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이 고뇌의 강을 건너 저 이지(異地)의 나라로, 재가안거 70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0. 8. 09:31

이 고뇌의 강을 건너 저 이지(異地)의 나라로, 재가안거 70일차

 

 

이 고뇌의 강을 건너 니르바나, 저 이지의 나라에 가라.”이 말은 법구경에 나온다. 석지현 스님이 번역한 것을 말한다. 이 경구에서 이 고뇌의 강을 건너라는 말에 마음이 갔다. 그래서 한때 블로그 제목을 이 고뇌의 강을 건너라고 했다.

 

오늘은 재가안거 70일째이다. 숫자 7을 기록했다. 일곱 번째 맞는 10일이다. 또한 오늘은 일요일이다. 오늘로서 재가안거 10번째 맞는 일요일이다.

 

오늘 일요일 외출계획이 있다. 평소와 달리 서둘러야 한다. 좌선도 30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알람은 이전대로 한시간으로 세팅해 놓았다.

 

좌선은 720분에 시작해서 755분에 끝났다. 35분 좌선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지(異地)의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고뇌도 없었다. 법구경에 있는 구절 이 고뇌의 강을 건너 니르바나, 저 이지의 나라에 가라.”라는 말이 실감 되었다.

 

이지의 나라는 어떤 세계일까? 먼저 법구경 원문을 보았다. 이전에 써 놓은 글을 찾아 본 것이다. 또한 글을 보니 블로그 제목을 대승의 바다에서 이 고뇌의 강을 건너로 바꾼 것은 2009629일의 일이다.

 

현재 블로그 이름은 진흙속의연꽃이다. 블로그 명 이 고뇌의 강을 건너에서 진흙속의연꽃으로 변경한 것은 20129월의 일이다. 이렇게 본다면 블로그 명 이 고뇌의 강을 건너3년 가량 존속했던 것이다.

 

이전에 올린 글을 찾아 보니 이 고뇌의 강을 건너 니르바나, 저 이지의 나라에 가라.”라는 말은 법구경 383번 게송에 있는 말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을 보면 형성들의 부서짐을 알면바라문이여그대는 무위를 아는 님이다. (Dhp.383)라고 되어 있다.

 

석지현 스님은 아마 영역을 우리말로 의역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고뇌의 강을 건너 니르바나, 저 이지의 나라에 가라.”라고 멋지게 번역했을 것이다. 이 말에 대한 빠알리 원문을 보면 “Sakhārāna khaya ñatvā, akataññūsi brāhmaa”라고 되어 있다.

 

형성들의 부서짐을 알면 무위를 하는 자라고 했다. 여기서형성들의 부서짐(Sakhārāna khaya)’을 안다(ñatvā)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이는 오온의 부서짐을 말한다. 상카라가 오온을 대표하는 것이다.

 

석지현 스님은 형성들의 부서짐이 고뇌의 강이라고 했고, ‘안다라는 말을 건너라고 번역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지의 나라에 가라라는 말의 본래 뜻은 무엇일까?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형성들의 부서짐을 알면바라문이여그대는 무위를 아는 님이다.”라고 번역했다. 여기서 무위를 아는 님‘akataññūsi brāhmaa’를 번역한 말이다. 또한 브라흐마는 아라한을 말한다. 고대인도의 성직자 계급인 브라흐마나를 불교적으로 재해석한 말이다.

 

빠알리어 ‘akataññūsi’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말은 ‘akataññū형태로 하여 ‘Knowing nirvāa’를 말한다. 열반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무위를 아는 님이다.”라고 번역했다. 빠알리원문에 가까운 번역이다. 그런데 석지현 스님은 니르바나, 저 이지의 나라에 가라.”라고 하여 다소 낭만적으로 의역했다.

 

형성의 소멸이 소멸되면 열반에 이른다. 번뇌가 소멸 되면 저 언덕에 이른다. 저 열반이나 저 언덕은 이지의 나라와 같다. 미지(未知)의 나라가 아니라 이지(異地)의 나라인 것이다.

 

이지의 나라는 부처님이 가 본 나리이다. 부처가 출현할 때마다 그 나라에 가 보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는 제자들도 그 나라에 가 보았다. 그 나라는 더 이상 미지의 나라가 아니라 이지의 나라인 것이다.

 

좌선을 하면 이지의 나라에 있는 것 같다. 모든 고뇌가 사라지는 것 같다. 오로지 배위 부품과 꺼짐에만 마음을 새기고 있으면 다른 것은 잊어 버린다. 설령 열반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방석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이지에 나라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지의 나라에 가면 평온이 있고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다. 전에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이라서 그대로 계속 앉아 있고 싶다. 그런데 이런 것이 위빠사나 경계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어제 잠결에 들은 법문이 있다. 107일에 올려진 법문이다. 오늘이 8일이기 때문에 속된 말로 올려진지 얼마 안되는 따끈따끈한법문이다. 그러나 조회수는 형편 없다. 법문을 보았을 때 100회 이하였다. 지금 보니 고작 290회에 지나지 않는다.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은 들을만하다. 모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애매한 것이 없다.

