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수행에 진전이 없는데, 재가안거 72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0. 11. 11:57

수행에 진전이 없는데, 재가안거 72일차
 
 
수행에 진전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퇴보하는 것 같다. 오늘 한시간 좌선에서는 망상이 지배했다. 마음이 탈탈 털린 것 같았다. 무언가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오늘은 재가안거 72일째이다. 행선을 먼저 했다. 막바로 앉았을 때 졸음이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행선을 20분 가까이한 다음에 자리에 앉았다.
 
좌선은 8시 24분에 시작되었다. 한시간 알람 설정한 것에 대하여 시작버튼을 눌렀다. 아래로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한시간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언제나 그렇듯이 좌선에 임하는 각오는 남다르다. 오늘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라고 다짐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놓치지 않고 새기겠다는 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망상에 마음이 털리지 않겠다는 것을 말한다.
 
망념을 막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배의 부품과 꺼짐을 놓치지 않고 새기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엉덩이 ‘닿음’을 추가한다면 철통 같은 보안이 된다. 부품과 꺼짐, 닿음을 새기면 물샐 틈 없는 보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망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본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허탈하다. 한마디로 맥 빠지는 것이다. 마치 집에 도둑이 든 것 같다. 주인이 문단속을 하지 않아 도둑이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주관찰대상은 배의 움직임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은 피난처와도 같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 순간적으로 기쁨이 일어날 때가 있다.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지만 어느새 망념이 치고 들어와 깨져 버린다.
 
좌선 한시간은 변화무쌍하다. 마치 일생과도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의 문만 열어 놓는다. 청각의 문도 열어 놓는 것과 다름 없다. 이때 주관찰 대상이 없으면 마음의 문으로 들어오는 생각에 지배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배의 부품과 꺼짐을 놓치지 않겠노라고 다짐한다. 마음을 배의 부품과 꺼짐이라는 기둥에 새김이라는 밧줄로 꽁꽁 묶어 놓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마음은 새김의 밧줄 길이만큼 움직일 것이다. 이것이 고짜라, 행경이다. 소가 줄의 범위만큼 풀을 뜯듯이, 마음은 새김의 밧줄 길이만큼 반조하게 된다.
 
한시간 좌선 동안 이런 일 저린 일이 생긴다. 마치 일생을 보는 것 같다. 어떤 때는 기쁨과 평안이 일어난다. 이런 때는 새김이 좋을 때이다.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이다. 이런 상태가 되면 즐기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바로 위빠사나 경계라는 것이다.
 
위빠사나 경계에 대한 것은 청정도론에 언급되어 있다. 이른바 ‘십경계’라 하여 빛 등을 보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위빠사나 경계는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청정도론에서는 “이 통찰의 경계적 오염은 진리를 꿰뚫은 고귀한 제자나 삿된 행도를 닦아 명상주제를 놓아버린 게으른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Vism.20.105)라고 했다.
 
수행을 하다 보면 편안해지는 상태가 있다.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을 때 계속 그 상태에 머물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도와 과의 길로 가는데 있어서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도와 과를 증득한 수행자에게는 빛과 같은 장애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명상주제를 놓아 버린 자에게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 십경계가 나타날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오직 올바른 행도를 닦고 이치에 맞게 노력하고 통찰을 시작한 훌륭한 가문의 아들들에게만 일어난다.”(Vism.20.105)라고 했다.
 
위빠사나 십경계는 명상주제와 함께 올바른 수행을 하고 있는 자에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수행의 목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왜 그런가?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빛을 보았을 때 마치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어떤 수행자가 “실로 지금 이전에는 이러한 빛이 일찍이 생겨나지 않았으나 확실히 나는 길에 도달했고 경지를 획득한 것이다.”(Vism.20.107)라고 착각할 수 있음을 말한다.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십경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청정도론에서는 십경계가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훌륭한 가문의 아들들에게만 일어난다.”(Vism.20.105)라고 했는데, 이에 대하여 “생멸의 지혜에 이르러 위빳사나를 시작하는 이라고 불리는 선한수행자들에게만 일어난다.”(2권, 280쪽)라고 풀어서 설명해 놓았다.
 
