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이대로 계속 있고 싶었다, 재가안거 64일차
지금 시각은 오전 10시 32분이다. 좌선이 끝난 지 9분만에 쓰는 것이다. 속된 말로 “따끈따뜬한” 글이다. 마음은 맑다. 무려 1시간 46분 좌선 했다. 마음이 청정한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이다.
오늘 재가안거 64일째이다. 추석연휴 영향이어서인지 세상이 조용한 것 같다. 백권당이 있는 복도 양 옆에는 사무실이 9개 있다. 내가 유일한 것 같다.
오늘 컨디션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가슴 아래 배꼽 위에 통증이 왔다. 이런 일은 종종 있다. 십년 이상 된 것 같다. 이런 일이 있으면 사람들은 병원에 가라고 한다.
오늘날 병원은 구원의 장소와도 같다. 아프면 병원에 가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알수 있다. 그러나 몸은 회복력이 있다. 아프다가도 시간 지나면 낫는다. 몸이 회복력이 없을 때 중병이라고 할 수 있다.
몇 달 전 유튜브 ‘5분뚝딱철학’에서 본 것이 있다. 생명에 대한 것이다. 항상성이 있으면 살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복원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람의 체온은 항상 일정하다. 이 것을 넘어버려서 돌아 오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바닷물의 염분 농도는 항상 일정하다. 대기 중의 산소 농도도 항상 일정하다. 지구도 항상성이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지구를 생명체로 보기도 한다.
생명체가 있는 것들은 항상성이 있다. 이는 복원력이 있다는 말과 같다. 항상성과 복원성이 있어서 생명이 유지된다. 지금 아픈 것은 항상성과 복원성을 위한 것인지 모른다.
몸이 아프다고 하여 병원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검사를 해서 몸에 조그마한 것이라도 발견되면 수술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직한 의사의 말에 따르면 그냥 내버려 두어도 된다고 말한다.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쉬면 된다. 감기처럼 쉬면 낫는 것이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 낫는 것이다. 지금 상태가 좋지 않다고 겁을 먹어서 병원에 달려 간다면 검사를 하게 될 것이다. 그것도 값비싼 검사를 한다.
병원은 자선사업단체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병원은 수익을 내기 위한 회사 같은 구조임을 알아야 한다. 아주 작은 것도 심각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다. 단 1%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말했을 때 이런 저런 검사를 받아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몸이 아플 때 나름대로 해쳐 나가는 방법이 있다. 내몸은 내가 잘 아는 것이다. 병원에서 첨단 의료기기로 검사 받아 보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데이터만으로 잡히지 않는 것도 있을 것이다. 데이터를 신뢰할 수는 있지만 전적으로 믿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오늘 아침 좌선은 8시 37분에 시작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앉아 있는 것이 마치 집에서 누워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누워 있느니 앉아 있는 것이다.
방석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편했다. 달리 할 것이 없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지켜 보기만 하면 된다. 세상에 이런 편리가 어디 있을까? 몸이 아프다고 병원 침상에 누워 있는 것보다 백배, 천배 나을 것이다.
집중은 잘 되었다. 종종 잡념이 들어 왔으나 힘을 쓰지 못했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두었을 때 다른 생각은 일어나지 않는다.
요즘 좌선을 하면 한시간이 금방 가는 것 같다. 예전에는 한시간 보내기가 무척 힘들었다. 무엇보다 다리가 아팠다. 평좌한 오른쪽 다리가 저린 것이다. 그 덕에 통증을 볼 수 있었다.
통증은 손님과도 같은 것이다. 위빠사나 명상에서 통증은 귀한 손님과도 같은 것이다. 법의 성품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통증을 보면 남의 것으로 보인다. 내 통증이 아닌 것이다. 통증 따로 마음 따로가 되는 것이다. 마치 제3자가 통증을 관찰하듯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며칠전 김진태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구에 사는 분이다. 2018년 12월 미얀마 담마마마까로 수행자들을 인솔한 사람이다. 그때 거기에 있었다.
