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고독한 수행자, 재가안거 69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0. 7. 11:58

고독한 수행자, 재가안거 69일차
 
 
결국은 혼자 가야 하는 길이다. 아무도 함께 이 길을 갈 수 없다. 죽음이 왔을 때 혼자 가야 하듯이, 도와 과의 길도 혼자 가야 한다.
 
오늘은 재가안거 69일째이다. 평소와 다름 없는 나날이다. 백권당에 와서 아침을 먹는다. 감자와 고구마와 계란과 치즈 들어간 모닝 빵 한 개를 꿀물과 함께 먹는다. 오래 되었다. 이런 식단이 아침에 가장 부담 없다.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커피를 마신다. 분쇄된 커피를 드립하여 마신다. 이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커피만 마신다. 식사를 할 때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먹는 것에만 집중한다.
 
아침을 먹자 마자 좌선에 들어가지 않는다. 최소한 한시간 뜸을 들인다. 백권당 정리정돈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정리정돈이 되지 않으면 엉망이 된다. 보는 즉시 해야 한다. 생각 날 때 하는 것이다. 미루어 두면 잊어 버린다. 냉장고 기울어진 것을 보자 바로 잡을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백권당에 소형냉장고가 있다. 당근마켓에서 5만원 주고 산 것이다. 승용차에 들어가기 때문에 사왔다. 도시락을 싸왔을 때 반찬보관용으로 필요한 것이다. 또한 빵이나 음료수를 보관용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탁자 가운데가 휘어졌기 때문에 기울어진 것이다.
 

 
잘못된 것은 즉시 바로 잡아야 한다. 기울어진 냉장고를 바로잡고자 했다. 두께가 있는 박스 종이를 떼어 내서 받쳐 주었다. 그 결과 이전 보다는 달라졌다. 거의 수평이 맞은 것이다.
 
해야 할 일은 지금 해야 한다. 어차피 해야 할 것이라면 지금 해야 한다. 휴지도 보는 즉시 주어야 한다. 식물에서 변색된 이파리를 발견하면 즉시 잘라 주어야 한다.
 
무엇이든지 내버려 두면 엉망이 된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집을 보면 무너져 내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빈 집에서 한번 무너진 것은 그대로 있다. 누가 치우기 전에는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다. 계속 무너지면 역시 그대로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도 내버려 두면 엉망이 된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지 않으면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처럼 된다. 아이를 내버려 두면 불량학생이 된다. 어디 사람뿐일까? 회사도 관리를 하지 않으면 부도의 길로 가게 되어 있다.
 
내버려 두면 엔트로피 법칙에 지배 받는다. 내버려 두면 엉망이 되는 것이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다. 끊임없이 제어 해야 한다. 특히 마음이 그렇다. 그래서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훌륭하니, 마음이 다스려지면, 안락을 가져온다.”(Dhp.35)라고 했을 것이다.
 
마음은 닦는 것일까? 마치 더러워진 거울을 닦듯이 마음은 닦는 것일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마음은 닦는 것이라기 보다는 제어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마치 코끼리 조련사가 야생의 코끼리를 길들이기 하듯이 마음을 길들이기 하는 것이다.
 
마음은 내버려 두면 제멋대로이다. 대개 악하고 불건전한 대상에 마음이 가 있기 쉽다. 유튜브에서도 알 수 있다.
 
유튜브를 보면 제목이 자극적이다. 여기에 화면도 한몫 한다. 이른바 낚시성 제목이다. 대개 감각적 내용이기 쉽다. 이런 영상은 조회수가 높다. 반면에 부처님 법문에 관한 영상은 조회수는 매우 낮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은 감각적 대상에 가 있기 쉬움을 말한다.
 
마음은 내버려 두면 감각적 대상에 가 있기 쉽다. 이는 욕계 중생이라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왜 그런가? 우리는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마음은 항상 감각적 대상에 가 있기 쉬운 것이다.
 
법구경에 따르면, 마음은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제어하기 어렵다.”(Dhp.33)라고 했다. 마음을 한 줄로 장 정리한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음은 흔들리기 쉽다고 했다. 이러한 흔들림(phandana)은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사실과 같은 대상과 관련하여 흔들리기 쉬움”(DhpA.I.288)을 말한다.
 
마음은 동요하기 쉽다고 했다. 이러한 동요(capala)는 “한시도 가만 있지도 못하는 동네아이처럼 한 주체에 머물지 못하고 마음은 동요함”(DhpA.I.288)을 말한다.
 
