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나는 언제나 소음을 찰나생찰나멸로 새길 수 있을까? 재가안거 67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0. 5. 10:48

나는 언제나 소음을 찰나생찰나멸로 새길 수 있을까? 재가안거 67일차
 
 
이 상태는 무엇일까? 지극히 편안한 상태를 말한다. 이 상태가 좋아서 이 상태를 유지하고자 했다. 어제 보다 빨리 온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좌선 한시간이 빨리 지나간 것 같다.
 
오늘 재가안거 67일째이다. 오늘 컨디션은 좋다. 날씨도 좋다. 아침에 18도인데 이 정도가 최적의 날씨인 것 같다. 온도와 습도가 적당해서 그런지 백권당으로 향하는 아침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요즘 의도적으로 잠을 많이 자고자 한다. 전에는 새벽에 깨면 다시 자지 않았다. 그 시간에 엄지치기를 했다. 스마트폰 자판을 쳐서 글을 쓴 것이다. 그렇게 두 시간 가량 집중하면 피곤했다.
 
요즘 재가안거기간이다. 일체 언어적 행위를 하지 않는다. 당연히 새벽에 엄지치기도 하지 않는다. 아침에 스마트폰도 들여다 보지 않는다. 언어가 좌선에 영향을 끼칠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아침에 언어적 행위를 허용하는 것은 있다. 그것은 경전을 보는 것이다. 또한 위빠사나 수행지침서를 보는 것이다. 머리맡에 상윳따니까야 통합본과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이 있어서 열어 본다.
 
오늘 좌선은 8시 11분부터 시작되었다. 컨디션이 너무 좋아도 걱정이다. 어제가 그랬다. 좌선을 시작한지 20분가량 되었을 때 혼침이 왔기 때문이다. 오늘도 약간 걱정되었다. 그러나 혼침은 오지 않았다.
 
좌선하기 전에 행선을 10여분 했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육단계 행선을 했다. 육단계 행선을 하면 확실히 마음이 발에 가 있는 것 같다. 각 단계별로 마음이 가기 때문이다.
 
좌선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본다. 배의 부품을 새기고자 할 때 육단계 행선 방식을 적용해보고자 한다.
 
배가 한번에 부풀거나 꺼지는 일은 없다. 배가 부풀 때는 서서히 부푼다. 이를 단계적으로 새기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좀더 집중을 해야 한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마음은 배로 가 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새기고자 마음을 둔다. 마치 생활의 달인처럼 일없이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앞이 환해진다. 눈을 감았지만 일시적으로 환해지는 것이다.
 
앞이 환해지면 모든 것이 환해지는 것 같다. 더구나 차 소리와 전철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공백기간 때 강한 희열을 느낀다. “이런 상태가 계속 지속되었으면!”이라고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한다.
 
차 소리가 다시 들린다. 아마 신호에 걸렸다가 풀려서 주행하는 소리일 것이다. 여기에 전철 지나는 소리까지 크게 들리면 마음이 그쪽으로 향하게 된다. 이럴 때 한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 “좀 더 조용한 곳에 있었으면!”이라고 바라는 것이다. “산사와 같이 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좌선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도시에서 좌선은 한계가 있다.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면 차 소리가 덜 들릴 것이다. 그러나 바로 옆에 도로가 있고, 더구나 철길까지 있는 곳이라면 소음을 피해 갈 수 없다.
 
차 소리가 항상 나는 것은 아니다. 신호등이 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고요할 때가 있다. 전철은 10분 정도 간격이 되는 것 같다. 집중이 잘 되어서 머리가 환해졌을 때 일시적으로 산사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안거 67일째이다. 이제 앉는 문제는 해결된 것 같다. 더 이상 다리저림은 없기 때문이다. 이는 방석을 대폭 개선 했기 때문이다. 푹신한 방석 위에 두께가 얇은 레자 방석 네 개를 겹쳐 올려 놓았다. 단차가 10센티 가량 진다. 여기에 앉아 있으면 다리 통증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 집중은 빨랐다. 어제 보다 더 빨리 온 것 같다. 아마 10여분 지났을 것이다. 일시적으로 머리가 환해졌을 때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배의 움직임에서 머리로 옮겼다. 머리의 환함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마음은 항상 대상을 향한다. 마음은 항상 대상에 가 있는다. 새김이 없다면 마음은 제멋대로가 된다. 좌선할 때 주관찰대상은 복부이다. 복부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이다. 그것도 단계적으로 새긴다. 이렇게 새기다 보면 집중이 되게 되어 있다.
 