김진태 선생에게 통증 본 이야기를 했다. 김선생에 따르면 수행에 큰 진전을 이루었다고 말했다. 이는 통증을 나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을 통증 보듯이 보려 하고 있다. 통증이 나의 것이 아니듯이, 모든 현상에 대하여 나의 것이 아님으로 보는 것이다. 분노, 미움, 욕망, 시기, 질투 등 온갖 불선 마음부수에 대하여 나의 것이 아님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몸이 약간 불편한 상태에서 자리에 앉았다. 가슴 통증이 있는 상태에서 자리에 앉았을 때 편했다. 가만 앉아 있으니 통증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있고 싶었다.
좌선을 하다 보면 언제 끝날지 대충 안다. 알람 울릴 시간을 지레 짐작하는 것이다. 이는 백권당 사무실 바깥에 있는 철공소에서 나는 시보로도 계산이 된다.
좌선을 시작하기 전에 스마트폰 앱에 시작 시간을 기록해 놓는다. 오늘은 8시 37분이었다. 철공소 라디오에서 시보를 알리는 음악소리가 들렸다. 9시인줄 아는 것이다. 이후부터는 대충 계산이 된다.
한시간을 알리는 알람소리가 들렸다. 아쉬웠다. 계속 있고 싶은 것이다. 이제 집중이 잘 되어서 본격적으로 되어 가는 것 같았는데 끝내라는 소리가 울린 것이다.
오늘 좌선은 방석에 앉아 있는 것이 더 편했다. 몸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하여 의자에 앉아 있다면 무언가라도 하나 해야 할 것이다.
마음은 항상 대상을 향한다. 대게 즐길거리를 찾는다. 눈이나 귀 등으로 즐길거리를 찾는 것이다. 유튜브를 보기 쉽다.
좌선을 하면 눈을 감는다. 이는 눈으로 형상을 쫓는 것을 금하는 것이 된다. 눈으로 즐길거리가 없는 것이다. 다만 귀는 열려 있다. 차 지나가는 소리, 전철 지나가는 소리, 철공소 망치 소리가 들린다.
알람이 울렸을 때 이를 무시했다. 오늘은 더 달리고 싶었다. 그것도 달릴 수 있을 때까지 달리고 싶었다.
알람이 울리고 나면 집중이 더 잘 되는 것 같다. 마치 시험 볼 때 막판에 더 집중이 잘 되어서 분치기, 초치기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재가자의 안거에서 시간은 자유이다. 더 앉고 싶으면 언제까지나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앉아 있는 것이 더 편했다. 이곳이 본향(本鄕)이 아닐까라고도 생각 되었다. 밖에 세상보다도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세상이 더 안은 했다.
이렇게 계속 있고 싶었다. 더 이상 다리저림은 없었다. 다리저림 문제가 해결되자 마음껏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몸은 나른해졌다.
앉아 있는 내내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겼다. 배의 움직임에 집중하면 할수록 몸은 사라져 가는 것 같았다. 몸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지경이 된 것이다.
복부의 움직임에 마음을 두고 있으면 마음이 평안하다. 그렇다고 항상 이런 상태가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평안속에서도 변화가 있다. 제행무상이라는 말이 맞을 듯 하다.
복부에 마음을 두면 대체로 마음이 평안하다. 몸은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이 공간에서 오로지 부품과 꺼짐, 그리고 이를 새기는 마음만 있는 것 같다. 이럴 때 어느 순간 마음이 밝아 온다.
마음이 순간적으로 밝아 올 때 기회라고 생각했다. 더욱더 마음을 두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이 더욱더 밝아지는 것 같다. 그리고 고요해진다. 지극한 평안이다.
마음이 밝아 졌을 때 기쁨도 있게 된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한다. 그럼에도 배의 부품과 꺼짐을 계속 새기면 다시 생겨나게 된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대상과 붙어서 하나가 되어 버리면 사마타가 되어 버린다. 사마타하자고 명상하는 것은 아니다.