십경계는 수행을 시작하는 수행자에게 일어난다. 특히 위빠사나 16단계지혜중에서 4단계인 생멸의 지혜에 이른 수행자에게 나타난다고 했다. 여기서 생멸의 지혜에 이른 수행자는 아직 완전한 생멸의 지혜에 이른 상태가 아니라 유약한 생멸의 지혜에 이른 상태를 말한다. 생멸에 대하여 처음 생하는 것과 마지막 멸하는 것만 보는 것을 말한다. 완전한 생멸의 지혜는 생과 멸 사이에 있는 여러 개의 생멸도 볼 수 있는 지혜를 말한다.
 
빠띠삼비다막가(무애해도)에 십경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마하시 사야도가 대역한 것이다.
 
 
“bhāse ceva ñāe ca, pītiyă ca vikampati;
Passaddhiy
ā sukhe ceva, yehi citta pavedhati.
Adhimokkhe ca paggahe, upatthāne ca kampati:
Upekkhāvajjanāya ca, upekkhāya nikantiyā.”Ps.292)


(
대역)
“obhase ceva 생겨나는 광명 때문에, 또한
ñāe ca 매우 예리하고 빠른 지혜 때문에도,
pltiya ca 좋아하고 기뻐하는 희열 때문에도
citta 새겨 앎이라는 수행의 마음은
vikampati 동요한다. 동요하여 무너진다.

passaddhiya ca 몸과 마음의 편안함이라고 하는
경안 때문에, 또한

sukhe ceva 마음의 행복 때문에,
yehi 이 두 가지 때문에도
cittam 새겨 앎이라는 수행의 마음은
pavedhati 요동친다. 요동쳐서 무너진다.

 
adhimokkhe ca 매우 깨끗한 믿음이라고 하는 확신 때문에도,
paggahe ca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균등하게
잘 노력하는 분발 때문에도,
upatthane ca 대상에 뚫고 들어가듯 분명한
확립, 즉 새김 때문에도,
upekkhavajjanaya 대상을 일부러 찾지 않고서도
균등하게 숙고할 수 있는

전향평온과 함께 생겨나는
upekkhaya ca 위빳사나 평온 때문에도,
nikantiya ca 위빳사나에 대한 애착과 갈망, 즉 갈애 때문에도

cittam 새겨 앎이라는 수행의 마음은
kampiti 동요한다. 동요하여 무너진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281-282쪽)
 
 
빠띠삼비다막가의 게송에 대한 대역을 보면 위빠사나 수행이 무너지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했다. 수행 중에 빛을 보았을 때 “새겨 앎이라는 수행의 마음이 무너진다.”라고 했다. 이런 무너짐에 대하여 열 가지로 보았다. 즉 오바사(광명), 냐나(지혜), 삐띠(희열), 빳사디(경안), 수카(행복), 아디목카(확신), 빡가하(책려), 우빳타나(확립), 우뻭카(평온), 니깐띠(갈망)를 말한다.
 
위빠사나 십경계에서 광명은 어떤 때 생겨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광명은 삼매 그 자체 때문에도 생겨나고, 위빳사나 지혜 때문에도 생겨난다.”(2권, 282쪽)라고 했다.
 
수행 중에 빛이 생겨나는 것은 삼매 수행을 했을 때 생겨나고, 또한 위빳사나 지혜가 생겼을 때도 생겨남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그중, 부처님공덕 거듭새김 (Buddhanussati) 등의 사마타 수행을 계속 노력하고 있는 이들에게, 또한 물질과 정신이 생멸 할 때마다 아직 그것을 차례대로 따라가며 빠르게 새겨 알 수 없는, 아직 분명히 구분하여 알 수 없는 위빳사나 수행자에게 생겨나는 광명, 빛의 종류는 삼매 그 자체 때문에 생겨나는 광명, 빛이다.”(2권, 282쪽)라고 했다.
 
