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보다 나은 오늘, 재가안거 68일차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 좌선 중에 속으로 말한 것이다. 이 평안, 이 평화, 이 행복을 계속 누리고 싶었다. 이렇게 앉아 있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재가안거 68일째이다. 오늘 자리에 앉았을 때 어제와 같을 것인지 의문했다. 그것은 앉아 보아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좌선은 실망시키지 않았다. 어제 보다 더 빨리 평화가 찾아 왔다.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이다.
매일 똑 같은 일상이다.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잠을 자는 일상을 말한다. 일이 없으면 일을 만들어서라도 한다. 일이 없이 보내는 것도 일일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시간은 인정사정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똑같이 맞이하는 낮과 밤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내가 이 나이가 될 줄 몰랐다. 그렇다고 “내가 십년만 젊었더라면!”이라고 말 하지 않는다. 또한 나보다 젊은 사람을 보고 “참 좋은 나이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어제 보나 나은 오늘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날이 그날인 사람은 지나간 날을 후회한다. 항상 과거 속에 사는 것 같다. 에스엔엔스, 특히 페이스북을 보면 그런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어떤 이는 과거 사진을 즐겨 올린다. 마치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마음이 과거에 가 있는 사람은 현재가 불만족스러운 경우가 많을 것이다.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젊어서 청정한 삶을 살지 않고
재산도 모으지 못했으니
고기 없는 연못에 사는
늙은 백로처럼 죽어간다.”(Dhp.155)
마음이 과거에 가 있는 사람에 대한 대표적인 게송이라 말할 수 있다. 과거의 영광만을 회상 할 때 마치 날개 부러진 왜가리 같은 신세라고 말할 수 있다.
젊어서 청정한 삶을 살았다는 것은 출가자를 말한다. 여기서 청정한 삶은 빠알리어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를 번역한 말이다. 이를 청정범행이라고도 말한다. 바라문의 인생사주기에 있어서 학습기가 연장된 것이다.
출가자와 달리 재가자는 재산을 모은다. 그런데 늙어서 재산도 없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더구나 늙어서 병이 들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지 모른다.
두 가지 삶이 있다. 출가자의 삶과 재가자의 삶이다. 출가자는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 재가자는 여법하게 재산을 모아서 보시하고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가진 것이 별로 없다. 주로 작은 것 만 가지고 있다. 아파트 평수도 작은 것이다. 자동차도 작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재산을 모으지 못한 것이나 다름 없다. 어쩌면 날개 부러진 왜가리나 다름 없다.
출가자가 청정한 삶을 살지 않은 것은 허물이다. 재가자가 재산을 모으지 못한 것도 허물이다. 둘 다 고기 없는 연못에 있는 것과 같다.
고기가 없는 연못은 물이 없다. 물 없는 연못에 날개 부러진 왜가리와 같은 신세이다. 이 보다 더한 게송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젊어서 청정한 삶을 살지 않고
재산도 모으지 못했으니
쏘아져 버려진 화살처럼
누워서 옛날을 애도한다.”(Dhp.156)
화살은 화살통에 있을 때 가치가 있다. 사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쏘아져 버려진 화살은 그것으로 끝이다. 숲에 버려진 화살은 회수해 가기 힘들 다. 다시 주어서 활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쏘아져 버려진 화살과 같은 사람이 있다.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이다. 목숨이 다하면 일으켜 세워 살아나게 할 수 없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자신들이 행하고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놀고 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이와 같이 먹었고, 이와 같이 마셨다.’라고 통곡하고 애통해 하고 회상하고 후회하며 누워 있게 된다.”(DhpA.III.132-133)라고 했다.