위빠사나가 되기 위해서는 주관찰 대상인 복부의 움직임에 마음을 새겨야 한다. 그런데 새김이 잘 되면 움직임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부품과 꺼짐이 단계적으로 보이고 또한 멈춤도 보인다. 이럴 때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본 생멸의 지혜가 생각났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계속해서 새길 때마다 “‘불쑥, 불쑥’하며 생겨나는 것처럼, 머리를 들이밀고 들어오는 것처럼”새겨지는 물질·정신의 처음 생겨남이 새겨 아는 마음에, 지혜에 분명하다. “ ‘쉭, 쉭’하며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작은 초의 촛불이 ‘휙휙’하며 꺼지고 사라지는 것처럼” 새겨지는 물질-정신의 마지막 = 사라짐도 새겨 아는 마음에, 지혜에 분명하다. 이렇게 분명하게 되었을 때 계속해서 새길 때마다 그 새겨지는 대상인 물질-정신의 처음= 생겨남과 마지막 = 사라짐을 알고 보는 것을 생멸의 지혜 (udayabbaya ñāṇa)라고 한다.”(2권, 257쪽)
위빠사나 16단계에서 생멸의 지혜에 대한 것이다. 이는 3단계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에 이어 네 번째 단계의 지혜에 해당된다. 생멸의 지혜에 이르면 물질과 정신법들이 생겨남과 사라짐을 분명하게 알 것이라고 했다.
위빠사나 지혜에서 생멸의 지혜는 어떤 위치에 있을까? 이는 ‘생멸을 관찰하는 지혜’와 ‘무너짐을 관찰하는 지혜’와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가 핵심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생멸의 지혜에 이르면 수행에서 큰 진전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생멸의 지혜에 대한 책을 읽고서 “나는 생멸의 지혜에 도달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번에 재가안거를 하면서 후기를 쓰고 있다. 담마와나 선원에서 어떤 수행자는 이런 행위에 대하여 염려하기도 했다. 착각할 수 있음을 말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있는 이야기를 후기에 썼을 때 자신이 생멸의 지혜에 이른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열반까지 다르고 있다. 열반의 경지까지 가려면 깊은 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수행 초보자가 책을 보고서 책 내용대로 기술한다면 오해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논서를 보면서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논서에서는 이미 생멸의 지혜에 까지 왔다는 것이다. 이는 생멸의 지혜에 대한 항목을 읽은 것을 말한다. 책을 읽었다고 해서 그 지혜가 내 것이 되지 않는다. 다만 참고할 뿐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생멸의 지혜에 대하여 두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상속이고 또 하나는 찰나에 대한 것이다. 먼저 상속생멸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상속생멸)
“생겨나고 있는 물질이 현재이다(jātaṃ rūpaṃ paccuppannaṃ)”라는 구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배가) 부푸는 물질, (배가) 꺼지는 물질, 앉는 물질, 서는 물질, 뻗는 물질, 굽히는 물질, 펴는 물질 등 몸의 여러 동작에 관련된 물질 모두는 생겨나는, 행하는, 존재하는 순간에 모두 현재법들이다. 그 물질들의 처음 일어남이 udaya = 생겨남이다. 마지막 =소멸이 vaya = 사라짐이다. 한 번의 부품, 꺼짐, 앉음, 섬, 뻗음, 굽힘, 폄, 움직임, 이동함, 자세바꿈 등을 처음= 생겨남 한 번, 마지막 = 사라짐 한 번, 이렇게 구분하여 알고 보는 것을 ‘상속(santati) 현재 물질의 생멸을 알고 보는, 처음 생겨나기 시작한 (유약한) 생멸의 지혜’라고 한다. 이 정도로 알게 되면 부품이 따로 + 꺼짐이 따로 + 앉음이 따로 + 폄이 따로, 왼발 뻗음이 따로 + 오른발 뻗음이 따로, 이러한 등으로 여러 부분으로 서로 분리되어 드러나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행위는 다른 어떤 몸 행위와 섞이지 않고 바로 그 순간에서만 생겨나서 사라져 버린다’라고 일부러 깊이 숙고하지 않고서도 단지 새기는 것만으로 분명하게 알고 보고 이해한다.”(2권, 259-260쪽)
모든 법은 현재에 일어난다. 현재 상태를 관찰하는 것이 위빠사나이다. 좌선뿐만 아니라 행선, 일상에서도 관찰된다. 그래서 “(배가) 부푸는 물질, (배가) 꺼지는 물질, 앉는 물질, 서는 물질, 뻗는 물질, 굽히는 물질, 펴는 물질”이라고 했다.
