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이번 생에 발판이라도, 재가안거 74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0. 13. 12:07

이번 생에 발판이라도, 재가안거 74일차
 
 
좌선 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스마트폰이 진동한 것이다. 받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받으면 집중이 깨져 버린다. 말을 하는 순간 언어적 행위로 인하여 명상은 그것으로 끝이다. 무시하기로 했다. 진동이 아닌 무음으로 했어야 했다.
 
오늘은 재가안거 74일째이다. 오늘 좌선은 대체로 성공적이다. 어제 보다는 나았다. 번뇌망상이 덜 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평안해서 그대로 이대로 있고 싶었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했다. 주관찰 대상을 새기는 것이다. 초반에 잡지 못하면 번뇌망상으로 보내기 쉽다. 초반부터 배의 움직임에 마음을 기울인 것이다.
 
좌선 중에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을 때 부러울 것이 없다. 재벌이라 해서 이런 행복이 있을까? 돈이 많으면 감각적 욕망에 탐닉하기 쉽다. 그러나 욕망은 끝이 없다. 마셔도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도 같은 것이다.
 
욕망은 욕망으로 제어할 수 없다. 욕망을 내려 놓아야 한다. 명상은 욕망을 여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욕망이 있는 상태에서는 오분도 버티기 힘들다. 그래서일까 초선정에 들어가는 조건은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vivicceva kāmehi)”(S45.8)가 된다.
 
좌선 중에는 두 개의 문만 열려 있는 것과 같다. 의문(意門)과 이문(耳門)을 말한다. 좌선 중에는 눈을 감는다. 이는 안문(眼門)을 닫아 놓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마음의 문과 귀의 문은 닫아 놓을 수 없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면 마음의 문으로 생각이 들어 오지 않는다. 그러나 틈새가 없을 수 없다. 새김이 면밀하지 않으면 그 틈새를 파고 든다. 그러나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는 금방 제압 된다.
 
귀의 문은 막을 수 없다. 한때 귀마개를 하려 했었다. 그러나 그만 두었다. 차 지나가는 소리, 전철 지나가는 소리는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잠시 고요할 때가 있다. 신호가 있을 때, 배차 간격이 있을 때 그렇다. 이럴 때는 산중의 고요를 맛본다.
 
방석에 앉아 있으면 평화롭다.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다. 비록 가진 것은 없어도 부자가 된 것 같다. 비록 지위는 없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이 되는 것 같다.
 
 
멀리 여의어 속박이 없고
멀리 떠난 처소를 즐기니,
숲속에 삶으로
수호자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홀로 한적한 숲에 살면서
수행자가 안락을 얻으니,
제석천을 포함한 천신들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분소의를 착용하니
갑옷을 입고
한적한 숲의 전장에 나간 것과 같다.
여분의 두타행으로 무장했다.
 
악마와 그의 군대를
머지않아 함께 정복할 수 있으니
슬기로운 자라면
한적한 숲속의 삶을 기뻐해야 한다.”(Vism.2.55)
 

 

 
청정도론 두타행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게송에서 수행자의 안락에 대하여 “제석천을 포함한 천신들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라고 했다. 감각적 쾌락의 극을 누리는 욕계천상의 천신들은 ‘법의 맛’을 모른다는 말과 같다.
 
맛 중에 최상의 맛은 무엇일까? 이는 “가르침의 맛은 일체를 이긴다.”(Dhp.354)라는 법구경 게송으로 알 수 있다. 또한 “가르침의 즐거움은 일체의 즐거움을 이긴다.”(Dhp.354)라고 했다. 여기서 가르침은 담마를 번역한 말이다.
 
맛 중에 최상의 맛은 법의 맛(法味)이다. 왜 법의 맛이 최상인가? 이는 “먹을 수 있는 식물의 줄기 등과 같은 모든 맛, 심지어 신들이 먹는 감로식과 같은 음식의 맛들은 사람을 윤회의 세계에 빠뜨리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어떤 고통을 겪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DhpA.IV.75)라고 했다.
 
부자들은 예산에 있어서 한계가 없다. 이런 이유로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기 쉽다. 그러나 아무리 맛 있는 음식도 하루에 열 끼를 먹을 수 없다. 그래서일까 술과 도박과 마약에 탐닉한다.
 
술은 밥을 열 끼 먹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도박은 밥을 백 끼 먹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마약은 밥을 천 끼 먹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그러나 정신만 황폐화될 뿐이다.
 
명상을 하면 먹지 않아도 배부른 것 같다. 감각적 욕망을 여의었을 때 밥을 만 끼 먹는 것 이상일 것이다. 이를 법의 맛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법의 맛은 사향사과와 열반이라는 ‘아홉 가지 출세간법(九出世間法)’을 말한다.
 
구출세간법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수행의 원리(三十七菩提分法)을 닦을 때 구족된다. 그래서 숲속의 수행자에 대하여 “수행자가 안락을 얻으니, 제석천을 포함한 천신들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라고 했을 것이다.
 