 

어떤 이의 법문을 들어 보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들으면 들을수록 미궁에 빠진다. 그리고 자괴감이 든다. 왜 그럴까? 그것은 깨달아 보아야 깨닫지.”라는 식의 법문이기 때문이다. 마치 꿈을 깨 보아야 꿈인줄 안다.”라는 식의 말이다. 사띠에 대한 것도 그렇다. “사띠를 할 줄 알아야 사띠인줄 알지.”라는 식이다. 이런 법문은 좌절하기 쉽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것 같다.

 

법문은 경전이나 논서를 근거로 해야 한다. 빤냐와로 스님은 철저하게 수행자의 근기에 맞추어 법문한다.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는 법문이다. 그리고 반드시 경전적 근거를 제시한다.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에 공감했다. 하나하나 새겨둘 만한 가르침이다. 또한 나에게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비록 유튜브로 본 것에 지나지 않지만 나에게 수행점검 해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빤냐와로 스님 법문 제목은 수행이 잘될 때의 체크포인트 & 번뇌의 체크리스트 (2023 10 07)’(https://youtu.be/gsC7kvC_g1Q?si=pW15v_-CHz_NTu9n)이다. 이런 법문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을만하다.

 

반짝인다고 하여 모두 금은 아니다.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모두 양서는 아니다. 유명하다고 해서 모두 훌륭한 사람은 아니다. 조회수가 높다고 해서 모두 훌륭한 영상은 아니다.

 

대개 감각을 자극하는 것은 조회수가 높기 마련이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유튜브 영상은 조회수가 형편없다. 그럼에도 눈이 있는 사람, 귀가 있는 사람에게는 이 보다 좋을 수 없다. 이번 빤냐와로 스님의 수행이 잘될 때의 체크포인트 & 번뇌의 체크리스트영상이 바로 그것이다.

 

스님은 수행을 즐기지 말라고 했다. 수행이 어느 정도 되면 평온이 있고 기쁨이 있는데 여기서 머물지 말라는 것이다. 빨리 다음 단계로 가야 함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무너짐의 지혜(bhaga ñāna)’를 말하는 것 같다. 이는 영상에서 빨리 본인이 자기자신의 상태를 알고 대상이 빨리 사라지는 것들이 보여지도록 봐야 합니다.”(13)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쏟아지듯이 지속적으로 보이고 나면 그 다음에는 고요해져 버립니다.”라고 말했다. 이로 본다면 무너짐의 지혜를 말하고 있음에 틀림 없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가 있다. 이 중에서 생멸의 지혜(4단계)와 무너짐의 지혜(5단계), 그리고 형성의 평온에대한 지혜(11단계)가 핵심이다. 이 중에서도 무너짐의 지혜가 수행의 전환점이라고 한다. 이 단계를 지나야 도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빤냐와로 스님은 1단계와 2단계의 지혜에서 머물지 말라고 했다. 이는 수행의 결과로 인하여 발생되는 평온, 기쁨, 행복 등을 즐기지 말라는 말과 같다. 빨리 생멸의 지혜를 지나 무너짐의 지혜에 이르러야 함을 말한다.

 

어떻게 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스님은 체크리스트를 말했다. 수행이 잘 될 때 체크포인트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첵크리스트대로 점검하라는 것이다. 맛지마니까야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서는 40여가지에 달하는 리스트를 말하는 것이었다.

 

체크리스트에는 어떤 내용이 있을까? 이는 남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로 시작되는 첫 번째 항목에서부터 시작된다. 오계에 대한 것과 십선행에 대한 것이 있다. 이어서 수행에 대한 것이 있는데 40 번째 항목을 보면 도와 과에 이를 수 있는 담마를 많이 들을려고 하는가?”라고 했다. 41번째는 사띠가 완전해졌는가?”이고, 42번째는 그 사띠가 지금 현재 분명하게 있는가?”이고, 43번째는 지혜가 성숙되고 있는가?”이고, 마지막으로 어떤 것에 집착하고 있는가?”이다.

 

빤냐와로 스님의 44가지에 달하는 체크리스트를 들었다. 이 중에서 나는 얼마나 달성되었는가? 오계와 십계는 기본일 것이다. 아무래도 수행과 관련해서 부족한 것이 많은 것 같다. 스님이 말한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현재 상태를 점검해 나간다면 성과가 있을 것이다.

 

오늘 재가안거 70일째를 맞이하여 빤냐와로 스님의 체크리스트를 들어 보았다. 도와 과를 지향하는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반드시 점검해야 할 사항이다. 이 고뇌의 강을 건너 저 이지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

 

 

2023-10-0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