수행을 하면 누구나 빛을 볼 수 있다. 사마타 수행뿐만 아니라 위빠사나 수행을 해도 빛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위빠사나 수행에서 빛을 본다는 것은 도와 과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 위빠사나 지혜가 무르익지 않는 자에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아직 생멸의 지혜(4단계)에 들어가지 않은 수행자에게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논서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수행자가 빛을 볼 수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집중이 되면 빛을 볼 수 있는데 그 빛에 빠져 있을 때 새김을 잃어 버릴 수 있다. 초보수행자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어떤 빛들이 있을까? 이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따라서 일부 위빳사나 수행자가 정신·물질 구별의 지혜가 성숙된 때를 시작으로 경험하기도 하는 ‘번쩍번쩍’, ‘반짝반짝’하는 작은 빛들이나, 조건파악의 지혜를 시작으로 경험하는 녹색·붉은색· 파란색·노란색 등의 여러 빛이나 형색들, 불꽃처럼 밝아 오는 빛들, 이러한 빛들은 삼매에 의한 빛이라고 결정해야 한다. 빛뿐만 아니다. 그러한 삼매의 힘에 따라 부처님의 모습, 아라한의 모습 등 여러 모습. 형체들도 정신·물질 구별의 지혜, 조건파악의 지혜 등이 성숙된 때를 시작으로 경험하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삼매의 힘 때문이라고 결정해야 한다. 명상의 지혜 단계에서도 그러한 것들을 많이 경험할 수 있다. 생멸의 지혜가 아직 미숙한 단계에서도 조금 경험하기도 한다.”(2권, 284쪽)
 
 
수행중에 빛을 경험하는 것은 위빠사나 지혜 초기단계에 해당된다. 1단계 때는 “‘번쩍번쩍’, ‘반짝반짝’하는 작은 빛들”이라고 했다. 2단계 때는 “녹색·붉은색· 파란색·노란색 등의 여러 빛이나 형색들, 불꽃처럼 밝아 오는 빛들”이라 하여 컬러풀한 빛이나 형태가 있는 빛이 생겨남을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 초기단계에서 경험하는 것은 빛뿐만이 아니다. 냐나(지혜), 삐띠(희열), 빳사디(경안), 수카(행복), 아디목카(확신), 빡가하(책려), 우빳타나(확립), 우뻭카(평온), 니깐띠(갈망)을 경험한다. 이 중에서 경안(passaddhi)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경안이 생겨나면 이 경안과 함께 가벼움(lahuta), 부드러움(muduta), 적합함(kammaññāta), 능숙함(paguññāta), 올곧음(ujukata)도 분 명하게 생겨난다. 따라서 수행자의 몸과 마음에 경안이 생겨날 때는 무거움이 없다. 매우 가볍다. 새겨 아는 것도 매우 가볍고 빠르게 생겨 난다. 다른 생각을 한번 해 보아도 매우 빠르다. 갈 때도 마치 다리가 없는 것처럼 매우 가볍다. 앉을 때도, 누울 때도, 굽힐 때 등에서도 마치 몸 이나 팔, 다리가 없는 것처럼 매우 가볍다. ‘만약 걷는다면 먼 여행도 금방 도달할 것이다’라고도 생각한다. 빨리 달려가려는 마음도 생긴다. 그러한 마음의 바람처럼 행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몸이든 마음이 든 거칠고 격함이 전혀 없이 매우 부드럽다. 예경을 표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바라는 곳마다 마음을 잘 둘 수 있다. 관찰하고 알아차리려는 것을 곧바로 마음기울여 관찰하고 새길 수 있다. 거친 대상들, 거친 사람들과 만나려고 하지 않고 조용하게 관찰하며 지내려 한다. 마음기울여 관찰하도록 몸도 마음도 매우 당당하고 적당하다. 한 시간, 두 시간 등 오랫동안 계속 앉아서 관찰하고 있어도 몸에 저림이나 뜨거움. 아픔, 피곤함이 없이 평상시대로 관찰하며 지낼 수 있다. 새김이 무너지거나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평상시 새김이 좋던 그대로 오랫동안 새김이 잘 유지된다. 몸과 마음 모두가 매우 활기차다. 몸의 힘도 약해지지 않고, 새기는 마음도 ‘매일 빠지지 않고 예경드리는 예불 게송, 나모 땃사 등의 구절들을 독송할 때 놓치거나 틀리지 않고 잘 하듯이’새겨야 할 대상들에 차례대로 잘 밀착하며 새긴다. 움츠리거나, 멈추거나, 무너지거나 하지 않고 새김이 하나의 여세로 계속 힘이 좋다. 나쁜 행위에 대한 관심, 자기의 허물을 숨기려 함, 없는 공덕을 드러내어 있는 체 함 등의 간교함이 전혀 없다. 마음이 매우 정직하고 올바르다. 또한 그렇게 평생 청정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이러한 경안 등의 여섯 법들이 매우 강하게 생겨나기 때문에 ‘앉아 있을 때나, 서 있을 때나, 가고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굽히거나 펼 때, 관찰할 때 좋지 않은 것들은 경험 하지 않고 항상 좋다’라고만 생각한다. ‘몸도 마음도 매우 편안하고 지내 기에 좋다. 매우 행복하다’라고 생각한다.”(2권, 292-293쪽)
 