오늘 아침 백권당으로 향하면서 생멸의 지혜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과연 나는 이번 생에 생멸의 지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보면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다.
 
생멸의 지혜는 수행의 대전환점이라고 한다. 생멸의 지혜에 이르면 수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이 지혜를 시작으로 수순의 지혜까지의 위빳사나 지혜 아홉 가지를 실천지견청정이라고 부른다.”(2권, 304쪽)라고 했다.
 
실천지견청정은 칠청정에서 여섯 번째 청정을 말한다. 이를 빠알리어로 ‘patipadāāadassa visuddhi’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행도지견청정(行道智見淸淨)이라고 한다. 생멸의 지혜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천지견청정에 속한 위빠사나 지혜는 모두 아홉 가지가 있다. 이를 나열해 보면 1)생멸의 지혜(udayabbaya ñāna), 2) 무너짐의 지혜(bhaga ñāna),3) 공포의 지혜(bhaya ñāna), 4) 위험의 지혜(ādīnava ñāna), 5) 역겨움의 지혜(nibbidā ñāna), 6)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muñcitukamyatā ñāna), 7) 깊이 숙고하는 지혜(paisakhā ñāna), 8) 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sakhārupekkhā ñāna), 9) 수순하는 지혜(anuloma ñāna)가 된다.
 
실천지견청정은 본격적인 수행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제까지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 pariccheda ñāna), 2단계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paccaya pariggha ñāna), 3단계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āsana ñāna)는 예비적 지혜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 4단계 생멸의 지혜는 수행의 전환기 또는 분기점에 해당된다. 여기서 나아갈 수도 있고 주저 앉을 수도 있다. 주저 앉는다면 빛이나 평온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다 읽지 말라고 한다. 왜 그런가?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5단계 무너짐의 지혜를 읽었다면 자신이 그런 단계에 이른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호기심이 있다. 누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심리이다. 아직 생멸의 지혜에도 미치지 못한 수행자가 이 지혜를 넘어서 무너짐의 지혜(5단계) 등을 읽고 싶은 것이다. 설령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어떤 경지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더 나아가 열반은 어떤 경지인지, 열반에 이르는 방법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경전에 근거하여 열반에 이르는 방법을 써 놓았다. 수행자가 미리 읽어서 좋을지 좋지 않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호기심은 어쩔 수 없다. 설령 낮은 단계에 있을지라도 높은 단계가 어떤 경지인지 궁금한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무너짐의 지혜에 대하여 읽고 있다. 우 조티카 사야도의 ‘마음의 지도’에 따르면, 생멸의 지혜에 이른 자는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경지라고 한다. 먼저 생멸의 지혜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법구경 게송에 생멸에 대한 것이 있다. 이는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못보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3)라는 게송을 말한다. 여기서 생멸에 대한 것은 오온의 생멸을 말한다. 그런데 주석을 보면 다섯 가지가 더 추가된다. 이는 무명, 갈애, 행위, 자양분, 접촉을 말한다. 이 다섯에 다섯을 곱하면 스물 다섯 가지가 된다.
 
생멸의 지혜는 스물 다섯 가지 생멸에 대한 것이다. 이런 생멸을 어떻게 새겨야 하는가? 마하시 사야도는 복주석서를 근거로 하여 생멸의 지혜와 무너짐의 지혜에 대하여 함께 묶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물질과 정신이 생멸할 때마다 그것을 새겨 알면서 무상·고·무아의 특성들이 분명하게 드러난 수행자에게 생멸의 지혜가 완전히 구족되고 무르익게 되면 새겨 아는 것이 매우 빠르고 예리하게 생겨난다. 저절로 계속해서 알면서 나아가듯이 생겨난다. 앎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새겨 알아지는, 생겨나는 순간의 대상 형성들도 매우 빠르게 드러난다. 그때는 생겨나는 처음= 생성과, 중간= 머묾에도 마음 기울이지 않는다. 끊어짐이 없이 흐르고 있는 강물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계속 생겨나고 있는 물질과 정신의 연속적인 흐름에도 마음 기울이지 않는다. (앞의 여러 물질과 뒤의 여러 물질, 혹은 앞의 여러 마음과 뒤의 여러 마음이 끊어짐 없이, 다름이 없이 하나인 것으로 지혜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형체나 모습, 형색이 있는 것처럼 드러나는 형성 표상들에도 마음 기울이지 않는다. (예를 들면 굽힐 때나 펼 때, 이전에는 손의 모습이나 형체가 드러났지만, 이때는 (손의 모습 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새길 때마다 ‘사라진다, 무너진다, 없어져 버린다’라고 아는 지혜만 생겨난다. 그때 무너짐의 지혜가 드러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305-306쪽)
 
 
생멸의 지혜에서 무너짐의 지혜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대략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생멸이 드러나면 세 가지 특성도 드러난다.”라는 말이다. 생멸을 새기면 무상, 고, 무아의 특성이 드러남을 말한다.
 