젊어서 즐기는 삶을 산 사람들은 늙어서 후회할 것이다. 그들이 한 것은 고작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논 것에 지나지 않는다. 화양연화와 같은 시절을 회상하며 죽어갈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기 없는 연못에 날개 부러진 왜가리처럼 살 수 없다. 즐기기만 했던 삶을 회상하며 쏘아져 버려진 화살 같은 신세가 될 수 없다. 늦기 전에 무언가 해야 한다. 이에 수행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늦은 나이에 수행의 세계에 입문했다. 너무 늦었다. 그러나 나이는 숫자에 불과 하다고 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시기가 가장 빠른 시기인 것이다. 다행히도 요즘 수행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을 살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제와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 이에 글쓰기만한 것이 없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오래 되었다. 2006년부터 쓰기 시작했으니 17년 되었다. 매일 하나씩 쓰다시피 했다. 그런데 글은 매일 새롭다는 것이다. 이렇게 글 쓰는 것도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이 될 것이다.
글쓰기 못지 않은 새로운 삶이 있다. 그것은 수행이다. 수행을 하면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을 살 수 있다. 왜 그런가? 매번 다르기 때문이다. 매번 새로운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이 된다.
좌선을 하고 나면 후기를 작성한다. 한시간 좌선 하면 두 시간을 쓰는 것이 보통이다. 글쓰기도 어제보다 나은 삶이고, 수행도 어제 보다 나은 삶이다. 수행과 후기를 함께 쓴다면 어제 보다 나은 ‘삶의 플러스’가 될 것이다.
요즘 좌선을 하면 어제 보다 나은 것 같다. 재가안거가 68일째 되다 보니 이제 자리가 잡혔기 때문일 것이다.
좌선 중에 지극한 평화를 느낀다. 이런 평화는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상에 이런 행복이 없는 것이다. 이런 행복을 위해서라도 좌선이 하고 싶어진다.
이번 안거를 하면서 변화가 있다. 그것은 수행의 재미를 느꼈다는 것이다. 앉아 있으면 편안한 것이다. 그리고 행복한 것이다. 이런 행복이 계속 되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한다. 대개 감각적 행복이기 쉽다. 오감으로 느끼는 행복을 말한다.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배설하는 행복을 말한다. 어쩌면 법구경 156번 게송의 주석에서처럼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놀고 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이와 같이 먹었고, 이와 같이 마셨다.’”(DhpA.III.132-133)라고 여기는 행복 같은 것이다.
어느 경우에서든지 감각적 행복은 거친 것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도 좌선을 해서 얻는 행복에 비하면 매우 거친 것이다. 입으로 먹는 즐거움은 더욱더 거친 것이다.
감각적 행복은 거친 것이다. 그리고 일시적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목구멍에 넘어가는 순간 끝이다. 산해진미도 열 번 이상 먹을 수 없다. 그러나 좌선에서 행복은 제한이 없는 것 같다.
지난 일요일 옥천 용암사에 갔었다. 용암사에 가면 운무대가 있다. 운무대에서 바라 본 옥천은 장관이었다. 어느 정도일까? 안내판에 따르면 “미국 ‘CNN go’에서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50곳에 포함될 정도로 뛰어난 풍광을 자랑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옥천 용암사 운무대에서 바라본 옥천의 하늘과 땅은 장쾌 했다. 특히 첩첩으로 겹쳐 있는 산은 자연의 경이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이런 하늘과 땅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듯 했다. 그러나 오래 볼 수 없었다. 고작 10분 바라 보는 것에 그쳤다.
전세계적으로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 많다. 사람들은 이런 풍광을 에스엔에스에 소개한다. 과연 얼마나 머물러 있었을까? 잠시 장쾌한 경관을 바라 보며 경탄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 카메라에 담았을 것이다.
오감으로 느낀 것은 일시적이다. 그리고 거친 것이다. 그럼에도 오감으로 느낀 것을 행복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열반이라고 말하는 외도도 있다. 그래서 “벗이여, 이 자아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소유하고 구족하고 즐긴다. 벗이여, 이러한 한,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D1.91)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말하는 자들이 있다. 이를 현법열반론자들이라고 한다. 유사열반, 가짜열반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자아를 가지고 있는 한 현법열반론자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현법열반론자들은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어지는 행복을 말한다. 그것은 오감으로 감지 되는 행복이다. 그래서 ‘내가 행복하다’라고 말한다. 자신의 행복을 열반과 동의어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현법열반론자가 되면 술을 마시는 것도 행복이 된다. 술은 열반주가 되는 것이다.