복부를 새기다 보면 몸은 잊어 진다. 다만 닿는 부위만 알게 된다. 엉덩이 닿는 부위와 평좌한 다리가 닿는 부위와 선정인을 한 두 손 닿는 부위를 말한다.
 
새김이 깊어지면 몸은 잊혀진다. 몸의 닿는 부위는 미세하게 느낄 수 있다. 동시에 몸이 나른해진다. 이런 상태에서 눈 앞이 환해 졌을 때 세상에서 가장 편한 상태가 되는 것 같다.
 
좌선은 홀로 하는 것이다. 좌선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명상홀에서 집단으로 좌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좌선은 기본적으로 홀로 하는 것이다.
 
좌선하는데 있어서 남이 도와 줄 수 없다. 오로지 자신만이 할 수 있다. 누군가 조언을 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길은 자신이 찾아야 한다. 방법도 자신이 찾아야 한다.
 
좌선은 가보지 않은 길이다. 한번도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있는지 모른다. 다만 수행지침서를 참고하기는 한다. 그렇다면 좌선 중에 볼 수 있는 평안함은 무엇일까?
 
불멍’이라는 말이 있다. 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물멍’이라는 말도 있다. 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것을 ‘멍때리기’라고 말한다. 혹시 나도 멍때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평안함과 관련하여 오늘 아침에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읽은 것이 있다. 그것은 ‘유약한 위빳사나’에 대한 것이다. 이제 막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한 사람에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두루뭉실하게 새김하는 자를 말한다.
 
새김도 예리한 새김도 있고 약한 새김도 있다. 예리한 새김은 어떤 것일까?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찰나 현재 물질-정신의 생멸을 생겨나는 차례대로 놓치지 않고 따라 빠르게 새기고 알 수 있게 되었을 때, ‘이전에 생겨나지 않았던 법들만 생겨난다. 생겨나는 모든 법들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사라져 없어져 버린다’라고 알고 보고 이해하기 때문에 물질-정신 형성들이 새기고 아는 지혜에 계속해서 새롭게만 생겨나며 드러난다.”(2권, 276-277쪽)
 
 
찰나생찰나멸에 대한 것이다. 찰나생찰나멸은 현재법들에 대한 것이다. 배가 부푸는 것도 꺼지는 것도 현재법들이다. 그런데 배가 부푸는 것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행선할 때 여섯 단계가 있는 것과 같다.
 
배의 부품과 꺼짐은 물질적 현상이다. 이를 새기는 것은 정신적 현상이다. 마음을 배에 두어서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할 때 새김이 있게 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앉는 물질, 서는 물질, 뻗는 물질, 굽히는 물질, 펴는 물질 등 몸의 여러 동작에 관련된 물질 모두는 생겨나는, 행하는, 존재하는 순간에 모두 현재법들이다.”(2권, 259쪽)라고 했다.
 
앉는 것이 왜 물질일까? 이는 사대에서 풍대에 대한 것이다. 또한 몸의 암시에 의한 것이다. 몸의 암시가 있기 때문에 운동성(風)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 이전에 마음의 암시가 있는 것이다.
 
앉을 때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앉는다. 이렇게 본다면 앉는 행위는 정신-물질의 작용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서는 물질, 뻗는 물질, 굽히는 물질, 펴는 물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행, 주, 좌, 와는 모두 물질에 대한 것이다. 또한 정신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의도와 행위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한 것이기도 하고 조건 발생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 ‘나’라는 개념은 들어갈 수 없다. 어떤 ‘자재자’의 개념도 들어갈 수 없다. 오로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정신법과 물질법들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좌선을 해서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현재법을 보기 위한 것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법을 그때그때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새기는 힘이 약하면 무더기로 보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배의 부품의 경우 처음과 끝만 보이는 것이다. 중간 단계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앉을 때도 처음과 끝만 새길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면 집중이 강화된다. 그래서 “생멸의 지혜가 성숙하고 예리해졌을 때는 한 번 숨을 쉴 때마다 부풀어오는 여러 움직임들의 모임이 여러 단계로 많이 생겨나면서 분명하다.”(2권. 260쪽)라고 했다.
 
