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똑똑 떨어지도록 새겨야 하는데, 재가안거 73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0. 12. 10:56

똑똑 떨어지도록 새겨야 하는데, 재가안거 73일차

 

 

마음이 청정하면 중생도 청정하다고 했다. 심청정이면 국토청정과도 같은 말이다. 한시간 좌선을 마치고 창을 바라보니 세상이 평화롭다. 아침햇살에 식물은 빛난다. 이런 맛에 명상하는지 모른다.

 

 

오늘은 재가안거 73일째이다. 오늘은 734분에 자리에 앉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배의 부품과 꺼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그런 다짐은 몇 분 지나지 않아 무산된다. 망상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어떤 불교전통에서는 번뇌즉보리라고 했다. 번뇌가 곧 깨달음이라는 말이다. 번뇌가 어떻게 깨달음이 될 수 있을까? 번뇌가 번뇌인줄 알면 깨달음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마치 법구경에서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그로써 현명한 자가 된다.”(Dhp.63)라는 표현이 연상된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어리석은 줄 모른다. 오히려 현명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운다.”(Dhp.63)라고 했다.

 

번뇌는 어리석은 자나 하는 것이다. 현명한 자는 번뇌에 시달리지 않는다. 왜 그런가? 번뇌를 번뇌인 줄 알기 때문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정형구이다. 여기서 이것은 오온을 말한다.

 

오늘 좌선에서는 생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생멸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한 것이다.

 

생멸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멸은 나와 무관하게 일어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지켜 보는 것 밖에 없다.

 

좌선시간 한시간 내내 생멸에 대하여 생각했다. 이는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를 배 부품과 꺼짐이라는 운동성에서 찾아 보고자 했다.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생멸의 지혜는 일어남과 사라짐의 중간 단계까지 보는 것이라고 했다. 단지 처음 일어남과 마지막 사라짐을 보는 것에 대해서는 유약한 생멸이라고 했다. 강력한 생멸은 일어남과 사라짐 사이에 있는 무수한 생멸을 보는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 할 때 무수한 생멸을 보고자 했다. 배가 부풀 때 시간을 필요로 한다. 부풀기까지 몇 단계 과정이 있는 것이다. 이를 보고자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배의 부품에 최대한 마음 기울여야 한다.

 

배의 부품을 볼 때 마치 , 걸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는 가슴에서 걸리는 것과 같다. 배의 부품과 가슴에 걸리는 것이 연동작용을 일으켜서 네 단계로 생멸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소리도 단계적으로 생멸을 볼 수 있을까?

 

명상공간은 그다지 조용하지 않다. 빌딩이 도로 바로 옆에 있어서 차 지나가는 소리가 시끄럽다. 전철 지나가는 소리는 더 시끄럽다. 그럼에도 잠시 고요할 때가 있다.

 

차가 신호를 받을 때, 전철이 공백일 때 일시적으로 고요하다. 이럴 때는 산중에 있는 것 같다. 생멸도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왜 부처님이 숲속이나 빈집, 동굴, 무덤가에서 명상하라고 했는지 이해가 갈 것 같다.

 

백권당 사무실에서 명상할 때 가장 걸리는 것은 소음이다. 산중이 아니기 때문에 소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소음도 잘 관찰하면 생멸이라는 것이다. 소음이 항상 계속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겨난 것이 있으면 사라지지 마련이다.”라는 말을 실감한다.

 

명상 중에 갑자기 까마귀가 까악, 까악하고 울었다. 차량 소음만 듣다가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이럴 때 깨달음의 기연(機緣)이 생각났다.

 

선사들의 깨달음의 기연을 보면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는 말이 많다. 아침 새벽 종소리를 듣고 깨달음이 왔다는 선사도 있고, 밖에서 누군가 대화하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는 선사도 있다. 커다란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에 깨달았다는 사람도 있다.

 

깨달음은 어느 날 갑자기 오는 것 같다. 그것도 소리가 많다. 넘어져서 일어나려고 할 때 깨달음이 왔다는 테라가타 게송도 있다. 어느 장로는 자살을 시도하려 할 때 깨달음이 왔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집을 떠나 출가한지 나는

이십오년이 되었으나,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큼도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했다.”(Thag.405)

 

심일경성을 얻지 못하고

감각적 쾌락의 탐욕으로 괴로워하며

팔을 움켜잡고 울면서

정사(精舍)를 박차고 나왔다.”(Thag.406)

 

차라리 칼을 들어 자결해 버릴까?

몸숨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랴?

학습계율을 포기하고,

어떻게 나와 같은 자가 죽을 수 있을까?” (Thag.407)

 

그때 나는 삭도(削刀)를 들고

침상이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목의 정맥을 자르기 위해

삭도를 가져다 그 곳에 대었다.”(Thag.408)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그 때문에 나에게 일어났고

위험이 분명하게 보였고

싫어하여 떠남이 정립되었다.”(Thag.409)

 

그 때문에 나의 마음이 해탈되었다.

여법하고 훌륭한 가르침을 보라.

세 가지 명지를 성취했으니

깨달은 님의 교법이 나에게 실현되었다.”(Thag.410)

 

 

쌉빠다싸 장로가 읊은 게송이다장로는 출가한지 25년이 되었지만 깨닫지 못했다한계를 느껴서 삭도로 자결하고자 했다그런데 삭도를 목에 대는 순간 깨달음이 왔다는 것이다.