수행을 왜 하는가? 빛을 보기 위해서 수행하는가? 마음의 평안과 안정을 위해서 수행을 하는가? 스트레스를 저감하기 위해서 수행하는가? 아니다. 해탈과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 수행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온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보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세 가지 특성으로 보아야 다음 단계로 진행된다. 이렇게 보아야 해탈과 열반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위빠사나 지혜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머리맡에 상윳따니까야가 있다. 머리맡에 있어서 틈만 나면 읽는다. 요즘 오온 상윳따(S22)를 읽고 있다. 오온 상윳따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삼매를 닦아라. 수행승들이여, 삼매에 들면 수행승은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무엇을 있는 그대로 분명 히 아는가? 물질의 발생과 소멸, 느낌의 발생과 소멸, 지각의 발생 과 소멸, 형성의 발생과 소멸, 의식의 발생과 소멸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S22.5)
 
 
부처님은 삼매를 닦으라고 했다. 이는 집중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삼매는 반드시 선정에서의 ‘본삼매’만을 말하지 않는다.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면 ‘순간삼매’에 해당될 것이다. 순간삼매 상태이어야 오온의 생성과 소멸을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삼매에 들면 오온의 생성과 소멸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생성과 소멸을 어떻게 아는가? 이는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S22.15)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오온의 생성과 소멸을 알면 무상, 고, 무아도 알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을 필요로 한다. 이는 새기는 힘을 말한다. 단지 배의 움직임만 보는 것은 아니다. 이는 “한 번의 꺼짐, 앉음, 발의 움직임, 굽힘, 폄, 움직임, 행위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여러 단계, 여러 부분들로 나뉘어져 분명하게 드러난다.”(2권, 260쪽)라는 말로도 알 수 있다.
 
걸을 때 천천히 걷고자 한다. 새김을 하며 걷는 것이다. 그러나 보행을 할 때 각 단계별로 새기기 힘들다. 정말 그렇게 새긴다면 집에서 일터까지 가는데 하루 이상 걸릴지 모른다.
 
육단계 행선을 하면 각 단계마다 동작을 새길 수 있다. 각 단계마다 생멸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상에서도 행, 주, 좌, 와 간에 단계마다 생멸을 볼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다. 왜 그런가? 현재 수준에서는 행, 주, 좌, 와를 새기기도 벅차기 때문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고 있다. 현재 나의 수준 단계 보다 더 나간 것을 읽고 있다. 어떤 이는 읽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호기심은 내버려 두지 않는다. 아마 읽게 된다면 열반에 이르는 방법도 읽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마하시 사야도는 이미 2권 초입에 도와 과에 이르는 상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해 놓았다는 것이다.
 
 
“1) 매우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이 대상과 새김들이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2) 잡아당겨 움켜쥐던 곳에서 벗어나듯이 대상과 새김들에서 벗어나 버렸다.
 
3) 매우 단단히 묶여 있던 속박에서 갑자기 벗어나듯이 대상과 새김들로부터 벗어나 버렸다.


4) 대상과 새김들이 사라지는 모습이 마치 등불이 ‘획’꺼져 버리듯이 매우 빠르다.


5) 어둠 속에서 밝음으로 즉시 도달하듯이 대상과 새김들로부터 벗어 나 버렸다.


6) 얽매임 속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쑥’하며 이르듯이 대상과 새김들로부터 벗어나 버렸다.
 
7) 물속에 ‘쑥’가라앉듯이 대상이나 새김이 모두 가라앉아 버렸다.


8) 달려오던 이를 가로막아 갑자기 밀어내듯이 대상과 새김이 멈추어버렸다.


9) 대상과 새기는 마음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06-107쪽)
 
 
이것이 도와 과의 순간이다. 이는 다름아닌 열반의 상태를 말한다. 이 중에서 7번 항을 보면 “물속에 ‘쑥’가라앉듯이 대상이나 새김이 모두 가라앉아 버렸다.”라고 했다. 이 말은 빤냐와로 스님이 유튜브나 담마와나 선원 법문에서 말한 것과 일치한다.
 
빤냐와로 스님에 따르면, 열반의 순간에 대하여 화장실 변기통의 물내려 가는 것으로 비유했다. 어느 순간 쑥 내려 가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말려들듯이 소용돌이 치며 내려 가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도통이 아니라 도에 든다’라고 표현 했다.
 
도는 통하는 것일까 도는 드는 것일까? 빤냐와로 스님에 따르면, 도통한다는 것은 아직 열반에 들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도에 들어야 열반에 든다는 말과 같다고 했다. 이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물속에 ‘쑥’가라앉듯이 대상이나 새김이 모두 가라앉아 버렸다.”라고 쓰여져 있는 내용과 일치한다.
 
갈 길이 멀다. 나는 언제나 생멸의 지혜에 이를 수 있을까? 열반의 길은 멀고도 멀다. 이번 생에서 도에 들 수 있을까? 그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이번 생에 안되면 다음 생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번 생에 발판이라도 마련해야 한다.
 
 
2023-10-1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