심코 하는 일이 종종 있다. 무심코 하늘을 쳐다 본다든가 무심코 머리를 긁는 행위 등을 말한다. 이렇게 무심코 하는 것은 사띠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라면 사실상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다. 수행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Dhp.21)라고 했다.
 
항상 사띠를 유지해야 한다. 걸을 때나 앉을 때나 새김이 있어야 한다. 걸을 때는 걷는 다고 알아야 하고, 멈출 때는 멈춘다고 알아야 한다. 이렇게 행, 주, 좌, 와 간에 새김이 있어야 한다.
 
새김이 없다면 죽은 목숨이다. 살아도 살아 있지 않은 사람이다. 마치 좀비와도 같은 사람이다. 나는 이제까지 좀비처럼 살아온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을 새겨야 한다. 새겨야 하는 이유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함이다. 여기에 나라는 것은 개입 될 수 없다. 대상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로 보면 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무상, 고, 무아로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빤냐와로 스님은 느낌으로 이야기 했다.
 
빤냐와로 스님에 따르면 움직임으로 삼빠자나를 할 수 없다고 했다. 변화를 지켜 봄으로 가능하다고 했다. 단지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는 것만으로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볼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삼빠자나는 느낌의 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에 스님은  빳타나를 인용했다. 빳타나에 따르면, “몸의 감각으로 인해서 위빠사나가 일어나고, 도가 일어나고, 지혜가 일어나서 열반의 성취가 일어난다.”라고 되어 있음을 말한다.
 
열반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단지 움직임이나 운동성을 새기는 것만으로 되지 않는다. 변화에 따른 느낌을 새김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느낌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느낌을 말한다.
 
열반의 길로 가려면 웨다나(느낌)을 경험해야 한다. 무색계 존재는 몸이 없어서 느낌을 경험할 수 없다. 그래서 열반에 들 수 없다. 부처님의 스승이었던 알라라 깔라마와 웃따까 라마뿟따는 죽어서 무색계 천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몸이 없어서 열반에 들 수 없었다.
 
인간으로 태어나야 열반에 들 수 있다. 선정수행을 해서 색계천상에 태어난 자는 열반에 들기 힘들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느낌의 변화를 알기 힘들기 때문이다. 오로지 인간만이 가능한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행복하게 생각해야 한다. 인간 몸 받았을 때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알도록 노력해야 함을 말한다. 삼빠자나를 해야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느낌에서 느낌으로의 변화를 알아차려야 한다. 그래야 삼법인의 특성을 알아차리게 된다. 무상, 고, 무아라는 삼법인의 특성이 드러났을 때 사띠에서 삼빠자나가 이루어짐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아따삐 삼빠자나 사띠마”의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느낌을 어떻게 알아차려야 할까?
 
즐거움 속에서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즐거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아야 하며, 괴로운 느낌은 화살이라고 보아야 하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보아야 한다.”(S36.5)라고 되어 있다.
 
괴로운 느낌은 화살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왜 화살로 보라고 했을까? 이는 찌르면 아프기 때문이다. 좌선할 때 다리 저림도 화살을 맞은 것처럼 아프다. 바늘로 콕콕 찌르듯이 아픈 것이다.
 
괴로운 느낌은 화살처럼 알아야 괴로운 느낌에 사로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왜 그런가? 콕콕 찌를 때 변하기 때문이다. 괴로운 느낌이 변한다는 사실을 모를 때 어떻게 될까? 괴로운 느낌은 항상 상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괴로운 느낌이 변한다고 알아차려야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경전적 근거가 있다.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방일하지 않고 성실하게 정진할 때에 괴로운 느낌이 생겨나면, 그는 이와 같이 ‘나에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것은 조건적이지 조건 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이 몸을 조건으로 한다. 그런데 이 몸은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이 몸을 원인으로 생겨난 괴로운 느낌이 어떻게 항상 할 것인가? 그는 몸에 관하여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관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소멸을 관찰하고 버림을 관찰한다. 그는 몸에 관하여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관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 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소멸을 관찰하고 버림을 관찰하면, 몸에 관한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관한 분노의 경향을 버리게 된다.”(S36.7)
 
 
세 가지 느낌이 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느낌을 말한다. 위 가르침은 세 가지 느낌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문구가 있다. 그것은 조건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적 조건을 말한다.
 
세 가지 느낌은 몸이 있어야 생겨난다. 여기서 몸에 대하여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몸에서 생겨난 느낌도 조건발생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조건과 조건이 겹친 것이다. 무상한 것과 무상한 것이 겹친 것과 같다. 이렇게 본다면 느낌은 무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상한 것은 변화하는 것이다. 무상한 것은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경에서는 느낌에 대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소멸을 관찰하고 버림을 관찰한다.”라고 했다. 변화에 대한 것이 무려 다섯 가지가 나온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생겨난 것은 반드시 소멸하는 것임을 말한다.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을 듣고 후기를 작성하고 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열반의 길로 가려면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움직임, 예를 들어 배의 부품과 꺼짐이라는 운동성만을 새겨서는 가능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빳타나에서는 “몸의 감각으로 인해서 위빠사나가 일어나고, 도가 일어나고, 지혜가 일어나서 열반의 성취가 일어난다.”라고 했다.
 
빤냐와로 스님은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스님은 법문을 마칠 때 “수행을 할 때는 움직임을 분명히 알도록 하십시오. 시작되는 것, 진행 되는 것, 끝을. 그것이 이루어지고 나면 느낌에 대하여 알도록 하십시오. 그 느낌의 변화들을 알아차리려고 노력하십시오. 이렇게 수행해서 자기에게 맞는 단계들을 밟아 나가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재가안거 75일째를 맞이 하여 오늘도 긴 후기를 작성했다. 좌선은 한시간 했지만 후기는 세 시간을 훌쩍 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것도 수행일 것이다. 특히 수행의 방향을 잡아 주는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을 녹취해서 옮겨 보았다. 느낌의 변화를 삼빠자나 하는 것이 열반에 이른다고 말했다.
 
 
2023-10-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