 

장로가 깨달은 순간은 극적이다. 대개 우연히 깨닫는다. 바라밀이 무르익었을 때 어떤 계기가 되어 깨달음이 온다. 그런데 빤냐와로 스님에 따르면 좌선 중에는 오지 않는다고 했다. 걷거나 움직임이 있을 때 온다는 것이다. 이는 넘어질 때, 자리에 누울 때 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삭도를 목에 대는 순간 깨달음이 왔다는 것이다.

 

장로는 삭도를 목에 대는 순간 차가움을 느꼈을 것이다. 이때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일어났다고 했다. 여기서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은 마나씨까라(manasikāra)를 말한다. 대상에 마음을 주의기울이는 것이다. 그 결과 위험이 분명하게 보였고 싫어하여 떠남이 정립되었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그 후에 ‘계행은 병들지 않았는지’라고 성찰하다가 ‘파괴되지 않고균열되지 않은 청정한 계행을 보고 기쁨이 생겨나고 기쁨의 마음에서 몸이 경안해지고 몸의 경안에서 자양없는 행복을 경험하면서 삼매가 일어났기 때문에 마음의 통찰을 통해서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일어났다. 또는 목에 칼을 대어 상처가 생겨나자 생겨난 고통을 진정시키면서 통찰을 통해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일어났다.(ThagA.II.173)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에 대하여 두 가지로 설명해 놓았다. 하나는 계행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고통에 대한 것이다.

 

장로는 계행이 청정했다. 목에 칼을 대는 순간 알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기쁨과 평안, 심일경성이 일어났다. 그리고 통찰지를 얻게 되었다.

 

장로는 목에 칼을 댔다. 그리고 피가 났다. 그 피를 보면서 통찰지가 일어났다. 어쩌면 이런 것도 생멸일 것이다.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 생겨나고 이로 인하여 앎이 있게 된 것이다.

 

요즘 너무 서둘고 있는 것 같다. 마음이 급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마음이 급한가? “생멸의 지혜에 도달해야 하는데.”라고 마음이 급하다고 말할 수 있다.

 

생멸의 지혜에는 아무나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 조건 발생의 지혜에 도달해야 한다. 나는 과연 이 두 가지 지혜에 도달하기나 한 것일까?

 

생멸의 지혜는 나에게 언감생심이다. 미얀마로 건너가서 수없는 철을 수행한 사람도 도달하기 힘든 것이다. 그럼에도 재가안거라는 이름으로 단기간에 도달하려 한다면 욕심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 생멸을 볼 수 있을까? 생멸의 지혜는 칠청정에서 도비도지견청정에 해당된다. 생멸의 지혜에 이르면 열 가지 위빠사나 오염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빛이나 기쁨, 경안 등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것들은 위빠사나 장애라고 말한다.

 

생멸의 지혜 단계에서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마하시사야도의 직제자 중의 하나인 자나까 사야도는 생멸의 지혜 후반부에 대하여 움직임과 꺼지는 움직임들이 하나씩 차례대로 일어나서는 사라지는 것을 깨닫습니다.”(위빳사나 수행 28, 425)라고 말했다. 이어서 또한 관찰하는 마음도 마치 물이 똑똑 떨어지는 것처럼 하나씩 차례대로 일어나서는 사라지는 것을 깨닫습니다.”라고 말했다.

 

생멸의 지혜단계에서 새김은 매우 정밀해야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적용되어야 한다. 팔을 뻗을 때도 여러 단계로 보아야 한다. 걸을 때도, 앉을 때도 여러 단계로 보아야 한다. 과연 이렇게 똑똑 떨어지도록 보는 것이 가능할까?

 

백권당에는 위빠사나 수행지침서가 몇 권 있다. 그 중에 우 조티카 사야도의 마음의 지도가 있다.

 

마음의 지도에서 생멸의 지혜에 대한 것을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네 번째 통찰에 도달하면 나머지는 수월합니다.”(224)라고 했다. 여기서 네 번째 통찰은 생멸의 지혜를 말한다. 이어서 첫 번째 통찰에 이르기는 어렵고, 두 번째 통찰과 세 번째 통찰은 수월하고, 다시 세 번째 통찰에서 네 번째 통찰에 도달하기는 어렵습니다.”라고 써 놓았다.

 

위빠사나 1단계 지혜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를 말한다. 그래서인지 청정도론에서는 견청정이라 하여 매우 길고 상세하게 써 놓았다. 다음으로 위빠사나 4단계 지혜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4단계에 이르면 수행의 전환점에 이른다고 말한다.

 

4단계 지혜에 이르면 다음 단계는 자연스럽게 따라 온다고 한다. 이에 우 조티카 사야도는 생멸의 지혜에 대하여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점점 빨라지고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명료하게 봅니다.”(224)라고 했다.

 

배의 부품과 꺼짐, 앉거나, 서거나, 걸어 갈 때 생멸을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고도로 집중해야 할 것이다. 순간 집중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생선 할 때 여섯 단계로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행선은 천천히 하는 것이다. 단지 사띠만 실어서 걷는 것이 아니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는 과정을 모두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육단계 행선이야말로 법의 성품을 보는 매우 훌륭한 수행방법임을 알 수 있다. 왜 마하시 전통에서 행선을 좌선 못지 않게 중시하는 것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재가안거 73일째를 맞이하여 한시간 좌선했다. 알람이 울리고서도 8분 더 있었다. 반조와 숙고의 시간을 가졌다. 어떻게 하면 생멸의 지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생겨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생멸은 매우 빠르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마음의 생멸은 더 빨리 일어난다. 이런 생멸에 대하여 똑똑 떨어지도록 새겨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 단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

 

 

2023-10-1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