생멸의 지혜는 위빠사나 16단계지혜중에서 네 번째 단계 지혜에 해당된다. 위빠사나 단계에서 중요한 단계 중의 하나이다. 이와 같은 생멸의 지혜에 이르면 어떤 모습일까? 우 쿤달라 비왐사가 지은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을 보면 다음과 같은 장면이 있다.
 
 
“주석을 가르치는 스승은 수행자를 보기만 하여도 이 사실을 안다. 그의 얼굴 표정이 온화하고 은은하며 깨끗하다. 그는 스승을 향해서 공손하고 부드럽게 인사를 할 것이다. 또한 스승에게 예의가 바르고 조용하게 보고한다. 이는 매우 훌륭한 일이다.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의 수준에서 생멸의 지혜로 올라선 것이다.”(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323P, 우 쿤달라 비왐사 지음, 도서출판 행복한 숲)
 
 
스승은 제자의 태도만 보고서도 어느 단계인지 알 수 있다. 제자는 수행보고를 하기 위해서 절을 했다. 아마 테라와다식 오체투지를 했을 때 스승은 알아 보았을 것이다. 굽히는 동작 하나하나를 새기면서 절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승은 제자가 생멸의 지혜에 이르렀음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생멸의 지혜에 이르렀다는 것은 수행의 대전환점이 된다. 새김이 예리해졌음을 말한다. 일어나고 있는 현재법들을 찰나생찰나멸로 관찰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생멸의 지혜단계에 이르면 현재법들을 관찰하는 것이 예리해진다. 어느 정도일까?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물 표면에 빗방울이 떨어질 때 생겨나는 작은 물방울들, 물 표면에 막대기로 그릴 때 생겨나는 파동들, 구름에서 뻗어 나오는 번개 빛, ‘윙, 윙’하며 계속 울리는 엔진 소리 등, 이러한 것들이 아주 짧은 시간 정도만 머물고 빠르게 소멸해 버리는 것처럼, ‘형성법들은 매우 짧은 순간 정도만 머물고 빠르게 사라져 버리고 없어져 버린다’라고도 새겨 아는 분명하게 드러난다.”(2권, 277쪽)라고 했다.
 
유약한 위빠사나에서는 현재법들을 분명하게 알기 힘들다. 그러나 강한 위빠사나에서는 현재 생멸하고 있는 법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를 빗방울이 바닥을 때리는 것으로 묘사했다. 또한 기계 엔진소리로도 설명했다.
 
오늘 좌선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그것은 시간이 잘 갔기 때문이다. 한시간이 빨리 지나간 것 같다. 지루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이런 상태로 계속 있었으면 하고 바랬다. 또한 “깊은 산속에서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도 생각해 보았다.
 
일 못하는 목수가 연장 탓한다고 했다. 공부 못하는 학생이 환경 탓한다는 말이 있다. 근기가 낮은 수행자도 환경 탓할 것이다. 수행자라면 시장 바닥에 앉아서도 선정에 들어야 할 것이다.
 
좌선 중에 차 소리, 전철 지나는 소리, 기계음 소리가 거슬린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저열한 수행자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차 소리, 전철 소리가 일시적으로 끊겼을 때 한없는 평화와 기쁨을 맛본다. 이런 상태가 계속 되기를 바란다. 이것도 욕심일 것이다.
 
도시에서 소음은 피할 수 없다. 또한 기계음도 피할 수 없다. 차 소리가 일시적으로 멈추어도 건물 자체에서 나는 미세한 기계음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이런 소리마저 극복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윙, 윙’하며 계속 울리는 엔진 소리”도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으로 보라고 했다. 나는 언제나 소음을 찰나생찰나멸로 새길 수 있을까?
 
 
2023-10-0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