행복에는 감각적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선정의 행복도 있다. 그런데 선정의 행복을 열반과 동의어로 보는 외도도 있다는 것이다.
선정의 행복을 경험한 자는 감각적 행복을 부정한다. 이는“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으로 그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을 원인으로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근심, 절망이 생겨나기 때문이다.”(D1.91)라고 말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래서 선정에 도달한 자는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한 것이다.”(D1.91)라고 말한다.
현법열반은 유사열반이고 가짜열반이다. 왜 그런가 자아에 기반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각적 행복을 즐기는 자는 “이 자아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소유하고 구족하고 즐긴다.”(D1.91)라고 말한다. 또한 선정의 행복을 즐기는 자는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한 것이다.”(D1.91)라고 말한다. 반드시 자아가 들어가는 것이다.
자아에 기반한 행복에 대하여 현법열반이라고 말한다. 지금 여기에서 경험 되어지는 행복감을 말한다. 감각적 행복은 거칠고 일시적이고 짧지만, 선정의 행복은 잔잔하고 대체로 긴 것이 특징이다. 어느 경우에서든지 자아 개념이 들어가면 가짜열반이 된다.
부처님은 무아를 설했다. 무아에 기반한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 될 것이다. 특히 열반이 그렇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라고 했다. 이는 느낌이 없는 행복을 말한다. 행복이라고 경험되어지지 않는 행복을 말한다.
자아개념이 없으면 느낌은 경험 되어질 수 없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되고 의식마저 소멸되었을 때 행복은 경험 되어질 수 없다. 그럼에도 경험되어지지 않는 행복에 대하여 진정한 행복, 최상의 행복, 궁극적 행복이라고 말한다.
며칠 동안 행복을 맛 보고 있다. 좌선한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눈을 감은 눈 앞이 환해지면서 지극한 평화를 맛본다. 이럴 때 행복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감각적 행복은 거칠고 일시적이지만 선정의 행복은 잔잔하고 꽤 오래 간다. 백권당 명상공간에서 이렇게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이 선정인지아닌지 잘 모른다. 그저 앉아 있다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여기에 자아개념이 들어간다면 외도의 선정이 될 것이다.
외도의 선정은 자아개념이 들어간 선정이다. 그래서 ‘내가 행복하다’라고 말할 것이다. 심지어 이런 상태를 열반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아개념이 있는 한 유사열반, 가짜열반에 해당된다.
금요니까야 공부모임에서 들은 것이 있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부처님은 협의의 열반과 광의의 열반을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여기서 협의의 열반은 열반 그 자체를 말한다. 명색과 의식이 끊어지는 열반이다. 그런데 광의의 열반은 평화나 평온을 의미한다고 했다.
좌선 한시간 동안 내내 행복했다. 그러고 평화로웠다. 이럴 때 열반을 뜻하는 비유어가 생각났다. 대표적으로 섬과 동굴이다.
상윳따니까야 ‘무위상윳따’(S43)를 보면 부처님은 열반에 대하여 비유로 묘사해 놓았다. 열반을 섬으로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윤회의 바다에서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열반을 동굴로 표현한 것은 "모든 유해한 번뇌의 숲으로부터 안전하게 동굴로 피신한 상태”이기 때문이이라고 했다.
좌선한 상태에서 그대로 있고 싶었다. 안전하기가 섬과 같았고, 안은하기가 동굴과 같았다. 어떤 감각적 행복도 이보다 못할 것이다. 재벌의 밥상도 이보다 못할 것이다. 장쾌한 풍광도 이보다 못할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도 이보다 못할 것이다. 내일이 기다려진다.
좌선하면서서 평화와 행복을 맛보았다. 이런 상태를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배의 부품과 꺼짐에 새김을 둔 상태였다.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평화와 평온, 행복을 맛 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차 소리, 전철 지나는 소리, 기계음은 그다지 문제 되지 않았다.
늦은 나이에 수행을 하고 있다. 늦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하다.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한살이라도 젊을 때 경지에 도달하고 싶다. 이런 게송이 생각났다.
“최상의 원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최상의 원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5)
2023-10-0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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