 
몸과 마음이 매우 편한 상태가 경안이다. “아, 좋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것도 경안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경안상태는 새김을 놓쳐 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빠띠삼비다막가(무애해도) 게송에서 “새겨 앎이라는 수행의 마음은 요동친다. 요동쳐서 무너진다.”(Ps.292)라고 했기 때문이다.
 
빤냐와로 스님은 위빠사나 경계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수행을 해 나갈 때 수행이 잘 되나간다 해서, 그 잘되나가는 것으로 해서 여러가지 현상들을 경험하는 것 가지고 만족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아주 기초적인 것이라고 빨리 거기서부터 탈출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유튜브 18분, 수행이 잘될 때의 체크포인트 & 번뇌의 체크리스트 , 2023 10 07, https://youtu.be/gsC7kvC_g1Q?si=ij2XcuZQ8SvU7hzy)
 
수행 중에 빛을 본다든가, 경안의 상태에 있다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의 장애가 된다. 그래서 거기에서 빨리 탈출해야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한가? 이에 대하여 빤냐와로 스님은 “중요한 거는 사띠가 지금 잘 되고 있는가 하는 것, 지금의 단계에서는 잘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고 얼마만큼 나에게서 번뇌가 떨어져 나갔는가를 본인이 체험하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대단한 반전이다.
 
열 가지 경계에 이르렀을 때 주관찰 대상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배가 주관찰대상이라면 부품과 꺼짐을 새겨야 한다. 그런데 빤냐와로 스님은 번뇌가 얼마나 떨어져 나갔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반전에 반전을 보는 것 같다.
 
어떻게 해야 번뇌를 떨어져 나갔는지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빤냐와로 스님은 중부경전에서 ‘삭감경’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삭감경을 키워드로 검색해 보았다. 맛지마니까야 8번 경인 ‘버리고 없애는 삶의 경(Sallekha sutta)’이다.
 