물질이라 하여 반드시 물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물질은 사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사대에서 파생된 것이다. 배의 부품도 물질인 것은 풍대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앉는 것도 물질이고 서는 것도 물질이라고 했다. 이것도 풍대에 대한 것이다. 운동성이 있는 것도 물질인 것이다.
모든 물질은 변화하고 사라져 버린다. 생성 되는 순간에 무너지는 것이다. 이는 찰나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초보 수행자는 이와 같은 생멸에 대하여 무더기로 본다는 것이다. 이를 상속(santati)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는 하나의 기간 또는 연속을 말한다.
배의 부품을 새길 때 부품 하나로만 새긴다면 상속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발을 움직일 때 단지 들음과 놓음으로만 본다면 역시 상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발을 움직일 때 여러 단계가 있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단계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배의 부품도 여러 단계가 있다. 이는 새김이 예리 해졌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찰나생멸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찰나생멸)
“생멸의 지혜가 성숙하고 예리해졌을 때는 한 번 숨을 쉴 때마다 부풀어오는 여러 움직임들의 모임이 여러 단계로 많이 생겨나면서 분명하다. 그러한 작은 움직임들은 “마치 물 표면 위에 작은 빗방울들이 계속 해서 떨어질 때마다 생겨나서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리는 그 작은 물방울처럼 한 움직임이 다른 움직임으로, 한 단계가 다음 단계로 이르지 못한 채 바로 그 순간에서만 ‘휙휙’하며 생겨나서 사라져 버린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한 번의 꺼짐, 앉음, 발의 움직임, 굽힘, 폄, 움직임, 행위 등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여러 단계, 여러 부분들로 나뉘어져 분명하게 드러난 다. 바로 그때,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는 몸의 여러 행위들의 처음 생겨남, 마지막 사라짐들을 생겨나기만 하는 것으로, 소멸하기만 하는 것으로 일부러 숙고하지 않고서도 단지 새기는 것만으로 분명하게 알고 보는 것이, 바로 성전에서 설명한 대로 ‘찰나(khana)현재 물질의 생성과 소멸을 알고 보는 강력한 (balava) 생멸의 지혜’이다. 볼 때, 들을 때 등에도 보이는 형색 물질, 들리는 소리 물질 등이나, 깨끗한 눈 감성물질, 귀 감성물질 등을 각각의 그 순간에 “ ‘휙, 휙’하며 생겨나서 사라져 버린다”라고 알 수 있게 된다.”(2권, 260쪽)
찰나생멸은 생멸의 지혜가 성숙하고 예리해졌을 때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부품을 관찰할 때 여러 단계가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각 단계마다 또 생멸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큰 생멸이 있는 것임을 아는 것은 상속생멸에 속하고, 생멸속에서 생멸을 보는 것은 찰나생멸에 대한 것이라고 알 수 있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생멸의 지혜에 대하여 매우 길게 설명하고 있다. 그것도 성전을 근거로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빠띠삼비다막가를 말한다. 무애해도라고 한다. 쿳다까니까야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성전으로 보는 것이다.
생멸의 지혜에 이르면 모든 현상을 생멸로 본다. 마음의 대상뿐만 아니라 마음부수도 있다. 어떤 것이 있을까? 위빠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쩨따나(의도), 위딱까(사유), 위짜라(고찰), 삐띠(기뻐함), 빳사디(경안), 삿다(믿음), 사띠(새김), 위리야(노력), 사마디(삼매), 빤냐(지혜), 로바(탐욕), 도사(성냄), 모하(어리석음), 마나(자만), 웃닷짜(들뜸), 딧티(사견), 위찌낏차(의심)라는 마음부수도 있다.
모든 법은 생멸법이다. 마음이 대상과 접촉 했을 때 일어나는 법을 말한다. 이런 생멸법에는 선법도 있고 불선법도 있다. 모두 새겨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볼 때 등에서 관찰하고 새겨 이 정신 무더기들의 생성과 소멸을 상속으로든, 찰나로든 구분하여 알고 보는 것이 생멸의 지혜이다.”(2권, 262쪽)라고 정의해 놓았다.
좌선하다 보면 다리가 저릴 때가 있다. 이때 단지 통증 하나만을 본다면 이는 상속생멸에 해당된다. 그러나 통증이 있는 가운데 통증을 본다면 찰나생멸이 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통증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마치 파도치는 것과 같다. 1파의 통증이 있으면 2파의 통증이 밀려 오는 것과 같다.