마음은 지키기 어렵다고 했다. 이러한 지키기 어려움(durakkha)은 “곡물이 굵을 때 마구 먹어치우는 산만한 황소처럼, 하나의 유익한 대상에 집중하기 어려움”(DhpA.I.288)을 말한다.
 
마음은 제어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러한 제어하기 어려움(dunnivāraya)은 “동일하지 않은 대상을 향해 움직일 때에 그것을 멈추는 것은 어려움”(DhpA.I.288)을 말한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보면 마음의 속성을 알 수 있다. 마음은 본래 불선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로 본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은 본래 깨끗한 것이 아니다.
 
어떤 불교전통에서는 마음은 본래 깨끗한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마음은 거울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마음에 얼룩이 졌기 때문에 거울을 닦듯이 마음을 닦아야 한다고 말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법구경을 보면 ‘마음을 닦는다’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마음은 본래 불선한 것이기 때문에 제어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는 것이 마음이다. 이런 마음은 제어 되어야 한다. 제어 되지 않으면 마음은 항상 감각적 대상에 가 있을 것이다.
 
마음을 제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쳐 날뛰는 듯한 마음을 멈추게 해야 할 것이다.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불교에서 수행은 멈춤과 통찰에 대한 것이다. 통찰하기 위해서는 먼저 멈추어야 한다. 여기서 멈춤은 사마타이고 통찰은 위빠사나를 말한다.
 
법구경 마음의 품을 보면, “마음이 다스려지면 안락을 가져온다.”라고 했다.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할까? 법구경에서는 비유로서 설명했다. 이는 “마치 활 제조공이 화살을 바로 잡듯”(Dhp.33)이라는 문구로 알 수 있다.
 
활 제조공은 화살을 만든다. 화살은 어떻게 만드는가? 이는 “활 제조공은 숲에서 나뭇가지를 가져와서 껍질을 벗기고, 그것에 쌀죽을 바르고 화로 속에서 가열하고 뾰족한 막대기 위에 그것을 박고 똑바로 펴서 머리카락을 쏘아 맞출 수 있도록 조절한다.”(DhpA.I.288)라고 했다.
 
잘 만들어진 화살은 머리카락도 쏘아 맞출 정도로 정교하다.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총명하고 지적인 현자는 동요하고 움직이는 본성을 가진 마음을 다룬다. 그는 숲속에서 두타행으로 거친 번뇌를 제거한다. 그것이 껍질을 벗기는 것이다. 그것에 믿음의 기름을 바른다. 정신-신체적인 노력으로 그것을 가열하고 그것을 멈춤과 통찰의 뾰족한 막대기 위에 박는다.”(DhpA.I.288)라고 했다.
 
무엇이든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이해하기 쉽다.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유로서는 설명할 수 있다.
 
마음을 제어하는 것에 대하여 화살을 제조하는 것으로 비유했다. 주석에서는 놀랍게도 “동요하고 움직이는 본성을 가진 마음”이라고 했다. 이는 마음이 본래 불선한 것임을 말한다.
 
불선한 마음은 내버려 두면 항상 감각적 대상에 가 있는다. 이는 생활속에서도 알 수 있다. 혼자 가만 있을 때 마음이 제어 되지 않으면 감각적 대상에 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유튜브도 감각적인 것만을 본다.
 
마음은 닦는다기 보다는 제어해야 한다. 어떻게 제어하는가? 이는 멈춤과 통찰이라는 말로 알 수 있다. 활 제조공이 화살을 만들 때 똑바로 깍은 뾰족한 나무막대기에 날카로운 화살촉을 올려 놓는 것과 같다.
 
날카로운 화살촉은 어떻게 만드는가? 대장장이가 담금질해서 만든 것이다. 수도 없이 망치로 쳤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도 담금질 해야 한다. 정신-신체적으로 가열하여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화살 제조공은 마침내 머리카락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한 화살을 만든다. 이는 수행자가 마음을 단련하여 어떤 번뇌도 뚫어 버릴 수 있는 힘을 갖는 것과 같다. 이런 힘은 멈춤(止: samatha)과 통찰(觀: vipassana)로 가능하다.
 