빤냐와로 스님은 살레카경에 실려 있는 44가지 항목에 대하여 나열하여 말했다. 도중에 중요한 것은 설명을 하기도 했다. 빛이나 경안보다도, 주관찰 대상을 새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에게 얼마나 번뇌가 떨어져 나갔는지 확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번뇌체크리스트’와 같은 것이다.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쭌다여, 그대는 지금 여기서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1)다른 사람들이 잔인하더라도 우리는 잔인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2)다른 사람들이 생명을 살해하더라도 우리는 생명을 살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3)다른 사람들이 주어지지 않은 것을 빼앗더라도 우리는 주어지지 않은 것을 빼앗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4)다른 사람들이 순결을 지키지 않더라도 우리는 순결을 지킬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5)다른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더라도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6)다른 사람들이 이간질하더라도 우리는 이간질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7)다른 사람들이 욕지거리하더라도 우리는 욕지거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8)다른 사람들이 꾸며대더라도 우리는 꾸며대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9)다른 사람들이 탐욕을 부리더라도 우리는 탐욕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10)다른 사람들이 성내는 마음을 갖더라도 우리는 성내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11)다른 사람들이 삿된 견해를 지니더라도 우리는 올바른 견해를 지닐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12)다른 사람들이 삿된 사유를 하더라도 우리는 올바른 사유를 할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13)다른 사람들이 삿된 언어를 쓰더라도 우리는 올바른 언어를 쓸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14)다른 사람들이 삿된 행위를 하더라도 우리는 올바른 행위를 할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15)다른 사람들이 삿된 생활을 하더라도 우리는 올바른 생활을 할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16)다른 사람들이 삿된 정진을 하더라도 우리는 올바른 정진을 할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17)다른 사람들이 삿된 새김을 하더라도 우리는 올바른 새김을 할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18)다른 사람들이 삿된 집중을 하더라도 우리는 올바른 집중을 할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19)다른 사람들이 삿된 지혜를 갖더라도 우리는 올바른 지혜를 가질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20)다른 사람들이 삿된 해탈을 하더라도 우리는 올바른 해탈을 할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21)다른 사람들이 해태와 혼침에 묶이더라도 우리는 해태와 혼침에 묶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22)다른 사람들이 흥분과 회한에 사로잡히더라도 우리는 흥분과 회한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23)다른 사람들이 의심에 빠지더라도 우리는 의심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24)다른 사람들이 악의를 갖더라도 우리는 악의를 갖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25)다른 사람들이 원한을 품더라도 우리는 원한을 품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26)다른 사람들이 저주하더라도 우리는 저주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27)다른 사람들이 횡포를 부리더라도 우리는 횡포를 부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28)다른 사람들이 질투하더라도 우리는 질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29)다른 사람들이 인색하더라도 우리는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30)다른 사람들이 거짓을 행하더라도 우리는 거짓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31)다른 사람들이 기만하더라도 우리는 기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32)다른 사람들이 고집을 부리더라도 우리는 고집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33)다른 사람들이 자만에 빠지더라도 우리는 자만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34)다른 사람들에게는 충고하기 어려워도 우리에게는 충고하기 쉬울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35)다른 사람들이 나쁜 벗이 되더라도 우리는 좋은 벗이 될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36)다른 사람들이 게으르더라도 우리는 부지런할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37)다른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없더라도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38)다른 사람들이 부끄러움이 없더라도 우리에게는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39)다른 사람들이 창피함이 없더라도 우리에게는 창피함이 있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40)다른 사람들이 배움이 적더라도 우리는 많이 배울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41)다른 사람들이 태만하더라도 우리는 애써 정진할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42)다른 사람들이 새김을 확립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새김의 확립을 이룰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43)다른 사람들은 지혜가 부족하더라도 우리는 지혜를 가출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44)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에 집착하고 완고하여 그것을 쉽게 버리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자신의 견해에 집착하지 않고 완고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쉽게 버릴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M8)
 
 
버리고 없애는 삶 44가지를 보면 오계도 있고 십계에 대한 것도 있다. 또한 팔정도에 대한 것도 있고 다섯 가지 장애에 대한 것도 있다. 최종적으로는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버리고 없애는 삶은 번뇌를 소멸하기 위한 삶과 같다. 이런 삶에 있어서 빛을 보는 것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수행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띠를 강조한 것은 아니다. 리스트를 보면 사띠는 42번째 항목으로 44가지 중에서 한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사띠를 강조하는 사람이 있다. 언제 어디서나 사띠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말로 새김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을 보면 사띠가 수행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로 버리고 없애는 삶은 많다. 무려 44가지나 된다.
 
빤냐와로 스님은 사띠 보다도 번뇌가 떨어져 나가는 삶을 강조했다. 빛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가 없다. 몸과 마음이 편안해짐을 경험 했다고 해서 거기에서 머물러서는 안된다. 오계를 지키고, 십선행을 실천하고, 팔정도를 닦고,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하고,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알고, 무엇보다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버리고 없애는 삶이다. 수행에 진전이 없는데 스님의 법문을 듣고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2023-10-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