생멸은 통증만 예로 들 수 없다. 편안함, 뜨거움, 가려움도 연속적이라는 말이다. 심지어 보는 것도 그렇다.
눈으로 사물을 볼 때 사물은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엄밀히 말하면 눈이 나를 속이는 것이다. 그런데 소리는 이와 다르다는 것이다.
소리는 들렸다가 들리지 않았다가 한다. 두 손바닥을 마주 쳤을 때 “짝”하고 소리가 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계속 사물이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저 산은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리와는 달리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눈이 나를 속이기 때문이다. 눈 역시 귀와 마찬가지로 보는 것이 생멸한다. 이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한 종류의 형색을 인식할 때도 첫 번째 인식하는 것이 따로 + 두 번째 인식하는 것이 따로, 이러한 등으로 각각 나누어 구분하여 안다.”(2권, 263쪽)라고 했다.
생멸을 보면 생멸의 지혜에 이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논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지금 새겨 알아지는, 생멸하고 있는 물질과 정신은 아직 생겨나기 전에 어느 곳에 모여 머물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생겨날 때도 어느 곳으로부터 이동하 여 생겨난 것이 아니다. 사라져 버릴 때도 어느 곳으로 이동하여 가는 것이 아니다. 사라져 버렸을 때도 어느 곳에 모여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조건에 따라 이곳에서 생겨나서 바로 그 생겨난 곳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2권, 264쪽)
생멸의 지혜 핵심은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것이다. 이는 일어날만해서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한번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라지는 것에는 조건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생겨난 것은 조건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사라지는 것에는 조건이 필요 없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도 찰나생찰나멸이다. 이와 같은 생멸의 지혜를 더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이 있다.
“이 지혜의 단계에 아직 이르지 못했을 때는 ‘굽히려고 하는 손이 아직 굽히기 전에도 그대로 존재한다’라고, 또는 굽히고 있을 때도 ‘그렇게 존재하는 팔이 움직여 온다’라고, 또는 굽히고 나서 끝났을 때도 ‘그 굽힌 팔이 바로 아래로 내려간다. 내려놓은 곳에서 그대로 존재하던 대로 존재한다’라고 생겨남과 사라짐이 없이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지금은 (이 지혜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는) 그처럼 잘못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부품, 꺼짐, 앉음, 다리를 듦, 나아감, 놓음, 들음, 봄 등도 같은 방법으로, 또한 반대로 예를 들어 비교하여 알기 바란다. 이렇게 아는 모습이 생멸의 지혜 단계에서 제일 중요하다.”(2권, 264-265쪽)
생멸의 지혜는 항상하는 존재를 부정하게 만든다. 팔을 굽히려고 할 때 본래 팔이 있어서 굽히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이는 존재론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존재론의 부정은 영원주의 부정과 같다.
지금 눈이 있어서 저 산을 보고 있다. 그런데 저 산은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그 자리에 있다. 그러나 이는 눈이 나를 속이는 것이다. 눈으로 볼 때 계속 생멸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소리로 들으면 이를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무상의 가르침을 폈다. 이는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 (A9.20)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여기서 부처님은 왜 소리로 무상의 가르침을 알려 주고자 했을까? 아마 그것은 눈이 나를 속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귀는 잘 속이지 않는다. 소리는 한번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좌선 할 때 눈을 감으라고 한다. 그러나 귀는 막지 못한다. 귀에 들려 오는 소리는 저 산처럼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생멸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열어 놓은 것인지 모른다.
오늘 안거 64일째를 맞았다. 좌선은 대체로 잘 되었다. 몸이 편치 않아서 앉아 있었더니 다른 것 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편했다. 그래서 계속 앉아 있고 싶었다.
알람이 울리고 나서도 46분 더 앉아 있었다. 집중은 잘 되었다. 주관찰 대상인 배의 부품과 꺼짐에 계속 마음을 두었다. 일시적으로 마음이 환해졌을 때 이를 기회삼아 더 자세하게 보고자 했다.
일시적으로 고요를 맛보았다. 계속 이런 상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이런 상태로 죽음을 맞이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이대로 계속 있고 싶었다.
2023-10-0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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