수행은 멈춤과 통찰로 해야 한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도 강조한 것이다. 이는
 “그렇다면, 밧차여, 그 위에 다시 두 가지의 가르침, 즉 멈춤과 통찰을 닦으라. 밧차여, 이러한 두 가지의 가르침 즉 멈춤과 관찰을 닦으면, 여러 가지 세계를 꿰뚫어 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M73)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오늘 재가안거 69일째를 맞이 하여 1시간 9분 앉아 있었다. 한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지만 더 앉아 있고자 했다. 여분의 시간은 반조의 시간을 갖고자 해서 앉아 있은 것이다.
 
좌선하면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생각이 들어 오는 것과 다르다.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자각은 반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삼빠자나라고 볼 수 있다.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반조하면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 경전에서 읽었던 것이 떠 오를 때가 많다. 때로 이 경전에서 읽었던 것과 저 경전에서 읽었던 것이 조합되기도 한다. 이럴 때 ‘고독한 수행자’라는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이 세상에 홀로 왔다가 홀로 간다. 배우자가 있어도 자식이 있어도 함께 할 수 없다. 함께 있어도 결국 홀로 가야 한다. 좌선할 때 절실하게 느낀다.
 
진리의 길은 홀로 갈 수밖에 없다. 동료가 있으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전부에 해당된다.”(S3.12)라고 했을 것이다.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이 있어도 명상의 길은 혼자 가야 한다. 혼자 방석에 앉아 눈을 감고 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길은 가보지 않은 길이라는 것이다. 다만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아 가는 것이다. 선지식의 경험을 스승으로 삼아 가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고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외롭다고 말한다. 특히 홀로 되었을 때 외롭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삶이 지겹다고 말한다. 홀로 된 삶이 외롭고 지겨움을 말한다.
 
수행자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 수행자의 삶은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삶이다. 이는 교제 없이 홀로 가는 것이다. 교제를 하면 애착이 생겨서 진리의 길을 가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백권당 사무실에서 매일 아침 한시간 좌선을 하고 있다. 불을 끈 상태에서 앉아 있으면 홀로가 된다. 눈을 감고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 마음이 밝아 온다. 홀로 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지금 외로운 자가 있다. 삶이 지겨운 자도 있다. 이런 자는 외로움을 참지 못한다. 그 결과 교제하려 할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남에게 의지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는 다르다.
 
수행자도 외롭다. 진리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좋은 도반이 없다면 외로운 것이다. 그럼에도 진리의 길은 혼자서 가야 한다. 멈춤과 통찰이라는 명상의 길에 동반자와 함께 갈 수 없는 것이다.
 
수행자는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수행자는 자신에게 의지한다. 수행자는 자신을 의지처로 하여 진리의 길을 나아간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야 한다.
 
수행자는 고독하다. 그러나 외롭지 않다. 수행자는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에게 의지하기 때문에 외롭지 않은 것이다. 자신을 섬(島)으로 만들었을 때 자신이 자신의 수호자가 된다. 여기서 섬은 열반을 체험한 경지를 말한다. 도와 과가 자신의 의지처가 되는 것이다.
 
섬은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다. 자신을 섬으로 만들었을 때 타인에게 의지할 것이 없다. 타인에게 의지할 것이 없어서 외롭지 않은 것이다. 그 대신 수행자는 고독하다. 자신에게 의지하는 수행자는 본래 고독한 것이다.
 
부처님은 자기자신은 자기자신에게 의지하라고 했다. 이는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이니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되리. 자신을 잘 제어할 때 얻기 어려운 수호자를 얻는다.”(Dhp.160)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앗따굿따(attagutta), 자신이 수호자가 되었을 때 홀로 갈 수 있다.
 
명상은 홀로 한다. 오로지 이 세상에 홀로 남겨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나는 없다. 있다면 물질과 정신만 있을 뿐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이라는 물질, 그리고 이를 새기는 정신만 있는 것이다. 이 공간에, 이 우주에 정신과 물질만 있다.
 
고독한 수행자는 오늘도 내일도 정신과 신체적인 과정을 본다.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 의지하는 삶을 살아간다. 자신에게 있는 섬을 의지하여 오늘도 내일도 혼자서 길을 간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
 
 
바라문들이여, 이 세상이 늙음과 병듦과 죽음으로 이끌어지더라도 어떤 사람이 신체를 제어하고, 언어를 제어하고, 정신을 제어하면, 그 사람에게 그것이 죽은 뒤의 구원이고 동굴이고 섬이고 피난이고 피안입니다.”(A3.51)
 
 
2023-10-0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